책들의 우주/문학

흡혈귀의 비상, 미셸 투르니에

지하련 2009. 1. 8. 15:19

흡혈귀의 비상 - 10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현대문학


흡혈귀의 비상, 미셸 투르니에(지음), 이은주(옮김), 현대문학



'독서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이 한국적 상황 속에서 온전한 의미의 '독서노트'로 읽혔으면 좋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써대고 있는 비평문들이 미셸 투르니에의 독서노트 수준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최근 내 기억에 그런 평론은 없었다. 도리어 난삽하고 정의되지 않는 개념어들의 나열이고 시덥잖은 작가의 작품을 띄워주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젊은 평론가일 수록 이런 경향 더 심해지니 어찌할 노릇인지.)


이 책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 독자에겐 이 책은 어렵고 지루하며 도통 모르는 작가들과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니 읽지 말아야 된다. 아니면 가령 이런 식의 노력이 필요하다.
(미셸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을 읽기 전에 읽어야 할 책들 http://blog.aladdin.co.kr/misshide/11551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었던 이유는, 미셸 투르니에의 문학적 안목과 식견,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미셸 투르니에의 경우, 이미 한국에 여러 권의 산문집이 번역되어 나와있다. 그 중에서 몇 권은 매우 뛰어나다. 산문집이라면, 미셸 투르니에 정도는 되어야 하지만, (정말 안타깝고 불행하게도) 한국 작가들이 낸 산문집 대부분은 여기저기 쓴 기고문들이나 일기 쪼가리들의 짜집기들이다.
(표현이 과격한 이유는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평가했을 때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과 비교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나름 괜찮은 산문집들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미셸 투르니의 이 책이 읽고 싶다면, 도리어 미셸 투르니에의 다른 산문집을 낫다.이 책은 불문학을 전공한, 성실한 학생에게조차 버거울 정도로, 비평적 통찰과 듣지도 못한 작가들이 툭툭 튀어나기도 때문이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는 시간의 방향에서 비롯되는 차이가 있다. '문헌적인' 진실이 언제나 회고적이라면, 이에 반하여 '픽션의' 진실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15쪽)


소설의 주인공과 그 환경 - 사회적 환경뿐 아니라 또한 물리적 환경 - 과의 이 근본적인 대립은 소설의 어떤 범주를 잘 정의해주는데, 그것은 성장소설과 짝을 이루면서 그것과는 반대되는 논리를 따르는 소설인 '대결의 소설'이다. 스탕달이 바로 "적과 흑" 안에서 말하는 유명한 정의는 이 대립을 아주 잘 설명한다 : 하나의 소설은 "대로 위를 움직이는 하나의 거울"이다. 이선 이 표현의 비인격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좋겠다. 거울은 혼자서 움직이며, 그 뒤에서 거울을 붙들고 동시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소설가는 없다. 그런데 거울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다. 거울이 반영하는 것은 아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진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수많은 모험들과 실패를 겪어내는 스탕달의 주인공을 대단히 잘 특징짓는다. (160쪽)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글은 '클라이스트 혹은 시인의 죽음, 자료들', '질식한 신비주의자: "마담 보바리"', '앙드레 지드를 위한 다섯 개의 열쇠', '헤르만 헤세와 "유리알 유희"', "귄터 그라스와 그의 양철북", "에밀 아자르 혹은 자기 뒤의 생" 등이다. 특히 '클라이스트 혹은 시인의 죽음, 자료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클라이스트는 독일의 시인이다. 아마 독일문학사를 공부를 해야만 읽을 수 있는 이 시인은, 불과 서른 네 살에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는 이미 동갑네기인 헨리에테 포켈 부인을 먼저 권총으로 쏘아 죽인 후였다.


문학기행 애호가가 서(西)베를린에 간다면, 고속전철을 타고 종착역 바로 전 역인 반제역에 갈 수 있다. 오른쪽으로 대(大) 반제를 두고 다리를 건너면 소(小)반체의 가장자리에 이르게 된다. 나무들 밑을 조금 찾으면, 클라이스트의 무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헨리에테 포겔이 그의 곁에 묻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아마도 거기에 함께 있을 테지만, 1811년 말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스캔들이 필경 그녀의 무덤에 이름이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1811년 11월 22일 그날, 한 건의 살인과 한 건의 자살이 철 이른 겨울 선잠에 빠져있던 슈티밍 여관의 사람들을 뒤흔들었던 것이다.(117쪽)

미셸 투르니에는 이 사건을 경찰 조사 기록, 진술 조서들, 압류된 편지들과 같은 자료들로만 재구성해낸다. 그리고 클라이스트(빈번한 연애 실패로 점철된 시인, 더구나 동성애로 의심까지 받았던)와 헨리에테 포겔(자궁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던 유부녀)의 사랑을 믿을만한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더구나 연애 편지가 사라진 디지털 시대에 클라이스트와 헨리에테 포겔의 편지를 읽는 건 참 이상하고 야릇하고 가슴 아픈 경험이다. 가령 이런 편지가 우리 시대에 다시 씌여질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헨리에테 포겔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게

베를린, 1811년 11월

나의 앙리, 나의 아름다운 이, 나의 히아신스 꽃밭, 나의 오로라, 나의 석양, 나의 평화로운 태양, 나의 공기의 하프, 나의 이슬, 나의 무지개, 내 무릎 위의 갓난아기, 내 소중한 사람, 고통 속의 나의 기쁨, 나의 재생, 나의 자유, 나의 노예, 나의 안식일, 나의 황금 성배, 나의 대기, 나의 열기, 나의 생각, 내가 기다리던 내세와 현세, 나의 사랑하는 죄, 내 두 눈의 위안, 나의 가장 소중한 근심, 나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 나의 자부, 나의 보호자, 나의 양심, 나의 숲, 나의 영광, 나의 투구 나의 칼, 나의 용기, 나의 오른손, 나의 크리스탈, 나의 생명의 원천, 나의 수양버들, 나의 주인 영주님, 나의 희망, 그리고 나의 굳은 결심, 나의 사랑하는 성좌, 나의 어린 아양꾼, 나의 흔들리지 않는 성채, 나의 행복, 나의 죽음, 나의 도깨불, 나의 고독, 나의 아름다운 배, 나의 골짜기, 나의 보상, 나의 베르테르, 나의 레테, 나의 요람, 나의 향 그리고 나의 몰약, 나의 목소리, 나의 판관, 나의 다정한 몽상가, 나의 노스텔지어, 나의 영혼, 나의 황금거울, 나의 루비, 나의 목신의 피리, 나의 가시관 , 나의 수많은 골짜기들, 나의 스승, 나의 제자, 내 생각 속에 있는 이 모든 것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나의 영혼은 당신의 것입니다.

헨리에테

추신 - 나의 정오의 그늘, 나의 사막의 오아시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종교, 나의 내면의 음악, 나의 가엾은 병든 앙리, 나의 부드럽고 하얀 유월절의 어린 양, 나의 천국의 문.



이 독서노트가 가치있는 것은 이러한 풍부하고 사려깊은 자료집의 역할도 충실히 한다는 점도 빠질 수 없다.


추천하는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 - 10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현대문학


예찬 - 8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현대문학


생각의 거울 - 8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북라인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의 개정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