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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언어 공부 How I Learn Languages 

롬브 커토(지음), 신견식(옮김), 바다출판사, 2017 



아무도 내 말을 못 알아들으니 내가 여기서 야만인이다(Barbaus hic ego sum, quia non intellegor ulli). 

- 오비디우스 




설마 이 책을 통해 외국어를 잘하게 되는 숨겨진 비결, 혹은 공부하는 방식이나 자료를 얻으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도리어 저자는 정공법을 이야기한다. 가령 '반복은 공부의 어머니다Repetitio est mater studiorum'같은 라틴 격언을 인용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언어 공부에 유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리어 어떤 이들에겐 이 책은 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열정적 권유가 될 수도 있다. 왜냐면 언어에는 천재가 없다고 말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 공부를 권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스스로 '언어 천재'라고 믿어라고 말한다. 


책은 의외로 짧고 쉽게 읽힌다. 헝가리인인 롬브 커토는 언어를 공부해온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언어 공부에 대한 간단하지만, 중요한 방향을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하며 자신감을 잃어버리지 말기를 원한다. 이런 측면에서 언어를 사랑하고 언어를 배우길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귀중한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 나 또한 몇 년째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왜 늘지도 않는 영어를 하고 있을까 스스로 묻곤 하지만, 영어책 읽는 게 때론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나, 독해가 일상 영어 회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저것 다 하라고 말한다. 도리어 독해를 언어를 배우는 첫 번째 과정에 넣기까지 한다. 시작은 제대로 된 셈이지만, 내가 거쳐온 학교 교육은 외국어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기에 부족했던 것이다. 하긴 중고등학교 과정의 어느 교과목인들 안 그럴까. 모든 교과과정이 학생들에게 열정을 불어넣기 보다는 진정한 공부와 연구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롬브 커토는 책 말미에 언어공부를 위한 열가지 규칙을 언급한다. 이 열가치 규칙(십계명)만 잘 지켜도 언어 공부의 성과는 한결 좋아질 듯 싶다. 나부터 실천해보기로 할까. 


하나. 

언어를 매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라. 시간이 짧다면 최소한 10분짜리 독백을 만들어보라. 이 점에서는 아침 시간이 특히 소중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말을 잡는다!

둘. 

학습을 향한 열정이 너무 빨리 식어버린다면 공부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되, 한 번에 그만두지도 마라. 다른 방식의 공부로 옮겨가라. 예컨대 독해를 하는 대신에 라디오를 듣거나 작문을 하는 대신에 사전을 뒤적이거나 해도 좋다. 

셋. 

말을 고립된 단위로 익히지 마라. 그보다는 문맥 속에서 익혀라 

넷. 

교재 구석에 쓸만한 표현을 적어놓고 대화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요소'로 사용하라 

다섯. 

뇌가 피로에 지쳐있다면 번쩍하고 지나가는 광고 표지판, 현관의 번지수, 엿들은 대화의 단편적인 내용 등을 재미로 번역해보라. 휴식이 되고 긴장이 풀린다 

여섯. 

교사가 고쳐준 것만 암기하라. 교정 및 수정을 받지 않았다면 자기가 쓴 문장을 계속 공부해선 안 된다. 실수가 머리 속에 뿌리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혼자 공부를 한다면 암기하는 각각의 문장은 오류의 가능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 

일곱. 

관용적 표현은 늘 일인칭 단수로 암기하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I am only pulling your leg."(나는 너에게 장난을 치는 것 뿐이야)

여덟. 

외국어는 성곽이다. 전방위에서 포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문, 라디오, 더빙되지 않은 영화, 기술 문서 혹은 과학 논문, 교재, 이웃의 방문객 등 모든 것을 활용하라. 

아홉. 

실수가 두렵다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말되, 틀린 것은 대화상대자에게 고쳐달라고 요청하라. 상대가 정말로 고쳐줄 가능성은 희박하겠으나 도와줄 때 혹시라도 짜증을 내면 곤란하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열. 

스스로 언어천재라고 굳게 믿어라. 실은 그 반대라는 게 드러난다면 통달하려던 그 성가신 언어나 여러분의 사전들 혹은 이 책에 불만을 쌓아두라.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198쪽 - 200쪽) 



언어 공부 - 10점
롬브 커토 지음, 신견식 옮김/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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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story - a very short introduction

Dana Arnold, Oxford, 2004 




그러고 보니, 원서를 통독한 것은 참 오랜만이다. 그만큼 읽기 쉬운 평이한 문장으로 되어있기도 하고 책 제목 그대로 introduction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거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책의 장점은 다양한 관점에서 미술사(art history)를 조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사와 예술 비평에 대한 비교나 예술작품감정(Connoisseurship)에 대한 언급도 있으며, 신미술사(New art history)나 철학사의 영역에서 바라보는 예술작품, 또는 예술사도 포함시키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설명들이 명확하고 단순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데리다의 <<The Truth of Painting>>를 설명하기도 하고 도상해석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약 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책에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언급하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Dana Arnold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What is art history? 

Writing art history 

Presenting about art history

Reading art

Looking art 


이 책의 목적은 명확하다. 


This book is intended as an introduction to the issues and debates that make up the discipline of art history and that arise from art history's central concerns - identifying, categorizing, interpreting, describing, and thinking about works of art. (이 책은 미술사라는 학문을 구성하는 동시에, 미술사의 중점 관심사들 - 예술작품들에 대해 정의하고, 분류하며, 해석하고 묘사하고 사유하는 것 - 로부터 생겨난  쟁점들과 논쟁들을 소개하기 위해 씌여졌다)


하지만 예술작품만 보자면, 어쩌면 이 책은 필요없을 지도 모르겠다. 


This kind of visual material can have an autonomous existence - we can enjoy looking at it for its own sake, independent of any knowledge of its context, although of course viewers from different time periods or cultures may see the same object in contrasting ways. (이러한 종류의 시각적 소재들은 자율적인 존재를 가질 수 있다 - 우리는 그것들의 콘텍스트(배경)에 대한 어떤 지식들에 의지하지 않고, 심지어 다른 시대나 다른 문화권에서 온 관람자가 똑같은 대상을 전혀 다른 반대의 방향의 보게 될 지라도, 작품 그 자체로 보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난 다음 뒤따르게 되는 질문들, 누가 만들었지? 이 작품의 주제는? 언제 만들어진 걸까? 등에 대한 일련의 활동이 모여 예술사라는 학문이 된 것일지도.  


미술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다수의 도판이 나오며 미술사의, 최신 논쟁이나 주제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 번역된 여타 책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신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아래 글은 꽤 의미심장해 옮겨본다. 


The Dinner Party

Judy Chicago

1979, 브룩클린 미술관 소장 

https://www.brooklynmuseum.org/eascfa/dinner_party/home (The Dinner Party에 대한 다양하고 자세한 자료를 읽을 수 있다) 


My idea for The Dinner Party grew out of research into women's history that I had begun at the end of the 1960s ... the prevailing attitude towards women's history can be best summed up by the following story. While an undergraduate at UCLA, I took a course titled the Intellectual History of Europe. The professor, a respected historian, promised that a the last class he would discuss women's contributions to Western thought. I waited eagerly all semester, and at the final meeting, the instructor strode in and announced: 'Women's contributions to European intellectual history: They made none.'

I was devastated by his judgement, and when later my studies demonstrated that my professor's assessment did not stand up to intellectual scrutiny, I became convinced that the idea that women had no history - and the companion belief that there had never been any great women artists - was simply a prejudice elevated to intellectual dogma. I suspected that many people accepted these notions primarily because they had never been exposed to a different perspective.

As I began to uncover what turned out to be a treasure trove of information about women's history. I became both empowered and inspired. My intense interest in sharing these discoveries through my art led me to wonder whether visual images might play a role in changing the prevailing views regarding women and women's history. 

- Judy Chicago, The Dinner Party (1996) pp.3-4 (25쪽 - 26쪽) 




* Art History를 미술사로 옮기고 art work를 예술작품으로 옮겼는데, 이는 미술작품이라고 하면 painting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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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인근의 한옥카페


아직 대기 틈으로 봄이 스며들기 전, 혹은 그렇게 스며들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안은 숙녀들이 지나가던 세종로 인근 카페에 들어가 잠시 머물렀지. 시간은 쏜살 같이 지나고, 그 남자도 지나고 그 여자도 지나고 사랑도 지나고 이별도 지나고, 내 철 없고 순수하던 마음도 그렇게 지나가 버렸지. 하지만 내 몸은 철 없는 채로, 순수한 채로 여기 있는데, 이 몸에 어울리던, 그 마음은 사라지고 지치고 의욕 마저 희미해진, 누군가의 마음만 남아 그 몸과 싸우고 있었지.


그러다가 어느 새 봄이 오고, 황사가 오고, 미세먼지가 내 코와 입을 통해 내 폐로 들어오고, 내 깊은 마음 속으로 들어가, 억지로 잊고 있었던 그 옛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따스한 계절이 오고, 그 핑계로, 혹은 다른 핑계로 술을 마시고 자유로운 일탈을 꿈꾸며 영원한 도망자를 잠시 상상해보지만, 철 없고 순수한 몸에는 이미 무모한 용기 대신 차분한 현명함이 남아있었을 뿐. 


요즘 자주 낯선 이들로 가득찬 남대문과 명동을 오가지. 그러다가 혹시 예전에 사랑하던 이가 다녔을 법한 갤러리나 미술관도 갈 법 한데, 아니면 한 때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함께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배회했을 그 거리 속에서 잠시 혼자 술 한 잔 할 법도 한데, 그렇게 하기 싫었지. 그런게 일상이거니, 체념했어. 깊은 체념, 그리고 저 봄인 듯 여름인 듯한 대기와 함께. 


그렇게 계절을 잊어버린 대기 속을 떠다니는 현명한 마음과 함께. 


*           * 


출근길에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미국 샌디에고 라디오방송을 듣는데, 모차르트의 심포니들 중에 도시 이름이 붙은 곡이 2곡이 있는데, 한 곡은 프라하, 다른 한 곡은 파리라고 한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31번을 들으며 나비가 마치 작은 새처럼 나는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때 파리에서 사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은 어디로 간 걸까. 


파리Paris라.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Paris, Texas>>도 있었구나. 이 때의 나스타샤 킨스키는 최고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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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한 허스트의 작품



제프 쿤스도 그렇고 데미안 허스트도 그렇고 현대 미술에서 잘 나가는 스타 예술가들을 보면, 진지함보다는 번뜩이는 재치와 탁월한 유머와 놀라운 비즈니스 감각과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풍부한 비평적 언어와 적절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재/주제를 제시하고 어느 공간에서나 어울리면서 그 중심에 예술 작품이 위치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궁금하게 한다. 예술작품 앞에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사람이 무조건 한 두 마디를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실패하지 않는 작가가 된다. 다른, 심각하고 진지한 예술가 앞에 서서 현대 미술을 주도하는 예술가가 되는 셈이다. 


현대를 가벼움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 현대의 공기일 것이다. 느린 속도는 태도의 진지함을 부르고 빠른 속도는 사고의 가벼움을 부른다. 연예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만남도 그렇다. 현대는 본질적으로 허무함이 극에 이른 시대다. 이는 보들레르가 진단한 바, 덧없는 모더니티의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백년 전에는 그것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면 지금은 삶의 일부로 허무함이 내려앉아 익숙해진 시대라, 그 체감 온도는 다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현대의 허무함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장 보드리야르처럼 그 덧없는 허무함에 삶과 인생을 기대고 그 속으로 사뿐하게 내려앉는 꿈을 꾼다. 아니면 기존의 모든 것들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거나 해체하며 새로운 것을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미 가고 아직 오지 않는 시대'가 현대가 된다. 종종 현대를 고전적 현대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짧은 순간, 20세기 초반 세잔, 젊은 피카소,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등에게서 언뜻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결국 저 허무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연인이라는 존재는 결국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연인이며, 뜨겁던 사랑은 결국 차갑게 식어갈 것이기 때문에 사랑인 것이다. 


프로젝트 초반부터 삐걱대는 곳에 와서 뭔가 해결 책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어느 프로젝트에선 예상했던 것보다 품질 수준이 높고 난관이 예상된다. 다행인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 그런데 그 시간이 흘러서 뭘 할까. 결국 허무할 것을. 


내가 바로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허무함을 인지하면서도 고전적 태도로 직진했기 때문이다. 바니타스 작품들이 나왔으나,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삶의 반성이거나 도리어 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였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17세기 유럽이 아니고 나 또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래서 뭘....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상황도 여의치 못해 술마저 줄이고 있는데...아, 디오니소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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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지도 십수년이 넘었다. 한창 싸이월드 모임에서 활동하며, 일요일 오후 상수역 인근에서 와인카페를 하던 후배가 있어, 가끔 번개할 때가 좋았다. 와인은 부드럽고 기분 좋은 향기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근사한 음악과 우아한 공간 속에서 더 빛난다. 소주는 아무렇게나 마셔도 소주만의 강렬함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와인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약하기만 하다. 그래서 배경을 신경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때론 약점이기도 하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강렬함과 깊은 향을 가지고 있으나, 그, 또는 그녀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정하는 술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짝 어둡고 무거운 공간, 두 명이나 세 명이서 격렬한 감정의 모험 속에서 제대된 멋을 부릴 줄 안다. 종종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해변가에서 조금 덥구나 하는 생각이 스칠 때 볼 위로 내려앉는 바람들이 있을 때, 종종 위스키는 제대로 향을 풍길 때도 있지만, 그건 아주 드문 일에 속한다. 


자주 술은 우리를 지배하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도 하는데, 고대부터 이는 디오니소스, 또는 박커스의 행위라고 보았다. 와인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이런 저런 준비를 하며 준비물도 살짝 많다. 실은 아무렇게 마시자는 주의이지만, 마실 때마다 아쉽기는 매 한가지다. 조금만 차갑게 할 걸 그랬나, 조금 디켄팅을 할 걸 그랬나, 이 잔 말고 다른 잔으로 마실 걸 그랬나,  안주를 준비할 걸 그랬나, 그리고 당신이 왜 내 앞에 앉아 있지 할 걸 그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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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eau Meyney Prieur de Meyney 1999

Saint-Estephe, France 



저 사진 속의 1999년산 생 에스테프 와인은 Chateau Meyney의 세컨 와인이다. 지금 마실 수 있는 빈티지는 2000년 대 중후반부터다. 나를 와인의 세계로 초대한 와인이기도 한데, 살짝 부드럽게 내려앉다가 풍부한 과일향으로 입 안을 채우더니, 마치 우유와 같이 미끄러지듯 빨려 내려가는 피니시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세계였다. 십수년 전 그렇게 와인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메모를 정리하다 저 사진이 나와 이렇게 올려본다. 


그러고 보니, 기분 좋게 와인 마신 것도 참 오래된 것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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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CEO (CEO: The Low Down on the Top Job)

케빈 켈리(지음), 이건(옮김), 세종서적, 2010년 




일반적인 궤도를 그린 직장 생활이라기 보다는 중구난방으로 부딪히며 이 일 저 일 해온 탓에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마음을 접었다. 나만의 사업을 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종류의 일임을 새삼 깨닫은 탓이기도 하고 살짝 포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류의 책이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탑 레벨에서의 의사결정 구조나 리더십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만 조직 생활이 가능하고 중간 관리자로서의 모범을 보일 수 있다. 


글로벌 헤드헌팅 회사의 CEO인 케빈 켈리는 자신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CEO들을 바탕으로 한 권의 책을 쓴다. CEO란 누구이고 CEO는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막상 읽어보면 여느 경영 서적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CEO를 꿈꾸는 이들에게 약간의 도움은 될 듯 싶다. 


물론 CEO의 역할에 대한 편견이 반영되어있을 수도 있다. 이 중 첫 번째는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은 오해가 발생하기 쉽지만, 그래도 제대로 관리해야 하는 요소이다. 두 번째는 보상이다. 금전적인 보상에 그치지 않고 모든 직원에게 긍지를 심어주어 매일 아침 업무 의욕을 느끼게 해야 한다. (... ...) 변화 역시 중요한 주제이다. 찰스 다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힘센 종이 생존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똑똑한 종이 생존하는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용하는 종이 생존한다."

결국 변화를 관리하고 맞서며 소통하는 방법이 관건이다. (10쪽 ~ 11쪽) 


새로 CEO가 되고 CEO로서 어떤 역할을 중요하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한다. 


취임 초기 단계에 CEO가 집중해야 할 것은 다음 여섯 가지이다. 

1. 사기 진작 Mastering morale: 사람들의 감정을 파악한다. 

2. 대화 Talking the talk: 끊임없이 세심하게 의사소통한다.

3. 최고 경영팀 구성 Assembling the team: 리더십은 팀워크이다. 

4. 실행 Action: 직중에서는 실행이 중요하다. 그러나 집중하라. 단지 실행을 위한 실행보다는 신중한 실행이 낫다. 

5. 일화 만들기 Writing your own legend: 상징적 행동을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 

6. 기업문화 바꾸기 Culture check and change: 먼저 기업 문화를 이해한 다음에 바꾸어야 한다.

(79쪽)


그러고 보면 조직의 리더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모든 의사결정에 다 관여하거나 책임을 지면서 이사회나 대주주와의 정치적 우호 관계로 제대로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CEO가 되면 맞부딪히게 되는 여러 문제들과 해결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평면적이거나 예상되었던 문제이거나 해결책이기 때문에 다소 독서의 긴장이 떨어지기도 한다. 더구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디디'와 '고고'를 매춘부로 옮긴 건 치명적이다. 누구의 잘못이든 간에. 편집 과정 상의 실수는 책 전체적인 질이나 분위기까지 망친다. 그럼에 불구하고 리더십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워렌 베니스의 '핵심성과지표'는 리더가 조직을 운영할 때 관심을 기울여야 할 요소를 한 눈에 정리하고 있어, 옮겨본다. 



워렌 베니스의 핵심성과지표 Key performance indicators 

1. 조직이 잘 정렬되어 있는가? 이는 직원 전체가 성공의 기준을 동일하게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2. 적응력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복원력이 있는가? 미래를 내다보면서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해야 하며, 거듭된 성공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3. 재무실적이 있는가? 시가총액이든 투자수익률이든, 기업 인수나 매각의 성패는 상관없다. 재무 실적의 척도로 무엇을 사용하는,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

4. 미래의 리더 집단을 양성하고 있는가? 멘토제도mentoring system를 유지하고 있는가? 

5. 직원들이 의욕적이고 활기차며 업무에 몰입하고 권한은 있는가? 

6. 조직이 투명하고 개방적인가

7.연구개발에 자원을 얼마나 투입하는가? 

(87쪽 ~ 88쪽) 



전체적으로 서술은 평이하고 쉽다. 짧고 간결하기 때문에 읽기 부담 없다. CEO에 관심 있는 이들은 한 번 읽어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벌거벗은 CEO - 8점
케빈 켈리 지음, 이건 옮김/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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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김석철(지음), 창작과비평사, 1997년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책이라니,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이 책에 소개된 건축물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이야기들도 변하지 않았으니, 좀 오래된 책이라고 그 재미와 감동은 그대로일 것이다. 또한 건축가인 저자의 글솜씨도 나쁘지 않고 내용은 어렵지 않으며 짧은 분량으로 상당히 많은 건축물들과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고 있어 여행을 좋아하거나 건축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다. 


나름 건축물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는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간과했던 몇 개의 건축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세신궁이나 자금성 같은. 


이세 지역의 신궁은 일본의 신성함과 국가의 단일성을 과시하기 위해 기원전 1세기경에 계획되었다. (... ...) 그 옛날의 목조건물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식년천궁(式年遷宮)의 전통 덕분인데, 이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건물을 다시 짓고 신을 옮기는 의식을 말한다. 이세 신궁의 경우 20년마다 천궁을 했는데 천궁을 할 때는 이전 건물을 해체하고 그 터를 남겨둔다. (98쪽) 


2000여년전 지어진 목조건물이 아직도 그대로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구나 이 건물을 짓기 위해 해마다 나무를 심고 있으며, 그렇게 심어진 나무는 200년, 300년 후 새로 지어질 이세신궁을 위해 씌여질 것이라고 한다(아마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두 번쯤은 이세 신궁을 애니메이션 안에서 보았을 것이다). 가끔 일본이 놀라운 것은 이런 면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새로 지은 건물(아래쪽)과 곧 헐릴 낡은 건물(위쪽) -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D%B4%EC%84%B8%EC%8B%A0%EA%B6%81)


베이징의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가 머물던 곳이다. 현재의 자금성은 그 규모나 크기 면에서 여느 나라와 궁궐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경복궁을 떠올리면 다소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자금성은 그대로 보존된 반면 경복궁은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고 다른 궁궐과도 떨어져 조선 시대의 모습 그대로라 보기 어려운 면도 있어 문화재나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자금성은 명대의 성조가 20~30만 명의 민간인과 군대를 동원해 140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년에 걸쳐 건설한 황궁이다. 청조에는 부분적인 중건과 재건이 있었을 뿐 전체적인 배치는 변동이 없었다. '천하의 모든 노력을 다하여 황제 한 사람을 받든다'라고 할 만큼 500여 년간 부단히 고쳐 지어졌고 인력과 물력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요되었다. (232쪽) 



자금성  (출처: https://en.wikivoyage.org/wiki/Beijing/Forbidden_City


자금성과 경복궁은 비슷해 보이나, 그것이 놓인 위치나 그것의 구조나 철학은 서로 다르다.  어쩌면 서로 붙어있었으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국과 한국 상당히 다른 나라였음을 이 두 궁궐을 비교해봄으로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의 정도(定都) 당시의 기록을 보면 도시 설계과정의 기록이 모호해서 답답할 때가 많다. 한양의 도시 모델은 뻬이징이 아니라 <<주례>>의 <고공기>였다. 서울과 경복궁이 많은 부분에서 베이징과 자금성을 원형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정도전 등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고공기>의 논리와 도가의 원리에 의해 한양을 설계하였으므로 실제의 도시와 건축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베이징과 서울은 다른 도시이고 자금성과 경복궁은 여러 면에서 다르다. 건축형식에서도 공법은 같으나 건축미학에서는 독자의 모습을 갖고 있다. 자금성에는 인간이 만든 기하학과 빈 하늘만이 있는 반면 경복궁에는 북한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형국이 궁성과 하나가 되어있다. 자금성은 자연을 가지려 하고 경복궁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자금은 스스로가 원점의 공간으로 주변의 자연에 상관하지 않는 독존의 질서를 가진 데 비해 경복궁은 주변의 토지형국과 자연의 흐름이 하나가 된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자금성은 <<주례>>의 <고공기> 원리가 대공간군을 이룬 기하학적 질서의 공간이며 경복궁은 유교의 공간형식과 도가의 철학이 함께 한 유기적 질서의 공간이다. (238쪽 - 240쪽)

경복궁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A%B2%BD%EB%B3%B5%EA%B6%81_%EC%A0%84%EA%B2%BD.jpg)


그 다음으로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도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의 주거를 지배하는 아파트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은 다 사라지고 공장스러움만 남아 흉물스럽기까지 한 한국의 아파트 건물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 - 1965)의 중후반기 대표 작품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s d'habitation)은 165m의 블록에 높이 56m의 단일 건물로 337개의 주거단위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거단위는 복층형태이며, 총 1800여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고층 집합주거이다. 특히 이 건물은 다음과 같은 그의 다섯 가지 건축원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첫째 개방된 지층 공간(필로티), 둘째 옥상정원, 셋째 자유로운 평면, 넷째 가로의 긴 창, 다섯째 자유로운 건물 정면 

이를 통해 벽이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존의 조직적 구조물에서 탈피하여,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이용해 건물의 고층화와 구조적인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 (280쪽) 


1997년과 달리 지금은 워낙 좋은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해외 여행이 일반화되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많은 건축물들을 실제로 본 이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다만 여행을 가기 전에 이런 책을 한 두 권 읽는 것이 좋을 듯하며, 이 책은 여러모로 상당히 유용한 책이다. 


오랜만에 르 꼬르뷔지에의 건물 사진을 보면서, 필로티 - 경주/포항 지진으로 널리 알려진 - 형식이 르 꼬르뷔지에의 창안임을 잊고 있었음을 알았다. 하긴 르 꼬르뷔지에의 필로티는 지층 공간의 자유를 위해 기획되었는데, 한국에서의 적용은 주차장이거나 통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커피숍이나 상점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르 꼬르뷔지가 지금 한국에 와서 저 무수한 빌라와 아파트 건물들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 8점
김석철 지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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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한계 On Being Certain 

로버트 버튼(지음), 김미선(옮김), 더좋은책 




사고는 항상 더 어둡고, 더 공허하고, 더 단순한 우리 감각의 그림자이다. 

- 니체 



책을 읽으면서 노트를 하고 노트된 것을 한 번 되집은 후 책 리뷰를 쓰면 좋은데, 이 책 <<생각의 한계>>는 완독한 지 몇 달이 지났고 노트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은 탓에 정리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종교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땐 꽤 흥분하면서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로버트 버튼도 우리의 기억이 변화하고 조작된다는 사실을 이 책 초반에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명확하다. 우리가 안다라고 할 때, 그것은 감각적인, 일종의 느낌일 뿐이지, 흔히 말하는 바 논리적인 것이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느낌feel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편의상 나는 거의 동류에 속하는 확신certainty, 옳음rightness, 신념conviction, 맞음correctness의 느낌들을 한 덩어리로 모아 '안다는 느낌feeling of knowing'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로 했다. (19쪽)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할 때 아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알아서 어떤 행동을 할까? 논리적 추론이라든가, 분석, 혹은 이성적 행동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일컬어 지는 사고나 행동도 실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각적 경험에 의한, 일종의 경향일 뿐임을 알게 된다. 


프로야구 투수들이 던지는 공의 속도는 시속 130에서 160킬로미터에 달한다. 공이 떠나는 순간부터 본루를 지나는 순간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0.380에서 0.460밀리초이다. 공이 떠나는 상이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부터 스윙이 시작하는 순간까지 최소 반응 시간은 대략 200밀리초이다. 스윙에는 160에서 190밀리초가 더 걸린다. 반응시간과 스윙시간을 합친 시간은 대략 속구가 마운드를 떠나 본루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과 맞먹는다.(107쪽)


생각할 틈이 없다. 그냥 무턱대로 야구배트를 휘두르는 거다. 일종의 본능적이거나 감각적인 것이다. 


저자 로버트 버튼은 다양한 관점에서, 많은 이들의 견해들을 인용하면서 상당히 설득력 있게 우리가 안다고 할 때의 그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출간된 후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이 책은 우리의 믿음이나 확신, 소위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말한다. 


이성은 전통적으로 대개 생각하듯이 몸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 몸, 그리고 신체적 경험의 본질에서 일어난다. ... ... 우리로 하여금 지각하고 돌아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똑같은 신경 기제와 인지 기제들이 우리의 개념 체계와 이성의 양식들도 만들어낸다. 이성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시각계, 운동계, 그리고 신경결합에 바탕이 되는 일반적 기제들의 세부사항을 이해해야 한다. 이성은 우주의, 또는 신체에서 분리된 마음의 초월적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우리 인체의 특색에 의해 우리 뇌가 가진 신경 구조의 놀라운 세부 사항들에 의해, 우리가 세계 속에서 날마다 하는 특정한 움직임에 의해 형성된다. 

몸에서 분리된 사고는 생리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 정신적 감각과 지각에서 자유로운, 순수하게 이성적인 마음도 마찬가지다. 

- 조지 라코프George Lakoff, 마크 존슨Mark Johnson, <<실물로 본 철학: 체화된 마음과 서구 사상에의 도전 Philosophy in the Flesh: The Embodied Mind and its Challenge to Western Thought>> 중에서 


결국 우리는 매사에 조심해야 된다. 신중해야 하며 끝없는 회의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야 된다. 그러나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역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고려한 채 조심스러운 회의주의적 삶을 살아야 된다. 


"나쁜 소식은 우리 자신을 알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제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단숨에 결론까지 도달하는 뇌의 영역인 적응 무의식adaptive unconscious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있는 길은 전혀 없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대부분 의식 밖에서 작동하도록 진화해왔고 ... ... 그러므로 무의식의 정신작용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대개 우리의 자발적인 행동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일으키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 티모시 윌슨Timothy Wilson, <<나는 내가 낯설다 Strangers to Ourselves>> 중에서 


아마 종교나 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아무리 신앙이나 믿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지에서 공격하더라도 ... 


"공간과 시간이 경계가 없는 닫힌 곡면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또 우주의 문제에서 차지하는 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된다. ... ... 우주에 시작이 있는 한, 우리는 우주의 창조가가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우주가 실제로 안전히 자급자족하고 경계나 끝이 없는 것이라면, 우주에는 시초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주는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창조자가 존재할 자리는 어디일까?" - 스티븐 호킹 (282쪽) 



저자 로버트 버튼의 홈페이지: http://www.rburton.com/






생각의 한계 - 10점
로버트 버튼 지음, 김미선 옮김/더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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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모험

헤르만 헤세(지음), 이인웅(옮김), 올재클래식스, 2018년 




"나는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보다도 회상시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무상하게 사라져 갈 일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며, 말을 걸어 불러내고 사랑에 찬 서술을 함으로써 지난 과거의 일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의 관념론적 전통에 따라 작가의 임무에는 어느 정도 선생님이나 경고해주는 사람이나 설교자로서의 기능이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교훈을 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언제나 우리 인생에 혼을 불어넣기 위한 독려의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사물을 관조하는 일이란 연구하거나 비평하는 것이 아니다. 관조란 바로 사랑이다. 관조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소망할 만한 상태로서, 아무런 욕구가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권두에 실린 역자의 헤르만 헤세 소개글에 인용된 위 두 문장은, 어쩌면 헤르만 헤세의 문학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싶다. 10대 중반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 - 1962)를, 40대 중반이 되어 읽었다. 다시 읽었다. 아, 이 얼마나 아찔한 일인가. 





매일 아침 9호선을 타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저녁이나 한밤 중에는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정해진 동선을 따라 왼손에 최초의 모험을 들고 이동했다. 내가 맞이하는 매 순간은, 나에게 있어 익숙한 일상이지만, 최초의 순간이며, 어쩌면 모험과 같은 것이다, 수백년 전의 일상과 비교한다면. 


그러나 모든 것들은 식상해졌으니, ... ... 



루드비히는 연주를 계속했고, 그녀는 넓고도 검은 수면이 커다란 박자로 물결치는 것을 보았다. 거대하고 강력한 새 떼가 태고 시대처럼 침울하게 쏴쏴 날개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폭풍이 둔탁하게 울리며, 때로는 거품이 이는 물보라를 공중으로 뿜어올렸는데, 물보라는 수많은 작은 진주가 되어 흐트러졌다. 파도와 바람과 거대한 새 날개의 쏴쏴 하는 소리 속에 무엇인가 비밀스러운 소리가 함께 울렸다. 때로는 소리 높은 격정으로, 때로는 갸날픈 어린 아이 목소리로, 하나의 노래가, 은밀하고 사랑스러운 멜로디가 울려나왔다. - 어느 소나타Eine Sonata 중에서



헤르만 헤세는 그대로였고, 전엔 읽히지 않던 부분까지 읽혔다. 실은 이렇게 로맨틱했나 하고 생각했다. 다소 낯선 문장 스타일로, 그가 겪었던 시대와 달리 애정어린 시선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모양이 마치 19세기 초 유럽을 떠올리게 하였다. 굳이 따지지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벨 에포크와 연관지을 수 있겠지만, 카프카(1883 - 1924)의 세계와 헤세의 세계를 같은 동시대를 이야기했다고 보기 어려우니, 비평적으로 헤세는 소외당하고 무시당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마치 스트라빈스키 같다고 할까. 복고풍의 세계로, 우리를 아련한 과거로, 혼란스럽지만 언젠간 정리되고 해결되고, 다시 그와, 그녀와 사랑을 하고 행복하게 될 어떤 일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점에서 헤세의 이 산문집은 약간의 위로가 되었고 약간의 휴식이 되었으며 살짝 쓸쓸하기도 했다. 


수십 년 전엔 심야 라디오를 듣다 보면, 헤세의 여러 소설들에 대한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자주. 다들 헤세를 읽는 거의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고 그렇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헤세의 책 옆으로 짝사랑하던 여고생을 향해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쓸쓸하긴 매 한 가지지만, 강도로 따지지만 지금이 더한 것같으니,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한 자리에 서서 언제나 '날 좀 바라봐줘'라고만 하는 듯 싶구나. 


활자가 작진 않지만, 빽빽했다. 독서의 속도는 느렸고 세상은 빠르게 흘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달이 지나버렸다. 아마 그렇게 이 세상과 작별했던 헤세의 나이가 되겠지. 그 전까지 나는 얼마나 더 쓸쓸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게 말이다. 



* * 



내가 알기로 올재클래식스는 예전에 번역되어져 나온 고전들 중, 시중에서 해당 번역서를 구할 수 없고 원 저작권도 사라진 책들을 역자들과 협의하여 기본 비용만으로 정가를 책정하고 유통하는 전집이다. 주로 사회 복지시설이나 도서관 등 우선 공급하고 일부만을 교보문고에서 판매한다. 어떤 책들은 시장성이 낮아 구할 수 없는 책들도 나오기도 하는데, 워낙 가격이 저렴하여 출판되고 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품절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온라인 판매를 하지 않아, 검색되지도 않는다(얌체같은 이들은 버젓이 올재 클래식스 책을 고가로 중고로 판매하기도 한다). 그래서 서점 한 가운데 쌓여있던 이 책을 바로 구입했다. 일종의 횡재였던 셈. (가격은 2,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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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표상, 에드워드 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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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경, <은주>
비 오는 날
데이비드 밴 David Vann 인터뷰 중에서 (Axt 2017.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