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비평 19

기업 문화예술 투자 환경 조성을 위한 세미나

기업 문화예술 투자 환경 조성을 위한 세미나 2009년 3월 13일 금요일 국회 도서관 강당 지난 13일 금요일, 국회 도서관에 다녀왔다. '기업 문화 예술 투자 환경 조성을 위한 세미나'라는 제법 거창한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다양한 참석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주로 내가 하는 분야에만 신경을 써다보니, 좀 넓은 시야에서 문화예술 정책이나 인프라에 대해서 고민할 일이 적었는데, 이 세미나로 인해 다소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세미나들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과연 투자할 수 있는 (순수)예술 분야가 있는가'이다. 불행하게도 (천박한) 자본주의 아래에서 투자라는 행위는 분명한 ROI(Return on Invest)가 나와..

두 얼굴의 ‘숲’

두 얼굴의 '숲' 문명화된 숲 어렸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을 뒷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의, 내 호기심을 자극하던 뒷산 너머에 있을 그 무언가, 미지의 세계. 거대한 바다가 있거나 반짝이는 조명으로 찬란한 대도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세계 최초로 발견하게 되는 외계인 마을이거나. 그리고 결국 나는 뒷산에 오르고 만다. 오전 일찍 집을 나선 나는 마을 뒤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키에 적당한 길이로 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사용하면서. 그렇게 몇 시간을 올라갔을까. 산 정상은 보이지 않고 좁은 길 흔적마저도 사라진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 소리만 들리고, 눈앞에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 속으로 가느다랗게 내려앉은 햇빛뿐. 이..

현실과 꿈 사이에 있을 숲 속 그 곳

사랑의 정원이 된 숲 내 몸 어디에서도 고된 노동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틈 날 때마다 그 흔적을 지우고, 또 지우고, 지우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탓이다. 자줏빛 뿔테 안경을 끼고 한 손에는 낡은 수필집을 든 채, 매일매일 전투 같은 일상을 보내는 직장인으로써가 아니라 책 읽기와 산책으로 소일하는 한가로운 룸펜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이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간다고 웅변하고 싶은 것이다. 현실을 떠나 꿈 속 세계로. 내가 원했지만, 절대로 실현되지 않았던 어떤 것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세계로. Fete Galante. 우아한 축제. 그 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턱이 없지만, 아름다운 무희가 춤을 추고 한순간도 술잔은 비는 법이 없으며, 새가 사랑을 노래하고, 얇은 바람이 시샘하듯..

영화 스토리의 성공 요소

두 편의 영화를 노트북으로 보았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극장에도 거의 가지 않는 내가 영화를 보는 채널은 온라인이다. ‘에라곤’과 ‘우주전쟁’ 내가 본 두 편의 영화다. 이 두 편은 영화의 완성도에서나 극적 요소의 사용, 스토리의 박진감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라곤’은 형편없는 영화이며, ‘우주전쟁’은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아주 가끔 영화를 보면서 왜 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들은 스토리를 왜 이렇게 구성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하면서 자신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화시키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에라곤’과 ‘우주전쟁’을 보고 난 뒤, 나는 그들을 위해 상식적이며 기본 사항에 해당되는 몇 가지 사실..

새로운 사적인 공간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새로운 사적인 공간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새로운 ‘사적’ 공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속해 있는 커뮤니티나 블로그(blog)가 있는 웹사이트에 로그인을 반복한다. 인터넷 메신저는 늘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며 메일 프로그램은 수시로 열어 살펴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프라인에 있으면서 동시에 온라인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낯설고 기묘한 상태가 언제부터 익숙해지고 심지어는 온라인에 내 존재가 없으면 불안해지기까지 한 상황이 시작된 것일까. 고백하건대, 그건 십 여 년 전 내가 피씨 통신을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물리적 실체 없는 공간 속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 곳을 친숙하고 익숙한 공간으로 이해하기..

알로이 리글(Alois Riegl)의 ‘Kunstwollen’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최근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경향의 작품을 보면서 경탄해 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Painting을 곧잘 사진과 비교해가며 대단하다는 표현을 금하지 못합니다. 아직까지도 Painting에 ‘발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것은 사진에서 보여지는 바의 ‘사실적(realistic)’인, 그 어떤 것을 향해가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인상주의의 등장이 사진술의 등장과 발달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때 리글이 말하는 바의 ‘예술의욕’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성이 생기게 됩니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진보와 퇴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카소가 비슷하게 말한 바 있듯이 ‘..

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모든 것은 지나쳐간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의 어두운 면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의 초점 이동에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높낮이 없이] 덤덤하게 되고 협소해진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 - 찰스 테일러, 1. 하루키 신드롬 아직도 하루키 신드롬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하루키는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있으니 말이다. 꽤 오래 전엔 매우 시끄러웠다. 여기저기 저널에서, 문학잡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키를 표절했다느니, 패러디했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고 서로 ..

음모이론 넘어서기

음모이론 넘어서기 - 서사구조와 그 한계 1. 몇 년전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말로 듣는 사람을 갑자기 소름 돋게 만든 이야기가 있었다. 승강기 안에서 들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엄마로 변신한 귀신의 아찔한 대화.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저 그런 공포담으로 받아넘기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어머니마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순간 우리들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대신 귀신을 등장시키는 이 공포이야기는 '가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믿음이나 가치가 상실되었고, '부모들'에 대한 아이들의 숨겨진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안쓰러운 이야기 속에서 요즘의 우리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

현대 미술에 대한 단상

21세기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의 입에서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한 색다른 예술양식이 되지 않을까요'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만,기대에 어긋나게도 테크놀러지는 언제나 예술의 일부를 이루어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진과 인상주의 미술과의 관계에서도 사진때문에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고전 시대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moria)을 저주하며 스스로 눈을 버릴 때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안티고네'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을 때의 그 성찰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