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56

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이우환 Lee Ufan, 대화(Dialogue), 2011 그의 작품들이 좋아서일까, 이 시집은 그의 회화, 조각, 설치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설명서처럼 읽혀진다. 내가 알기로, 예술가들 중에서 이우환만큼 명징(明澄)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옮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현대 철학과 현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실천력으로 현대 일본 미술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국어 교과서엔 이미 그의 글이 실려있고, 일본어라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검증 받은 글쟁이이다.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08) (사진 출처: art..

진폭, 이우환

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 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 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시선을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 이우환, 시집 중에서 자코메티, Three Men..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보르헤스 시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보르헤스(지음), 우석균(옮김), 민음사 그의 소설들을 떠올린다면, 보르헤스의 시도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수수께끼처럼 펼쳐지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소설가 보르헤스는 잊고 시인 보르헤스만 기억에 담아두게 될 터이다. 그렇게 몇 주 보르헤스의 시집을 읽었고 몇몇 시 구절들을 기억하게 된다. 시집 읽는 사람이 드문 어느 여름날, 세상은 저주스럽고 슬픔은 가시질 않는다. 행동이 필요한 지금, 어쩔 수 없이 반성부터 하게 되는 현실을, 미래보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게 되는 상황 앞에서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어느덧 내 영혼의..

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 [개정판]다카하시 겐이치로저 | 이상준역 | 향연 | 2011.11.08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의 다카하시 겐이치로다! 하지만 십수년만에 읽는 그의 소설은 ... 아, 이런 표현은 심하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읽는 건 시간낭비다. 전혀 유머스럽지 않다. 작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세계에 대한 반체제적인 알레고리라고 여겨지지만, 그래서 뭘? 너무 쉽게 읽히고 깊이감이 없다. 두서 없고 이야기는 흩어지고 등장인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본어로 읽었을 때는 어떤지 모르겠다. 현재 일본 문학계 내에서 그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그의 일본어 문장이 어떤지 모르는 탓에, 내 평가절하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적어도..

우울한 고양이(靑猫)

우울한 고양이(靑猫) 이 아름다운 도시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이 아름다운 도시의 건축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상냥한 여성을 찾기 위해모든 고귀한 생활을 찾기 위해이 도시에 와서 번화한 거리를 지나가는 것은 좋은 것이다.거리를 따라 서 있는 벚나무 가로수거기에도 무수한 참새들이 지저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 거대한 도시의 밤에 잠들 수 있는 것은오직 한 마리의 우울한 고양이 그림자다슬픈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고양이 그림자다우리가 찾기를 그치지 않는 행복의 우울한 그림자다.어떤 그림자를 찾기에진눈깨비 내리는 날에도 우리는 도쿄(東京)를 그립다고 생각해그곳 뒷골목 벽에 차갑게 기대어 있는이 사람과 같은 거지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 하기와라 사쿠타로(1886 ~ 1942..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전집 5

셰익스피어의 기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나이가 든다는 것, 그건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진 것, 지금 없지만 다가오는 공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쌓아갈수록 갑작스레 부는 바람에서 계절의 수상함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의 뜬금 없는 키스의 따스함 속에 깃든 슬픈 이별의 메세지를 읽으며, 길을 지나는 이름없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중 마지막 권인 을 읽었다. (1975)과 (1983)을 묶어 번역한 이 책은 짧지만 보르헤스의 세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에게 보르헤스는,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난..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경(지음), 한겨레출판 언제 이 책을 샀던 걸까. 그리고 하필이면 이 소설이었을까. 몇 명 등장하지도 않는, 굳이 분류하자면 '성장소설' 쯤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이 소설은 두 명이 죽는다. 한 명은 그냥 사라지고 한 명은 죽고 ... 차라리 일종의 알레고리이거나 은유라면 좋을 텐데, 그렇진 않고 참 슬프다는 생각만 들게 하니, 눈물샘을 자극하는 순정 소설(만화가 아니라)같다고 할까. 우리들의 성장은 과연 그랬던가. 누군가가 죽고 사라지고 정든 집을 떠나야만 성장할 수 있었던 걸까. 소년 화자인 '동구'는 몇 해 살지 못하고 죽을 여동생 '영주'의 탄생과 함께 소설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영주'가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읽기를 배우고 어두웠던 80년..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글, 그림), 길찾기 짧지만 강렬하다. 어떤 만화가 우리를 흔드는 힘은 형편없어지는 요즘 소설들보다 낫다. 최규석의 만화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진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메시지를 가지는 만화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둘리에 대한 비관적 해석이 불편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불편함'이야말로 이 만화가 우리 모습의 반영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최규석의 초기 단편들로 엮여진 이 만화책은 어떤 젊은 작가의 등장을 알리는 선언이며, 만화가 현실에 대해, 우리의 진짜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그는 네이버에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추천한다. '송곳'이다. http://comic...

미국의 송어 낚시,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 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리처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지음), 김성곤(올김), 비채 ‘미국의 송어 낚시’氏를 만나는 것이 쉬워진 탓에, 읽기는 맥주 캔 마시기와 비슷해졌다,고 빨간 말보루 담배를 피우던 그녀가 더듬, 더듬거리며 말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걸 그룹 아이돌이 꿈인 그녀는, 반드시 예능토크쇼에 나가 칼 마르크스의 에 대해 발언할 것이라고, 다시 나에게 말을 더듬, 더듬,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건전하고 낙천적이어서 그녀가 좋다. 그녀의 꿈과 행동, 그리고 현실에 심각한 오류가 있듯이, ‘미국의 송어 낚시’氏도 그와 그를 둘러싼 소설, 혹은 이야기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의가 바르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