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56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엠마누엘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박규현 옮김/동문선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고 직장에서의 내 위치가 올라갈수록 개인 시간을 만들기란 참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고 있다. 특히 돈벌이와 무관한, 개인적 시간은 가족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임을. 그 중 하나가 책을 읽고 난 다음 짧은 서평을 쓰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은 몇 권의 책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한 권이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쓰게 된다면, 적어도 그 책에 대한 찬사가 되어야 하고, 그 찬사가 그 책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한 책이다. 레비나스는 오래 동안 블랑쇼와의 깊은 우정을 통해 그의 ..

시를 읽다 - 박서영, 손의 의미

얇게,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 비가 내리고 우리들의 일상은, 놀랍도록 조용히 흘러간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나는 간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았다.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지나치게 되는 어느 중학교 뒷편은 고요했고 무채색 아파트 벽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어제 어쩌다가 보니, 시를 읽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시인이었지만, 오래, 어떤 손이 가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우리 삶도 그치테지만, 어떤 시들의 여운은 문명의 끝까지 가면 좋으리라. 손의 의미 박서영 기타를 잘 치는 긴 손가락을 갖기 위해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갈퀴를 찢어버린 사람,그러고 보면 호미를 쥐는 손은 호미에 맞게펜을 쥐는 손은 펜에 맞게 점점 변해가는 것 같다그건 자신의 울음에 알맞은 손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이매진 그가 죽고 난 다음, 르몽드에서 한 면을 통째로 특집으로 꾸몄다. 20세기 후반기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내팽개쳐져 있을 무렵,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생과 학문 세계가 유력 일간지 특집으로 나온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현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거의 독보적인 인물.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마르크스주의에 도입한 철학자. 하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동료이기도 했던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침묵의 세월 보내며 죽는다. 그리고 죽기 전에 발표한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며, 자신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도려내어 분석한다. 문장 문장 하나가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며, 추억은 쪼개지며, 사랑..

남자 삼대 교류사, 박유상

남자 삼대 교류사 - 박유상 지음/메디치미디어 남자 삼대 교류사박유상(지음), 메디치 나이 마흔에 아들을 얻었다. 늦어도 이렇게 늦을 수가 없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니, 준비가 되었을리 만무하다. 모든 게 낯설고 힘들다. 한 해 한 해 나는 나이가 들 것이고 주름이 늘 것이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아들이 야구를 하자거나 축구를 하자고 했을 때, 내 나이는 쉰을 넘길 것이니, 내가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테고 ...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신문을 읽다,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 - 아버지 - 아들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남자들의 교류사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 대해 걱정을 가졌던 터라, 이 책은 내심 반가웠다. 못난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마음산책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Pol-Serge Kakon)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i12bent.tumblr.com/post/242749612/jean-seberg-nov-13-1938-1979-was-an 그러고 보면 이 책의 독자는 정해져 있었다. 로맹 가리Romain Gary, 혹은 에밀 아자르Emile Ajar의 팬이거나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의 여 주인공 진 세버그Jean Seberg를 잊지 못하는 이들로. 그러나 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재미있지 않다.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을 ..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장안의 화제가 된 책, 수전 케인의 'Quiet' 한글 번역본과 ... 그리고 진 세버그,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여주인공과 '새들, 페루에 가서 죽다'의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을 구입했다. 어제 주문하고 오늘 받았다. 일하는 도중에, 폴 세르주 카콩의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을 조심스럽게 뒤적이며, 내가 사랑하는 두 이름,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를 기억했다. 그간 로맹 가리의 자살을 그의 문학적 세계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겼는데, 실은 진 세버그였다. 20살 무렵 만났던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 나온 진 세버그. 진 세버그가 먼저 죽고(여러 번의 자살 시도가 있고 난 다음, 파리 근처에서 죽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르시아 마르케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Memoria de Mis Putas Tristes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1.이름 없는 사람들의 독자성으로 포장된, 도시인의 무관심으로 가득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맞은 편 사람에게 떠들고 있을 뿐인, 소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도심의 커피숍에는 무의미한 젊음을 소비하기 위한 21세기의 이십대만 가득했다. 희망을 잃어가는 중년은 없었고, 이승만, 새마을운동, 유신 시대를 겪었던 과거의 기억을 마치 찬란했던 영화처럼 여기는 노년도 없었다. 그저 방향을 잃어버렸고 애초에 방향 따윈 없었던 이십대만 있었던 어느 커피숍에서 나는 ..

저지대, 헤르타 뮐러

저지대 -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문학동네 저지대 헤르타 뮐러(지음), 김인순(옮김), 문학동네 참 오래 이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오래 읽은 만큼 여운이 남을 진 모르겠다. 번역 탓으로 보기엔 뮐러는 너무 멀리 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그녀의 양식이 낯설다. 자주 만나게 되는 탁월한 묘사와 은유는, 도리어 그녀의 처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그녀는 의미의 망 - 단어들을 중첩시키고 시각적 이미지를 사건 속에 밀어넣어 사건을 애매하게 만들었으며, 상처 입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인물들 마저도 꿈과 현실 사이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그녀의 작법은 시적이며 함축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답답하고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얼굴의 모든 낱말은악순환..

도널드 바셀미의 '백설 공주Snow White' 번역에 대하여

오랜만에 도널드 바셀미의 백설공주Snow White를 꺼냈다. 번역본을 조금보다 이건 아니다 싶어 원서를 꺼냈다. 아, 이런! 내가 영어를 잘 하는 것도, 번역을 잘 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건 좀 심했다. 도널드 바셀미는 미니멀리스트다. 그의 짧은 영어 문장은 감미롭고 압축적이며 시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번역문은 길어지고 아무렇게나 선택된 한글 단어들은 도널드 바셀미의 진면목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 두 페이지에서 인용한 문장들이다. She is a tall dark beauty containing a great many beauty spots: one above the breast, one above the belly, ... (중략) 번역: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무언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구토 La Nausee, 장 폴 사르트르

구토 -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문예출판사 구토 La Nause'e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이휘영(옮김), 삼성출판사, 1982년(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로는 문예출판사 번역본이 좋을 듯싶다.) 그냥 우연히 책을 집어 들었다. 이휘영 교수의 번역으로 수십 년 전 출판된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이다. 헌책방에서 외국 문학들만 집중적으로 수집했던 적이 있었고, 그 때 사두었던 낡은 책이다. 요즘에도 좋은 소설들이 번역되지만, 과거에도 그랬다. 단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없을 뿐. 그래서 과거에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소설들도 꽤 존재한다. 장 폴 사르트르다! 그는 20세기 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 중의 한 명이다. 실은 앙리 베르그송이 아니었다면, 그는 최고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