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잠시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급여 격차에 대해서 멤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이 급여 격차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적게 받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니, 도리어 설득력이 없거나 자격지심 같은 것이고 대기업에 다니는 이들이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보수적이지 않냐고 말을 덧붙였다. 그 땐 보수와 그것이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대선 이야기도 나왔는데, 이재명을 지지 않다고 좌파라는 지적을 받았는데, 정보의 불균형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인 이재명 주위에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저 저주받을 한국 언론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건, 이 나라의 너무 큰 비극이다. 하긴 그러니, 19세기 그토록 많은 민란이 있었던 조선이 부패한 양반 사대부와 지방 관리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1. 능력주의
사람들은 종종 어떤 개인의 부족함, 모자람을 그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나오는 에피스드이지만,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첫째였다는 사실은 개인의 역량이 온전히 그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뜻한다. 리처드 월킨슨과 케이트 피킷의 <<평등이 답이다 The Spirit Level>>을 읽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십대의 임신이나, 저소득층의 약물중독이나 우울증 등을 조사하다 보니, 결국 만나게 되는 건 경제적 불평등이었다는 사실은 원인과 결과라는 단순한 인과율을 알지 못한 채, 어떤 누군가들이 제시해놓은 그럴싸한 거짓된 인과율에 현혹되어있었음을 알게 된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는 역학을 연구하는 이 두 학자가 황당하게 정치경제학적 주제와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의아했을까. 이 책 말미에는 자신들이 겪은 여러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는데, 심지어 좌파 마르크주의자라고 공격받은 이야기까지 적고 있다. 그들은 그냥 사회역학을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능력주의의 문제는 심각하다. 개인의 능력이나 역량은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그건 가족이 부여하고 교육 시스템이 부여했으며, 사회나 집단, 국가의 합작품에 가깝다. 반대로 개인의 모자란 능력이나 역량도 마찬가지다. 이런 측면은 있을 수 있다. 의지가 강하고 성취욕이 있는 집단을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의 집단을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의사 결정 말이다. 능력주의에 경도된 이들은 전자를 선택할 것이며 능력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후자에 기울 것이다. 실은 나도 전자에 해당되었다. 그러니 걸핏하면 회사를 그만두었고 언제나 옮길 회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더 많은 것들을 고민하게 된다. 왜냐면 전자로 접근했을 때 결과는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수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글을 적고 보니, 그렇지도 않겠구나.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무시하는 것이 능력주의라면, 보수에 가깝긴 하구나. 그런데 보수나 진보의 관점이 아니라 리처드 월킨슨과 케이트 피킷이 <<평등이 답이다>> 이후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바와 같이 그냥 답이 분명하게 나온 과학적인 접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을 뿐인데. 실은 요즘 읽고 있는 도널드 서순의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의 초반부에 서순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아니나 유럽인이, 혹은 미국인이 실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일으킨 어마어마한 살인 사건들(아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했다면 '테러'라고 지칭했을)을 언급하면서 '외국인 혐오'라는 프레임을 꼬집고 있지만, 그건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역사학자의 견해일 뿐이다. (솔직히 이런 책들을 읽으면 결국 에라스무스를 떠올리게 되는 건 츠바이크의 평전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걸까)
2. 정보의 불균형/불평등
깨어있는 시민들을 보수주의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왜 깨어있어야 하는가. 조선이 결국 몰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반 사대부들, 우리가 좋은 말로 '선비'라고 말하는 그룹들이 나라를 망친 것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천재들 중 한 명이었던 정조 이후 조선은 천천히 쓰러져갔다. 나는 정조의 문체반정이 조선 내부에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어떤 기운을 막아버린 치명적인 정책이라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기존 시스템이나 정치 체제, 혹은 기득권의 유지에 방해가 되고 그 틀을 흔들 수 있는 새로운 정보와 지식은 애초 차단해야 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허황된 정보를 내세워 흔들어야 한다. 이는 오래된 술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현혹되어 넘어가고 그들이 하는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건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아직도 카리스마 있는 리더를 언급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웃긴 소리다. 마커스 버킹엄의 <<유능한 관리자 First Break All The Rules>>를 읽어보면, 리더의 카리스마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게 된다. 이 책은 미국 갤럽이 25년간 성공적인 관리자들이 인터뷰하고 조사한 결과를 정리한 것인데, 언론 등 매스미디어에서 전파하는 관리자(리더)의 모습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누가 이 책을 사서 읽겠는가. 이는 나쁜 소문이 빨리 퍼지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가치 있는 것들은 쉽게 구할 수 없다. 참 안타깝게도.
한 번 덧씌워진 부정적인 프레임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언론사 기자들은 자신들이 그런 잘못된 프레임을 만들고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무비판적이다. 최근에는 과연 그들이 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몇 명의 기자들을 예로 들며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이 읽게 되는 기사들 대부분은 맞춤법 조차 틀리는 경우가 있을 정도니.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런 기사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왜냐면 잘못된 기사를 읽고 이것이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들일 수 없다는 점이다. 한 번 잘못된 기사로 인해 씌워진 프레임으로 그 다음부터는 잘못된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실제로 겪어보면 아! (얼마전 중학교 아들이 유튜브에 나온 극우 동영상에 빠져 극우적 사고에 빠진 건 알게 된 아빠가 그 아들을 다시 정상적인 사고로 돌려놓기 위해 거의 반년 가까이 노력했다는 글을 읽고,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알고 이를 이해한 후에 가능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알기 위해 지금 우리들은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내가 김어준을 싫어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이것이다. 십 수년 전 모 대학 정치학과 교수와 술 한 잔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내가 현대 정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더니만,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추천하는 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문 사립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였다. 그만큼 추천할 만한 정치학 책이 없었거나 내가 너무 허술해 보였거나... 나는 비정상적인 한국 정치 상황이 김어준이라는 인물의 영향력을 너무 키웠다고 생각한다. 하긴 지금은 한국이 그마나 나아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미국 사립대학들이 트럼프 행정부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래서 미국이다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근본이 다르다. 윤석열 정부 때 대학들 중 누가 저렇게 반발했던가. 심지어 누구나 봐도 표절임이 분명한 논문을 두고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걸 두고 앞으로 이 대학들에서 학문의 자율성이나 독립성을 이야기한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겠지. 어쩌면 중도 정부가 들어오면 어제 일 따윈 까맣게 잊고 자신만만하게 떠들 것이고 언론이나 대중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같이 정부를 욕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어느 택시 기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땐 모든 댓글이 '노무현 탓이다'로 시작해 끝나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언론들이 노무현 정부를 공격했다. 이 때 앞장선 언론은 조중동이 아니라 한겨레와 프레시안이었다. 이 때 이후로 나는 이들 언론마저 손절했다. 도리어 박근혜 탄핵 이후로는 몇 년간 중앙일보를 구독했을 정도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사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맥락을 알아야 한다. 맥락을 모른 채 받아들이는 사실은 왜곡될 가능성이 높거나 이미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논술을 배울 때 알게 되는 여러 오류들을 지금도 여기저기서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이재명을 둘러싼 여러 사실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실의 맥락을 설명해주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계가 있다.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프레임이 완고하다. 이는 마치 인상주의 미술이 사진 때문에 나왔다는 근거없는 학설과 유사하다.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해선 근대 사상의 흐름을 설명해야 하고 공간의 깊이(원근법)가 어떤 이유로 평면화되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더 나가 현대 사진 예술의 흐름을 같이 보여주어야 한다. 여유가 된다면 마르셀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해주면 더 좋겠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자들의 생애는 불후했지만, 말년, 혹은 사후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면 어쩌라는 건가. 사후의 명성 따윈 중요하지 않다.
글이 길어졌다. 요즘은 글을 쓸 시간 조차 없이 바쁘다. 이력서도 써야 하는데... 올해 50권을 읽는 것이 목표였는데, 벌써 25권을 넘겼다. 이런 일도 있구나 싶기도 하다.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탓이다.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하고 있어서 쉽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모르는 것이 늘고 배워야한다는 강박감에 휩싸인다. 결국은 카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