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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이는 시간을 먹고 나는 청춘을 먹었다. 게걸스럽게 먹는 사이, 많은 것들을 잃고 얻었다. 노트 한 장을 찢어 길게 반으로 접어, 한 쪽에 내가 잃은 목록을, 한 쪽에 내가 얻은 목록을 적는 사이, 계절이 가고 계절이 오고, 너무 하얀, 그녀의 창백한 볼을 닮은 눈이 내린다. 반쯤 마신 맥주 잔 위로 하얀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이 쌓인다. 쌓인 눈 위로 서로 손을 마주 잡은 그들이 잔 위로 걸어나와 대학로 거리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그렇게 취해가던 금요일 밤, 다행히 나는 그녀들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실은, 전화번호도 알지 못했다, ...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녀들과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이 만날 수 없음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적어도 나는 앞으로 그 찬란하던 고통을 받지 않아도, 그렇게 투명하던 눈물도, 끝없는 저주의 언어를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시 볼 수 없을, 하얀 잔 위로 그 발자국처럼, 그 쓸쓸하고 아름다웠던 청춘의 발자국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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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글 소재, 혹은 주제를 떠올렸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했지만, 가끔 글도 참 못 쓰고, 지적 성실성도 지적 통찰도 없는 이들이 교수가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그럴 여유가 존재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동한다. 공동체는 무너졌고 쓸쓸한 개인만 남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지금 한국엔 너무 슬프고 화가 나는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내 일상에는 변화가 없다.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생각을 서른 초반에 했고 자본주의의 사슬에 매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나를 마흔 초반에 발견했다. 쓸쓸하다. 





벚꽃은 어김없이 봄이면 핀다. 벚꽃이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그 때, 학교 교정에 벚꽃이 흐드러질 때, 나는 사랑을 하지 못했다. 봄 벚꽃과 내 사랑과는 그 어떤 연관도 맺지 못한다. 내 사랑은 계절을 벗어나 저 멀리, 외따로 있었다. 하지만 꽃은 쓸쓸하게 아름답고, 언제가 헤어지게 될 젊은 연인들은 부조리한 한 때의 사랑을 추억하기 위해 벚꽃 아래로, 아래로 몰려들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자, 하늘이 어두워졌다. 갑작스레 밤이 오고 예상보다 빨리 아침이 왔다. 오는 밤과 오는 아침 사이에 나는 끼여,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도로는 축축했지만, 젖지 않았고 도시는 조용했지만 쉬지 않고 떠들었다. 대화는 없었고 일방적인 수다만 있었다. 나는 없고 너만 있는 봄이구나. 





퇴근을 하면 몸은 녹초가 된다. 녹초가 되는 만큼 마음은 투명해져, 어쩌지 못하는 밤이 된다. 시를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싶지만, 예전만큼 건강하지 못하고, ... 실은 한 번도 건강했던 적이 없었다. 병든 현대인의 유머를 이해할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되었지만, 술은 내 곁을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술 친구들 마저. 




늦은 밤,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결국 읽지 못하고 반납하게 될 몇 권의 책을 빌렸다. 오늘, 저 벚꽃도 마지막이다. 내년 저 벚꽃을 볼 때면, 즐겁게 술을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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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운동을 한다. 이마저도 힘들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8시. 저녁을 먹고 아이와 놀다 보면 9시, 10시, ... 이러면 운동하러 가지 못한다. 그리고 잔다. 꿈을 꾼다. 꿈 속에서도 나는 쫓기고. 그러다보면 아침이 오고 곱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힘을 내자고 다짐을 한다. 


이렇게 아빠,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알게 된다. 종종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란다. 이렇게 늙었다니. 그러고 보면 늙는다는 걸 인식하며 세월을 보내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늙었구나 하고 인식한다. 그리고 그 때 뿐이다. 


나는 아직 클럽에 갈 수 있다고 여기고(간 적도 없지만), 아직 옆을 지나는 여대생에게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말을 건 적도 없지만).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지만, 뾰족한 솔루션을 찾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같이 가자는 자리였다.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는 시간이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지만. 그러기엔 산적해 있는 문제가 너무 많고 비즈니스 세계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제서야 나는 조직이라든가 인적 시스템라는 것에 대해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참 잘하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관련 책 읽고 사람들 신경 쓰고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노력한다. 솔직히, 정말 쉽지 않다.




요즘 지나가는 말로, 대체로 무슨 일을 하려고 내가 이러는 걸까 하곤 중얼거리곤 한다. 회사를 옮기고 참 많은 일들을 겪고 있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나이를 먹겠지. 결혼을 하고 보니, 참, 아빠들 어렵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아빠들 중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은 떼지어 이 사회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거참. 그나저나 글은 언제 쓰나. 전시는 언제 보고 벗들과 술은 언제나 마시나. 할 이야기가 많아지니, 글을 쓸 시간이 없구나.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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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누군가가 석유를 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신문 가져올 동안 좀 들고 있어"하며 내 손에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불타고 있는 거대한 50센트 짜리 동전 같았다. (23쪽) 


가을은, 마치 육식 식물 속으로 질주해 내려가는 롤러 코스터처럼, 포트 와인과 그 진하고 달콤한 와인을 마셨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기억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39쪽)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52쪽) 


-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 낚시> 중에서 



출처: http://www.pasunautre.com/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으면 왠지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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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태도 - 대중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사회주의적이며 카발라적인 진지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그 속에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 에서도 기인하지만,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책은 벤야민 글쓰기의 급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러한 글쓰기의 급진성으로 이미 조각난 시간, 조각난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꽤 적절한 책이 되었다(그러나 가끔 만나게 되는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 앞에선 아쉽긴 하지만). 


고전적 예술 양식은 이미 사라지고 그 흔적들이 광고 문구 -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에서 따오거나 유래한 비유적 문장들로 즐비한 - 나 디자인 소품 - 이미 고전 예술을 넘어 현대적 예술 양식의 하나로 인정받는 - 으로 남겨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란 24시간 꺼지지 않는 케이블 방송처럼 끊임없이 변하며, 이 세계의 본질마저 이미지들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연속체, 즉 영화적인 병렬적 구성 -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구성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는 각 단락을 나누고 그 단락마다 에피소드를 담는다. 마치 각기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선 아케이드를 지나는 산보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거리 풍경처럼, 이 책도 그런 구성을 띄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산책할 때나 그 산책을 끝내고 혼자 있을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끝없는 허전감, 쓸쓸함 - 혹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행인들 사이에서 경험하는 익명성의 공포 - 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벤야민이 향하는 곳은 그 산책의 본질을 호도하고 그 산책의 외관으로서의 글쓰기 형식 자체이거나 그 산책의 쓸쓸함을 극복하기 위한, 비현실적 이상향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여러 문학작품들에 빗대어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을 통해 현실 변화의 단초를 읽기 보다는 이미 변해버린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실은 너무 늦게 우리가 벤야민을 읽기 시작한 것이며, 너무 일찍 벤야민이 절망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나마 이런 글쓰기를 통해 변해버린 현실을 알려주는 이마저도 드문 탓에, 벤야민은 우리들의 숨겨진 친구가 된다. 


이 책은 벤야민의 주저가 아니다. 일종의 산문집에 가까우며, 짧은 글들의 연속으로 인해 도리어 독서의 혼란스러움만을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을 지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벤야민저 | 김영옥외역 | 길 | 2007.1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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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반 정도 모 통신사의 사보 편집장 했는데, 유명하다는 몇몇 필자들의 형편없는 원고를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국엔 일반 독자에게 어필해야 된다는 것이니, 나에겐 요원한 일이다제대로 된 글을 읽으려면, 그만큼 독자도 준비해야 된다. 바둑판을 읽을 수 없으면서 바둑을 두겠다고 하는 것이나, 글의 품격을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읽으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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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6점
정재승, 진중권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몇 개의 새로운 정보와 몇 권의 참고 서적을 노트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당시의 트렌디한 소재들을 대상으로, 전반적으로 쉽게 씌여진 글들의 모음이고 지금 읽기에는 벌써 몇 년이 지나 식상함마저 풍기는 책이 되었다. 이미 두 저자 모두 대중적 글쓰기로는 유명한 이들이고 그들의 재치나 박학다식은 다 아는 이야기니, 책의 내용에 대해서 읽지 않아도 대강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겨레 21에 실렸던 칼럼들을 모은 것-검색하면 관련 칼럼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으로, 제시된 소재나 주제에 대해 자신의 전공분야나 관점에 맞추어 쓴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심각한 주제 의식이 있다기 보다는 쉽고 대중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까. 다만 나같은 이에게 이 책은 독서의 즐거움을 전혀 전해주지 못했을 뿐이고, 또한 이 책의 저자들이나 편집자 또한 나같은 이를 목표 독자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은 쉽고 트렌디한 소재들에 대해 쉽고 재미있는 글들이 이어진다. 딱딱하고 어려운 책을 읽고 싶으나,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이 책은 유익한 독서가 될 수 있을 듯 싶다. 또한 이 두 명의 저자도 신뢰할 만한 작가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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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우는 이렇게 씌어 있었어도 괜찮았을 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분 속의 한 사람, 한 알의 씨앗이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 빛나고 ... ... 진동하고 ... ... 작열하는 씨악이다......" 어느 날 나는 국립도서관에 있었는데, 쉰 안팎의 토끼털 모자를 쓴 부인이 내가 있던 책상 앞으로 다가와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 르 끌레지오, '사랑하는 대지' 중에서


낡고 오래된 책을 꺼내 기억하는 몇 문장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이 일상도 거대한 지구의 운동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토요일의 일상을 오늘에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이 갑자기 많아졌고 이를 헤쳐나가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몸에 이상이 왔다. 휴식이 간절하지만, 막상 휴식 시간이 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안절부절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고 포기함으로써 어떤 이들의 지지를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지를 얻음으로써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포기하는 것들이 더 늘어나더라. 마치 작은 구멍이 뚫린 모래댐이 붕괴하듯, 내 영역이 사라지고 있었다.



풍경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땐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풍경화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풍경화가 신화에서 시작하여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풍경을 담다가 결국 평면화와 도형으로 귀착되는 것은, 마치 길을 가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 풍경의 달라진 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공근혜 갤러리의 마이클 케냐 전시는 현대 사진의 어떤 자화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칸트가 이야기하고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떠나고 싶었던 어떤 것이기도 하다. 마이클 케냐는 이국적인 것 너머 있는 숭고미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진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에서 카메라 렌즈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간에.. 


 

유엔씨갤러리의 '스타워즈'전은 해마다 열리지만, 늘 기대되는 전시이기도 하다. 신인작가들은 그렇게 자리를 얻어 전시를 하고 미술애호가에게 소개되지만, 또 그렇게 몇 년 잊혀지내다가 소리 소문 없이 어느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 다시 그렇게 몇 년 잊혀 지내다가 .. 어느 갤러리에서 ...

"나는 여러분 속의 한 사람, 한 알의 씨앗이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 빛나고 ... ... 진동하고 ... ... 작열하는 씨악이다......" 

르 끌레지오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참 의외의 일이었다. 미셸 투르니에도 있고 밀란 쿤데라도 있지 않은가! 르 끌레지오의 초기작이 가졌던 아름다운 무모함은 후기작으로 올수록 이국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마치 왕가위의 영화가 사랑에 빠진 거친 숨소리에서 시작해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슬픈 시선으로 변해갔듯이 나에겐 그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몇 개의 전시를 더 챙겨보고, 리뷰를 또 몰아서 올릴 듯 싶다. 어느 출판사와 원고 약속을 했는데, ... 그것도 차일피일 뒤로 늦어져버렸다. 어쩌나, 내 일상... ... 오늘은 집에 손님들이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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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기억 - 8점
안치운 지음/을유문화사



안치운의 연극과 기억’(을유문화사, 2007)을 읽었다. 그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여러 지면에 쓴 연극평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 여간 읽기 불편한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문제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심연을 가로질러가 무대를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글은 살아남기 위한 표현이되 노력이다. 비평가의 글은 살아남기 위한 열정의 소산이 아니던가. 공연을 재현하는 비평은 공연의 표현이다. 삶이 삶의 표현이듯이. 비평 없이도 연극은 가능하지만, 연극 없이 비평은 불가능하다. 연극을 가능하게 하는 비평이야말로 비평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평의 꿈이다. 그렇지만 비평이란 글은 결코 연극의 얼굴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다. 다만 비평이 무용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서문' 중에서)



하지만 안치운의 글은 너무 문학적이다. 마치 연극 무대를 벗어나,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유하는 듯하다. 글이 사라지는 시대에, 이런 산문은 낯설다. 연극이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난 지금, 그런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은 더욱 더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는 기묘한 슬픔으로 채워진다.
 

뮤지컬 공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에 연극은 혼란스럽다. 혼란은 근원적인 것이다. 연극하는 이가 줄어드는 반면 뮤지컬을 하고자 하는 배우들은 늘어난다. 빨리 먹고 빨리 자리를 드는 패스트푸드가 점차 많아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길거리에서 잡아타는 택시들이 대부분 중형 택시인 것처럼, 뮤지컬은 관객을 태우고 쏜살같이 앞으로 내뺀다. 반면에 연극은 땀 흘리며, 천천히, 헉헉 숨 가쁘게, 절룩거리며 그 뒤를 따라간다. 속도가 잃고 간 것들, 예컨대 과거의 반추, 현재의 반영, 미래의 기다림을 주우면서 간다. (21쪽)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의 층이 얇아지고, 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의 층이 얇아질 수록, 진지한 사유로 매체를 바라보고 풍부한 향기의 산문를 쓰는 이의 존재는 불행하다. 안치운이 그렇다.

두꺼운 이 책을 연극하는 몇 명에게 선물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질 못했다. 무릇 이 시대에 진지함이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진지한 사랑마저도 외면당하고 버림받는데, 무엇 하나 살아남는 것이 있을까.

이 책의 독서는 즐겁지 않았고 도리어 쓸쓸해지고 무안한 기분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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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뒤뷔페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순수하고 신기한 매력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장 뒤뷔페의 글은 어느 작가 못지 않은 영감으로 번득인다. 지난 주말, 여러 전시 도록을 다시 펼쳐보면서 장 뒤뷔페의 문장을 옮긴다.

세 사람, 1975년. (몇 년 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음)


'존재한다'라는 개념은 그 스스로 특별한 뿌리를 갖진 않는다. 단지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황된 투명일 뿐이다. 화가들은 이 허황된 투영을 통해 세상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무형성 자체를 묘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
- 장 뒤뷔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착각을 일으키는 듯한 오브제를, 예를 들면 우리가 가진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개념, 유한과 무한의 정의, 곡선과 직선, 가득찬 공간과 텅빈 공간 등 ... 이 모든 개념들은 어떠한 확실성을 띤 개념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저 그 안에 멈춤없는 열정으로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 장 뒤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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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적인 공간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새로운 ‘사적’ 공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가 속해 있는 커뮤니티나 블로그(blog)가 있는 웹사이트에 로그인을 반복한다. 인터넷 메신저는 늘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며 메일 프로그램은 수시로 열어 살펴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프라인에 있으면서 동시에 온라인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낯설고 기묘한 상태가 언제부터 익숙해지고 심지어는 온라인에 내 존재가 없으면 불안해지기까지 한 상황이 시작된 것일까.
 
 고백하건대, 그건 십 여 년 전 내가 피씨 통신을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물리적 실체 없는 공간 속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 곳을 친숙하고 익숙한 공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 공간을 대체하거나 오프라인 공간을 변혁시킬 새로운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몇 명의 이들을 만났고 만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오프라인 공간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학자는 이러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온라인 공간이 열린 공간을 지향하기 보다는 닫힌 공간을 만들기 쉽다고 지적한다. 자신과 비슷한 취미, 지적인 경향, 정치 성향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시작하며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채널들이 비슷한 경향의 사람들만을 모아 하나의 커뮤니티(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결국에는 닫힌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닫힌 공간이 훨씬 안정적이며 안락하고 사적인 친밀감 내지 유대감으로 가득차있는, 늘 일상에 쫓기는 오프라인 공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공간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열려있는 온라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실은 닫혀있고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은 않을까. 아마 우리는 온라인 속이 사적이고 친밀하며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익명의 타자들로 둘러싸여 있고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모든 가치가 계량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사적 공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꼭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이 꿈의 안락함으로 가득 찬 사적인 공간 속으로 들어갔듯이.
 
 
 진실과 거짓의 문제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모든 것이 실은 거짓이고 거짓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래서 슬플까? 아니면 안타까울까?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보다는 기쁘고 행복하다는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현실의 세계가 아닌 내가 바라는 어떤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 내가 사랑하지만, 날 사랑하지 않는 그녀가 날 사랑해주는 세계. 경제적 능력이라곤 제로에 가까운 내가 풍부한 경제적 능력으로 남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세계. 현실 세계의 진실들이 거짓으로 되고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 현실 세계에서는 거짓인 것들이 진실이 되는 것.
 
 영화 ‘매트릭스’(Matrix)는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다분히 교훈적으로 안락한 거짓 대신 힘든 진실을 택하는 등장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은 관객의 입장에선 시온의 세계가 진실인지, 매트릭스의 세계가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나누어져 있는 이 두 세계 모두 진실일 수도 있고 두 세계 모두 거짓일 수 있다. 도리어 객관적인 세계란 존재하지 않고 한 개인이 어떤 세계를 진실로 선택하느냐에 대한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두 세계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영화 ‘매트릭스’가 그러하듯 ‘진실은 무엇인가’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적 태도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에게 과거 진실이었던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인식되며 진실을 복사한 형태, 또는 그것을 변형한 형태들이 진실을 압도하여 결국에는 현재의 우리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실이 되는 어떤 세계가 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현대에 와서 때 아닌 주목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희망하는 어떤 거짓이 진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 ‘매트릭스’나 장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던 이론이 새롭거나 낯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마다 우리를 사로잡았던 꿈과 환상에 대한 요구가 현대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셈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것이 거짓이었으면’하고 되뇌이는가. 실은 우리는 종종, 혹은 자주 진짜인 모든 것들이 가짜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손쉽게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온라인 공간이다. 나는 채팅하면서 나이를 속일 수 있고 내 소유의 대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전문직 종사자라고 속일 수도 있으며 최근 심각한 실연의 상처를 겪어 누군가의 애정 어린 위로를 구한다는 글을 온라인 공간 어딘가에 남겨 누군가의 위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현실 세계에서는 쉽게 감행하기 힘든 종류의 행동을 온라인에서는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다. 익명의 공간 속에서 낯선 이의 대화가, 낯선 이의 게시물이 진실인지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믿게 되는 과정이 논리적인 과정이기 보다는 직관적인 느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종종 겪게 되는 차별적인 대우나 비슷한 종류의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그러한 일을 온라인 공간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꾸며내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라인 공간 속에서 업데이트 되는 내용들을 모두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도리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믿는 것이 어쩌면 더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보들레르(Baudelaire)는 19세기 파리 거리 한 복판을 거닐면서 고독한 산책자(fl?neur)의 이미지를 발견하고는 경악하고 흥분했다. “새가 공장에서 날아가고 물고기가 물 속에서 노는 것처럼 그의 활동 영역은 대중이다. 그의 정열, 그리고 그의 직업은 대중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산책자, 정열적인 관찰자에게 있어서 숫자와 물결치는 것, 움직임, 그리고 사라지는 것과 무한 속에서 자신이 거주할 집을 세우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다. 자신의 집 밖에 있으면서 어디서든지 자신의 집처럼 느끼는 것,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계로부터 숨어있는 것, (… …) 관찰자는 도처에서 자신의 익명을 즐기는 왕자이다.”1) 그리고 “현대성이란 일시적인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으로 예술의 반을 이루고 나머지 반은 영원한 것, 불변의 것이다.”2)라고 말한다. 19세기 중엽의 보들레르는 익명의 대중들에 둘러싸인 한 개인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열광하고 있지만, 실은 그 거리 속에서 나를 아는 이라곤 한 명도 없는, 그리고 내가 아는 이도 한 명도 없는, 나를 제외한, 심지어 나까지도 포함한 거리의, 도시의 모든 것이 풍경인 어떤 비극적인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21세기 서울의 종로나 명동에 우두커니 서있을 때, 우리가 종종 ‘나는 혼자구나’라는 쓸쓸함이나 외로움 같은 것을 느낄 때, 19세기의 보들레르는 이 느낌을 새롭다고 느끼며 흥분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리차드 세네트(Richard Sennet)은 『공적 인간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에서 이러한 보들레르의 경험을 사회학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해낸다. 그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변화, 그리고 공적 공간이 과거의 위상과 권위를 잃어버리자 사적 공간 속으로 거침없이 빨려 들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낸다. 보들레르에게 19세기 파리의 거리는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었지만, 20세기와 21세기의 개인에게 대도시의 거리란 외롭고 쓸쓸한 곳이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거나 두 공간을 지배하는 질서가 비슷했던 시대는 근대(17세기) 이전이었다. 17세기 이전에도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이나 분열이 나타났던 시기-대표적으로는 로마 후기-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갈등이나 분열을 사라졌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질서가 비슷할 경우, 한 개인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은 특별한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한 개인의 꿈은 그 시대나 그 나라가 원하는 꿈과 비슷하거나 그 공간 속에서 용인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일 가능성이 높고 한 가족, 가문의 단위가 확대된 것이 한 나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세계는 틀리다. 이를 본격적인 탈주술화의 과정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중세의 세계관이 뒤로 물러나고 계량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인 시대가 된다. 이 때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중세적인 것들은 그 위력을 서서히 잃어나가고 가치를 상실한다. 아마 근대 초기에 살았던 지식인들은 이 낯선 변화에 대해 열광하고 흥분하였을 것이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났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떤 개인이 근대 이후의 계량적 세계관과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공적 공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한 가족, 한 가문 내에서 통용되던 전통적인 질서가 공적 공간 속에서 통용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장(Market)이다. 시장 속에서의 모든 것들은 계량화되어 거래된다. 근대 이전의 추상적인 가치들이 근대 이후에는 계량화되어 언급될 수 있다는 신념이 급속도로 확대된다. 이것이 바로 서양 인문학에서의 ‘근대’(Modern)이다. 근대 초기에 이러한 태도는 혁명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내었으며 17세기의 바로크적 자신감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갈수록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능동적 참여자이기 보다는 수동적 참여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시장의 질서는 개인들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시장의 경우에서처럼 계량화된 가치들이 통용되는 근대의 공적 공간은 개인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종류의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19세기 자본주의가 준 치명적인 쇼크로 인해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승자도 패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 질서의 충격으로부터 가능한 어떤 방법이라도 써서라도 자신을 보호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공생활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다스리려던 의지는 점차적으로 무너져갔으며, 사람들은 공생활의 질서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는 데 더욱 관심을 쏟았다. 가정은 이러한 보호막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를 통하여 가정은 특수한 사적 생활 영역의 중심으로서의 성격을 점점 잃어갔으며 대신 공생활 영역보다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독자적인 세계로서의 이상적인 도피처로 점점 인식되어져 갔다.”3)
 
 19세기에 본격화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은 20세기에 들어서는 더욱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업이나 관공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공과 사를 나누어 생각하려는 태도’도 20세기에 들어서서 분명해진 태도이다. 하지만 사적 공간에서의 실수가 공적 공간으로 일어질 수 있거나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점에서 공과 사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 것인가를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오래 전 루소(J.J. Rousseau)가 “가족이라는 사회도 결국은 약속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을 때4), 근대 초기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공적 공간에 대한 이해를 사적 공간까지로 확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개인들은 공적 공간과는 무관하고 비밀스러운 사적 공간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공적 공간 속에서의 개인들의 삶이란 꼭 무대에서의 배우처럼, 일정한 역할과 책임을 부여받은 채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은 채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나가듯이 공적 공간 속에서 우리는 배우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보들레르는 산책자의 존재를 발견해내며 열광하지만, 이 열광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보들레르 이후의 예술가들은 산책자로서의 자기 존재를 분명히 하지만, 외부 세계를 거저 관찰할 뿐, 더 이상 의미나 가치를 구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란 감각 지각에 비친 영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의 작품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연인이나 동일한 지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가 바로 익명의 존재들로 가득 차 있는 공적 공간이다. 이러한 때에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는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공적 공간 속의 개인들의 삶을 드러내는데, 「가면 있는 자화상」에서 예술가의 얼굴만 보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가면을 쓴 형태로 표현하여 공적 공간 속에서의 개인들이란 배우들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예술가인 자신만은 진실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혀지지만, 그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는 이러한 의지의 표현보다는 우리의 삶이 가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절망적 세계 인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앙소르처럼 대부분 현대 예술가들은 외부 세계 속에서 더 이상 삶의 가치나 의미를 구할 수 없다는 니힐리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20세기 추상 예술을 낳은 추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나는 누구인가?
 
 현대의 예술가들이 심각할 정도의 주관주의로 방향을 틀었을 때, 외부 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면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고 해서,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이 봉합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갈등은 심해지고 공적 공간의 영역은 더욱 확장되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가 저녁 9시에 들어오는 평범한 회사원의 삶은 그 공간의 확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20세기 전반기의 많은 예술가들이 경고하였던 종류의 삶이 20세기 후반에 일반적인 삶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공적 공간을 지배하는 계량적 가치의 태도, 즉 도구적 이성의 위력은 이제 사적 공간마저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개인적 삶이란 아무런 존재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의, 나에게만 고유한 어떤 종류의 인생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나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 절대로 수로 표기될 수 없는 가치를 공적 공간 속에서의 사람들은 이해해줄 수 있을까. 사적 공간에 있는 사람들마저 공적 공간에서 통용되는 가치 기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려고 했을 때, 한 사소한 개인이 갈 곳이라곤 아무 곳도 없다.
 
 루이지 피란델로는『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라는 소설 속에서 ‘모스카르다’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 세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어느 날 ‘모스카르다’는 자신의 신체 일부분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 너무 사소해서 소설은 희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질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이어지고 결국은 주인공 ‘모스카르다’는 비극적 파국을 맞이한다. 왜냐면 그는 하나의 단일한 존재라기보다는 소설의 제목처럼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었기 때문이고 결국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할수록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마 17세기의 데카르트(Descartes)라면 어처구니 없어했을 이 소설은 현대인들에게 데카르트의 세계가 얼마나 소력이 없는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도대체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셰리 터클은 온라인 공간 속의 삶을 연구하면서 한 개인의 정체성은 하나이기 보다는 다수에 가깝다고 말한다. “정체성이란 ‘다양한 역할들의 집합’이라는 관념이 일반화됐다. 역할들은 서로 섞이고 짝을 이룬다. 때로는 역할별로 터져 나오는 다양한 요구 사항을 조정할 필요가 생기곤 한다. 이런 새로운 정체성 경험을 이론화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나서고 있다. 로버트 제이 립튼은 ‘다중 역할’이라는 개념을 썼고, 케네스 저건은 ‘포화상태의 자아’라는 말로 설명했다. 에밀리 마틴은 ‘유여한 자아의 개념이야말로 각종 유기체와 개인, 조직이 가져야 할 현대적 덕목’이라는 주장을 폈다.”5) 그리고 그녀는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단일한 특성을 이루는 것보다 다양한 특성이 서로 공존하는 정체성을 긍정한다.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그러한 현상을 적절하게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이론들이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역사 속에서 단일한 자아 정체성을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 듯싶다. 우리는 이미 공적 공간, 사적 공간 가릴 것 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러 역할들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가령 한 아이의 아버지이면서 한 여자의 남자친구, 그리고 어느 부부의 아들이면서 회사에서는 영업 사원, 이런 식으로 이미 삶 속에서 한 개인의 역할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역할마다 그가 보여주어야 하는 행동 양식도 틀리다. 온라인 공간 속의 정체성의 문제란, 실은 이미 온라인 바깥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이다. 아니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논의되는 정체성의 문제보다 오프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문제가 더 중요하고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그 온라인 공간을 벗어났을 경우에는 대체로 잊혀지기 일쑤이지만, 오프라인 공간 속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우리의 직접적인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온라인에서 누구이고 오프라인에서는 누구인가.
 
 자기 진실성(authenticity)
 
 나에게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고 좋은 일일까. 도리어 나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어느 누가 보아도 나를 동일한 성격을 가진 존재로 파악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가족 내의 내 모습과 직장 내에서의 내 모습이 판이하게 다를 때, 과연 나는 누구일까.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갈등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과 겹쳐져 사적 공간 속의 자아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내가 나라고 믿는 어떤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그러한 내가 속해 있는 공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 도구적 이성의 태도로 재단되지 않으며 공적 공간과는 무관한 어떤 사적인 공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적인 공간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던 가족이나 친구의 관계를 지나 더욱 폐쇄적인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공적 공간의 질서가 사적 공간까지 침범할 때, 공적 공간의 역할이 더욱 강화될수록 개인의 사적 공간은 더욱 비밀스러워지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은 『성실성과 진실성』(Sincerity and Authenticity)를 통해, 성실성은 사적 생활 속에서 느끼진 것을 공적 생활 속에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확실성이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느끼려는 시도를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현대인은 끊임없는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이 믿음과 진실의 보편적인 척도라고 생각하게 되며 언제나 자기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기 노출을 감행하게 된다. 즉 현대인들은 다양한 정체성의 집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 대신 사람들은 늘 단일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고자 하며 이를 위해 자기 노출의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라’라는 트릴링의 견해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지배적인 윤리적 경향이 되었다. 꼭 호수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감동하는 나르시스처럼, 이질적인 다양한 것들의 복합체로서의 자아가 아닌 온전히 하나의 자아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꿈은 끊임없는 자기 노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트릴링의 견해대로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자기 노출은 이러한 자기 진실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필사적인 노력이다. 공적 공간 속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떠나, 도리어 그 역할 수행의 이면에 숨겨진 자신의 생각을 드러냄으로서 온전한 자아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공적 공간 속에서 위축당하고 있는 사적 공간의 영역을 온라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개인적인 일상, 비밀스러운 생각까지 노출시킴으로써 개인들은 사적 공간을 지키고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온라인 속에서만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며 그 이외의 공간 속에서는 가면을 쓴 채 살아가게 한다든지, 또는 도리어 온라인 공간 속에서마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의 소설 『질투』는 삶에서 상처 입은 한 개인이 어떻게 소설 속에서 사라지는가를 양식적으로 표현해낸다. 알랭 로브그리예는 소설 속에서 말하는 주인공 화자를 지워버리고 문장을 구성해낸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만 있고 생각되어지는 것만 있을 뿐, 그 속에 화자는 없다. 이러한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이라면, 온라인 공간 속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트릴링의 격언은 실현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왜냐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패, 잘못, 무능력까지도 가져가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
 
 한 달 동안 우리가 어느 누군가와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몇 시간쯤 될까. 온라인 공간이 현대인에게 줄 수 있는 혜택 중에 이것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누군가에게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건네는 것.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온라인 공간을 마련했다고 해서 영원히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의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의 사적인 글쓰기는 확장된 공적 공간 속에서 지친 현대인들의 적극적인 ‘자기 노출’이면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열망의 반영이다.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끼워맞추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여러 개로 나누어진 역할들 중에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실존적 노력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열망과 노력이 치열할수록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어떤 이는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어떤 사람이 그녀의 직업, 사는 곳, 나이, 모든 것을 속였다는 것에 분노했고 도리어 그녀가 자신의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슬퍼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도 온라인 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너무 상심한 탓일까.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면 좋을 텐데, 나의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바라지만, 알아준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를 알아주기 바라듯이 타인도 나에게 그러한 몸짓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고 그 중에서 온라인 속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이해받지 못하자, 대저택의 침실로, 욕실로, 또는 저 꿈 속 세계로 도망쳤다. 이것이 로코코의 세계다. 나를 알아주지 못하자, 나를 알아주는 어떤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내가 오해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남을 속이기 위한 양식적인 행동과 말투와 적절한 자기 노출을 병행한다. 가끔 직장 생활에서만 나를 알던 어떤 이에게 내 홈페이지나 내 블로그를 보여주면 놀라곤 한다. 적절한 공적 공간 속에서의 역할 수행과 적절한 자기 노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한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지고 사적 공간 속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공적 공간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선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다. 나의 경우엔 공적 공간 속에서 내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존에의 요구와 그러면서도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열망이 뒤죽박죽되어 있는 상황일 뿐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해본 바, 그마나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이게 결론이라면 너무 허망하지만,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갈등을 봉합할 힘이 우리에게 없고 도구적 이성을 능가할 힘도, 생각하는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알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것만 알 뿐, 내 감각지각에 비추어진 외부 세계가 진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 고작 내 자신에나마 진실하고자 노력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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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에서의 개인적 글쓰기를 위한 가이드
 
 난데없이 ‘가이드’가 튀어나와 어색할 지도 모르겠다. 온라인 공간 속에서 개인적 글쓰기를 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잡지 편집진들의 의견을 존중하였고 온라인 공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개인적 글쓰기가 자신의 심리 상태나 공적인 삶을 수행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이다.
 
 1. 글쓰기를 위한 준비
 개인적인 글을 쓰기 위해 개인정보를 노출시켜야만 한다는 건 다소 불합리해보이지만,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갈등은 온라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즉 웹사이트 회원 가입을 해야 한다. 그리고 악의적인 누군가에 의해 개인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온라인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곳으로는 대부분의 포탈 사이트와 커뮤니티 사이트, 블로그 사이트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사이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면, 포탈 사이트의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따로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리스트를 제시하지는 않겠다. 왜냐면 지금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은 검색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2. 개인적 글쓰기 시작
 
 글쓰기에 대해서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다. 글짓기 시간에 영 점을 받았다고 해서, 글이라곤 쓴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이 폭력적인 시대 속에서 글쓰기가 자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성공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온라인 공간 속에서 글을 쓰는 두 세 가지의 방법을 설명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된다. 곧바로 자신의 온라인 공간을 개인적 생각이나 관심사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2.1. 감정적인 일기 쓰기
 
 모 커뮤니티 사이트 미니홈피의 모든 게시판을 폐쇄하고 다이어리 기능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00자 이내의 일기를 종종 남긴다. 가령 이런 식이다. ‘피곤했다. 그래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슬퍼졌다.’ 이렇게 하루의 특정한 시간대에 내가 움직인 행동들만 모아 서술해보는 것이다. ‘OO역에 갔다. K를 만났다. 그와 두 시간 동안 쓸데없는 종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에 왔다. 잠을 잤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마지막에 ‘꿈 속에서 K를 만나 두들겨 팼다’라든가 ‘악몽을 꾸었다’라는 문장을 하나 더 첨가하면 더욱 좋겠다.?
 
 길게 적는 건 좋지 않다. 길게 적으려고 노력할수록 글쓰기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길게 적으려고 할 경우, 온라인 공간 속에서의 개인적 글쓰기의 재미를 느껴보지도 못한 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짧게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시시콜콜한 모든 이야기를 적으려고 하지 말고 특징적인 몇 개의 행동들만 문장으로 옮기면 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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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디지털 사진을 올리면서 글쓰기
 디지털 카메라와 핸드폰 카메라로 인해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올리는 것이 매우 쉬워졌다. 나는 사진을 올리면서 사진 밑에 몇 문장을 붙인다. 어디서 찍은 사진임을 알리는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적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년 여름 사무실에서 저녁 늦게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외롭다’는 표현을 함께 올렸다. 그러자 사진이 외로운 사진이 되어버렸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 때 기분을 몇 문장으로 적어 올리는 게 낫다. 이쁜 여자 연애인 스틸 사진을 올리고 ‘그녀는 왜 이렇게 못 생겼을까’라고 한 줄 달아놓으면 별 뜻 없이 쓰인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
 
 2.3. 특정 소재를 통한 글쓰기
 
 친구들과 함께 간 술집, 소개로 만난 이성, 오랜만에 읽은 책, 또는 선물 받은 음반에 대한 글을 적는 경우가 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길게 적는 건 육체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되도록이면 짧게 적는 것이 좋다. 이런 경우는 있을 것이다. 가령 1분 동안 겪은 일을 적었는데, 원고지 분량으로 스무 장이 넘고 한 시간 동안 겪은 일인데, 원고지 한 장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소재나 어떤 사연마다 그것에 어울리는 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또 이 길이는 사람마다 틀리다. 억지로 이 길이를 조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짓이다. 아무렇게나 적어도 상관없다. 단지 느낀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책일 경우에는 마음에 드는 문장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좋다. 어떤 이의 경우에는 수십 개의 문장을 올리기도 하는데, 네 다섯 개만 올리면 된다. 한 번도 독후감을 제대로 써보지 않은 사람에게 독후감을 쓰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다. 차라리 재미있는 책을 읽고 그 책 속의 문장 몇 개를 적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익숙해지면 옮긴 문장 밑에 자신의 의견을 한 줄 정도로 정리하면 된다. 다른 소재의 경우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3. 여행을 떠나기
 
 컴퓨터 인터넷 브라우저 즐겨찾기에는 개인 폴더가 있고 이 속에서 개인홈페이지, 블로그 리스트를 따로 관리한다. 여행 떠나기란 다른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이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방문해 타인의 세계를 훔쳐보는 것이다. 잘 찾아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은 타인에게도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알아가는 과정인 셈이다.
 
 또한 블로그에는 트랙백(Trackback) 기능이 있어 타인의 블로그에 올려진 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릴 수도 있다. 여행을 떠나 만난 어떤 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이다.
 
 이런 식으로 사소하지만, 천천히 온라인 공간 속에서 개인적인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시작하였다. 살아가다가 적절할 때에 개인적 글쓰기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주석.

1) 보들레르, 「현대적 삶의 화가」, 박기현 옮김, 계간『세계의 문학』2002년 봄, 민음사 pp.31-32
2) 위의 책, p.35
3) 리차드 세네트, 『The Fall of Public Man』(번역제목: <현대의 침몰>), 김영일 옮김, 일월서각, p.41
4) 장 자끄 루소, 『사회계약론』,이태일(외) 옮김, 범우사, p.16
5) 셰리 터클, 『스크린 위의 삶』, 최유식 옮김, 민음사, pp.271-272
 
 

* 이 글은 무크지 '북페뎀'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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