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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문학 +92




또 세 권의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했다. 한글로 된 책도 밀려 쌓여있는데, 영어로 된 책을 세 권이나 주문했으니. 당분간 책을 사지 않고 쌓인 책들만 읽고 밀린 리뷰를 올려야 겠다. 


오늘 온 세 권의 책은 아래와 같다. 


루이 뒤프레(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 Andy Warhol

도널드 바셀미(Donald Barthelme), Sixty Stories 


집에 와, 루이 뒤프레의 책을 잠시 읽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 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책으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있었던 학자였다. '모더니티의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법한 이 책은 모더니티를 지성사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책 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Did modernity begin with the Renaissance and end with post-modernity? In this book a distinguished scholar challenges both these assumptions, discussing the roots, development, and impact of modern thought, trac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modernity to the late fourteenth century, and affirming that modernity is still an influential force in contemporary culture. 



14세기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모더니티의 흐름(passage)를 고찰하면서 현재 진행형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되새기고 있다. 무척 흥미롭다. 루이 뒤프레 스스로 서문에서 다소 거칠게 씌여졌다고 인정할 정도로 기존의 모더니티 연구서와는 다른 면모를 가진 책이다. 그런데 언제 다 읽어?


아서 C. 단토의 'Andy Warhol'은 열받아 구입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선 몇 주 전에 한 번 포스팅한 적이 있고, 또 다시 포스팅할 예정이다. (관련 포스팅: 2012/04/01 - [책들의 우주/예술] - 아서 단토의 앤디 워홀?? ) 이 책은 이미 번역되어 있는데, 그 번역서의 실체가 너무 황당해서 실제 단토의 책을 확인하고자 책을 구입한 것이다. 순수 미술책이 아무리 안 팔린다고, 미술 전문가가 굳이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는 책을 낼 수 있는 그 대담한 용기를 다시 확인하고자 실제 책을 구입했다. 


도널드 바셀미를 알게 된 것은 이미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그 사이 번역된 것은 몇 편의 단편 소설 뿐이었고, 원서는 대학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어려웠던 터라, 번역된 몇 편의 단편에만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바셀미를 다시 읽기로 했다. 나도 좀 자유로운 처지라면, 하루키 처럼 소설을 번역하면서 내 소설 구상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럴 형편은 안 되고, 열심히 읽기라도 할 생각이다. 소설 앞에 David Gates의 소개가 있는데, 이는 한 번 번역해서 포스팅을 해봐야겠다. 


벌써 11시 40분이다.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주일이, 한 달이, 쏜살같이 지나쳐간다. 어찌된 영문인지, 여유 부릴 틈도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술 한 잔 하면서 지내고 싶은데 말이다. 봄이 가기 전엔 한 번 만날 순 있겠지, ... 그렇게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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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세니예프의 생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지음), 이희원(옮김), 작가정신, 2006년



아르세니예프의 생 - 10점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음, 이희원 옮김/작가정신
 

 
1.
‘그래, 그랬지. 나는 지금 이 순간 늙어가고 있고, 지나간 일 따윈 돌이킬 수 없지. 하지만 밀려드는 슬픔은 왜일까’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이 소설을 6개월 동안 가슴 조이며 읽었다. 6년에 걸쳐 번역한 소설을 나는 6개월에 걸쳐 읽으며, 한 장 한 장마다 러시아의 차가운 서정(敍情)을 느꼈고 거친 대지의 순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한 영혼이 어떻게 서글픔에 잠긴 채 과거를 되새길 수 있는가를 보았다. 

나는 목격자이며, 방관자였고, 공범이 되었다. 지금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지나쳐 버린 세월에 대해, 무채색으로 흐려져만 가는 추억에 대해, 그리고 시들지 않는 사랑의 기억에 대해. 그 때 나는 최선을 다했으나,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밀려드는 건 그나 나나 똑 같은 것이리라. 

2.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53년 파리에서 죽었다.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이 두꺼운 소설은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 소설은 한 젊은이가 태어나 성장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질풍노도와 같은 방황도, 자신의 생을 파멸로 이끄는 사랑도,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열정도 없다. 소설은 마치 순백의 눈이 쌓인 러시아 중부 평원 가운데를 지나는 강물을 담아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쬐는 햇살의 각도에 따라, 계절마다 방향을 바꾸며 부는 바람, 혹은 시시때때로 자신의 모양을 바꾸는 구름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모하는 말 없는 강물처럼, 소설은 잔잔하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러시아적 삶과 자연을 노래한다. 

우리의 삶이 시간 위에서 유한함의 비극을 가지고 있듯이, 소설 전체를 물들이는 것은 바로 지나간 추억에 대한 쓸쓸한 반추다. 그 위로 러시아의 건조하고 차가운 풍경이 겹친다. 

3.
 

내 삶의 첫 기억은 미심쩍은 정도로 무언가 좀 하찮은 구석이 있다. 초가을 햇살이 비쳐 드는 커다란 방, 그리고 그 방의 창을 통해 남쪽으로 보이는 산비탈 위로 빛나는 가을 태양의 건조한 섬광 …… . 오로지 그 단 한순간!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 그 순간이 아무런 이유 없이, 기억이 가능해진 후의 내 삶에 있어 첫 기억으로 그토록 선명하게 나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일까?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는 왜 또다시 오랜 기억의 공백이 있는 것일까?
나의 유년기는 슬프게 기억된다. 모든 유년기는 서글픈 것이다. 아직 온전한 삶으로 깨어나지 못한 무료한 생활과,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여리고 겁먹은 영혼이 고요한 세상 속에 흐릿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11쪽 



문장은 유려하고 아름답고, 정처 없는 젊은 영혼이 머무는 곳은 가족이거나 문학, 또는 소녀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으로 향하는 젊은이는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었던 갈망으로 그 사랑을 놓친다. 이 소설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저 노년이 된 어떤 사람의 고백처럼 읽히는 건, 지나간 추억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소설 전반을 물들이기 때문이다. 

4.
 

육지의 가장자리, 칠흑 같은 어둠, 짙은 안개와 차가운 파도는 거세게 몰아쳤고, 파도소리는 잦아들다가 커지면서 야생침엽수가 내는 소리처럼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 . 밤의 심연은 앞을 볼 수 없이 캄캄하고 불안했고, 요람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스럽고 적대적이고 무의미한 삶을 말하는 것 같았다. 
- 302쪽



청춘은 캄캄하고 불안하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구원처럼 나타나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것. 삶의 비극은 그 비극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 영혼의 병은 심해져만 가고, 그 사이 우리 사랑도 우리 곁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 해 봄에 나는 그녀가 폐렴에 걸려 집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가능한 한 오랫동안 내게 그 사실을 숨기게 한 것도 그녀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495쪽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멋없는 몇 개의 문장들로 수놓아진 이 작품의 끝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은 끊임없이 되새겨지지만, 그 밑에 흐르는 슬픔은 어쩌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6. 
소설은 구성은 아래와 같다. 

1부 카멘카, 삶의 시작 
2부 나의 조국 러시아
3부 숭고한 사명, 문학
4부 청춘, 그 찬란한 이름
5부 사랑, 시들지 않는 기억 

번역된 것으로는 작가정신(출판사)를 통해 이희원 번역으로 나온 것과 나남출판사를 통해 이항재 번역으로 나온 것이 있다. 후자의 책은 읽지 않았지만, 지금 구할 수 있는 것은 이 책뿐이다. 


7. 
6년에 걸쳐 이 소설을 번역한 이희원 선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출판사에서도 이 책의 재발간을 검토해보았으면 좋겠다. 이번 겨울, 이 소설은 지친 우리들에게 충분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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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친구들도 유미리를 읽을까. 유미리를 읽지 않는다면, 누구를 읽을까.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녀. 해질녁 공원 계단에서 죽은 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그녀.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 


도서관에 빌린 강상중의 책 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 때문에 강연회를 할 때마다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는 강상중 교수의 책을 보자, 문득 유미리가 떠올랐다. 서재에 이미 그녀의 책은 다른 책들로 인해 밀려밀려 어디로 사라지고 ... 도서관에 가서 그녀의 책을 빌려 읽어야겠다.

그녀의 트윗을 팔로워했는데(일본어를 할 줄 모르면서), 그녀의 딸인가 싶다. 혼자 딸을 키우고 살아가는 작가 유미리... (주제 넘은 생각이지만) 가끔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도 거기에 속한다.

- 2011. 12. 18에 적다. 


---- 
아래 글은 2004. 08. 29에 적었다.


유미리(지음), 한성례(옮김),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문학동네, 2002(1판 1쇄)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 8점
유미리 지음, 한성례 옮김/문학동네





그녀는 늘 나는 외롭지도, 힘들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어금니를 꽉 물고는 너무 외롭고, 너무 힘들고, 무척 슬프다고 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녀의 몇몇 문장은 매우 좋지만, 대부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선명한 아픔을 느끼게 하여 불편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소설이라는 허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유미리라는 여인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유미리라는 한 인물을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 소설 속으로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 산문집을 굳이 사서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썩 좋은 산문집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가 여성이고 나는 너무 외롭고 너무 힘들며 너무 슬프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이 한시라도 떠나지 않는다면 유미리의 소설이나 산문집을 사서 읽는 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도 그러하니깐.

 
“양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보폭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달릴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달린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견뎌내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이면서 손기정 선수와 버금갈 정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던, 그러나 전쟁으로 동경올림픽에 참여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살아가게 된 어느 남자의 외손녀. 그리고 그는 한국에 돌아와 죽고 그 손녀는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쫓아 한국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만나는 건 할아버지의 과거가 아니라 그녀의 현재이고 그녀의 아픔이며 그녀가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였다.

 
아마 유미리의 외할아버지가 남겼다는 말.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고 달린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견뎌내는 것. 아마 그녀는 그녀의 인생 전체, 그녀의 문학 전체로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닐까.

 
잠시 옥상에 올라가 8월의 하늘을 보았는데, 어느 하늘은 높았고 어느 하늘은 낮았다. 어느 곳은 여름이었고 어느 곳은 겨울이듯이. 보이는 것, 느끼는 것, 아는 것들이 우리의 감각을 속이고 우리 생을 배반할 때, 우리의 분노가, 우리의 펜이 향하는 곳은 우리 자신이다. 유미리, 그녀는 지금 그녀 자신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 자신과 싸워 이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설가 유미리씨(왼쪽)와 고 손기정옹의 손녀 은경씨가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그녀의 웹사이트
http://www.yu-mi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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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중해 읽을 시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줄어들기만 한다. 이제서야 책 읽는 재미, 문맥 속에서 세상의 비밀을 엿보는 기쁨을 알게 되는 듯 한데 ...

얼마 전 펼친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Wirklichkeiten in denen wir leben, 양태종 옮김, 고려대출판부)의 한 구절은 올해 읽었던 어느 문장들 보다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가 하나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20세기 철학을 자극하는 발견들을 위한 정식이다. 그것은 우리와 맞닥뜨리는 횟수가 늘어나는 발견들을 위한 정식이다." - 한스 블루멘베르크

 
하나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20세기의 생각들은 시작되었을 지 모르겠다. 블루멘베르크의 표현대로... 하지만 몇 세기 전 17세기의 존 단(John Donne)은 하나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And now good morrow to our waking souls,
Which watch not one another out of fear;
For love all love of other sights controls,
And makes one little room an everywhere,
Let sea-discoverers to new worlds have gone,
let maps to others, worlds on worlds have shown:
Let us possess one world; each hath one, and is one.
(
그리고 지금 우리 깨어나는 영혼들에게 아침 인사를,
두려움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던 건 아니라네.
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랑을 막아주고, 
그리고 이 작은 공간이 전체의 세계가 되네,
바다 위의 발견자들은 새로운 세계로 가도록 놔두고,
지도를 다른 이들에게, 세계들에 대한  세계들을 보여주며,
우리 하나의 세계를, 각자 하나의 세계를, 그리고 하나가 될 세계를 가지네.)

- 'The Good-Morrow'의 2번째 연.
(번역은 방송통신대학 교재 - 영국 문학의 이해 - 주석을 참조하여 직접 함)


존 단의 근대성(Modernity)는 지도 위의 어떤 세계들이 실제로 구현되는 하나의 세계, 서로 공유하게 될 어떤 세계. 즉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을 꿈꾸는 것이다. 이론이 현실이 되어 퍼져나가는 것.

그런데 20세기 이후의 문학과 철학 속에서는 실제 현실이 이론화되고 예술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담론만 넘쳐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잠자리에 들기 전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대부분은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 이제 내 나이도 마흔이 된다. 어렸을 때, 마흔 이상 되는 이들은 이 세상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강력하게 동의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 그런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흔들거리는 어느 일요일 밤,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책은 잠시나마 나의 위안이 되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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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뒤에야 김경주라는 시인이 있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하긴 대학 졸업하고 난 뒤, 직장생활을 하고 난 뒤, 시집을 샀던 적이 몇 번 되지 않았을 테니... 요즘 나오는 시인이나 소설가에겐 흥미를 잃은 지 오래... 그러다가 읽게 된 김경주. 

아래 글은 얼마 전 휴간으로 들어간 브뤼트 마지막 호에 실렸다. 예전부터 한 번 블로그에 옮기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올린다. 이런 글 참 오래만이었다.  

언어는 폐허 위에서 생겨난다. 언어의 폐허로부터 시는 태어난다. 시는 자신의 폐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는 폐허의 속살이다. 시는 언어와 폐허가 교미한 흔적이다. 시는 언어의 폐허를 채운다. 언어는 인간의 폐허를 망각하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가서 발화된다. 한 인간의 사랑이 된다. 혁명이 된다. 시가 된다. 언어는 지상의 폐허를 목격하고 증언하지만 폐허를 바꿀 수 없다. 언어는 폐허의 잔해이기 때문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폐허 또한 누군가의 입안에서 흘러나와 누군가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폐허를 감추기 위해 시를 쓰기도 하지만 폐허 뒤에 숨어서 언어를 남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폐허에 숨어 살며 수많은 언어로 귀향을 가는 꿈을 꾸기도 한다. 때로 그것이 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언어 뒤에 숨어있는 폐허를 장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 폐허는 스스로의 언어를 찾아 시가 되기 때문이다. 시가 되려거든 타인의 폐허를 함부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 시가 되려거든 자신의 폐허를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세상의 곁으로 가서, 폐허가 새로운 지상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다리 없는 새가 폐허 위에 내려앉아 시가 된다. 
- 김경주, '폐허의 복화술', 2011년 7월 브뤼트(Br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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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 자리할 수 없는 불가능성들이 존재하는 황야에서의 고독.
문학은 우리를 그러한 황야로 이끈다. 문학은 언제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 레비나스


한참 머뭇거렸다. 마치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와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를 담아낸 듯한 저 문장 앞에서.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존재로 하여금 메아리가 울리는 근원적인 언어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일 게다. 사물들의 존재는 작품 속에 명명된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며, 말들은 사물들의 부재를 가리킨다.
- 레비나스


그렇다면 한국어 문학 중에 그런 문학이 있었던 걸까?

오늘 잠시 들른 서점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 기분이 묘했다.
블랑쇼.
매혹적이면서 기묘한 고유명사이다.
 
침묵은 언어를 낳고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낳는다. 그리고 그 곳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심연. 그리고 어두움. 내가 꿈꾸는 언어가 있다면 밝혀지지 않은 어두움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에마누엘 레비나스 저/박규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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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깊이 있고 멋진 문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보면 참 대단해요. 전 평생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런건 타고 나는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부끄럽지 않은 소설 하나 쓰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요.

    •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소설 하나 쓰는 목표를 가지고 노년을 향하는 것도 꽤 멋진 소망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그런 마음(꿈)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 그걸 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느 인터넷서점의 파워블로그 혜택을 받게 되었다. 꾸준히 포스팅을 하고 트위터에 글을 보내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월 5만원 상당의 포인트는 꽤 좋은 혜택이다. 포스팅이야 꾸준히 하는 것이고 트위터에 글을 보내, 이 블로그로의 유입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 내 블로그로 오는 이들은 꾸준히 방문하는 일부의 단골 손님들과 검색 엔진 통해서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크게 신경쓸 건 없는 듯하다. 

여하튼 며칠 전 인터넷서점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오늘 퇴근 전에 여기에다 올려놓는다. 요즘 소설 잡으면 몇 달 동안 읽는다. 좋은 소설을 잡은 탓이기도 하지만, 실은 네 다섯 시간 이상 집중할 여유와 새벽까지 지탱할 건강이 사라진 탓이다. 독서가의 입장에선 참으로 절망적인 일이다. 다행인 것은 절망적인 일임을 알게 되었으니,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아암.~.

---

긴 회의를 끝내자, 잠시 머리가 멍해진다. 이 작고 거친 틈새를 타고, 몇 권의 소설을 이야기해본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필독이다.

김승옥은 한국 근대 문학에 서구에서 이해하는 바의 모더니즘(modernism)이 있었다면, 그 모더니즘의 절정이다. (김승옥의 소설집이 집에 있는데, 다시 꺼내 읽어야 겠다. 몇 개의 단편은 정말 좋은데..) 
 

무진기행
김승옥


우리가 실존주의적 문학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카뮈, .. 또는 베케트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동양에도 그런 소설가가 있으나, 그는 단연코 아베 코보가 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여러 작가들이 선보였던 실존주의적 절망과 자포자기가 동양에서는, 특히 일본에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소화되는지는 극적으로 보여준다. (2003/01/27 - [책들의 우주/문학] -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저/김난주


한국에도 한 때 후일담 문학이 유행했다. 80년대 운동권 세대들의 경험, 도전, 후회, 자기 반성들로 이루어진 이 문학들은 대체로 그 작품성이 낮고 완성도도 떨어졌다. 그래서 관계된 사람들이나 읽는 소설들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제는 읽지 않는 소설들이다. 나는 후일담 문학에 대해서 입에 침을 바르지 않고 찬사를 해대던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기억난다. 그들의 형편없는 심미안이란!

하지만 장 폴 뒤부아의 이 소설은 읽다면, 후일담 문학이라는 것도 이렇게 우아하고 근사하며 문학적 완성도를 이룰 수 있구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후일담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2008/02/01 - [책들의 우주/문학] -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저/함유선

몇 권의 소설을 추천했다. 다음에도 이런 틈새가 생긴다면, 한 번 정리해서 올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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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질 듯, 무너질 듯, 일상을 지탱해온 것 같다. 아내를 직장으로 보내고, 집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주 짧은 휴식을 취해보지만, 습관은 늘 그렇듯 활자로 나를 이끌었다. 활자 속의 삶.


대학시절, 글 쓰던 친구들은 시집이나 소설을 읽을 때 늘 작가의 등단 연도를 찾았다. 몇 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몇 살 때인지가 중요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은 있어, 당연하게도 20대 초반 만에 등단하는 작가는 많지 않았으니, 가끔 김인숙이나 구광본처럼 대학 심지어 그 이전에 등단한 작가를 만나면 책을 휙 던지며 말 한 마디 없이 우울해지곤 했다. 그 짓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시들해져갔다. 보기는 하지만, 나는 대기만성형이야, 라고 주절거리는 횟수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를 보라며, 작품은 인생 경험이 있어야 쓰는 거지 어린 것들이 뭘 아냐고, 그러다 그것마저 초라해지면, 더 이상 약력을 들춰보지 않고 아니 더 이상은 아티스트가 될 꿈을 버리며 서서히 뒤편으로 물러나곤 했다.
- 김봉석, 편집자의 글 중에서, 브뤼트 2011년 6월


브뤼트 2011년 6월호

편집자의 글


사무실로 날아온 ‘브뤼트’에 실린 편집자의 글을 보며 피식 웃으며, 나도 저랬지, 하고 회상에 잠기는 것도 잠시, 쉴 새 없이 어둠은 내리고 바람은 불고 시간을 흘러갔다. 약간의 공포가 날 에워쌌다.


토요일 오후를 지탱한 힘, 혹은 가식과 허위의 미장센


하늘은 높고 토요일의 시간은 쉼 없이 흐른다. 며칠 전 심하게 마신 술은 아직까지도 여파가 있는 듯, 나를 쉽게 피곤에 지치게 한다. 종이 잡지를 뒤적거릴 좋은 시간이다. 몇 개의 잡지를 책상 위에 놓고 노트를 펼친다. 돈 벌이와는 무관하거나 거의 보이지 않을 도움을 주는 취미를 지탱하는 건 뒤편으로 물러나기 싫은 어떤 반항심과 관련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루이지 피란델로는 나이 쉰이 거의 다 되어 최초의 글을 출판했고, 결국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내가 아는 등단한 친구들은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요즘 습작하는 친구들도 등단에 목을 맬까. 별의별 생각이 주절주절 머리카락처럼 자라나기 시작하는 오후다.


브뤼트에 실린 알렉산더 메퀸 기사




브뤼트 BRuT 2011.6 - 10점
브뤼트 편집부 엮음/오니트(월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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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31 02:01

    비밀댓글입니다

    • ㅎㅎ 이 잡지는 없어졌어요. KT&G 지원을 받아 나오던 잡지였는데, 지원이 중단되자 나오지 못하게 되었죠. 정기구독 신청한 지 2달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ㅜㅜ;;



출근길에 시집 한 권을 챙겨 나섰다. 지하철 안에서 시집을 읽는 건 너무 낯설어서, 꺼내지도 못했다. 이는 사무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시집을 읽기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로만 했다. 어쩌면 모든 시는 위기의식으로 만들어지듯, 모든 시 읽기는 현대적 공간에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시를 읽는 나는 물신적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21세기 현대적 공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 같았다.

한 때 내 모든 것이었던 시는 이제 시 읽기조차도 어색해진 상황이 되었으니, …

그런 내가 들고 나온 시집은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오징어뼈’였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그의 시는 번득이는 슬픈 유머와 깊은 통찰, 그리고 나와 너, 자연을 아우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존재를 하나의 공간으로 수렴하고 이를 다시 배열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얇게 웃기도 하고 얇게 울기도 한다.


삶의 불행


나는 때때로 삶의 불행을 만났다.
그것은 꼬록꼬록 숨 막히는 개천이었고,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포장하는 것이었으며
넘어지는 말(馬)과 같았다.

신의 무관심을 슬며시 열어주는

경탄스러운 일 이외, 나는 아무것도
잘 알지 못했는데, 그것은 한낮의
잠에 취한 조각상, 구름, 높이 솟은 사냥매였다.




삶의 불행을 노래(?)한 시지만, 끝없이 슬프지 않다. 삶의 불행과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그는 그 불행으로 야기된 결과에 대해선 접어둔다. 그래서 불행으로 야기될 슬픔, 아픔과의 거리를 두고 ‘한낮의 잠에 취한 조각상, 구름, 높이 솟은 사냥매’로 불행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행복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아래 시를 읽어보면, 행복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며 행복 오기 전의 불행을 되새기며 경계하려는 듯 읽힌다.


행복


찾아온 행복이여, 그대를 향해
우리, 칼날 위를 걷고 있다.
눈에 비친 그대는 깜박이는 불꽃,
발에 깨어져 부닥치는 얼음이어라.
그래, 그댈 더 사랑하는 자, 그댈 다치지 말아야지.

그대 슬픔에 짓눌린 영혼에
이르러 밝게 해주면, 그대의 아침은
달콤하여 새들의 둥우리인 듯 설렌다.
그러나 집 사이로 달아나는 풍선 때문에
울부짖는 아이의 마음, 아무것도 달래지 못한다.




몬탈레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시의 깊이에 감동받는다. 그의 언어는 사소한 것으로 시작해 확장해나간다.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자기 바깥의 사물과 존재에 투영시킬 수 있고 이를 다시 자신의 시어로 표상화한다.

‘지중해’는 마치 바다를 노래하는 듯 읽히지만, 실은 바다로 대변되는 사람들 사이의 만남, 대화, 우정을 노래하고 있다.


지중해


옛 친구여 나는 취했다오
푸른 종(鍾) 같은 그대의 입술에서
열렸다 다시 오므라져
터져 나오는 소리에.
흘러간 여름마다 살던 내 집이
그래, 그래, 그대 가까이 있소.
태양이 작열하고
모기가 하늘에 구름 이루는 곳에
바다여, 그때처럼 오늘도
그대 앞에 무감각해지는 나.
나 어찌 받을 수가 있을지
그대 호흡이 주는 숭고한 충고를.
내 마음의 미세한 고동일랑
한 순간의 그대 숨결에 그친다고 ……
준엄한 그대 율법이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니
폭넓고 다양하고 견고하게 하라며 … …
그대가 심연에 있는 온갖 쓰레기를
바닷가 불가사리, 코르크 조각, 해초 속으로
내리치듯 나 역시 모든 불결 씻어버리라고 ……
그대가 맨 처음 나에게 일러주었소.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더 인용하며, 오랜만에 시집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이 시집을 추천한다.


번민


당신의 손은 건반을 두드렸고
당신의 눈은 알 수 없는 부호들을
종이 위에서 읽고 있었으니,
음악은 온통 고뇌의 소리처럼 들렸다오.

사방의 사물, 짓눌려 무기를 잃고서
제 언어에도 무지한 당신을 보고
유순해지고 있음을 내 알았다오.
말간 바닷물이 덜 닫힌 창 너머로 철렁댔다오.

나비가 도망치듯 추는 춤 파란 사각형 속을 지나쳤고
잎사귀 하나 해님 속에 펄럭였소.
이웃의 어느 것도 제 언어를 못 찾았으니,
당신의 달콤한 무지는 나의 것, 아니 우리의 것.


 

오징어 뼈 - 10점
유제니오 몬탈레 지음, 한형곤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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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기억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지음), 오정미(옮김), 플래닛


오래, 이 책을 잡고 놓지 못했다. 아는 이(나는 이 분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에게서 소개받은 이 책은, 역시 나보코프라는 찬사를 지나, 작은 기억, 혹은 그 흔적에서 시작되어 재구성되고, 형상화되며, 눈 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생생함, 그리고 그 뒤에 표현되는 숨겨진 의미와 고백, 또는 독백으로 이루어져, 문장은 느리게 읽히고, 자주 호흡을 가다듬게 만들었다. 그래, 이 책은 내 놀라움과 동경으로 축조된 오래된 성(城)과 같았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을 통해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19쪽)



나보코프는 러시아 태생으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 고국을 뒤로 하고 유럽과 미국을 떠돌다 스위스 로잔에서 자신의 생을 내려놓는다. 무명의 시절을 보낸 이 언어의 천재는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써, 20세기 후반 영미문학사에서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았으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의 문장은 10대 소녀와 사랑에 빠진 가여운 험버트를 순수한 사랑의 노예로 변호하였다.

‘말하라 기억이여’는 그런 나보코프의 자서전이다. 하지만 시간은 뒤섞이고 기억의 한계 속에서 언어는 창백한 별빛 아래에서 슬픈 표정을 짓는다.


누군가 음악에 대해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면, ‘하지만 침묵 역시 아름다울 수 있겠죠’라며 거품을 물었다. “뭐, 어느 날 저녁, 알프스의 황량한 골짜기에서 정말로 침묵을 들었거든요.” 이와 같이 그녀가 돌발적인 발언들을 하거나 특히 심해지는 귀먹음 증상으로 인해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질문에 답할 때면 고통스러운 침묵이 생겨났고, 누구도 기운차게 이야기의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없었다. (140쪽)



과연 자서전일까. 나보코프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의 문학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가치판단’을 배제한다. 그는 보여줄 뿐이다. 각각의 챕터는 서로 연결고리가 없다. 병렬적으로 구성되어, 마치 아무런 관련 없는 여러 장의 사진을 보는 듯한, 각기 다른 스토리를 가진 단편 영화 여러 편을 읽는 기분을 선사한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그 어느 화가보다도 뛰어나게 표현하고 사건의 세부적인 영역, 인물의 사소한 습관까지 드러내면서 자신의 기억, 추억과 연결 짓는다.


박물관과 영화관에 들어갈 수는 없고 아직 밤이 되기엔 일렀을 때, 우린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가장 수척하고 불가해한 도시의 황량함을 탐험하게 되었다. 고독한 거리의 등은 우리의 눈썹에 붙은 얼음 조각들의 습기로 인해 무지갯빛 등뼈를 지닌 바다 생물체로 변신했다. 광활한 광장을 가로질러 갈 때면, 어디선가 갑작스레 소리도 없이 나타난 다양한 건축학의 환영들이 우리 앞에 솟아올랐다. 우리는 대개 높이가 아닌 깊이와 관련하여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즉, 우리의 발을 향해 열려 있는 심연에 관한 것이었다. (289쪽)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어디에서부터 끝나는지 이 책 속에서는 알 수 없다. 기억이란 시간의 압축이자, 시간의 병렬적 구성이다. 현재는 순서대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순간을 지나쳐 기억의 혼돈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인과적 배열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하나가 아니면 둘이고 있었거나 아예 없던 것이다. 자서전이란 그런 것이다. 있지만, 없는 것이므로, 현재의 순간, 글을 쓰는 순간 순간마다 재창조되는 책이 자서전이다. 기억에 의존해 씌어지지만, 기억은 시간과 공간의 상상적 파편이고 단지 영혼 속에 존재하는 상상체이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말하라, 기억이여’라고 이름 붙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지난 과거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세계 속으로 진입했음을 깨달았다. 나보코프와 같은 위대한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내 철없는 상상력과 빈약한 인내력의 언어들, 무책임함과 무모함 사이에서 내 인생은 어떤 낭떠러지 앞에서 밀렸고 그 때의 시도란, 망각과 포기다. 아니면 모든 지나간 것들을 상상의 기억 속에 밀어 넣고, 그 입구를 또 다른 세계의 표지로 닫는 것이든가.

책 표지를 덮지만, 책은 끝나는 법이 없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나보코프는, 내가 가게 될 그 세상 어딘가에 앉아 자신의 언어로 아름다운 마법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화려한 날개를 자랑하는 나비들과 함께.


꿈 속에서 죽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은 늘 조용히 근심스럽고 이상하게 침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모습은 다정하고 밝았던 그들 본래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 친구의 집 같은 곳, 그들이 생전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놀라지도 않으며 그들을 알아본다. 그들은 마치 죽음이라는 것이 어두운 흔적 내지는 부끄러운 가족의 비밀이라도 되는 양, 얼굴을 찌푸린 채 서로에게서 떨어져 마루에 앉아 있다. 죽을 운명의 자가 돛대로부터, 과거로부터, 제 성벽의 탑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볼 수 있는 때는, 분명 이 같은 꿈 속이 아니라 그가 완전히 깨어있는 순간이다. 이는 강건한 기쁨과 성취의 순간으로, 그는 의식의 가장 높은 테라스와도 같은 장소에 존재하고 있다. 비록 안개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지언정, 어떻게든 바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더 없이 행복한 느낌이 그 곳에 있다. (58쪽)

 

말하라, 기억이여 - 10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오정미 옮김/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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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느사람 2011.06.01 04:25 신고

    저도 나보코프 젤 사랑해요 덕후에여 삼년전에 처음 읽자마자 뙇!!!!!그리고 제 모든게 변했어요
    혹시 님도 나보코프만 떠올리면 눈물이 또르르...?? 아니에여?ㅋㅋㅋ농담이에욬ㅋㅋ
    참 이 책 p106에 나보코프 아가때 사진이 있잖아요 동생 손 잡고 찍은
    거기서 나보코프 표정 제 아가때 표정이랑 똑같아요 동생 손 잡고있는 것도 왠지 모르게 진짜 펑펑 울었어요 만약 제가 나보코프랑 동시대에 살았다면 스토커가 됐을꺼에요ㅋㅋㅋ

    • 나보코프는 20세기 후반 최고의 소설가 중의 한 명이예요. 나보코프의 책은 모두 다 읽어도 될 만큼 좋답니다. ^^~


하루의 피로가 몰려드는 저녁 시간. 밖에는 3월을 증오하는 1월의 눈이 내리고 대륙에서 불어온 바람은 막 새 잎새를 틔우려는 가녀린 나무 가지에 앉아 연신 몸을 흔들고 ... 어수선한 세상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고, 밀려드는 업무에 잠시 손을 놓고 ... 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눈 오는 3월의 어느 저녁.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소리 내어 읽는다.

사물들에게 바치는 송가



모든
사물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들이 정열적이거나
달콤한 향내가 나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긴 해도
이 대양은 당신의 것이며
또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단추들과
바퀴들과
조그마한
잊혀진
보물들.
부챗살 위에 달린
깃털
사랑은 그 만발한 꽃들을
흩뿌린다.
유리잔들, 나이프들
가위들…
이들 모두는
손잡이나 표면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스쳐간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망각의 깊이 속에
잊혀진
멀어져간 손의 흔적



나도 사물들에게 몰두할 때가 있었다. 그건 내가 어떤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때였다. 외로움의 강물이 내 몸에 흘러넘쳐,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거친 살갗 사이로 희멀건한 물기가 흘러나왔다. 내 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여있는 샘이 되었고 그 위로 쓸쓸한 음악이 흘렀다. 

파블로 네루다가 외로웠을까. 모든 사물들에게서 흔적을 찾는다. 흔적을 간직하며 애무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노래한다. 사물들에 대한 사랑을. 

아마 17세기의 이 벨기에 화가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Adriaen van Utrecht (Flemish painter (b. 1599, Antwerpen, d. 1652, Antwerpen))
Vanitas Still-Life with a Bouquet and a Skull
c. 1642
Oil on canvas, 67 x 86 cm
Private collection


해골과 꽃다발,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그 흔적을 지친 먼지들로 숨기는 사물들을 위트레흐트(Utrecht)는 사랑했는가 보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뒤돌아보며, 시간의 흔적들을 숨기는 사물들 속에 자신의 외로움을 투영시킨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가, 위트레흐트가, 그리고 젊은 날의 내가... 그러다가 어느 날 사물들에 병적인 집착을 드러낸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까. 

눈이 내리는 3월의 저녁은 길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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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는사람 2011.06.01 04:04 신고

    옛날에 기사로 읽었는데요 어떤 여자가 에펠탑이랑 결혼했데요 되게 슬프죠? ㅠㅠ

    • 일본의 어떤 남자는 게임의 캐릭터와 결혼을 했다고 하더군요~.. 사물이나 가상의 존재와 결혼했다가도,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사람과 결혼했을 거예요~.. ^^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과격한 방식의 프랑스 소설가. 20세기 후반 문학 비평의 일대 혁신을 몰고 온 <<텔켈>>지를 주도했던 인물. <<여자들>>이라는 소설로 여자를 긴 시간에 걸쳐 까발리기도 한 그는 정신분석학자이자 기호학자이며 <<무사들>>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은 국내에 여러 권 소개되었으나, 워낙 대중적이지 않고 식견있는 문학 애호가들에게조차 인기를 끌지 못한 채 곧바로 사장되었다. 그의 데뷔작은 80년대 초반에 나온 범한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실려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제 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내가 1997년에 그러했듯이 이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헌책방에서 쥐를 잡듯이 뒤져야 한다. 그냥 쥐가 아닌 황금으로 도배했다는 소문의 쥐를.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또는 운좋게 구한 젊은 솔레르스의 문장은 우울하고 기운 빠진 20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입안 가득 거친 독기를 품게 되며 세상에 대해 증오 선 칼날을 갈 수 있으며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나의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끝내 '이 세상 드디어 나 혼자다'라는 극도의 희열과 끝없는 두려움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것을 바란다는 그 청춘기의 병(病), 그 병이 솔직이 말해서 나의 내부에서는 거의 미친 듯한 비율로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을 피로하게 하고, 벌써 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그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일찌기 없었던 나는 자신이 저주받고 있다고 믿었으며, 어쩌면 시인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불행이 나를 계속 엄습했다 ? 그것은 더우기 눈에 보이지 않아 그만큼 쓰라린 시련이었다. 나는 사랑과 침착성을 잃었다.”
- <<도전>>에서



르 끌레지오Le Cle’zio. 문학애호가인 여성들 틈에서 보기 드문 키와 외모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소설가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 실제로도 무명에 가까운 그가 테오프라스트 르노도상을 받고 일간지에 사진이 실렸을 때, 매혹적인 금발과 깊은 눈길에서 누가 반하지 않았겠는가. 개인적으로 지금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르 끌레지오의 후기작들은 별로 재미없다. 꼭 왕가위의 초기 영화가 거칠긴 하지만 청춘의 끝없는 터널 같은 절망과 사랑을 보여주기에 적당했듯이 르 끌레지오의 초기 작품들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초기작들도 구할 수 없다. 너무나도 매혹적인 <<홍수>>는 아주 오래 전에 동문선에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구할 수 없고 최근 새로 번역되어 나왔으나, 아직 나머지 한 권은 미처 번역을 끝내지 못한 듯 보인다. <<침묵>>은 세계사에서 고대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출판되어 나왔으나, 지금은 도서관에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도 좋지만, 고(故) 김 현의 번역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상하듯이 이 번역도 구할 수 없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세계문학전집에서 복사한 것이 있었는데,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실패, 몇 번의 도망, 몇 번의 사고 끝에 잃어버렸다. 그리고 겨우겨우 계간 <<작가세계>>에 실린 김화영 교수의 번역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 여기저기 먼지 묻은 <<작가세계>>는 찾아내지 못한다.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채 서재의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장소로 달아나버린 르 끌레지오. '내가 죽으면,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던 저 사물들은 더 이상 나를 증오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죽고 난 후, 저 사물들을 내가 증오하기 시작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르 끌레지오는 갑자기 남미로 날아가 이국적 글쓰기를 감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증오하지 않기 위해.

르 끌레지오의 <침묵>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고 우기고 있을 때, 혹은 날 이해해주길 바라는 오직 한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갈 때, 그래서 오직 한 가지 길,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되는 어떤 길만 있을 때, 그 속에 웅크려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럴 때 읽으면 펑펑 울고 마는 단편이다. 1997년과 98년의 내 어두운 이십대 후반의 겨울을 끝까지 지켜주었던 소설.


1984년에 나온 범한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


필립 솔레르스와 르 끌레지오가 같이 묶여 있다. 이런 신기하고 매혹적인 조합이 또 어디에 있을까.




<침묵>을 원어로 읽고 싶은 마음에 산 <<물질적 황홀>>. 교보문고 외서부에 주문해 한 달만에 구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선명하게 보이는 글자. 침묵.


침묵의 첫 부분.



지금을 구할 수 조차 없는 故 김휘영 교수의 번역본. 초기작들 중에서 문학성으로만 따지자면 최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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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 10점
이유선 지음/라티오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이유선 지음, 라티오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는 참 좋은 책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철학에 대한 아무런 깊이도 통찰도 가지지 못한 얼치기 문학평론가들이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를 사용하며 적어대는 문학 평론보다 백 배는 더 나은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과 문학을 서로 엇대어 구조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글들은 설득력을 가지면서 소개되는 문학작품의 맛을 살리고 있다.


서로가 모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현실화될 때, 여기에서 관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용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오고, 관용은 같이 살기(공존)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관용이 이성에서 나왔다고? 관용이 조화를 위한 것이라고? 이건 이성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데 머릿속에서 나온 이념만 가지고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런 태도는 왈쩌의 표현대로 ‘나쁜(악성) 유토피아’일 뿐이다. (송재우, 역자 후기에서 (마이클 왈쩌, ‘관용에 대하여’ 미토, 2004))
- 168쪽


가장 기억에 남는 인용구이다. 책을 소개하는 서평집의 좋은 미덕은 책의 핵심적인 부분을 잘 소개하고 인용하는 것이 되고, 이 책은 이 점에 매우 충실하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이 책이 놓여진 위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알기에는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 중에는 문학 작품을 열심히 탐독하다가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사람이 꽤 많다. (…)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진실된 삶의 방식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고 하자. (…)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 철학적인 문제를 던져준다.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덕률은 어떤 것인지, 양심이란 무엇인지 등등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된 청년이 철학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윤리학 입문서를 읽게 되었다고 해보자. 이 청년이 철학 책에서 얻게 되는 해답은 대체로 두 가지다. 벤담이나 밀 같은 공리주의자들이 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선이다”라는 명제와 칸트 같은 의무론적 철학자가 말하는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법이 그것이다. 이런 명제들은 비판적인 사고를 전개해 나가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 주기는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겪고 있는 인생의 고민, 창녀인 소냐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문제와 고통 등등은 모두 사라진 채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차가운 정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그래서 철학 책에서 삶의 냄새를 맡기 전에 대부분 질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 문학과 철학의 경계(8쪽 ~ 9쪽)


문학을 하기 위해 철학을 전공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둘 다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새삼스럽게 저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책에 실린 서평들이 리처드 로티의 영향 아래에서 씌여졌다고 고백한다.

이 글들은 2007년 6월 8일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교수의 철학을 문학 작품과 일상을 통해 내 나름대로 해설한 것에 불과하다. 프래그머티스트인 로티는 참과 거짓, 현상과 본질, 이성과 감성, 주관과 객관, 절대와 상대, 보편과 특수 등과 같은 개념 틀을 깨뜨리려고 했다. 로티의 철학함의 태도는, 본질적이며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는 철학자들의 지적인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 문학과 철학의 경계(12쪽)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일상에서 시작하여 철학, 문학작품을 가로지른다. 책 속에서 철학자들의 지적인 강박으로부터 벗어났는지 알긴 어려우나, 적어도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인상 비평일 지라도, 최근의 문학평론가들이 터무니없는 단어들과 자신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현대 철학들로 문학 작품을 읽어내는 것과 달리, 적어도 이 책의 저자는 매우 소박하지만, 솔직하게 철학과 문학, 그리고 일상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또한 그의 솔직함은 아래와 같은 글에서도 드러난다.


그 난해한 철학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여러 권의 책이 이미 번역되어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요 저서 ‘삐딱하게 보기’의 앞부분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역시 너무 어려워서 내용을 이해하기는 곤란했다. 이런 책이 그래도 꽤 팔렸다는 것은 아마도 스티븐 호킹의 난해한 책 ‘시간의 역사’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과 비슷한 현상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니면 내가 한국의 평균독자들의 글 읽는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 18쪽 - 19쪽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지 못했던 대학 시절, 나에게도 인문학은 유행따라 흘러가는 어떤 것이었다. 그  점에서 들뢰즈나 지젝에 대한 이상하고도 기묘한 유행은 나를 참 당황스럽게 한다.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우리의 현실적 삶에 그 어떤 영향력도, 정치적 파급효과도 가지고 오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들의 책을 읽고 소비하는 풍토는 낯설기만 할 뿐이다.


요즘 학생들의 상식으로 통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읽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포스트니체주의자인 이들은 아예 ‘본다는 것’을 제쳐두고 철학에 대해 생각하는 듯이 여겨졌다. 이들의 저서는 그 의미가 대단히 불확실한 용어들로 가득 차 있어서 명확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했는데,  어쨌든 이들은 철학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책에서 ‘본다는 것’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논외로 하고 있다. 이들은 철학이 개념을 창조하는 기술이라고 주장하면서 관조, 반성, 소통은 철학의 본령이 아니라고 말한다.
- 210쪽


그리고 씁쓰리한 현실 인식...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바뀌었다. 불의에 항거했던 민주주의의 투사들이 정권의 주역이 되었다. 80년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민주투사 치고 국회의원이 되지 않은 자가 있다면 팔불출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되었다. 더 이상 독재정권은 없으며, 매판 재벌도 없다. 그리고 옛 투사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대학생들의 얼굴을 보면 80년대 대학생들의 얼굴에 드리워있던 그늘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다.
- 151쪽



과감하게 추천하는 서평집이다. 다소 딱딱할 수도 있고 그간 읽어왔던 책들과는 다르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학문과 문학은 우리 일상의 삶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 유행하는 학문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아직도 유행하는 책을 읽고 작품이나 일상을 분석하는 글을 쓰는 이들을 보면서 내가 그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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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기억 - 8점
안치운 지음/을유문화사



안치운의 연극과 기억’(을유문화사, 2007)을 읽었다. 그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여러 지면에 쓴 연극평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 여간 읽기 불편한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문제다. 텍스트와 무대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심연을 가로질러가 무대를 집어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글은 살아남기 위한 표현이되 노력이다. 비평가의 글은 살아남기 위한 열정의 소산이 아니던가. 공연을 재현하는 비평은 공연의 표현이다. 삶이 삶의 표현이듯이. 비평 없이도 연극은 가능하지만, 연극 없이 비평은 불가능하다. 연극을 가능하게 하는 비평이야말로 비평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평의 꿈이다. 그렇지만 비평이란 글은 결코 연극의 얼굴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있다. 다만 비평이 무용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서문' 중에서)



하지만 안치운의 글은 너무 문학적이다. 마치 연극 무대를 벗어나,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사유하는 듯하다. 글이 사라지는 시대에, 이런 산문은 낯설다. 연극이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난 지금, 그런 연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은 더욱 더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는 기묘한 슬픔으로 채워진다.
 

뮤지컬 공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에 연극은 혼란스럽다. 혼란은 근원적인 것이다. 연극하는 이가 줄어드는 반면 뮤지컬을 하고자 하는 배우들은 늘어난다. 빨리 먹고 빨리 자리를 드는 패스트푸드가 점차 많아지는 것처럼, 우리들이 길거리에서 잡아타는 택시들이 대부분 중형 택시인 것처럼, 뮤지컬은 관객을 태우고 쏜살같이 앞으로 내뺀다. 반면에 연극은 땀 흘리며, 천천히, 헉헉 숨 가쁘게, 절룩거리며 그 뒤를 따라간다. 속도가 잃고 간 것들, 예컨대 과거의 반추, 현재의 반영, 미래의 기다림을 주우면서 간다. (21쪽)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의 층이 얇아지고, 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의 층이 얇아질 수록, 진지한 사유로 매체를 바라보고 풍부한 향기의 산문를 쓰는 이의 존재는 불행하다. 안치운이 그렇다.

두꺼운 이 책을 연극하는 몇 명에게 선물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질 못했다. 무릇 이 시대에 진지함이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진지한 사랑마저도 외면당하고 버림받는데, 무엇 하나 살아남는 것이 있을까.

이 책의 독서는 즐겁지 않았고 도리어 쓸쓸해지고 무안한 기분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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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방법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노영희.명진숙 옮김/소화


하루 종일 밖을 떠돌다, 겨우 들어온 집은 아늑함을 가지지 못했다. 너무 거칠어, 마치 여기저기 각을 세운 채 모래먼지로 무너지는 사막 같았다. 어느새 내 작은 전세 집은 지친 몸과 마음을 뉘일 공간이 아니라, 또다른 전쟁터였고 내 마음은 새로운 전투에 임해야만 했다. 결국 도망치듯 책으로 달아났지만, ... ...

간단하게 서평을 올리고자 몇 달 전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려 했다. 몇 달 전에도 힘겹게 읽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의 방법'. 그러나 그 때의 기억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오에의, 이 오래된 책은 낯설고 또 힘겨웠다. 내 요즘의 일상처럼.

한때 소설 쓰기를 배웠고 소설가가 된 선후배가 즐비한 지금. 심지어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들 중 2명이 나와 함께 대학을 다녔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어떤 소설들은 너무 먼 곳, 까마득히 아득한 저 어둠 속에 있어, 동년배들의 소설 읽기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늘 도전하게 되는 건 위대한 이야기꾼들. 하지만 소설쓰기를 배우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위대한 소설가들에게서 느끼는 절망은 이루 설명할 길이 없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 중 한 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풍경이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지는 나에게,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소설의 무인도와도 같다고 할까. 그의 소설들은 지극히 일본적인 산문 전통 위에 있으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해 나간다. 마치 놀라운 마법과도 같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 지역성이 두드러져 낯설지만, 그가 마주하며 싸우는 것은 인간과 세계, 인간과 시간(역사), 그리고 우연히 고통스러운 삶과 싸우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지역성을 너머 보편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내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지하철에서 소설책을 읽는 몇 되지 않는 독자들이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들고 있는, ... ... 그러기에는 우리 시대 문학 독자의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 형편없다. 심지어 문학을 평하고 논하는 평론가들의 수준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정체 모를 안개로 왕창 내려앉아 버렸다. 하긴 위대한 문학과 싸운 경험이 있어야 평론가들의 수준도 올라갈 텐데, 한국에 언제 위대한 문학이 있었던가.

이 책은 체계적인 구조를 지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 쓰기에 한 번쯤 도전해본 이라면 이 작은 책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리 시대에 소설 쓰기가 어떠한 과정과 태도로 이루어지는가를 오에 겐자부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스토리 만들기에만 몰두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스토리 너머 존재하는 표현(문체), 상상력, 이미지, 리얼리즘, 태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쓰기를 배운 이들에게조차 이 책은 딱딱하고 재미없고 지루하며 쓸데없는 내용만 가득하다고 여기게 할 지 모르겠다. 그만큼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국내 저자가 쓴 소설 작법 관련 책들 중에 이 정도 수준이 되는 책이 있기나 할까.  

진짜 문학, 진짜 소설을 꿈꾼다면, 대학 교수나 문학평론가(이론가)가 쓴 형편없는 이론서가 아니라 소설가가 쓴 이런 에세이가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 책을 집어들고 재미없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여긴다면, 이 책의 저자 오에 겐자부로나 나를 탓하지 말고 자신을 탓하길.


무엇보다도 저는 무엇을 쓰는가는 새로운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쓰는가에 관한 방법을 나타내는 식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작가가 무엇을 쓰는가의 문제까지 간섭하고 또 지도하는 것은 비문학적인 월권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젊은 독에게 이 책을 다시 보이면서 제가 제시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그 독자가 자신의 독자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대답해 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쓰는가"와 "무엇을 쓰는가"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매듭짓는가? 또 전자가 후자를 만드는가 하면, 후자가 전자를 결정하는 일도 있는, 이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를 오랫동안 계속해 온 인간으로서, 이 몽상의 신선한 의미를 의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993년 3월 1일, 오에 겐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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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 10점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정우사



부영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1984. (민음사 이데아 총서 중 한 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98쪽)



그들은 계절풍 속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혹은 그녀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어떤 행동을,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그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혹은 계절풍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가던 서사(narrative)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 ‘놓침의 독서’는 나의 기억 속에 몇 개의 이름만을, 몇 명의 존재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 그녀, 그, 그녀, 그, 그, ......

그와 그 사이, 그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아이를 밴 몸으로 계절풍 속을 떠돌다 캘커타 속으로 들어온 한 걸인 소녀의 배고픔과 몇 명의 백인 남자들 사이에 서있는 안 마리 스테레뗴르의 공허 사이. 하나의 공간 속을 떠도는, 멀리 떨어진 존재들, 그 존재들의 영혼 깊숙한 곳, 그 곳까지 계절풍은 불고.



** 뒤라스의 문장은 독특하다. 그래서 그녀의 동시대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 누보로망의 작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작가이다. <<부영사>>는 그녀의 영화 <<인디안 송>>의 원작 소설이며, 그녀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뒤라스의 소설들이 다 그렇듯이 흥미진진한 물결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염두에 두길.

*** 위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적은 리뷰다. 오늘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떠올라, 오래된 자료들 사이에서 이 리뷰를 찾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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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민연우맘 2009.11.20 12:39 신고

    며칠째 부영사.
    부지런한 포스팅으로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주던 주인장 어디갔나.
    아, 짜증으로 점철된 일주일이로다.
    나, 사업한다~ 여러가지로 골 아프네.
    태생이 게으른데 신경쓰면서 돌아다니면서 할 일이 왜 이리 많은고.

    • 이제 좀 신경써서 포스팅해볼까하고. 딴 이들은 블로그에 올린 글(?)로 책까지 내던데, 나도 제대로 써서 책을.. 흐흠.. 그것보다는, 하도 "지하련씨, 예전 당신 글 좋았는데, 요즘은 엉망이야, 왜 그래?"라는 소리를 최근 들어서 너무 자주 들어, 좀 포스팅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초고만 쓰고 올리지 못하는 글들이 꽤 있네. 크크. 기대하삼~.
      그리고 사업한다고? 사업하지 마삼. 천칭자리는 우유부단하고 느려서 사업에는 별로이네. 그런데 어떤 사업을 하길래? 여튼 돈 많이 벌어, 소원 성취. ; )

  • 지나가는사람 2011.05.28 14:15 신고

    리뷰가 참 슬프네요 ㅠ_ㅠ

    • 뒤라스의 소설을 읽는 이가 드문 요즘, 20세기 후반 프랑스 소설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겼지만, 이젠 잊혀져 가고 있는 것같아요.~ 그래서 더 슬플 지도 모르겠어요. ... 뒤라스, 정말 좋은 소설가예요.

 

소설가의 각오 - 8점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문학동네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지음), 김난주(옮김), 문학동네 




소설가 중에 그럴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나 그렇다고 믿고 있는 자는 많아도, 세상에 있는 많은 불행을 혼자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큰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딱히 없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은 소설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또 소설가가 책을 선전하는 이외의 목적으로 자기 작품 앞으로 나설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아니면 단호하게 소설가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36쪽)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207쪽)


내가 이 오래된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된 이유는, 어느 잡지를 보다가 '하루키와 달리기'에 대한 짧은 글을 읽고 흥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한다. 하지만 하루키를 대단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찌 되었건, 하루키 팬으로 보이는 글쓴이가 마치 달리기를 소설의 원천 쯤으로 파악하는 것에 기분이 다소 상했던 터에, 마루야마 겐지의 달리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 터전을 잡고 사는 마루야마 겐지, 그는 시골길을 자신의 셰퍼드와 함께 달렸다. 소설 쓰기란 육체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믿는 그. 그런데 내 기억에 남아있었던, 땀에 젖은 옷을 입은 겐지의 모습은 '소설가의 각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을 다시 읽었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었던 그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새삼 내 나이를 떠오르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재에 틀어박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런 생활에서 나오는 특징은 가식적이고 평면적인 것에 불과할 테니 그런 소설가는 한 명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술집이니 서재니 출판사, 때로는 골프장 등 지극히 한정된 장소를 오가면서 거의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는 주제에 그럴싸한 구실을 구질구질 늘어놓는 소설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52쪽)


이 책은 마루야마 겐지의 자전적인 수필집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한 책이다. 위선적이고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문학 세계에 대한 강력한 어퍼컷들로 이루어진 이 수필은 기분 좋은 편견들로만 가득차 있다. '여자와 게이에게 인기 있는 순간 끝'이라고 말하는 그는, 소설은 진지해야 하고 새로워야 하며 치열한 전투와도 같아야 된다고 믿는다. 

그의 소설 스타일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소 놀랍긴 하지만, 이런 소설가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센다이 시에 살 때 친구의 하숙방 옆방에 모인 T대학 문학 동아리가 갑론을박 격론을 펼치는 것을 벽 너머로 들은 일이 있다. 욕지기가 올라올 듯한 말싸움이었다. 놈들을 한 명씩 세워놓고 뺨따귀를 내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하필이면 소설을 쓰다니.(178쪽)


마루야마 겐지는 애초 소설을 쓸 계획이 없었다. 직장인이었으며, '소설쓰기는 건장한 청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틈틈히 쓴 첫 소설이 문학 잡지의 신인상을 받았고 그리고 그 소설이 아쿠타카와 상을 받게 된 것이다. 이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소설가가 되었다. 심지어 '어디서 베낀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들었던 마루야마 겐지.

파격적인 발언들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읽지 않아도 대강 내용이 나오는 하루키의 신작 소설보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이 수필집을 감히 추천하는 바이다.

10년 전에 나온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아직 내가 소설을 쓰지 않으며(못하며), 소설가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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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에 대한 생각:  아마 뭔가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곧장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는 소설가가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만한 소설가도 없을 것이다. 솔직히 ‘해변의 카프카’만큼 실망한 소설도 없었다. 차라리 그의 초기 소설들은 재미있고 솔직하며 적당한 자신만만함으로 뻔한 허위와 기만에 빠질 수 있었다. 소설가 하루키의 치명적인 약점은 진지하게 이 세상에 대해서 성찰하려고 할 때 나타난다. 그는 애초부터 ‘여러 가지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여러 가지와 나 사이에 확실한 거리를 두고’(<상실의 시대>) 있었는데, 나이 들어 마치 그가 속해 있었던 외부 세계(현실)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려는 모습은 황당하다. 그런데 ‘틀림없이 레미콘처럼 튼튼한 위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혹은 ‘소화제를 대량 복용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전문적인 평론가’들의 격찬이 역시나 이 세상은 깊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http://intempus.tistory.com/135 (오래 전에 쓴 짧은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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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2010.05.17 04:54 신고

    검색하다가 우연히 이곳에 들어오게 되어 포스팅 읽기에 빠져 있는 중입니다.^^
    즐겨찾기해서 계속 봐야지 하면서도 댓글은 못달고 있었는데
    (댓글 달기에 인색해서가 아니라 제가 워낙 소심한 눈팅족이라서요..;;)
    하루키에 대한 생각을 덧붙이신 걸 읽고 웃음이 터져서 결국 엄두를 내었습니다.
    하루키에 대해 제가 하고 싶던 말을 너무 잘 정리해주셔서요.ㅎㅎ
    앞으로도 자주 들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하루키를 좋아했는데, 너무 격찬하는 '레미콘처럼 튼튼한 위장을 가진' 필자들과 다른 소설을 찾아 읽지도 않고 마치 패션 악세사리처럼 하루키 책을 들고 다니는 독자들 탓에 (문학판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지만) 하루키가 싫어지고 있습니다. ^^;


해석에 반대한다 - 8점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이후



수잔 손택을 알게 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을 통해서였다. 가라타니 고진은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인용하면서 근대 일본 문학을 이야기했다. 아마 내가 문학 이론서를 읽으면서, 최초로 감탄했던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의 책이 아니라.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의 책을 종종 읽지만,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나, 작품의 결을 파악해 나가는 방식이나, 작품과는 무관하게 서술되거나 인용되는 이론들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긴 수작으로 평가받은 고진의 책이나 수잔 손택의 이 책과 비교해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젊은 날의 수잔 손택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이 책에는 젊다는 것이 가진 거친 유쾌함, 거친 통찰력, 날카로움으로 가득차 있다. 문학, 영화, 연극을 종횡무진 오가는 그녀의 시선과 거침없는 분석은 즐거운 독서 경험을 안겨준다. (인)문학 전공자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특히 프랑스 문학 예술에 대한 손탁의 관심은 매우 높아서, 셀린느의 소설이나 고다르, 브레송, 레네에 대한 영화에 대한 글,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언급은 매우 흥미로웠다. 


예술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예술 자체로 경험해야한다. 투명성 transparency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이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혁명이었다. 또 한때는 예술작품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한다.도시의 공기를 더럽히는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처럼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 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추상미술은 일상적 의미에서 아무런 내용도 담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내용이 없으니 해석도 있을 수 없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 10점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민음사
가라타니 고진의 이 책은 필독서이다. 문학 평론이란 어때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책이다. (그런데 절판되었다고 한다. 다소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지만, 그만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나 문학 평론에 대한 관심이 낮아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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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화 - 8점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궁리


세계는 앞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해 있는 것일까? 혹은 뒤로 가는 것일까? 아마 사람들은 앞으로 간다고 믿고 싶겠지만, 실은 '앞으로 간다'라는 진보(혹은 진화)의 개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명확하게 떠오른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는 것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후였다. 이 점에서 소설 '강철군화'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군의 사람들에 대해 적고 있다. 

언젠가 평화로운 시위대를 폭도로 만드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방법인 즉슨, 시위대 속의, 눈에 잘 띄는 젊은 여자(이쁘고 연약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좋다)에게 아주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폭력을 가하면 된다. 그러면 그 젊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위대 속 남자들이 일어날 것이고 나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최초의 폭력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며, 폭도로 변한 시위대만 찍어 다음날 뉴스에 보도하면 된다. 

실은 현실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일은 비일비재하다. 선량한 척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욕망을 감춘 사람들이 득세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소설은 짧고 굵으며 강렬하다. 오직 한 방향을 향해서만 가는 이 소설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까지 소유한 프로퍼갠다다. 그래서 소설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고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왕왕 문학적 완성도나 미학적 구조는 무시된다. 무시된다기 보다는 소설 구성의 요소들 중에서 전통적으로 중요시되던 요소들이 뒤로 밀리고, 정치적 메시지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우리 세계의 일부만 반영할 뿐이다. 아직까지 이 소설이 호소력을 갖는다면, 여전히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밑바닥 인생의 참혹함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이다. 소설에서처럼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며, 실제 현실 세계는 누가 노동자인지, 지배계급인지 알지 못하는 회색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소설은 순진한(직접적 폭력의) 자본주의 시대에 씌여진 순수한 소설이라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안개 낀 대기와도 같아서,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20세기 초반에는 잭 런던의 '강철군화'가 있었다면, 21세기 초반에는 과연 어떤 소설이 있을 수 있을까? 

소설을 읽어나가는 내내 불편했던 것은 프로퍼갠다 문학이 아직까지 읽혀져야 하는 당위성이 우리 시대에도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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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랑 비슷하게 이 책에서 '순진함'을 엿보셨네요~
    처음엔 그 '순진함'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읽었지만, 곧 그 '순진함'이 그립더라구요. 그것이 '프로퍼갠더 문학이 아직도 읽혀져야 하는 당위성' 때문일까요? ^^
    글 잘 읽고 갑니다. 부끄러운 제 글도 엮고 갑니다.

    • 순진했기 때문에 앞만 향해갈 열정, 신념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 ) 동시에 우리 시대에 어울릴 만한 순진함(이 표현이 적당한지 잘 모르겠지만)을 찾아서 잃어버리고 있는 열정이나 신념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

  • 2009.05.07 13:43

    비밀댓글입니다

  • 2009.05.07 14:07

    비밀댓글입니다

  • 2009.05.07 14:15

    비밀댓글입니다

  • 그러네요..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현안들이 산재해 있는데..순수한 시각으로 바로보았던 그의 저서에..완전히 공감하기엔 뭔가 부족했던것 같네요

    •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세계가 크게 다가왔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때 바라보던 세상과 지금 바라보는 세상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깐요. 하지만 '강철군화'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지금 세상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니... 결국엔 참 아픈 소설이었다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기 때문에 집 창문을 여는 때는 주말 아침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며칠 전 문득 창을 열었다. 하얀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 정말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뚫고 약 2 킬로미터 정도 되던 학교까지 걸어갔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로 유명한 자유로를 달렸던 것도 기억한다.

안개는 공포와 두려움과 함께, 우리 마음 속 깊이 이 세상으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건들과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어떤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실은 안개 너머 어떤 신비의 유토피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김포공항에서 삼성동까지 가는 도심공항행 리무진 버스에는 안개로 인해 결항된 비행기 탓에, 승객은 나 혼자였다. 버스가 동쪽으로 갈 수록 안개는 옅어졌고 서울의 도심은 안개와 무관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서가 어딘가 있을, 낡고 오래된 기형도의 시집을 꺼낼 용기도, 시간도 나에겐 없다. 나에게 어떤 종류의 사랑은 너무 거추장스럽고 견디기 힘든 마음의 청동 장식처럼 변해버린 것일까.

토요일 늦은 오후, 사무실에서 기형도의 안개를 소리내어 읽는다. 참 슬프다.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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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오니, 어느새 자정이 지나있다. 지하철 안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크를 읽었다. 세계는 지금 미국식 경제 정책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로 고심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지금 어떻게 하면 (레이건 이후 부시까지 이어진) 미국식 경제 정책들을 잘 도입할 수 있을까 고심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긴 르몽드 디플로마크라고 하면, 소위 말하는 '좌빨' 저널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으니(내가 읽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지만). 

지난 주 토요일에는 약 일곱 개 정도의 전시를 챙겨보았다. 약간 불편한 동선이었고 두 개의 약속이 있었던 터라,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몸이 피곤한 만큼 영혼은 꽤 풍요로웠다. (보았던 전시들의 리뷰를 적을 생각인데, 과연 언제 다 적을 수 있을련지~)

일요일에는 아침 8시에 일어나 약간의 청소를 하고 11시까지 한강변을 달렸다. 오래되고 낡은 운동화에, 내 거추장스럽게 늙은 육체가 다서 걸리적 거리긴 했지만, 내 견디기 힘든 쓸쓸함을 조금 잊게 해주었다.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할 생각이다. 그러니까 토요일엔 갤러리들을 돌아다니고, 일요일엔 달리기, 또는 등산을 하면 어떨까 싶다. 올해 10Km를 1시간에 들어오는 것으로 목표를 잡아야겠다.)


오늘은 밤 늦게까지 일을 했고, 몸은 피곤하고 머리는 아프고 마음은 슬프다. 월요일에는 반드시 운동을 하기로 했는데, 결국 운동을 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시인 김사인 선생이 오랜 수배 생활을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학과에서 몇 시간짜리 특별 강연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가 읽어준 시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지난 주에 만났다. 그의 앞에는 이창동 감독이 앉아 있었다. 80년대 잘 나가던 소설가였는데, 지금은 영화감독이 되어 있었다. 김사인 선생의 시집 한 권과 이창동 감독의 소설책 한 권을 올 봄이 가기 전에 다시 읽을 생각이다. 그러면서, 지금은 소설을 쓰지 않는 형의 소설집도 같이 읽어야겠다. 문학, 참 오래만에 들어보는 그리운 이름이었다.


映山紅(영산홍)


              서정주(徐廷柱)



영산홍 꽃잎에는
山(산)이 어리고.

山(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小室宅(소실댁).

小室宅(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산)너머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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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2.03 17:31

    비밀댓글입니다

    •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피해'라는 표현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클림트 전시는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전시이며, 상당한 수준의 보험료도 있기 때문에 좀 비싸게 책정한 보입니다.

  • 2009.02.04 19:42

    비밀댓글입니다

캐비닛 - 6점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캐비닛>>, 김언수(지음), 문학동네, 2006


쉽게, 아주 짧은 시간에, 힘을 거의 들이지 않고 다 읽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히고 종종 흥미 있는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신기하고 낯선 스토리였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스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단지 이러한 스토리로 소설을 쓸 생각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확실히 나라면, 이런 소설을 쓰지도, 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책 뒤에 실린 심사평의 일부는 동의할 수 있었고 일부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의 높은 평가과 찬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평가들이 많았고, (심각하게)스스로 내가 이상한 독자나 평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특별하거나 흥미진진한 인과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병렬적으로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라는 것이, 카프카의 여러 소설에서처럼 현대 세계의 불길하고 암울한 슬픈 모습의 반영이나 은유라기 보다는 그저 신기한 이야기 수준에서 멈추어 있었다. 한 번 진지하게 따져보자. 일요일 오전 MBC에서 방영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신기함의 수준에서? 정보 전달 방식의 차이에서?

나의 평가를 너무 야박하게 여길 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다음, <<캐비닛>>은 속이 텅 빈 채로, 낯선 별나라에서 수입된 과자 포장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구에 사는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별나라에서 수입되었다는 이유로 주목은 받았지만, 포장지를 벗겨내면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소설을 다 읽은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분명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이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정적 여운도, 감정적 흔들림도 남기지 않는다. 진지한 세계나 질문은 거세되어 있으며, 현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너무 보수적이고 심각한 독자이다. 나는 현대 소설이야 말로, 위대한 서사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이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고 가치있는 발언을 계속 해야 된다고 믿는 골치 아픈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고 찬사를 거듭한 평자들의 눈에 나같은 독자는 당장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테마들로 가득 찬 도서관 서가 구석으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치부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왜, 어떤 이유로, 소설의 진정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소설이 가진 힘에 대해서 논하는 소설가나 평론가들이 사라져 가는 것일까? 무엇이 포스트모던 사상가로 분류되는 가라타니 고진으로 하여금,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르트르의 낡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꺼내들게 만드는 것일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 독서 행위는 이제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나 한국의 조폭 코메디 영화를 보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며, 이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은 이런 영화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영화(또는 TV 드라마)와의 거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옆에서 평론가들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느라 정신 없다.

꼭 'PC방 Vs. 비디오대여점'을 보는 것 같다. PC방의 성공으로,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듯이, 영화나 TV 드라마로 인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사라진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그래서 소설은 영화나 TV 드라마보다 나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소설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소설의 가치와 위상을 절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영화, 또는 TV 드라마와는 전적으로 다른 장르이며, 매체다. 소설가라면, 절대로 영화화, TV 드라마화, 심지어는 희곡으로도 만들 수 없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소설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해야 되지 않을까.

결국 나는 너무 보수적이거나 심각한 독자이거나, 또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친 무명의 평자일 것이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불행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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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ink-lotus 2008.02.12 13:52 신고

    책에 대한 소개보다는 요즘 글에 관한 글에 깊이 공감하고 갑니다.
    맛있는 글읽기가 사라지는 건 정말 불만이예요.
    영화나 드라마가 보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읽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 소설을 쓰는 것을 수입의 원천으로 삶고자 하는 모든 소설가들에게 불행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진지함' 자체가 사라져가는 사회니까요. 소설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소설을 써야한다는 말씀에 깊이 동감하고 갑니다.

  • 미 섭 2008.08.04 17:34 신고

    (어쩌다 다시 이 공간에 들어왓군요..
    파아란 영혼이란 문구가 어쩐지 낯익다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기대 되어]
    그만 실수를 ...)

    '여러 의미에서 나보다 아래에 속한' 사람이니 선의의 호의를 드립니다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는
    골방에서( 자기자신만의 물리적 공간성) 자판치는 것의 부작용은
    사실 크게 해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얼굴 마주보지 않는 물리적 공간으로의 골방의 익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주체적 본질체의 열린 마음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 혹은 내가 아직 모르는 다른 진실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스스로 존중의 마음을 품고 있느냐의 여부 입니다

    파아란 영혼...
    열린/ 드러난/ 실체성으로의 우주적 색체에 대한 개인적 뉘앙스이기에.

    물론
    우주는 드러난 실체성 이외의
    그 드러난 실체성이 유지(드러날 수 있도록)될 수 있도록, 가능하도록 하는
    드러나지 않은 존재성을 갖고 잇을 것이고
    결국 우리 관용의 범주라는 것조차도
    미비하고 지엽적이고 편협한 것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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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 살라메아 시장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지음), 김선욱(옮김), 책세상


인생은 꿈, 삶은 한 편의 연극, 우리들은 태어날 때 각자 배역 하나를 맡고 죽을 때까지 성심성의껏 연기한 후 죽는다. 죽은 후 얼마나 잘 연기를 수행했는가에 따라 천당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맡은 바 배역을 제대로 연기해야만 할 것이다. 17세기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이 생각은 바로크 특유의 허무적 미학을 만든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이러한 허무적 미학을 종교적인 메시지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러한 연극을 ‘성찬신비극’이라고 한다. 이 연극 형식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성찬에 대한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죽기 전날 밤, 예루살렘에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갖는다. 이 때 그리스도는 빵을 주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라고 하며, 포도주를 주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린 피니라’, ‘너희는 이 예를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성찬(聖餐, eucharistia)은 이 때의 빵과 포도주를 의미하며 초대교회에서는 이 명령에 따라 빵을 떼어 나누는 의식을 행하였으며, 그 후 이것이 미사성제라는 형태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의식은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 그리스도가 행한 속죄의식 속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찬신비극은 성찬식의 의미를 연극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알려주고 그것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속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도록 하는 종교극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던 성찬신비극은 교회 밖으로 나오게 되며 대중적 취향의 서정성을 받아들인 극적 감동으로, 이성으로는 절대로 감지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신성한 신학의 문제를 무대로 옮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바로크 특유의 허무적 미학 위에 종교적 가르침을 덧씌워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몇 백 년이 지난 뒤, 발칙한 모더니스트인 내가 읽기에 매혹적인 부분은 종교적 가르침보다는 바로크 특유의 허무적 미학이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종교적 가르침은 그 시대의 한계 속에서 작가가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살라메아 시장’은 코메디아(comedia)극이다. 이 극은 17세기 스페인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희극과 비극의 경계가 사라진 장편연극들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이 연극은 유럽의 근대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국왕, 귀족 또는 군인, 시민으로 대변되는 세 계급이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시민의 명예와 정의가 승리하게 된다는 근대적 가치관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연극은 끝난다.



세상이라는거대한연극살라메아시장

페드로칼데론데라바르카저 | 김선욱역 | 책세상 | 2004.08.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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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지음), 정덕애(옮김), 솔, 1996년


문학비평가들이 쓴 문학에세이들 대부분이 그들이 가진 편협한 이론적 시야에 갇혀 일방적인 해석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하고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은 반면, 작가들이 쓰는 에세이는 적어도 작품이나 작가를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때로 더 뛰어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산문집 또한 그러하다. 19세기, 20세기 영국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도 그녀의 문장은 독자를 배려하며 독자의 눈길 앞에 순결한 그 하얀 살결을 드러내며 초봄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위장(僞裝)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공손함이 너무나 필수적이기 때문에 전통과 의식을 던져 버리고 마음에 맞는 한두 사람과 ‘가벼운 말’로 대화하는 것은 더운 방의 한 줄기 공기처럼 필수적이다.
- 25쪽


수 차례의 정신병 경력이 있고 빈번한 자살 시도, 그리고 끝내 자신의 생을 자살로 끝냈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글은 감미롭고 때로 냉정하며 격정적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버리지 않는다. 아니면 그녀 스스로 이러한 에세이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그녀의 소설을 꺼내보아야겠다. 세월. 버지니아 울프. 열린 창으로 봄 바람이 들어와 반대편 베란다 창으로 나간다. 그렇게 봄은 지나가고 아직도 영국의 우즈 강은 이승에서의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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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지음), <<내 마음의 무늬>>, 황금부엉이, 초판3쇄



산문집을 출판한 뒤, 보름 만에 3쇄를 찍은 이 산문집을 보면서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게 꼭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도리어 읽을 책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신뢰할 만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휙 돌고 나오고 나온다. 일간지에 실린 광고 생각부터 오정희가 가지는 개인브랜드까지.

얼마 전 어느 신문 기사에 한국 문단은 정부가 먹여 살린다는 짤막한 시평이 실렸다. 소설 써서 정부 지원금 받고 재단 지원금 받고 하면 연봉이 한 이 천 만원 정도 된다는 웃지 못할 글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진짜 밥벌이용 소설인 셈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출판해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원금 신청에 사용하고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도,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안목도 없고.

그러니 광고나 대문장만한 리뷰를 보고 책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정희의 산문집 서평 서두부터 시답잖은 문장으로 시작한 것이 그리 유쾌하진 못하겠지만, 나로선 오정희의 산문집이 나오고 난 뒤, 여기저기에서 들려준 격찬은 다소 어색하고 조금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이 산문집의 시작은 ‘무척’ 좋다. 꼭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긴장감은 떨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엮기 위해 억지로 붙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편집자의 몇 마디 글은 ‘나는 오정희의 열성팬이예요’라고 광고하는 듯 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이렇게 글 쓰는 사람이 없나 하는.

그리고 이 생각은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기싱의 고백>>(효형출판)을 떠올리면서 더 심해졌다. 무릇 산문집이라면 조지 기싱의 책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아니면 미셸 투르니에나.

오정희의 산문집도 꽤 좋은 책이다. 무리 없이 읽히고 간간히 그녀만이 우리에게 선사해줄 수 있는 문장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평범한 수준의 산문집이며 도리어 오정희라는 이름과 견준다면 다소 실망스러운 산문집이다.

혹시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이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내 마음의 무늬 - 6점
오정희 지음/황금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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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 수업이다. 5월. 1층 강의실 옆 잔디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대낮부터 막걸리와 소주를 펼쳐놓고 술을 마시고 있다. 의례 술잔 옆에는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이 나뒹굴고.

강의를 하러 들어온 교수는, 출석을 부르다 말고 고개를 돌려 창 밖으로 술판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 틈에서 이 수업을 들어와야할 학생들이 있음을 발견하곤 한심한 눈으로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쳐다본다.

이 좋은 봄날에 자네들은 강의실에서 뭐하는 짓인가. 자네들은 시를 쓸 수 없겠구만.

하곤 2시간 강의를 꼬박 채우고 창 밖 학생들의 술자리로 간다. 강의실에 앉아 있던 몇 명의 학생들도 투덜대면서 술자리로 간다. 그렇게 어느 대학 봄날 오후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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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대학 2학년 때, 군대 가기 전 낮술이 정말 좋았는데. 특히 4월, 5월. 잔디밭에 앉아 술판 벌려서 지나가는 선배며 후배며 불러서 술 먹일 때, 지나가는 교수나 강사 불러서 술 먹일 때, 술값 떨어지면 다시 지나가는 선배며 후배며 불러 세워서 술값 내놓고 가라고 할 때, 지나가는 교수나 강사 불러서 술 사주고 가라고 할 때,  ... ... 앗. 이거 완전 대학 때 날라리였다는 사실이.. 헐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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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페터 풍케 지음, 한미희 옮김, 한길사



도덕적인 책이라든가 부도덕한 책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 잘 썼거나 잘못 쓴 책이 있을 뿐이다. 그뿐이다.

삶은 예술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동시에 유일한 제자이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기보다는 삶이 예술을 훨씬 더 많이 모방한다.

자연이 그토록 불완전한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비극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나는 나의 천재를 인생에 사용했으며, 작품에는 재능만을 사용했답니다.

*****

오스카 와일드가 여기저기 남긴 몇 마디의 문장은 심미주의(유미주의)의 분명한 정의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로코코의 대가, 와또나 초기 모차르트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것이며 19세기 말 상징주의나 아르누보의 대가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와일드의 생애는 심미주의적이지 않았다. 세계적인 전기 시리즈의 한 권인 이 책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던 한 독자에게 이렇다할 감동을 전해주지 않았다. 심미주의자이며 댄디의 시조였던 와일드의 인생은 추측했던 것보다 밋밋하고 열정적이지 못한 듯이 느껴진다.

실제 오스카 와일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선 러스킨과 페이터의 세계와 19세기 말 영국 사회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이 섬나라와 대륙 간의 차이, 그리고 대륙에서 불고 있는 예술의 새로운 회의주의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시대를 나비처럼 스쳐지나가는 오스카 와일드의 여러 몸짓들을 살펴볼 때 오스카 와일드에 대해 보다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느꼈던 오스카 와일드의 기만성이 사라질 수 있을까. 심미주의란, 거짓된 세계를 버리고 진실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근대의 예술 양식에서는 혼자만의 공간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나아 울프, 혹은 세잔이나 고흐처럼. 그리고 말러처럼 인생 전반을 생에 대한 우울로 물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와일드의 세계는 심미주의가 아니다. 그는 전형적인 댄디이긴 하지만, 예술사에서 언급되는 그런 심미주의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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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내 마음 - 10점
샤를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해서만 굴러간다./-모든 이가 의견 일치를 하는 것은 바로 보편적 오해에 의한 것이다./-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면 불행하게도 결코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보들레르를 읽는 것일까. 참혹하고 끔찍하며 슬픔에도 불구하고 왜 보들레르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보들레르를 이해하고 감동받는 이라면 분명 그는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나는 살아간다는 것,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히 말해 살아가면서 보들레르를 읽는 것 말이다. 보들레르의 유려한 독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긴 이런 질문보다 먼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보들레르의 이 산문집은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에게도 권하지 않고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은 이 책을 읽고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아니면 쓰레기같은 동경을 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들은 보들레르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내려갈 때의 고통이나 번민,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은 누가 읽어야하는 것일까.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마음먹은 사내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즉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할 것이다.

자고로 책은 먼저 쓸모가 있어야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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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울력.





‘지난 시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 1891년의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봄의 깨어남 Fruhlings Erwachen>, 에밀 슈트라우스 Emil Strauß의 <친구 하인 Freund Hein>(1902),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소설들과 함께 무질의 이 소설 또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1)

하지만 나이가 너무 든 탓일까. 아니면 그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가 틀리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바지니, 이렇게 네 명의 소년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학교 모험담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쉽게 말해 나이를 어떻게 먹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까 연약한 친구에게 행사하는 폭력, 비난, 따돌림, 성적 수치 등등을 통해 우리의 퇴를레스는 혼란을 거치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지? 한 편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한 편으로는 모든 걸 다 아는 척 해대는 이 소설은 현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리석음의 한 쪽 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근대 교양주의가 현대 소설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읽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번역된 무질의 다른 소설, <<세 여인>>(문학과지성사)은 언제나 추천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젊은 소설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뜻 모를 단어와 문장으로 설교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지극히 나쁜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

진지하고 슬픈 퇴를레스는 이미 없고 영혼의 성장이라는 테마는 현대에서는 오래된 유물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늙은 채로 태어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에 얼마나 더욱 잘 적응하는가의 다른 말일 뿐이다.



(1) http://hesse-library.mokwon.ac.kr/archiv/HeFo6-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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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이야트 - 10점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지음/민음사





The Rubaiyat of Omar Khayyam
E. Pitzgerald.
이상옥 옮김, 민음사 세계시인선 12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 63편




19세기에 번역된 11세기, 또는 12세기 아랍의 시집. 그러고 보면 거의 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옛날, 같은 하늘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법한 곳의 시인의 시집이 후에 유럽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감동이나 열광을 생각을 해보면, 이 세계가 아무리 많이 변했다고들 하나, 이 인생들의 본질적인 영역의 변화는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들이 옛 것과 비교해 가치 있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현대인들의 대부분이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믿는 이유는, 적어도 학교에서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고작 몇 백년 밖에 되지 않은 서양 근대의 산물이며 그렇게 생각해야만 명석 판명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지옥이나 천국이 없다고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논증불가능하기 때문에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 어찌 알겠는가.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을지.

하지만 지옥이 있든 천국이 있든, 11세기 아랍 사람이나 21세기 동아시아사람이나 한결같이 인생은 덧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 96편 



인생은 참 덧없다. 청춘은 한순간이고 시간이 지나고 얼굴의 주름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공포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생각하는 나 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슬프다. 대학 시절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던 이들은 이 도시 어느 구석진 곳에서 세상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나타나 도시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젊음의 향내는 책 속에서 잠들어있고 해마다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허무주의란 그렇게 특별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 세상이야 원래 허무했던 것이고 인생사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었고 생의 가치라든가 인생의 의미라든가 하는 것도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듯하다.

영원한 건 없고 사랑은 언제나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사라진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두고 연구논문이나 책들을 펴내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배운 것일까. 이 시집을 읽고서.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영고성쇠)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 56편 



이제 남은 건 술뿐이구나.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고 가슴 아팠던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은 맘을 놓고 즐겨야겠구나. 아, 텅 빈 주머니가 초라하게 하지만, 그런들 어떠리오.


죽음의 술잔 든 저승의 천사
강가에 앉아 있는 그대 찾아와
그대의 영혼에게 잔을 권하면
사양 말고 들이키오, 그 한잔 술을
- 43편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이 가르쳐주는 방법. 생의 허무를 긍정하고 그것을 위해 한 잔 술을 들이키는 것. 희망이니 가치니 의미니 하는,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잠시 손 끝에서 놓고 그 빈 손으로 술잔을 쥐고 춤을 추며... ...


천국이 별것인가, 욕망 충족의 환영이요
지옥이 별것인가, 어둠 속에 던져진
불붙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우리 모두
그 어둠에서 나와 다시 거기로 돌아갈 몸
- 67편 



덧없이 흘러가는 사랑을 잡으며 흘러갈 사랑을 노래하자.


남몰래 속삭이며 대답하는 술잔이여
그대 또한 한때는 살아서 마셨으리
고분고분 입맞춤을 받아주는 입술이여
얼마나 많은 입맞춤 주고 또한 받았는가.
- 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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