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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지음), 오석윤(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의 놀랍고 아름다운 시작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은 독자가 읽게 되는 첫 문장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이쿠 소설'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우호적인 것일지도.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7쪽~ 8쪽



하지만 소세키는 우리를,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는 소설 속의 '나미 氏'와 같은 이를 그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작중화자처럼 그런 여행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소설은 부러움의 대상인 셈이다. 


그래서 소설은 전쟁 중인 현실과 멀리 떨어져, 딴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자주 딴 세상을 꿈꾼다. 그건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남 몰래 연애도 하고, 사랑도 하고, 경제적 불안이나 세상사의 갈등이나 불협화음에서 벗어나, 어떤 사색의 풍요로움 속에 빠지고 싶은 게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사색의 풍요로움으로 넘쳐나며, 나미 氏의 가느다란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 소세키의 소설들 대부분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자아의 심리를 보여준다면, 이 <<풀베개>>는 그 갈등과 흔들림에서 한 발짝 옆으로 벗어나 꿈 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 끝에서 나미 氏의 이혼한 남편이 등장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규이치를 배웅해주는 장면에서, 주인공 화자가 그림 한 장면을 포착해내는 순간, 결국 예술의 창작은 꿈에서 벗어나 현실의 슬픔 속에서 나온다는 걸 이야기할 땐, 여행의 끝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비극적으로 깨닫게 된다. 



나미 씨는 우두커니 떠나가는 기차를 보내고 있다. 그녀가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애련이 얼굴 가득히 떠 있다. 

"그거야! 그거야!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나는 나미 씨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속삭였다. 내 가슴 속의 화면은, 뜻하지 않았던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 

-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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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7쪽~ 8쪽(오석윤 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소설의 첫 문장들을 이렇게 구성했을까. 나는 몇 주째 이 문장들을 지나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그네슘 부족인지 왼쪽 눈 부근 근육들이 파르르 떨리기를 반복하고, 잇몸은 수시로 붓는다. 어깨가 결리고 입안은 헐었다.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아니면, ... 


현암사에서 나오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장만하고 싶으나, 그의 소설을 읽을 시간마저 없는 이에게 전집은 사치라는 생각에 ... ... 


비 오는 대체공휴일, 사무실에 나와 일을 했다, 하지만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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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 8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인디북(인디아이)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지음), 육후연(옮김), 인디북 


- 이 소설에 대해 간단한 평을 쓰려고 인터넷서점을 검색해보았더니,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었다. 그 전집을 보고 있으니, 이젠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오에 겐자부로 소설 전집이 떠오른다. 그 때 그, 오에 전집을 다 사둘 걸,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살 생각은 없다. 이미 소세키의 소설 다수를 구입한 터라, 소세키를 읽을 때마다 사서 읽는 편이 좋을 게다. 


이 책은 소세키의 소설들 중 가장 대중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꽤 유쾌하고 작은 소극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주었던 바, 지식인의 고뇌, 현대적 삶의 쓸쓸함, 정적인 서술과 표현 속에 담긴 감정의 섬세한 포착 등은 보여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전혀 소세키스럽지 않다.  

집중해 읽으면 두 세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냥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합리적이며 억지스러운 선생들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있으나, 나는 도리어 '도쿄와 지방 사이의 차별'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러한 지역 차별에 대해서는 패트릭 스미스의 '일본의 재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독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시간 안에 나쓰메 소세키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하진 않겠다. 




*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 대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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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문예출판사



마음, 나쓰메 소세키(지음), 김성기(옮김), 이레 



1.
나쓰메 소세키, 무려 1세기 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동시대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근대성(modernity)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리라.  

이번 소설도, 내가 이전에 읽었던 소설과 비슷하게, 큰 사건이 없이 한 편의 풍경화처럼 이야기는 조용히 흘러간다. 소설의 전반부는 나와 선생님이 만나고 가깝게 되는 과정을, 소설의 후반부는 선생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한 부분은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머지 한 부분은 독백에 가까운 편지로만 구성된다. 

그런데 누군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대화가 아닌 '글로 씌어진 편지'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고 오래 전에 상처 입었던 마음이, 누군가에 그 마음의 속내를 드러내자마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취하게 되는 건, 과연 올바른 방식일까 하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윤리적 질문까지 던지게 되는 건, 그 극단적인 선택- 죽음, 자살- 을 비정상적이라고 하기엔 이미 우리의 마음은 너무 닫혀있고 상처입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절벽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더군. 만족할 만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좀 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을 테지. 하지만 ... ... 자네, 알고 있나. 사랑은 죄악이야." 
- 42쪽 


2.
사랑하는 마음은 죄악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일방적이고 소통하지 않으며 오직 내 마음을 알아주길 상대방에게 호소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선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만 하고, 그 죽음 위로 사랑을 수놓아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걸까?  

그런데 결국 사랑을 해도 쓸쓸하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해도 마음은 위로받지 못한다. 마음은 혼자이고 고독하고 이해받지 못한 채 (똑같은) 죽음을 향해 간다. 마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근대의 개인주의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고, 그 근대의 끄트머리에 선 우리들에게 자살이란 너무 일상적이 된 셈이다. 


3. 
강상중 교수의 최근 두 권,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나쓰메 소세키의 충분한 해설서가 될 수 있으며, 나쓰메 소세키를 기초로 하여 현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위로가 될 순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두고 아래와 같이 평한다. 


그리고 '개인적 공명'이라는 말에서 저는 소세키를 떠올립니다. 개인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시대에 고독한 영혼끼리 공명하는 무언가는 <<마음>>에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오고간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친척'과도 인연을 끊었으며, 고등유민이기 때문에 '사회'와도 접점이 없고, 단 한 명인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가족'인 '아내'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게 되어 버린, 세계 어디와도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우주로 튕겨 나간 공 같은 궁극의 개인입니다. 
아울러 선생님은 이름조차 없습니다. 이름 없는 공空입니다. 그 선생님은 최종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외에 길이 없었습니다만, 그때 작품의 절반에 이르는 길고 긴 고백인 '나'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는 테일러가 말하는 개인적 공명을 찾는, 세대를 초월한 이야기의 시도가 아니었을까요. 
강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146쪽 - 147쪽 
(* 개인적 공명: 찰스 테일러가 주장하는 바로, '흩어진 개인들이 새로운 차원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개인적 공명'이라고 해야 할 새로운 공통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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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민음사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어떤 계획을 세워서 자연을 억지로라도 자기의 계획에 맞추려드는 고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이란 인간이 세운 그 어떤 계획보다도 위대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연을 거역하고 자기 계획을 고집하게 된다면, 그건 버림받은 아내가 이혼장을 방패 삼아 부부 관계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 228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된다. 적어도 다이스케에게 있어선 그랬다. 그는 자연의 이치대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무 일도 기획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으며 그냥 조용히 외부 세계와는 무관한 듯 그렇게.

 

 

다이스케는 책상 위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약간 열려있는 툇마루의 유리문 사이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와 화분에 심은 색비름의 빨간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큰 꽃 위에 햇살이 가득했다. 다이스케는 허리를 굽혀 꽃 속을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가늘고 긴 수술 끝에서 꽃가루를 따다가 암술 끝으로 가져가서 정성스레 발랐다.

- 58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무 일도 못 하리라 여겨지진 않았다. 많은 책을 읽었고 부드러웠으며 신중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의 하루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지식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종류였다. 그는 매일 차를 마셨고 책을 읽었으며 다양한 화초가 자라는 정원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달리, 자연을 따르기로 한 다이스케에게 있어 '자연'이란, 이 외부세계의 어떤 거대한 흐름 이전에 정처 없이 떠도는, 자기자신에게마저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 나무의 마음, 구름의 마음, 식물의 마음이 모여 이 거대한 자연을 이루듯, 그 시작에는 다이스케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솔직해진다는 것의 무모함이란, 자기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가져다 주는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21세기 초반의 TV 드라마들 대부분은 이 마음의 자유가 가져오는 통속적 비극에 대한 것들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이여,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말고 어른이, 이 세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생각하고 움직여라)

 

요즈음 마음이 쓸쓸하니 자주 와주세요.”라는 미치요의 말에 다이스케는 휘청거리며 100미터 정도를 걸었다.’ 마음 가는 대로 친구의 여동생인 미치요와 친구인 히라오카와의 결혼을 주선하였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마음 가는 대로 친구의 부인인 미치요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비극을 선물한다. 우리 비극의 원인은 바로 자연이다.)


 

왜 저를 버렸지요?”

라고 말하고는 다시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 대고 또 울었다.

- 286

 

 

미치요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면서 띄엄띄엄 한 마디씩 말하고 있었다. ‘너무하세요’, ‘잔혹해요라고 말하며, 지나간, 이미 버림받은 사랑을 되새기고 있었다. 친구의 아내가 된 미치요 앞에서 19세기 후반의 다이스케는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할 어떤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없어요?”

라고 물었다.

그런 건 없어요. 뭐든지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떠돌이 생활 …….”

떠돌이 생활을 해도 좋아요. 죽으라고 말씀하시면 죽겠어요.”

다이스케는 또 한번 전율을 느꼈다.

- 316

 

 

이 흥미로운 소설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사랑에 대해선 별 내용이 없다. ‘그 후이라는 소설의 잔인한 제목처럼, 현대적 비극은 막이 내려간 다음 이루어지고 그 누구도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는 데에 나쓰메 소세키는 의문을 갖는다.

 

다이스케는 19세기 후반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한 나약한 일본 지식인을 떠오르게 하며, 미치요는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일본 여성을 보여준다. 결국 둘의 사랑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이스케와 같은 지식인 류의 고백이란 늘 한 발 늦기 마련이고, 어떤 상황은 종료되고 현장은 깨끗이 치워진 이후다. 그리고 자신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순종하며 늘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고 정직하다며, 이미 끝난 사랑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붙잡곤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봐달라고 해대는 것이다.

 

 

잘 알았습니다.”

라고 다이스케는 간단히 대답했다.

너는 바보 천치다.”

라고 형이 크게 소리쳤다. 다이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얼간이 녀석.”하고 형이 또 말했다.

평소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입심이 센 놈이 정작 이런 때는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잠자코 있구나. 그리고 뒤에서는 부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나쁜 짓이나 하고 말이야. 이제까지 무엇 때문에 교육을 받은 거냐?”

- 348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나고 그 후 아무도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사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아무렇게나 그 둘은 슬픈 풍경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고 지병이 있었던 미치요는 갑자기 무능력해진 다이스케의 손을 잡으며 죽었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란 언제나 잔인하게 공평한 것이다.


그 후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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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기 2009.12.30 21:07 신고

    몇해 전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싶으면서도 또 스산한 감흥을 가지고 덮었던 책인데
    어제 집에 들어갔더니 엄마가 이 책을 꺼내놓고 계시더군요. 이상하게 <그 후>와 거푸 마주치게 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란 인사를 하러 왔어요.
    새해에는 함 만나서 수다떨 기회라도 있길 바래요. :)

    • 소세키의 소설은 19세기말, 20세기초의 분위기스럽지 않게 스산하더군요. 아니면 우리는 스산하지 않았던 때 없었던 건지. ㅡ_ㅡ;;;
      수다~! 너무 좋아해요.. ㅎㅎ 딸기님두 건강하시고요. ^^ 새해에는 수다를 기필코.. : )


"왜 저를 버렸지요?"
라고 말하고는 다시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 대고 또 울었다.
- 나쓰메 소세키, '그후', 민음사, 286쪽



일요일 심야의 퇴근길 지하철 9호선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다 읽었다. 왜. 저를. 버렸지.요.?... 소설은 아무런 사건 없이 이어지다가, 마치 거친 골짜기를 며칠 째 헤매다가 무지개 낀 폭포를 만나는 듯한 느낌을 읽는 이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그건 슬픈 비극일 뿐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9세기말의 시선으로 현대인의 비극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을 늦게 깨닫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런데 다이스케는 어리석었다.

며칠 전에 만난 그녀는 '그 후'를 '소레카라'로 읽는다는 걸 알려주었다. 프랑스 남편과 두 아이가 있는 동경으로 갔지만, 일본은 그녀의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 늘 그녀를 힘들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그녀의 나라라고 하기에 그녀는 일본어가 한국어보다 편하고 일본 문화가 한국 문화보다 더 익숙했다. 몇 년간의 일본 생활이 끝나면 다시 파리로 돌아가겠지만.

뉴욕에 사는 친구에게 언제 한국 들어오느냐고 메일 보내고, 오래 전에 읽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뒤적였지만, 역시 서평 쓸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 천연덕스러운 보수주의자의 글은 요즘 읽기엔 너무 구식스럽다. 하지만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문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내일 아침엔 일찍 광주에 내려가야 한다. 협상과 계약이 기다리는 미팅이 있기에.

광주의 지인들에게 연락해 볼까 하다가, 술 한 잔 걸쳐야 하는 부담 탓에 연락을 하지 못했다. 광주의 날씨가 어떤가에 따라 연락 여부가 결정될 듯 싶다.

집에 들어와, 마크 알몬드 밴드의 음악을 들었다. 사랑을 잃어버리게 될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얼굴이 떠올라 슬펐다. 사랑하고 싶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랑은 두렵다. 이젠 그 두려운 마음을 들킬까 더 조심스러워졌다. 내 두려운 마음을 읽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마크 알몬드 밴드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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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i 2009.12.10 00:28 신고

    두려운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라.. 천생연분을 찾으시는군요 ㅎㅎ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끼리도 꾸준히 노력하고 마음쓰지 않으면 그걸 잘 못하는데 말입니다..^^;

    근데 지하련님에게 날씨와 술자리는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는지요? ^^

    • 천생연분인가요~? ㅎㅎ..

      '비도 오는데, 술이나 한 잔 하자'라는 표현을 종종 쓰긴 하지만, 실은 술 마시기 좋은 날씨는 화창한 봄날 오후나 가을 오후가 아닐까 싶어요. 날씨 탓에 술 마시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별 상관관계는 없는 듯.. 합니다. (실은 날씨 좋은 날 맛있는 요리와 술이 생각나긴 하죠. ㅎㅎ)

  • 윤민연우맘 2009.12.22 00:35 신고

    시즌이 시즌이니만큼 엄청 달리는 모냥이지?(부럽ㅠ)
    훼이보릿 시즌송이나 몇 올려봐바바.
    당신의 포스팅이 없으니깐 넘넘 심심해ㅠㅠ

    • 역시 예리하신~.. 두 아이의 엄마라는..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포스팅이라도 올리도록 하지요.. ㅡ_ㅡ;;
      아, 최근 내가 술이 많이 약해졌는데, 약해진 틈을 타서 주위 사람들 너무 먹이네.. 아웅.

  • 나츠메 소세키 2010.08.02 22:48 신고

    아 소레카라 인가요..

    저는 3단 구성인

    산시로-소레카라-문

    을 다읽었죠,,,

    다이스케의 심리 묘사는 이 책의 특이한 묘미 ㅋ

    • 소세키는 19세기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작가입니다. 1세기가 지난 지금 읽어도,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니 말이죠. 집집마다 꽂혀있는 하루키의 '1Q84' 대신 소세키 같은 소설가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터무니없는 바람이지만요)


일본의 재구성 - 10점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마티



일본의 재구성
패트릭 스미스(지음), 노시내(옮김), 마티, 2008




1. 일본과 한국, 그 닮음에 대해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리고 읽었던 일본인은 이 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하긴 나도 박노자의 책을 읽고 우리 한국인들, 우리들의 가치관, 그리고 우리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뜨끔했다. 한국인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을 박노자는 자신이 살아왔던 서양 세계의 가치관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트릭 스미스의 이 책은 박노자가 한국, 한국인에 대해 묻는 것 이상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분석하고 따져 묻는다. 그리고 많은 문헌들과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은 그 동안 나왔던 일본학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오리엔탈리즘에 젖어있었는가를 드러낸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매우 불편했고 아팠다. 그리고 가끔은 일본 속에 숨어있는 한국과 만나기도 했다. 가령,

모든 것이 공산주의 견제라는 이름 아래 희생당했다. 우익 국가주의자의 제거가 중단되었고 미국의 국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시아 대륙 침략을 후원하고 전쟁 물자를 공급했던 족벌 경영 체제의 재벌을 해체하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1948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전戰前 일본의 재벌 세력은 모두 제자리로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엘리트 세력들이 다시금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35쪽)


한국의 상황과 꽤 유사하지 않은가. 한국에서도 똑같이 일제 식민지의 순사가 바로 한국 정부의 경찰이 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는 동안, 김구가 암살당하고 임시정부에 속해있던 중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소외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임시정부는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국가를 대표한 것이 아니었다”면서 “현실 공간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는 1948년 8월 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책자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광복 대신 건국에 방점을 찍는 순간 시작된 일의 사소한 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할 말도 많고 종종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이 책과는 대체로 무관한 내용이다.

최근 정치적 상황이나 정부와 여당의 정책 방향은 도를 지나쳐, 잘못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과거와 소란스럽긴 하지만 나름대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현재 사이의 갈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길 염원하는 듯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다수의 법들과 다양한 제재 장치들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잘못된 과거 속에서는 이 책에서 언급하는 근대 일본의 유산과 전통도 포함되어 있다. 전쟁 전 식민지 세대들 중 일부는 일본어로 황국신민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며, 그들 극히 일부는 광복 한국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을 것이고, 일본어로 생각하고 쓰고 읽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며(http://intempus.tistory.com/790),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 후손들에게 그런 생각의 일부는 남겨놓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은연 중에 이어져 오는 것은 아닐까? 내 생각이 매우 위험한 가설에 지나지 않겠지만서도.

현대 일본이 그들만의 독자적인 과거사를 정립하지 못하고 과거사에 있어서는 중국과 한국에 대해 열등감을, 근대 이후에는 서양 국가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근대 이후 일본이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은 조금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쨋든 악전고투 끝에 민주주의를 이루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정부와 여당의 여러 정책들은 다소(혹은 매우) 위험해 보일 정도로 과거 회귀적임을, 더구나 대다수의 역사학자들까지 반대하는 역사 교과서 수정 문제나 한국 정부의 정통성 부분 등, 일본의 정치가들이 그랬듯이 한국의 정치가들도 그렇게 새롭게 채색된 한국의 가면을 만드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2. 일본의 근대(Modern), 그리고 근대적 자아

현대
일본은 이러한 과정 속에도 다수의 학자들은 서양의 근대를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한국에 번역 소개되는 무수한 서양 번역서들 대부분이 일차적으로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최근까지도 국역본 대부분은 먼저 번역된 일본 번역본에 의존했음을 떠올린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근대의 초극’이라는 표현을 20세기 초반에 사용하기도 했으며, 가라타니 고진같은 비평가는 세계적인 지명도가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스타급 대우를 받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아래의 인용문은 낯설다.

일본인은 루소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무수한 계몽시대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으며 근대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읽은 책과 그 속에 담긴 사상을 한쪽으로 제쳐두었다. 근대 경제는 이룩했으나 (여러 측면으로 미루어 보건데) 근대사회는 이룩하지 못했고, 패전 후 황국신민이 아닌 시민이 되었으나 참여할 만한 시민사회는 형성하지 못했고, 민주주의의 조직은 갖추었으나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뭐라고 정의하든 간에 일본은 절대로 포스트모던이라 할 수 없다.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프리pre-모던, 즉 전근대이다. (313쪽~314쪽)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과 실제 일본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가 아는 일본은 책이나 잡지, 혹은 만화나 영화로 만나는 가면으로서의 일본(수출용 일본), 또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으로 탈색된, 혹은 변장된 일본일 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19세기 일본의 정치가들이 먼저 시작했으며, 패전 이후에는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과 많은 역사학자들이 관여했고, 그러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세대의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가버렸다. 재일한국인과 같은 외국인(백인이 아닌), 일본 내의 부락민,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립국가였던 오키나와 등 자신들 내부에 많은 차별을 만들어놓고 있으면서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인 스스로도 이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전반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일본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주체성, 또는 근대적 자아)이 가장 거대한 문제일 지도 모른다.

외국인이 제일 빨리 깨닫는 일본인의 특징은 남에게나 자신에게 진심을 숨기는 습관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전부 가면을 쓰고 있고 각자 가면 쓰는 법을 배운다. 이 가면을 통해일본인은 남들과 가까이 살면서도 떨어져 사는 방법을 배운다. 일본이 이상하게 속이 텅 비고 모호하여 표면은 잔잔하고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으로는 갈등과 긴장, 역류와 불안감이 잔뜩 존재하고 있다.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늘 그래왔다. 단지 최근에 와서 마치 뚜껑이 열린 듯 가면의 일부가 벗겨진 듯, 그 현상이 좀더 뚜렷해졌을 뿐이다.
(74쪽)


일본인에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사랑 표현을 쉽게 하는 한국인이 낯선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일본 내의 부락민 운동하는 이들도 그렇지 않다고 패트릭 스미스는 말한다. 가면을 쓰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로 일본인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와버린 셈이다.


개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가장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조차 개인을 민족국가 개념에 끌어다 붙였다. 후쿠자와의 실수, 즉 “한 개인이 된다는 것은 일본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보는 실수는 이후에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112쪽)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아닌 채, 정치적으로 과장되고 의도되어진 일본인은 경제 발전에 몸을 내던지는 근대 무사의 모습에서, 전쟁 중의 일본 군인, 그리고 현대 기업의 직장인의 모습 등으로 변화하지만,  어느 것 속에서도 '스스로의 나 자신'은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외롭고 쓸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 혼자, 나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외롭고 쓸쓸한 일상을 견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다채롭게 살았던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뒤로하고 도망가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세상이 시골과 도시, 전통과 근대, 외국과 일본, 하는 식으로 우열로 나뉘는 집단들의 집합체라는 일반적인 시각을 그는 거부했다. ‘자기다워진다’는 것, 즉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큼이나 불투명한 과제가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세키 이후 그의 신념을 공유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일본은 소세키가 제시했던 ‘진실’에 걸맞게 살아갈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376쪽 - 377쪽)


그리고 이러는 동안 일본인들은, '지금도 일본인들은 소속감이라는 그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그 그물망 안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121쪽)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 초반에 어느 일본 작가가 요염하고 매혹적인 것을 뜻하는 ‘비타이’라는 일본인 특유의 미적 감각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기대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선호하며, 욕망의 대상과 가능한 거리를 좁히되 목적을 달성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최대한 목적 실현의 가능성을 음미하는 것이 ‘비타이’에서 얻는 쾌감의 진수라는 것이다.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영원히 타자이다. 꿈꾸는 상태가 실현되는 것보다 나은 모양이다. (21쪽)


그래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기분을 만끽한다. 꼭 히로히토 천황의 연설 전과 연설 후의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도, 일본인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어쩌면 역사적으로 두려워하게끔 만든 것일 수도).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은 일본이 항복한 날을 다음과 같이 놀랍게 묘사한다. 그날 구로사와는 스튜디오로 와서 히로히토의 항복연설을 들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 도쿄 시내를 걸어서 통과하던 구로사와의 눈에는 온 국민이 고귀한 일본정신인 국체와 덴노의 명예를 위해 금방이라도 죽을 각오인 것처럼 보였다. 다들 “경황이 없었다. 일본도를 빼들고 앉아 칼날을 망연자실 내려다보는 상점주인도 있었다.” 젊은 구로사와는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히로히토의 연설을 들었다. 그를 포함한 7,000만 명의 일본인은 히로히토의 목소리를 그날 생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구로사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집에 돌아갈 때는 거리 분위기가 일변해 있었다. 상점가 사람들은 마치 다음날 있을 축제라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들뜬 표정으로 소란스러웠다." (303쪽 ~ 304쪽)



3. 진짜 일본을 찾아가는 일본 현대 문학


하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오에가 말했다. “저는 작가로서 보통사람들이 사는 주변부에 관심이 있습니다.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내면적 자아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주변부야말로 진정한 일본 문화가 그렇지 않은 것과 함께 변천해가는 곳이지요.” (392쪽)


오에 겐자부로의 저 말처럼, 한국인들이 냉전과 독재 속에서 악전고투하여 민주주의를 얻어내었다면, 똑같이 일본인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 하지만 한국에서도 진짜 일본을 그려보여주었던 오에 겐자부로 대신 무라카미 하루키를 선택했듯이, 일본도 그런 것은 아닌까 걱정스럽다.

오에 겐자부로의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드디어 전 세계가 일본과 일본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중략)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변한 게 없었다. 오에의 소설이 선명하게 보여주듯 오에 세대와 나머지 일본인들 간의 간극은 넓어지기만 했다. 오에가 스톡홀름으로 향할 즈음에는 오에나 아베 코보(1993년 사망)는 일본 문학계에서 멸종된 공룡에 속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미처 거장을 알아보지 못한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아키히토는 서둘러 오에에게 덴노상을 수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덴노상은 자기 작품 속에서 극복의 대상이 되는 문화를 상징했으므로 오에는 이를 거부했다. 아키히토가 괜히 어색한 원조를 시도했다가 자국 최고의 작가들을 소외시키는 은밀한 현상을 드러내버린 꼴이었다.  (394쪽)


작품성으로나 문학적 위상으로나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애초부터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에 겐자부로가 어른이라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갓 유치원을 졸업한 초등학생 저학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간판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대한 소설가로 올려주는 국내의 모 문학잡지나 평론가들을 보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실은 그들의 형편없는 상업주의와 감식안을 탓해야 할 것이다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선 몇 년 전에 작은 평문을 쓴 적이 있었다. 하루키 문학은 본격 문학이라기 보다는 상업 문학에 가깝고, 이 점을 인정한 후 그나마 있는 가치에 대해서 적으려고 노력했던 글이다. 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 http://intempus.tistory.com/135)

그렇다면 패트릭 스미스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포스트모던 작품에 공통된 맥락은 ‘의도적 무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스로를 “오리지널”이라 일컫는다. “내가 내 소설을 위해 완전히 독자적으로 새로운 일본어를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꼭 그렇게 선언되어야 진정한 독창성인가?  (중략) 등장인물이 생활하는 환경에 관한 묘사를 거부하고, 일본에 대해 쓴다고 하면서 일본에 대한 진솔한 묘사를 작품에서 실종시키는 작가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398쪽)

그에게 과거란 무관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모방이나 죽은 전통에서 탈피하라는 과제에 대한 무라카미의 해답은,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에서 아예 통째로 탈피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본이라는 문제 많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일본을 외국인처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 바깥에서 일본사회에 대해 쓰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부분을 하나씩 전부 던져버린 후에도 남아있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이 아닐는지요.” 말도 안 되고 근거도 없는 역설이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부분? 뿌리 깊은 열등감이 또 한 차례 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다 무라카미도 십 년 후에는 감상적인 국가주의자로 변모해버리는 게 아닐까. (397쪽)


패트릭 스미스는 '나쓰메 소세키 - 아베 코보 - 오에 겐자부로'를 분명히 한다. 나도 여기에 대해서 100% 동의한다. 이 세 명의 소설가는 일본 근현대 문학의 최정수이다(반드시 읽어야 하는 소설가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옆에 슬픈 소설가 두 명 있다면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하기 몇 해 전인 1960년대 후반,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국의 외국인 특파원이 취재차 도쿄 남쪽 해변에 위치한 미시마의 집을 방문했다. 미시마가 사는 집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 특파원이 털어놓았다. 당시 골수 국수주의자였던 미시마의 집은 번지르르한 서양 저택이었다. 프랑스식 문에, 연철로 만들어진 발코니에, 정원에는 오르페우스 조각상이 서 있었다. “온 집안을 둘러봐도 특별히 일본적인 물건을 찾아볼 수 없네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파원이 미시마에게 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빼면 전부 일제예요.” 미시마의 대답이었다.(292쪽)

일본인들이 과거라는 감옥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정신이란 관념이 바로 그 감옥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미시마는 잘 알고 있었다.(293쪽)

“실패한 비극배우라 함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열심히 사람들을 울리려고 무대에 나가는데 사람들은 모두 박장대소하는군.” (384쪽에서 재인용)

과거가 현대에 대한 보호막이기를 원하던 그 꿈은 미시마, 가와바타와 함께 죽어버렸다. 이제 앞으로 그들과 같은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더 있다. 침묵하는 과거와 불협화음 가득한 현재가 뒤섞인 일본을 그저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은 꿈 말이다. 과연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일본 소설가들이 재능은 있어도 탁월한 정상급 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84쪽)


문득 '위대한 전통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예전 미술사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이다. 문제 많은 일본 옆에 문제 많은 상태에서 문제 더 만들고 있는 한국. 흥미로운 조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할 수 있을까. 페트릭 스미스는 적어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건데, 쉽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리더들이 바뀌지 않는 이상 말이다.(이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4. 숨겨진 일본

도카이도는 근대 일본을 둘로 나누는 경계이다. 태평양과 도카이도 사이에 놓인 지역이 ‘오모테니혼’ 즉 일본의 얼굴이고, 나머지 지역이 일본의 등에 해당하는 ‘우라니혼’이다. 메이지유신이 이런 구분을 새로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지리적 구분에 격변을 일으켰다고 보는 편이 옳다. 중국에서 문물을 수용하던 수세기 동안 일본의 앞면은 거꾸로 동해 쪽이고 태평양 쪽이 뒷면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19세기에 서구로 눈을 돌리면서 앞뒤가 바뀐 것이다. 도카이도의 한쪽이 근대화되는 동안 다른 한쪽은 과거에 멈춰야 했다.
요즘 ‘우라니혼’은 약간 실례되는 말이다. (중략) ‘숨겨진 일본’이라고 번역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우라니혼은 시골이다. 대나무 수, 계단식 논, 단선철로, 반딧불, 지푸라기 냄새, 가열처리 안 한 곡주가 있는 곳이며 근대 일본인이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 노력했던 곳이다. (254쪽)  


'오모테니혼'과 '우라니혼'의 대비. 다소 낯설지만,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도시과 농촌 사이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근대적 일본’이 ‘전근대적 일본’에 돈을 주어가며 진보를 막는 모습을 보면 그런 행태가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알 수 있다. 시골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시골사람들을 전시물의 일부로 삼아 자신이 옛날 그대로 순수한 존재라는 환상을 조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64쪽)


그런데 한국도 이렇게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벌써 이렇게 변한 것은 아닐까. 우라니혼은 오모테니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타자인 셈이다. 그리고 일본 안에는 많은 타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서 열린 피아노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한국에 갔습니다. 그때 3주 정도 한국에 머물렀는데, 사람 사는 후텁지근한 냄새가 나던 것과 빨리 일본에 돌아오고 싶던 것이 기억납니다. 두 번째로 한국에 갔을 때는 1980년 대학교 1학년 봄방학 때였습니다. 진정한 내 조국은 한국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에 갔는데 오히려 제 자신이 얼마나 일본적인지 강렬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416쪽~417쪽에서 재인용) 


1981년 22세의 나이로 지문날인을 거부한 이후 내내 일본 법정을 들락거린 최선애의 법정 진술의 일부다. 꼭 소설가 유미리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그런데 한국도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이 타자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면, 한국 사회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일본 사람들은 느리지만, 한발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책의 결말은 일본과 미국을 향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 일본인을 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전적으로 일본인들의 책임이다. 하긴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고 다듬다 보니, 어느새 2009년이 되어버렸다. 지금 여의도와 종로에서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무수한 인파들 속에서 촛불을 든 이들이 있을 것이다. 흥미롭다. 어째서 정치인들은 19세기나 20세기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토록 변한 것이 없는 것일까.

*      *  

책은 매우 두껍고 방대하며 많은 문헌 자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은 리뷰를 이렇게 길게 적을 생각은 없었다. 글이 길어지면 초점이 흐려지고 지루해진다. 따라서 위 글도 그러하리라 싶다. 그만큼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으며 한국, 한국사회, 한국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던 책이라 여겨진다. 또한 일본인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늘 일본인을 만날 때나 볼 때 뭔가 애잔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더 심해졌다. 내년에는 반드시 일본 여행을 갈 생각이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을 번역하신 noi님에도 감사를. noi님은 이 불성실한 독자를 위해 기꺼이 번역한 책을 보내주셨다. 2009년 최초의 포스팅은 noi님께서 번역하신 책의 리뷰가 되었다. : )  2009년 속을 살아갈 한국과 일본의 모든 개인들이여, 파이팅Figh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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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롬차 2009.01.01 19:13 신고

    글 잘 읽었습니다~(__) 특히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프리pre-모던, 즉 전근대이다~라는 말이 의미 심장하게 느껴지네요...쩝, 저도 일본은 한번쯤 가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엔고로 인해서 고민이 많이 되네요 ㅎㅎ 가본곳이라고는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혹은 태국 밖에 없으니~자주 들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
      엔고 정말 걱정입니다. ㅡ_ㅡ;; 2009년에는 환율 문제 제발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 2009.01.03 12:39

    비밀댓글입니다

  • 일본의 재구성을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도 계속 밀쳐두고 망설이기만 했었는데 오늘에야 주문을 했네요. 이렇게 상세하게 감상기를 올리셔서 읽는 데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아요. 정말 번드르르하기만 하고 어렵기만 한 일본학 서적보다 훨씬 더 사람의 마음을 울릴 것 같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래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했는데, 역시 저자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 무척 좋은 책입니다. 한국, 그리고 한국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 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네요. 패스츄리님의 댓글 덕분에 저도 이 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행인行人
나쓰메 소세키(지음), 유숙자(옮김), 문학과지성사



인생은 쓸쓸한 거다.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연인은 떠나가고, 마음 한 켠에 남은 상처는 새벽 네 시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마냥 예기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이 현대식 사랑이다. 그러니 다치지 않기 위해 사랑은 한 켠으로 밀어 놓은 지 오래. 하얀 눈이 보기 드문 겨울이 가고 황사 가득한 봄이 오고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과 만나게 된다.


어떤 확신처럼, ‘인생은 쓸쓸한 거다’라고 읊조리지만, 그것을 확인할 때면 가슴 한 쪽이 아려오는 건 어쩌지 못한다. 



     방 안은 촛불로 인해 소용돌이치듯 동요했다. 나도 형수도 눈살을 찌푸리고 타오르는 불꽃 끝을
   응시했다. 그리고 불안한 쓸쓸함이라 형용될 법한 심정을 맛보았다.
    (156쪽)



아무런 사건도 없지만, 아무런 사건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소설은 당황스럽고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쓸쓸함으로 시작해 불안함으로 끝나는 이 소설 앞에서 독자가 쥐게 되는 것은 그저 ‘인생이 그렇지, 뭐’ 정도.


나쓰메 소세키는 여러 상황들과 공간들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인물들을 가둔 채 그들의 외면을 훑는 것만으로 그들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낸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긴장이 흐르지만, 그 긴장 끝에는 어떤 결말이나 긴장의 해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독자의 몫이란 건가. 하긴 그에게도 그것을 해결한 힘도, 지혜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이 쓸쓸한 걸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래, 인생은 쓸쓸한 거다. 그것을 받아들인 채 늙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생이 쓸쓸한 거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행인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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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렸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알 턱도 없었고 알기도 싫었을 것이며 알려는 의지도 없었다. 이미 선 긋기는 시작되었다. 저 땅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곳.....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쓸쓸한 커피숍

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테슬라의 Market Cap(시가 총액)
음악 소비는 이제 스트리밍이 대세
혼술
스테이지 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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