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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현대자동차의 예술 사랑 - '현대자동차 Art & Culture Insight Tour' 후기




얼마 전 나는 무척 흥미로운 행사에 참석했다. '현대자동차 Art & Culture Insight Tour'. 지난 6월 21일 토요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예술(혹은 예술가)에 대한 고민, 열정,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많은 활동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참석하게 된 계기는 그저 이 작은 블로그 하나를 운영한다는 이유뿐이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이 잘 된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회사에서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내 기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순수 예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지만, 거기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 많은 기업들이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몇몇 기업들은 탈세 용도로), 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삼성은 문화재단과 리움을 통해, 금호는 미술관, 아트홀과 함께 클래식음악에 대한 지원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현대자동차의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서 느낀 것은 너무 특별했다. 다른 기업들이 직접적인 투자와 지원이라면, 현대자동차는 (어쩌면 기업 입장에서는 다소 위험도가 높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순수 예술 전반의 생태계와 순수 예술에 대한 저변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솔직한 내 반응은 '와우'였다.



(이대형 큐레이터의 강연 장면)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어 오후까지 이어졌다. 나는 여기에서 이대형 큐레이터를 만날 수 있었다. 나도 많은 큐레이터를 만났고 그 비슷한 일을 했으며 예술에 대한 사랑은 누구 못지 않다고 자부하는 터였지만, 그 앞에서는 솔직히 주눅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행복했다. 한국 미술은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기업에서 이런 유형의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한 것은 현대자동차가 처음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들은 기업의 브랜드와 순수 예술과 결부시키는 방법을 일차원적으로(혹은 피상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아트콜라보레이션(art collaboration)을 하더라도 해당 기업의 상품이나 브랜드 이미지와 직접적인 연상이 일어나야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 곳에선 이건 산업디자인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디자이너와의 협업이라는 이해가 되지만, 순수 예술가와의 협업이 제품으로 나온다는 건 ... 하긴 디자인과 순수 미술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고, 이 정도라도 해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대부분의 작가들은 스스로를 알리는 방법에 대해 잘 모르고 나서서 하는 것도 주저하는 마당에. 


그런데 현대자동차는 전혀 방식으로 아트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모할 정도로. 이미 현대자동차는 영국 테이트모던과 11년 장기 파트너십 계약을 맺었다!(세상에 한국 기업이 영국 최고의 미술관에다 이런 짓을!!). 테이트모던 역사상 최장의 파트너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같다. 테이트 모던보다 더 지원했으면 했지, 덜 지원하진 않은 모양이니. 이미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관의 갤러리 아트존은 현대자동차가 지원하고 있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를 통해 국내 중견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첫 번째 작가로 이불(Lee Bul, 1964년) 작가가 선정되었습니다. ‘여전사’라는 수식어를 가진 이불은 작품 활동 초기부터 퍼포먼스, 설치, 조각 작업 등 행위예술과 설치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 파괴 등을 주제로 인습을 타파하는 작업을 펼쳐왔습니다. 1990년대 후반 사이보그 시리즈 작업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2000년대 이후 개인의 기억, 경험을 반영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http://brand.hyundai.com/ko/art/with-mmca/mmca-hyunda-series.do 





그렇다면 현대자동차의 아트 마케팅은 어떻게 다르길래, 내가 '와우'라는 반응을 보였던 걸까. 이대형 큐레이터의 설명과 관련 안내 자료들을 바탕으로 정리해보면 크게 3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우리들의 마음과 행동을 바꾸는 내재화. 


한때 서양미술사를 공부했고 미술계에 들어가 뭔가 해보려고 했던 내가 늘 고민하고 부딪혔던 문제는 전시를 한 두 번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전까지 없었던 예술에 대한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내 꿈은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즐기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인데). 도리어 이 작품 돈 될꺼야 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았다. 적어도 그러면 이 작품은 왜 돈이 될까 하는 고민이라도 하니 말이다.


계량적 가치는 평가하긴 어려워도 설명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 가령 작품성이나 감동, 왜 이 작품은 위대한지 따위를 설명하자면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대형 큐레이터는 자신이 외국의 명품 회사와 일을 할 때, 그 회사의 담당자들이 가진 미술사적 이해와 폭넓은 지식으로 참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전시 한 두 번 본다고 해서, 미술 서적 한 두 권 본다고 해서 어제까지 예술에 관심 없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가 예술 마케팅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예술 마케팅 회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대형 큐레이터는 직접 자료를 만들어서 현대자동차 딜러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가 예술 마케팅 회사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현대자동차 직원들은 예술을 사랑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변할 테니 말이다. 이렇게 현대자동차는 변하고 있었다. 


그는 이와 비슷한 변화를  '내재화'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이것이 진짜 변화라고. 그런데 누가 이런 변화를 지원할 것인가. 많은 갈등과 고민, 오랜 기간 동안 투자하고 지원해야 하는 일인데. 현대자동차의 예술 마케팅이 기대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2. 콘텍스트를 움직이는 관계 미디어 


어쩌면 자동차도 미디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행동경제학에선 자동차는 강력한 효과를 지닌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자동차에 문화 예술을 씌운다면? 


문화는 마케터들의 판단과 방향성을 지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간파하고 있는 기업이 만든 청사진을 따라 나머지 기업들은 상품을 만들거나 마케팅 활동 등을 진행한다. 현대자가 문화예술 마케팅을 통해 문화 자산을 쌓는다면 주도적으로 청사진을 그려 타깃 시장을 지배하고 이끌어날 수 있게 된다. 

또한 고객은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서 기업을 바라본다. 문화가 고객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다. 고객은 자동차의 기본적인 가치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소양이 있고 이에 집중하는 현대차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브랜드 가치를 높게 평가하게 된다. 

- '현대자동차 문화지원 사업 소개' 중에서 


이렇게 생각해보자. 현대자동차의 문화지원 사업, 즉 현대차의 아트 마케팅을 통해 우리는 순수 예술을 보다 쉽게, 바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순 있지 않을까? 현대자동차라는 브랜드가 일종의 관계 미디어가 되는 셈이다. 


아마 순수 예술의 입장에서는 다소 어색하고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아 보이지만,  현대자동차의 이 도전적인 문화 예술 마케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국내 기업들 뿐만 아니라 다른 글로벌 기업들까지 따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더 많지 않을까. 나는 희망적으로 이걸 기대해본다. 



3. 미술생태계 중심, 그리고 사람 


마지막으로 현대자동차의 문화 예술 마케팅은 한국의 미술 생태계의 경쟁력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많은 기업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순수 예술 지원 할동은 갤러리 운영이나 작품 구입 정도다. 실은 이 정도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은 여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도리어 국립현대미술관을 지원하고(미술인프라 지원),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작가 전시 프로그램(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을 운영한다. 그리고 다양한 아트콜레보레이션과 이를 판매할 갤러리 아트샵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 다양한 활동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는 경쟁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들 속에서 원숙한 예술미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한국의 중진 작가들을 겨냥한 지원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리고 여기에 전 세계에 한국 미술을 알려온 이대형 큐레이터가 함께 한다는 점에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가 더 주목할 만하지 않을까. 


(갤러리 아트샵에 판매되고 있는 초콜릿 고려청자) 



현대자동차의 아트 마케팅은 환경, 즉 콘텍스트(기업과 미술 생태계) 속에서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의 중심에 작가과 관객을 위치시킨다. 그리고 기업, 자동차, 미술, 사람이 하나가 된다. 실은 이런 시도를 꿈꿀 수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를 실제로 행하는 전혀 다른 문제다. 더구나 수익 창출이 목표인 기업이 매우 무모해보이는 아트 마케팅을. 

 

어쩌면 이 표현이 현대자동차의 아트마케팅을  제대로 표현하는 문장일 듯 싶다. 


"최고의, 중장기에 의한, 진정성을 위한 현대자동차의 문화예술 마케팅" 



미술계를 떠나 시간 날 때 전시 보고 관련 잡지나 책을 보는, 이젠 미술 애호가일 뿐일 나에게 '현대자동차 Art & Culture Insight Tour' 기회를 준 많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특히 현대자동차에서 아트마케팅의 새로운 장을 펼쳐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이대형 큐레이터와 그 외 현대차 브랜드 마케팅 담당자들에게도 아낌없는 성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 현대자동차의 다양한 문화 예술 마케팅 및 지원활동에 대해서는 현대자동차 브랜드 웹사이트(http://brand.hyundai.com/ko/main.do)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ACCESS - an interactive art installation by Marie Sester 

(이대형 큐레이터가 강연을 하는 동안 알게 된 작품이다. 우리가 무심코 보고도 지나치는 골목, 거리 위의 카메라들. 그것이 지닌 폭력성을 드러낸 예술 작품이라고 할까)



토요일 오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부 전경. 역시 전시 관람의 최고 시간은 토요일 오전이다. 한창 미술 관련 공부를 할 때, 토요일 아침 일찍 나와 몇 시간 동안 인사동과 사간동 일대를 헤매던 기억이 난다. 그 땐 무슨 열정으로 그렇게 돌아다녔을까, 궁금하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문학 전공자였던 내가 그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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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ntemporary Art를 '동시대 미술'로 옮겨야 하나? 이전에는 현대 미술로 옮겼는데, 이 잡지에 실린 정형탁 편집장의 글을 읽고 난 다음, 고민에 빠졌다. 


아서 단토A.Danto가 정의한 '예술의 종말' 이후 생긴 '컨템포러리'는 이제 더 이상 미술작품은 어떠해야 한다는 특수한 존재방식에 방점을 찍은 거다. 예술이 미학의 집으로 편입되었을 때 이미 이런 현상은 예견되었는지 모르겠다. 팝아트의 등장으로 미술의 고유한 가치를 찾으려는 목표는 허망한 것이 되었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노력들이 생겨났다. (정형탁, '자살, 자본의 메타모프로시스' 중에서, 65쪽) 


(솔직히 정이 가지 않는) 미술 이론가 아서 단토를 인용하며, 그는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구한다. 굳이 저토록 진지해질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동시대 미술의 예술의 진지함, 심각함, 이론에의 집중을 벗어나고자 다양한 노력을 하는 것과 반대로 평론가들은 더 진지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은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구하고 있고, 도리어 '모든 게 예술이고 모두가 예술가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현실은 여전히 공고하게 시스템의 언어 속에서 작동한다'고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바 '특수한 존재방식'이 있음에 저항해야 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긴 하다. 


그가 인용하는 알랭 바디우는 '다문화주의란, "화폐만을 통해 보편화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결국 돈이 문제인가? 


2.

이 잡지 - Contemporary Art Journal 2011년 Vol.7'도 거의 2년만에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수를 세어보니 잡지를 포함해도 20권이 되지 않았다. 일상이 바빠지니, 독서나 전시 관람에 쏟는 시간이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그런데 이 줄어드는 시간만큼 내 관심사는 더 넓어지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3. 

근데 사실 '스칼라 마인드Scholar mind'와 '크리틱 마인드Critic mind'는 구별된다고 보거든요. 스칼라 마인드는 가치 중립이거든요. 크리틱 마인드가 되려면 어떤 것을 그래도 선호해야 됩니다.자기가 보는 전형이 있어야 되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어요. 그 당시에도 고민했고. 지금에서야 어떠냐 하면은 둘 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김복영, 대담 중에서, 15쪽 


4.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외부의 충격이 한국 사람들이 견디어 내기 힘들만큼 크거나, 아니면 외부의 충격이 크지는 않지만 한국 사람들의 내부가 취약하거나 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빠르게 증가하는 이유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외부의 충격이 점점 더 강해지거나, 한국 사람들의 내부가 점점 더 취약하거나 이다. 

- 이홍균, '자살의 사회적 원인' 중에서, 41쪽 


5. 

이제는 화가도 필요 없다. 작가도 필요 없다. 음악가도 필요 없다. 조각가도 필요 없다. 종교도 필요 없다. 공화당도 필요없다. 왕당파도 필요 없다. 제국주의도 필요 없다. 무정부주의자도 필요 없다. 사회주의자도 필요 없다. 볼셰비키도 필요 없다. 정치가도 필요 없다. 프롤레타리아도 필요 없다. 민주주의자도 필요 없다. 군대도 필요 없다. 경찰도 필요 없다. 민족도 필요 없다. 이 모든 천치들은 필요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그리하여 새로움이라는 것도 결국엔, 지금 우리가 원치 않는 그 모든 것들, 똑같은 것으로 변하겠지만, 우리는 다만 그것이 덜 썩어 빠진 것이 되기를 바라며, 너무 빨리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920년 2월 5일, 다다 제 2선언. (정형탁의 글 중에서 재인용, 66쪽) 


6. 

1917년 뒤샹이 변기를 출품한 앙데팡당전에 강사로 초빙받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아르튀르 크라방Arthur Cravant은 예술적 제스처로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 정형탁, '자살, 자본의 메타모르포시스' 중에서, 67쪽 


7.

장 - 루이 뿌아트뱅의 '자살: 불가능한 매뉴얼'이라는 아티클은 주의 깊게 읽어볼만 했으나, 한편으로는 끔찍하기도 했다. 자살을 직접적으로 예술 작품의 소재나 주제, 더 나아가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다룬 여러 사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잡지야 전문가들이 읽을 터이지만, 이 공개된 공간에서 인용하기에는 끔찍하기만 하다. 몇 사례는 너무 끔찍한 탓에, 크리스 버든 Chris Burden의 초기 작품인 Shoot은 애교스러울 정도이다. 






이와 같은 자살에 관한 접근 중 가장 의미 있는 예시들은 60년대 말 비엔나 출신의 2명의 예술가, 귄터 브루스Gunter Brus와 루돌프 슈바르츠코글러Rudolph Schwarzkogler에 의해 주도된 활동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당시 슈바르츠코글러는 공개적으로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 아니라 단지 사진 시리즈를 위해서만 퍼포먼스를 한 유일한 아티스트였다. (...) 실제로 그는 29살의 나이에 창문에서 뛰어내림으로서 다른 인생, 앙토닌 아르토Antonin Artaud가 주목한 '익명의 삶과 우주에 연결된 신체', 그리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명명한 '기관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에 대한 사색의 행위와 통찰을 끝내버렸다. 

- 82쪽


자살은 도덕이나 재현과 관련된 존재의 경계만을 밝히는 미학의 주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내밀한 결합, 내면과 심리, 상상 속에 판타즘과 실천 가능한 행동의 주제가 되었다. 

- 82쪽


자살을 예술과 삶의 영역에서 다룰 때 야기되는 한계는 항상 같은 것이다. : 우리는 자살을 보여줄 수 없고, 단지 이것에 대한 준비와 결과만을 보여줄 수 있다. 아직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자살을 연출하거나 사진, 비디오로 촬영하지는 않았다. 

- 83쪽 



9. 

그 외 읽을만한 글이 많았다. 이제 작업을 하는 이들과 술 한 잔 할 여유마저도 사라져 버렸지만, 가끔 읽는 이런 잡지도 사소한 위안을 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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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들은 자살조차도 예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살할만큼 힘들어 하는 사람과 자살로 인해 고통받는 남은 사람들을 보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하는 질문이 생길 것 같아요. 아니면 그 질문조차 의미없는 것일까요?

    • 위의 사례로 등장한 것은 자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지점으로 몰린 우리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심리적 해소를 기대하고 있다고 할까. 하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살에 이르는 어떤 감정이나 태도에 대해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에 몰린 사람들을 위한 예술 참여 치료가 좀 더 활성화되어야 할 것 같고요. ... 뭐랄까, ... 위 내용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저는 한국 사회,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자살로 몰고 가는 것같아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자신의 가족을 채찍질하고 ... 안 되면 남 탓, 사회 탓을 하고는 결국 극단적인 시도를 하는 ... 뭔가 나라 전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됩니다. ㅜㅜ;;



올해의 작가상 Korea Artist Prize 2012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12. 8. 31 - 2012. 11. 11 




* 아래 전시 설명에 사용된 작품 이미지는 국립현대미술관(http://www.moca.go.kr)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오랜만에 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었다. 완연한 가을 하늘이 펼쳐졌고 도심이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전시를 챙기는 것이 예전만 못하다. 직접적인 돈벌이와 관련없는 일이 된 지 오래 되었다. 가끔 있는 원고 청탁으로 전시를 보긴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일상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전시를 챙기기엔 내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전시 보러 가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고, 더구나 꼬박꼬박 기록하던 전시 리뷰나 메모도 이젠 사라진 지 오래다. 책을 읽고 리뷰 쓰는 것도 밀리기 일쑤이고, 글쓰기에 그만큼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다보니, 글의 완성도도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시간 투자와 완성도는 비례한다. 작품을 보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무조건 시간이 걸린다. 미술 관련 책을 수 권을 읽고 강의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실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걸린다. 하루만에 뛰어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지만, 그 하루에는 긴 시간 동안 쌓여져 온 고민과 치열했던 내적 투쟁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이번 전시도 그런 고민들이 여과없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시라고 해야할 것이다. 정치적인 테마에서부터 예술 지향적인 시선까지. 보는 이들에게는 현대 예술이 가지는 '바라봄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어떤 작품은 몽환적인 감미로움으로 빠지게도 하고, 어떤 작품은 메타적인 관점에서의 끈질긴 접근을 요구하며 예술을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현대 한국 미술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작가들의 작품을 도심의 상업 갤러리에서 만나기엔 한국 미술계는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경 - 쌍둥이 성좌 Constellation Gemini 



'번역된 도자기' 작품들만 보다가,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을 보면서 작가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 것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순수함과 여성성을 드러내며, 몽환적이면서도 숨겨진 자아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다. 내 설명보다 전시 소개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다소 어렵게 여겨지겠지만) 작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 싶다. 



한편, 이수경은 양손을 이용하여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되는 회화를 제작하는 자신의 작품 제작 특질에 주목하여 "대칭"을 전시 주제로 선택하였다. 개인적인 작품 제작 방식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개인적인 특질을 넘어 좌우 대칭의 교방춤, 족자 작업 및 설치로 이어진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인 대칭 이미지는 전시장을 메우며 깨진 상처나 파편화된 수많은 나와 타인들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이러한 작업은 내 안의 나 아닌 존재, 즉 내 속의 타인과 타인 속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자 나와 타자의 같음을 발견하고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시 소개 중에서 



문경원, 전준호 - 공동의 진술 Voice of Metanoia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 작품들은 나에겐 무척 의미심장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예술에 대해 묻고 인터뷰하고 공동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터뷰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이것이 투영된 설치 작업들, 드로잉 등은 서로 겹치고 교차하고 이어지면서 예술에 대해서 되묻고 되묻는다. 실은 결론이 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정답 없는 질문의 연속을 통해서 정의내릴 수 없는 예술에 가까이 가는 것을 작가들 스스로, 혹은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이 전시가 4개의 전시 중 최고였다. 



전시장에 놓인 설치, 드로잉, 영상을 아우르는 통합 작업은 우리 시대 예술의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들은 시각언어보다는 개념 언어가 난무하는 우리시대에 예술이 유지해야 할 범주를 유명 전시 포스터에서 기인한 색상과 설치작업을 통해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 문경원과 전준호는 예술의 본질과 역할을 규정하기 보다는 예술이 인간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담담히 제공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임민욱 - 절반의 가능성 The Possibility of Half 






임민욱은 북한의 김정일 주석과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한 오열하는 주민들 모습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절반의 가능성'을 출품하였다. 슬픔에 가득찬 주민들의 모습에서 국토 전체가 마치 커다란 연극무대가 된 것같은 아이러니함을 느낀 작가는 그러한 연극적 풍광을 조장하는 이데올리기와 미디어의 역할에 주목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교묘하게 섞어 현대 미디어의 속성을 탐구한 임민욱의 작품은 다소 생소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혼자 전시를 보러 갔더라면 열심히 보았을 텐데, 아이와 함께 간 터라 그의 진지하고 도발적인 메시지가 다소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김홍석 - 사람 객관적 - 나쁜 해석 People Objective - Wrong Interpretations 





김홍석은 이번 전시를 위해 '사람 객관적 - 나쁜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세 개의 방을 마련하고 각각의 방을 '노동의 방', '은유의 방', '태도의 방'이라 이름 붙였다. 동일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이 세 개의 방에 대해 작가는 노동, 은유, 태도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작품과 관련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 이야기들은 퍼포머에 의한 전시가이드(도슨트)의 형태로 관객에게 제공된다. 

이를 통해 김홍석은 미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도전하고 동시대의 미술을 미술로 인식하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제공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어 성공하였을까? 참여(도슨트의 설명 듣기)로 완성되는 작품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전시 공간의 한계는 곧바로 작품의 한계로 이어진다. 



4개의 전시는 각기 다른 주제와 접근을 보여주어, 보는 이들마다 선호가 분명히 갈릴 듯 싶다. 나 또한 그랬으니. 하지만 2012년 한국 미술의 현재를 보기 위해 이 전시만큼 좋은 전시가 어디 있을까. 


이번 '오늘의 작가상' 2012 전시는 이번 주까지 이어진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주말 과천국립현대미술관으로의 외출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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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신문들을 읽다가 앤서니 곰리(Anthony Gormley)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고고학과 인류학 전공자이다. 성공한 CEO들 중에 경영학을 전공한 이들이 많지 않듯이, 뛰어난 예술가들 중에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한국은 너무 '전공 편향주의'가 심한 듯하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순수 미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이를 보기 드물고, 학연은 여전히 심하기만 하다. 


이는 미술 뿐만 아닌 것같다. 솔직히 학부 시절 **전공을 이수했다고 해서 그 분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아도 해당 전공 분야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대해 무식한 경우를 너무 봐왔기 때문에 ... 사정이 이렇다보니, 해당 전공에 대해서 무지한데, 나머지 분야에 대해선 어떻겠는가! (결국엔 전공자를 찾게 되는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앤소니 곰리 같은 예술가가 나오리라는 기대를 한국에서는 애초부터 접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씁쓸한 생각에까지 미친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Antony_Gormley



뛰어난 예술가들 상당수는 생각이 깊고 언변이 좋다. 심지어 글까지 잘 쓰기도 한다. 또한 현대 예술가라면 의당 그래야 한다. 칸딘스키가 미술이론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현대 예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우환이 여러 권의 책을 낸 것도 여기에 속한다. 앤서니 곰리의 인터뷰를 옮기는 이유는 현대 예술이 고민하는 한 지점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 의사소통, 공유에 대한 탐구, 육체와 정신, 라이브 캐스팅, 종교 등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이 고민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인형이나 장난감만 한 크기의 조각을 만드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특이한 경험이다. 문득 전체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 나는 당신의 눈동자나 입술의 표현에 집중하지만 이는 전체적인 몸의 표현이 아닌 부분적인 표현일 뿐이지 않나. 아무튼 나는 신체를 27개의 블록으로 구성하면서 단순화하고자 했다. 그러고 나서 인간의 여러 심리를 전체적인 몸짓들로 표현할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인간의 감정을 뼈와 근육과 피부를 표현하는 블록을 이용해 통역한다는 작업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 블록들이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결합하느냐는 인간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이 도록에서 서 있는 세 가지 조각은 언뜻 같아 보이지만 블록의 결합이 미미하게 다르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각각 감사·간절함·자기방어라는 미묘한 감정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몸짓을 우리는 의도하지 않는다. 저절로 그렇게 될 뿐이다.” 



“육체의 자유를 제한할 때 우리의 정신은 더 멀리 나아간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커다란 패러독스다. ‘명상’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라이브 캐스트를 통해 움직임의 반경과 자유로운 표현 능력을 의도적으로 제한하고 모든 육체의 컨트롤을 기꺼이 포기함으로써 한층 더 자유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종교는 어린 시절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종교를 믿지 않는다. 종교는 천국과 지옥, 죄와 벌, 도덕적인 명령 등 매우 파워풀하면서 중요한 교리를 전파하지만 동시에 이는 위험한 사상이 될 수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더 이상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불교는 종교를 뛰어넘어 인생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며, 물질세계 속에서 우리의 정신·육체·생각·의식이 삶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가르친다.” 

- 중앙선데이, 2011년 5월 15일자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699







춮처: http://www.pablogt.com/artists/antony-gormley/


(라이브캐스팅 작품이다. 라이브캐스팅이란 실제 사람 위에 석고를 입혀 틀을 짜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 모던 조각가인 조지 시걸도 라이브 캐스팅을 통해 현대인의 정신적 쓸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출처: http://mocoloco.com/art/archives/001040.php


(위 인터뷰에서 인형이나 장난감 크기로 만든 조각이 이 작품이다. 전시장에 인형 크기의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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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6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Believing is Seeing
마리 앤 스타니스제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연구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두 번 적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적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책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다들 찬사 일변도여서 이건 아닌 것같아 여러 번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라면 원고지 10장 정도의 분량과 슬라이드 20개만 있으면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의 다섯 배 많은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러고 보면 다들 현대 미술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현대 미술을 어렵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째 자기자신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한 관계로 18세기나 19세기의 생각 방식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때문이라고 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현대 미술 비평가들이 잔뜩 어렵게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현대 비평 이론을 몰라도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런 어려운 이론이 왜 필요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작품까지 어려운 이론을 들이밀고 있으니 말이죠.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입니다. '믿는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1+1=2가 맞나요, 아니면 1+1=3이 맞나요?

다들 첫 번째가 맞다고 하겠지만, 몇 분은 왜 저린 질문을 던질까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진 의도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1,+,1,=,2, 3은 다 기호입니다. 추상적인 관념입니다. 원래는 실재하는 사물의 셈을 하기 위해 빗대어 사용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 이젠 관념만 남은 것입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그렇죠. 그러니깐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실제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좀 어렵군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1+1=2가 되고 1+1=3이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고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believing이란 하나의 규범이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입니다. 미술도 하나의 믿음(개념)이며 규범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미술(art)라는 것은'이것은 미술'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했을 때, 보이는 것만 미술로 인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고 이것은 미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저자가 예로 든 모든 것은 다 미술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 우리'가 바라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시스틴 성당 천장화)가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미술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오늘날의 의미로 미술로 인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지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술이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했을 때, 미술의 역사 또한 그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미켈란제로의 후기 걸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지금 우리가 봐도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16세기 중후반의 예술가들, 파르미지아노, 폰토르모, 로소 플로렌티노의 작품들은 무척 현대적입니다. (*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가들입니다.) 오래 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미술의 의미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그들의 작품들은 엄연히 예술 작품입니다. 현대 어느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감동적이죠.

위에서 제가 '믿음은 규범'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미술이라는 제도와 규칙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미술로 인정받기 위한 여러 규칙, 규범, 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현대 미술은 이러한 규칙, 규범, 제도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것은 진보는 아닙니다. 그저 변화일 뿐입니다. 어제 북서풍이 불다가 오늘은 남서풍이 부는 것과 같은 변화일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듯 그런 자연적인 변화입니다. 인위적인 변화도 있지만, 그것도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렇게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죠.

이러한 미술의 변화는 미술 내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미술 자체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실은 모든 예술 이론가들의 꿈이 미적, 예술적 자율성의 확보인데, 웃긴 소리입니다. 왜냐면 예술은 혼자 자족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이 아닙니다. 왜나면 예술은 예술 창작의 대상(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간에)이 필요로 하며 감상자를 필요로 합니다.

미술의 양식 변화는 미술 내의 어떤 동인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더 큰 요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 미술의 변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면 근대 생활은 개인주의 진전으로 이어지듯이 근대 미술도 개인주의화되기 때문입니다. 서명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나쁘지 않습니다. 전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을 뿐이죠.

하지만 미술사와 모더니즘의 발전,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대중매체의 창조, 오늘날의 미술과 문화에서는 순수미술은 물러나고 대중 문화를 차용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듯하여 씁쓰리합니다. 왜냐면 대중문화, 대중매체를 차용한다고 해서 그 미술 작품이 미술관에서 전시되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요. 도리어 그것은 강화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의 저급화'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즉 쓸데없는 소비자본주의적 오브제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짓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정치적 메타포를 집어넣습니다. 이건 요즘에도 통용 가능하는 방식입니다. 정치적 아방가르드 예술이 실제 세상에서 정치적 아방가르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대중들은 그것에 동의할까요? 전 매우 회의적입니다. 차라리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양식적 특징이라고 보기엔 너무 한계가 빤히 보이거든요.

뒤샹이 변기통을 가져다 놓은 이유는, 예술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반 대중에게 야, 니네들이 바로 예술가야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아카데미 미술가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었지만, 도리어 뒤샹의 변기통이 진짜냐, 가짜냐라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극복할 자신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현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여기에 대해선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한참 잘못된 논문입니다. 철저하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작성된 이 논문은 '아우라'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것 이외에는 나머지 것들은 예상을 빗나간 글입니다. 그런데 왜 이 논문을 읽는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예상보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강의 교재로 하긴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식으로 도판 잔뜩 넣은 책을 내고 싶군요. 글은 작고 도판이 많으니, 글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작을 테니 말이죠. 현대 미술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이 책에 대해서 읽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할 것은 저자의 견해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가 아니라, 개념미술과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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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인 2013.06.09 13:22 신고

    제가 읽었던 많은 책들을 읽으셨고, 그에 관한 색다른 시각이나 안목을 갖게 해주시는 서평 감사합니다. 비단 몇 권에 책에 관련된 이야기 뿐만이 아닌 많은 아이디어을 얻어갑니다. 우리가 블로깅을 하듯, 이 책 역시 저자의 생각이고 그가 정의내린 개념일 뿐인데 저같은 일반인들은 너무 수직적인 자세로 미술을 대하는 것 부터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확대시킨 비평가들, 또 그들처럼 인식해야지만 '고상한 취향'을 향유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자체가 큰 오류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저 같은 문외한은 그저 읽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만요.. ㅎㅎ 모쪼록 감사합니다. ^_^

    • 거의 10년 전에 쓴 리뷰이네요. 그리고 흥분해서 썼군요. ㅎㅎ 문제 제기만을 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많은 이들이 찬사를 해서 그 때 꽤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현대 미술에 대한 변명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요. 하지만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문제 제기를 위해서 한 번 볼 필요는 있을 꺼예요.
      댓글 감사합니다. ^^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이 현대 미술인데, 사람들은 현대 미술을 어려워만 합니다. 저는 그것이 도리어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의 탓이라 여겨집니다. 실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미술이 현대 미술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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