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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도. 그래서 그 조각이나 파편들을 이어붙여 우리가 이해가능하거나 수용가능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학문적/이론적 시도는 애체로 불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이나 그 삶 속의 사람들, 사건들, 이야기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그 조작과 파편들의 일부이거나, 그 일부를 묘사한 글이나 풍경이 전부이지 않을까. 그리고 기시 마사히코의 이 책,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생각'(7쪽)으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은 정리되지 못한 채 겉돌기만 하고 '원래 이렇지, 뭐' 식의 자조로 끝난다고 할까. 그런데 이 자조 앞에서 우리들은, 독자들은 이론적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무너진다. 기시 마사히코가 펼쳐놓는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 앞에서, 이야기들 속에서 결국 마주하는 건 쓸쓸한 우리들이거나 어디로도 갈 곳 없고 공감받지 못하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기시 마사히코는 구술 조사를 주로 하는 사회학자다. 


사회학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활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왔다. - 9쪽 



여기에는 다 쓸 수 없지만 구술 조사의 현장에서는 이렇듯,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난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구술현장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널려 있다. 사회학자로서는 실격인지 모르지만, 언젠간 '분석할 수 없는 것'만 모아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 13쪽 


이 책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호소력이 있으며 애잔하다. 


아버지는 수감되고 어머니는 증발되고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맡겨졌으니 아무도 없는 방이 되었는데도, 악취와 해충에 대한 민원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어왔다. 그래서 아파트 관리 회사의 입회 아래, 그 분이 여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곳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가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텅 빈 깨끗한 방이었다고 했다. - 62쪽 


학문의 테두리 안으로 모이지 않지만, 어찌되었건 우리 삶이며 일상이고, 우리가 길을 가며 마주치게 되는 이 도시의, 이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딱히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이 수행해왔던 사회학적 연구 속에서, 그 연구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저마다의 사연으로 누군가에게 알려지길, 읽히길, 그리고 읽혀졌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으로 이렇게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일지도.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 80쪽 


우리들은 '책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어떤 참여를 하게 된다. 소극적 형태의, 작은 공유이거나 공감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다.  


네모진 종이책은 그대로 온전히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네모난 창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으면 실제로는 자기 집이나 거리 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여기에 없는 어딘가 '바깥'이 있고, 자유롭게 문을 열고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가 오면 진정 창과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풀쩍 뛰어나가는 것이다. - 82쪽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타인에게 무신경한 현대의 우리들. 그렇다고 해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에게 신경 써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좁은 지구에, 다 같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만 알아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저마다의 쓸쓸한 사연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아주 작은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것이 고통 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는 '구조'를, 우리는 일체의 감동이나 감정을 빼고,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각자가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라는 것을 조용하게 나눌 수 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 141쪽 


기시 마사히코(岸政彦)

사진 출처: http://www.hankookilbo.com/m/v/9716234b333841bb96d0651e0d0ad18a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10점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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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88458 



잠을 자고 있는 두상이라는 주제에 대해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거의 20년 이상 몰두했다. '잠자는 뮤즈'를 구상하고 작업할 때, 그는 근본적인 형태와 단순화된 세부를 위해 개념들(ideas)을 줄여나갔으며, 이를 위해 극적인 요소와 디테일을 피했다. 그는 관성으로 인해 무겁게 내려앉은, 그러면서 평화롭게 쉬는, 바닥에 엎드린 머리의 모습으로, 나른함(languor)의 본질을 만들었다. 

-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설명을 번역함. 


 

*     * 


저런 잠이라면, 영원할 것만 같다. 1910년, 브랑쿠시는 왜 저런 잠을 꿈꾸었을까. 잠은 죽음과 맞닿아있고 꿈과 연결된다. 삶은 멈추고 운동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 네 태양은 지고 내 어둠은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은 잠시 숨을 고르고 떠나간 연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본다. 어쩌면서 우리의 모든 착오, 실수, 잘못, 그리고 실패한 사랑까지도 저 무거운 잠은 가지고 갈 것이다. 가지고 가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들이 단순화되면서 명료해지고 매끈해지면서 상처는 사라진다. 


그것은 어떤 종결이면서 시작이다. 우리를 아프게 했던 드라마는 흐릿해지고 그 날의 고통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브랑쿠시의 저 우아한 모더니즘이 향하는 위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소란스러운 시절이 가고 고요하고 안정된 평화가 온 것이다. 적어도 저 잠자는 뮤즈 옆에서라면, 그런 평화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www.eroiiromanieichic.ro/constantin-brancusi-i/ 

잠자는 뮤즈의 실제 모델인 Baroness Rene Irana Franc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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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조각 알렉산더 칼더 Alexander Calder  

July 18 - October 20, 2013 

리움Leeum, Samsung Museum of Art 




전시를 보고 난 다음, 리뷰를 쓰기 위해 몇 편의 논문들과 자료들을 모아두었는데, 역시 직장인이란 늘 시간이 없다보니, 이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냥 메모만 해둔다. 


2013년 여름에 있었던 이 전시는 총 118점이 전시된 국내 최대 규모의 알렉산더 칼더 회고전이었다. 칼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무척 뜻깊은 자리였으며, 칼더를 모르는 이들에겐 칼더의 조각 인생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서커스 장면 Circus Scene

1929

Wire, wood and paint

127 x 118.7 x 46 cm

Calder Foundation, New York



알렉산더 칼더(1898-1976)는 움직이는 조각, 모빌을 창안하여 현대 조각의 혁신을 이끌었다.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일상 속에서 미술을 접하며 자란 칼더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으나 결국 잠재된 예술성을 따라 조각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20년대 파리에 머물면서 몬드리안과 미로, 뒤샹, 아르프 등 당시 파리 미술계를 이끌던 작가들과 교류하며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같은 당대 최신 미술 경향을 접하고 크게 영향 받았다. 칼더의 대표적인 작업인 모빌과 스태빌은 칼더의 예술적 재능과 동시대 아방가르드 미술, 움직임을 구현하는 그의 공학적 지식이 조화를 이루어 탄생한 20세기 최고의 혁신적 조각이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서커스 장면>이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철사로만 표현하는 칼더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곡예사들>이라는 아래 작품에서 칼더가 지닌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곡예사들 Acrobats

c. 1927

Wire and wood

87.6 x 22.9 x 30.5 cm

Calder Foundation, New York

Gift of Katherine Merle-Smith Thomas in memory of Van Santvoord Merle-Smith, Jr., 2010




(... ...) 칼더 예술의 근간이 형성된 1920년대와 그의 혁신적인 작업인 모빌이 처음 등장하는 1930년대의 작업들이 선보인다. 우선, 그의 예술적 관심이 발하기 시작한 학창 시절의 그림들, 동물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한 동물 스케치들, 1926년 파리 이주 직후에 시작된 철사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상의 특징적인 형태와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이를 놀라운 솜씨로 표현한 철사조각은 칼더의 천재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어 칼더가 파리의 주요 미술가들과 교류하며 추상미술을 익히고 이를 자신만의 양식으로 탄생시킨 1930년대의 역사적인 모빌과 스태빌도 감상할 수 있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Small Feathers

1931

Wire, hout, lead and paint

97.8 x 81.3 x 40.6 cm

Calder Foundation, New York





The Star, 1960

Polychrome sheet metal and steel wire, 35 3/4 x 53 3/4 x 17 5/8”

Bequest of George and Susan Proskauer 



(... ...) 작가의 전성기인 1940년대의 작업부터, 그가 말년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대형 공공조각의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원숙의 경지에 들어선 1940년대의 모빌은 단순히 균형을 이루는 수준을 넘어 역동적이고 다양한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조각의 형태 역시 작업실 주변 자연 환경에서 받은 영감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반영된 유깆거인 특징이 두드러지면서 다채로와진다. 칼더는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2차 대전 동안 부족해진 금속 재료를 대신하여 나무나 청동으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작업을 선보여 예술가로서의 부단한 노력과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The three wings

Sculpture by Alexander Calder, 1967. 

Angered, Gothenburg, sweden.

출처 - http://commons.wikimedia.org/wiki/




1960년대부터는 칼더는 공학기술을 이용해 공공 장소에 어우러지는 대형 조각을 만드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 산업용 철판을 사용한 그의 대형 조각들은 마치 선박을 건조하듯 볼트로 조립하여 완성되었다. 1960년대는 많은 미국 조각들이 공공조각을 제작한 시기인데, 그 가운데서도 역동적이면서 부드러운 곡석인 특징적인 칼더의 대형 조각은 직사각형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1960-70년대 국제 양식의 건물들과 대비를 이루며 공간에 활기를 불어 넣었고 도시의 랜드 마크가 되었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거대한 속도 La Grande vitesse 

1969

sheet metal, bolts, and paint 



칼더의 <거대한 속도>는 너무 유명한 조각이라,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세계 여러 도시에서 이 작품을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더의 탁월함은 자연적 요소 - 공간, 바람, 공기 - 등과 어우러지면서 조각이 움직이며 이 움직임 속으로 관객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지극히 기하학적이면서도 유려하고 아름답다. 더구나 대중적이기까지 하다. 칼더의 작품은 쉽게 볼 수 있으니, 다음에 보게 되면다면 한 번 유심히 보면서 칼더의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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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 

2012.10.25 - 2013.2.8 

삼성미술관 Leeum 





황량한 현대 미술의 첨단에 카푸어가 불과 몇 명의 위대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우뚝 서 있음은 하나의 구원이다. 시각의 초월적인 기능, 아트의 건전한 엘레멘트의 구사, 풍요로운 표현방식, 긍정적인 미지의 암시 등으로, 그 환기력의 유효성을 정면에서 입증해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 이우환 


* * 



(리움에서 출간된 아니쉬 카푸어 도록. 잘 만든 도록이다)



전시를 본 것은 일 여년 전이지만, 아니쉬 카푸어는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책상 구석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아니쉬 카푸어의 도록 탓도 있었지만, 전시 공간 안에서 보여주는 놀라움과 경이는 현대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여는 듯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도록 - 아니쉬 카푸어는 리움(Leeum)에서 낸 도록을 직접 감수하며 사진하나하나 손수 골랐다고 전해들었다 - 을 펼치며 그의 작품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호미 바바의 말대로, 내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제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카푸어의 작업은 기존에 되풀이 되어온 비평 방식으로 종종 다루어졌는데, 이는 그의 작업을 이미 만들어진 초월적 형이상학의 틀 속에 넣어버림으로써 독창성을 제한해 버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허, 암흑을 절개하는 거울, 아득한, 잊혀진 풍경처럼 수집된, 채색된 꿈의 오브제들, 카푸어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같은 특징들은 '동양적인' 성스러움이나 '서양적인' 숭고 같은 낡아빠진 어휘들에 너무 쉬이 흡수돼 버린다. 초월성에 치우친 담론은 개념미술에 문화적인 강령과 해석적인 코드를 교묘하게 부과한다. - 호미 바바 



이렇듯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들은 우리가 가진 언어적 세계 너머를 향한다. 그리고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혹은 행복하게 강요당하는) 신비한 몰입은 현대 예술의 한 극점을 보여주었다.


카푸어의 고향, 인도를 제외하곤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이었으며, 아마 그 규모의 개인전은 한국에서는 꽤 오래동안 힘들 것이다(아니면 없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들은 구글링을 통해 구한 작품 사진들이다. 레비아탄의 경우에는 리움에서 전시되지 않았으며, 2012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보여주었던 작품이다(이우환은 이 작품을 그랑팔레에서 보았던 놀라움을 도록에 실린 글에서 표현하고 있었다).


*  * 


아니쉬 카푸어에 대한 상당수의 글들이 호미 바바가 지적한 대로의 비평적 방향을 그대로 수용하고, 나 또한 그렇게 해석하려고 했다. 도리어 호미 바바의 글 - 규정하기 어려운 오브제들: 아니쉬 카푸어의 분열적 예술(Elusive Objects: Anish Kapoor's Fissionary Art) - 은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또한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기존 사고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증 속에서 씌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강박증이야 말로 기존 틀을 벗어나 혼란 속으로 들어가, 미래를, 새로운 공간을 여는 행위로 유도하는 촉매제다. 


아니쉬 카푸어와 호미 바바는 같은 인도 출신이며, 호미 바바는 아니쉬 카푸어에 대해 다수의 글을 썼다. 아니쉬 카푸어에 대한 글을 통해, 나는 이제서야 호미 바바를 읽었는데, 그의 책을 한 권 사서 읽어야겠다. 




Sky Mirror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Sky_Mirror




Yellow 

출처 http://openhousebcn.wordpress.com/2012/01/27/good-morning-yellow-anish-kapoor-openhouse-barcelona-art/ 




출처 http://www.omnilexica.com/







1000 Names 

출처 http://www.designyearbook.com/2010/06/1000-names-by-anish-kapoor.html




My Red Homeland 

출처 http://chincha.co.uk/2012/11/anish-kapoor-exhibition-review/ 




Leviathan

출처 http://videoinstallationperformanceliupost.wordpress.com/20-2/sung-bok/installation-sung-b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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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egal,

Wendy with chin on hand, 1982




잊고 지내던 조지 시걸(George Segal)을 보고 울 뻔 했다, 아라리오뮤지엄, 낮고 어두운 실내 한 구석에 있던. 


이 작품은 아라리오 뮤지엄에 있던 작품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었던, 가장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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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이우환 Lee Ufan, 대화(Dialogue), 2011 

 



그의 작품들이 좋아서일까, 이 시집은 그의 회화, 조각, 설치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설명서처럼 읽혀진다. 내가 알기로, 예술가들 중에서 이우환만큼 명징(明澄)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옮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현대 철학과 현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실천력으로 현대 일본 미술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국어 교과서엔 이미 그의 글이 실려있고, 일본어라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검증 받은 글쟁이이다.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08)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이우환은 일본과 유럽에 먼저 알려졌고 그런 다음 한국에서 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가끔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양 떠드는 사람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이러한 태도 밑에 숨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태만, 불성실을 감추려는 불순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잘못된 관행, 정치적 낙후성 등마저도 옹호하려고 한다. 


해외에서 유명해져 국내로 들어오는 경우, 한국 내의 텃세는 만만치 않다. 이는 문화예술계는 더 심해서, 그들의 부족함을 상대의 몰이해, 또는 지역의 차이로 환원시킨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우환에 대한 관심은 국내 미술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한다(이우환 스스로도 그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 전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계 한국 작가였을 뿐이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이우환이 구겐하임과 베르사이유 궁에서 전시한 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의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식자들에 의해 거론되는 경우을 보지 못했다. 가끔 월간 현대문학에 실렸던 책 소개를 제외하곤. 이와 비슷하게, 무수한 번역된 소설들이 나오지만, 정작 한국의 비평가들이 번역 소설들을 평론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했다. 문체나 문장을 떠나 어떤 세계관과 태도, 인물과 사건의 구성, 언어 등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짧지만, 울림이 크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언어로 안내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도 옮긴 바 있지만, 가령 이런 시 말이다. 





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 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컫었다. 이러한 시선에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13)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다행히 현대문학에서는 꾸준히 이우환의 책들을 찍어 내고 있다. 이우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좋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십 수년 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 전을 잊지 못하듯, 그의 진수는 작품들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에서의 이번 전시는 아, 내 처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정말 느끼고 싶은 전시였는데. 기하학적으로 올려진 정원을 걸어가다가 무심코 마주하는 '조응'이라 ... 


 



멈춰서서

이우환저 | 성혜경역 | 현대문학 | 2004.11.19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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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 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 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시선을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 이우환, 시집 <멈춰서서> 중에서 




자코메티, Three Men Walking

출처: http://elogedelart.canalblog.com/archives/2009/05/31/139128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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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신문들을 읽다가 앤서니 곰리(Anthony Gormley)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고고학과 인류학 전공자이다. 성공한 CEO들 중에 경영학을 전공한 이들이 많지 않듯이, 뛰어난 예술가들 중에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한국은 너무 '전공 편향주의'가 심한 듯하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순수 미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이를 보기 드물고, 학연은 여전히 심하기만 하다. 


이는 미술 뿐만 아닌 것같다. 솔직히 학부 시절 **전공을 이수했다고 해서 그 분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아도 해당 전공 분야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대해 무식한 경우를 너무 봐왔기 때문에 ... 사정이 이렇다보니, 해당 전공에 대해서 무지한데, 나머지 분야에 대해선 어떻겠는가! (결국엔 전공자를 찾게 되는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앤소니 곰리 같은 예술가가 나오리라는 기대를 한국에서는 애초부터 접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씁쓸한 생각에까지 미친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Antony_Gormley



뛰어난 예술가들 상당수는 생각이 깊고 언변이 좋다. 심지어 글까지 잘 쓰기도 한다. 또한 현대 예술가라면 의당 그래야 한다. 칸딘스키가 미술이론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현대 예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우환이 여러 권의 책을 낸 것도 여기에 속한다. 앤서니 곰리의 인터뷰를 옮기는 이유는 현대 예술이 고민하는 한 지점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 의사소통, 공유에 대한 탐구, 육체와 정신, 라이브 캐스팅, 종교 등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이 고민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인형이나 장난감만 한 크기의 조각을 만드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특이한 경험이다. 문득 전체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 나는 당신의 눈동자나 입술의 표현에 집중하지만 이는 전체적인 몸의 표현이 아닌 부분적인 표현일 뿐이지 않나. 아무튼 나는 신체를 27개의 블록으로 구성하면서 단순화하고자 했다. 그러고 나서 인간의 여러 심리를 전체적인 몸짓들로 표현할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인간의 감정을 뼈와 근육과 피부를 표현하는 블록을 이용해 통역한다는 작업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 블록들이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결합하느냐는 인간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이 도록에서 서 있는 세 가지 조각은 언뜻 같아 보이지만 블록의 결합이 미미하게 다르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각각 감사·간절함·자기방어라는 미묘한 감정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몸짓을 우리는 의도하지 않는다. 저절로 그렇게 될 뿐이다.” 



“육체의 자유를 제한할 때 우리의 정신은 더 멀리 나아간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커다란 패러독스다. ‘명상’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라이브 캐스트를 통해 움직임의 반경과 자유로운 표현 능력을 의도적으로 제한하고 모든 육체의 컨트롤을 기꺼이 포기함으로써 한층 더 자유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종교는 어린 시절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종교를 믿지 않는다. 종교는 천국과 지옥, 죄와 벌, 도덕적인 명령 등 매우 파워풀하면서 중요한 교리를 전파하지만 동시에 이는 위험한 사상이 될 수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더 이상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불교는 종교를 뛰어넘어 인생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며, 물질세계 속에서 우리의 정신·육체·생각·의식이 삶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가르친다.” 

- 중앙선데이, 2011년 5월 15일자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699







춮처: http://www.pablogt.com/artists/antony-gormley/


(라이브캐스팅 작품이다. 라이브캐스팅이란 실제 사람 위에 석고를 입혀 틀을 짜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 모던 조각가인 조지 시걸도 라이브 캐스팅을 통해 현대인의 정신적 쓸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출처: http://mocoloco.com/art/archives/001040.php


(위 인터뷰에서 인형이나 장난감 크기로 만든 조각이 이 작품이다. 전시장에 인형 크기의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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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중독자의 날개 Wings of Gravity Addict
- 김이경 전, 한전아트갤러리, 2012.1.23 - 2.3


첫 전시를 한다는 건 참 고단하면서도 가슴 떨리고, 기대되면서도 쓸쓸한 일이다. 그건 누군가의 시선 아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드러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형편없는 취향에, 보잘 것 없는 언어에, 혹은 금전적 이득과는 무관한 시기와 질투 속에 휩싸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긴 도리어 지독한 찬사가 작가의 앞길을 망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젊은 작가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란 '작품이 좋네요'이거나 '계속 작업하세요'다. 이 두 말이 가지는, 인생에서의 가지는 위험성과 중독성을 잘 알고 있음에도... 

첫 전시를 한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이며 근사하고 아름다운 무모한 출발이다.

한전아트갤러리는 참으로 외진 곳에 있다. 양재역이라는 번화한 사거리 옆,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는, 시설 좋은 갤러리라는 점이지만, 미술 애호가들이 동선을 꾸미기엔 외진 곳이다. 그리고 특별한 기획전(대중에게 잘 알려진 국내 외 작가의 전시나 흥행성을 고려한 대형 기획 전시 등)이 자주(?) 열리지 않는 곳이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작가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해주면서 전시 공간을 주는 갤러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일이다. (공기업 한국전력에서 운영하고 있어, 작가 지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어느 겨울날 오후, 거리는 한산했다. 전시일정도 참 얄궂다. 설 연휴가 끼인 1월 말이라니.




그러나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면, 금세 눈은 환해지고 즐거워진다.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 뭔지 아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서 뭔가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전시된 작품을 보며서 의미를 찾아야 된다는 강박증은, 마치 더운 여름날 땡볕 밑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가서는, '나무 그늘은 말이야, 나에게 내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여름 날의 나무 그늘은 그냥 그늘이고 그 때 마침 나를 쉬게 해주고 편하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단 조건이 하나 붙는데, 그건 나무 그늘 밑에 가기 전 땡볕에서 땀을 흘려야 하는 것.





작품들은 한결같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러나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실은 우리 현대인들 모두가 저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까 말이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어쨋든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 아직까지 실패는 아니지 않은가. 실은 이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사랑에 실패하더라도, 직장에서 짤리더라도, 누군가의 버림을 받더라도, 어쨋든 다시 그 비슷한 것에 대롱대롱 매달릴 수 있거나, 적어도 심장은 '대롱대롱' 그 호흡을 이어갈테니, 너무 절망하지 말자. 




매달린다는 건 어떤 사이에 위치한다는 걸 뜻한다. 그래서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날개가 있고 그 사이에서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를 날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날개를 움직이지 않는다. 

  




날개가 없거나 머리와 몸이 떨어져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하긴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은데, 몸이, 마음이, 시대나 환경이 따라주질 못해 오르지 못하는 것이 한 두 번인가. 그냥 그럴 뿐이다.

작품은 말 없이 우리 처지를 보여주고 우리는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스로를 돌아본다.




사진이 좋지 않으니, 실제 작품를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이번 주말 한전아트갤러리의 한 전시는 우리들의 숨겨진 예술 욕구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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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_Gravity
전강옥(Kang-Ok Jeon),관훈갤러리, 2008.8.6 - 8.12
- 2008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전시


전강옥_멈추어진 시간, 떠 있는 큐브_나무, 추, 케이블 선_74×69×110cm_2005




어쨌든 삶은 지속된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더라도, 자살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통계적으로는 자살 시도 후 성공할 확률은 매우 낮다(어느 통계를 보니, 자살충동을 느낀 사람들 중에서 자살 성공한 사람은 0.087%,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 중에서 자살에 이른 사람은 2.15%라고 한다). 즉, 어쨌든 삶은 지속된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이 견고한 세계는 그 위용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전강옥의 ‘중력’이, 우리의 ‘삶’의 은유이며, 우리와 적대하고 있는 이 견고한 세계처럼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작가는 야심만만하게 조각의 물리적 측면에서의 본질을 건드린다. 현대 이전의 조각에서는 감각적인 형태가 중요한 부분이었다면, 현대 조각에서는 여기에 운동까지 끌어들인다. 전자가 '정지된 세계'라면, 후자는 '변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꼭 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를 보는 듯하다.

전강옥은 조각은 중력의 예술이라고 단언한다. 실은 조각이 조각이게 하는 것, 우리가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바로 '중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늘 있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물리학적 힘, 중력을 분석하고 확장시켜 작품의 소재/주제로 삼는다. 흥미로운 것은 중력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중력 속에서 조각은 어떻게 운동하여 변화를 만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중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형태에 운동과 변화를 부여한다. 키네틱 아트에서의 일정한 규칙이 있는 운동이 아니다. 그는 부정형의 운동과 변화를 극대화시킨다.
중력 하에서 변화란 중력의 힘을 이용하거나 이를 거슬러야만 가능한 것이다.

‘변화’란 기존의 상태를 부정하는 것이며 일종의 파괴이다. 서양 철학사가 존재의 철학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 ‘변화’를 집어넣는 순간,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듯이 학문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를 긍정했기 때문이고, 우리의 삶과 이 세계 전반에 우연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이는 철학적으로가 아니라 실제 정신적으로 우리를 매우 피폐하게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말자).

하지만 조각가 전강옥은 그의 작품들을 중력의 사이에 위치시키곤, 운동과 변화를 대입시켜 이를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기우뚱해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기도 하고 부서져 있다.

그런데 이게 꼭 우리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세계(혹은 힘) 사이에 끼인 채, 어쩌지 못하는 우리의 삶. 실은 우리도 정해진 바대로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문제는 땅바닥에 고정된 상태에서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중력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할 때면 영향을 미치듯, 우리의 삶 속에 삶은, 이 세계는 우리가 뭔가를 바라고 욕망할 때면 언제나 시비를 걸며, 불평하며, 방해를 하기 때문이다. 너무 과도한 비약일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대 조각이 중력과 싸우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듯, 우리도 이 거대한 세계와 싸우며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가고 있는 것을.

나는 작가가 보여주는 중력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거친 세상이 보였다. 



전강옥_무게, 매스, 공간_나무, 낚싯줄, 석고_190×190×190cm_2006


“조각은 중력의 예술이다. 조각은 매스(mass)를 사용하는 예술이므로 중력의 법칙에 우선적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즉, 조각은 건축과 마찬가지로 중력과 힘의 조작이며 물리적 법칙을 우선적으로 만족시켜야 하는 예술로서, 조각에 있어서의 매스는 부동 상태에 있거나 키네틱 아트에서처럼 운동 상태에 있거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넘어져서는 안 되는 필연성을 가지며, 이것은 곧 조각의 엄격한 규칙이자 동시에 조각 예술의 탁월성이라 하겠다. 조각 예술에 있어서의 엄격성은 바로 매스의 안정성 확보와 균형 상태의 보전에 있으며 이 안정 상태의 상실은 실제적, 상징적으로 조각의 파괴를 야기한다. 균형의 상실과 함께 땅바닥에 수평으로 넘어진 상태는 조각의 부정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된다. 따라서 조각이 조각일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사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삼차원의 공간에 놓인 매스의 균형을 만족시키는데 있으며, 모든 물체를 지표면으로 잡아당기고 쓰러뜨리는 중력의 힘에 대한 완벽한 지배는 조각 예술의 성격을 결정하는 최고의 특성인 것이다.”
- 전강옥의 ‘작가노트’에서 




전강옥_삐딱하게 서 있기 (테이블2)_나무, 석고_110×150×90cm_2008


전강옥_삐딱하게 서있기 (책장)_나무, 석고_230×130×30cm_2008





* 이 전시는 지난 여름에 있었던 전시입니다. 늘 제 리뷰는 느립니다. 작품을 글로 옮긴다는 건 꽤 힘들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작가와 작품을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전시 때 가면 어떨까 싶네요.
* 위 글에서 사용된 이미지들은 neolook.com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비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므로 그대로 옮깁니다만, 저작권에 문제가 있을 경우 바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http://neolook.net/mm08/080806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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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egal
(1924-2000)

Girl Against a Post, 1973
Plaster and cloth with wood
183.5 x 53.3 x 54.6 cm


자기 전에 조지 시걸의 조각 작품 하나를 올린다.
현대인의 쓸쓸하고 슬픈 모습이다.

내 모습이다.
원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다.

- 2003년 9월 16일.



이력서를 만들기 위해 내 사진을 찾다가 이 작품 이미지를 발견한다.
조지 시걸.
너무나 우아하고 슬픈 현대인들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가.
그를 꽤 오래 잊고 있었다.

(아직까지도)내 모습이다.
원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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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아테나를 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고전주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걸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 운명이 어떤 것이었던 간에, 젊은 미켈란젤로를 매혹시켰고 자끄 루이 다비드로 하여금 그 대단한 천재성으로 고전주의 양식을 꽃피우게 했던 것이리라.

라신느를 읽은 지도 오래 되었다. 라신느를 읽을 수 있는 여유가 나에게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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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urtain
George Segal 1974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그녀는 무엇을 보는 걸까.
하얀 그녀.
온 몸이 하얗게 변해, 하나의 색으로 변해,
그녀의 영혼까지 하얗게, 하나의 색으로 변해...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
세상은 그대로야.

왜 그녀는 하얗게 변했을까. 무엇 때문에.

왜 세상에서 멀어지는 걸까.
벽처럼, 단절되어지는 걸까.

하얀 그녀. 하얀 그녀.
커튼을 옆으로 조금 제치곤 무얼 그렇게 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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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시텔레스, <<헤르메스>> (기원전 4세기 경)

 

 

 

그리스의 남겨진 유적들을 보면 사람, 특히 벗은 육체를 표현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리스 고전주의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아직까지도 서술의 힘이 퇴색되지 않고 있는 요한 요하임 빈켈만의 설명을 들어보세요. 그러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인의 육체와 비교해보면 아마도 이피클레스가 그의 이복형 헤라클레스를 닮은 것만큼도 닮지 않았을 것이다. 온화하고 청명한 기후는 그리스인의 최초의 인간 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년 시절부터 행하는 육체적 단련이 형성에 기품 있는 형태를 가져다 주었다. 여기에 젊은 스파르타인이 있다고 하자. 그는 영웅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갓난아이 때문부터 번도 강보에 싸인 적이 없었고 7 때부터는 땅바닥에 잠을 잤고 투기(鬪技) 수영으로 어린 시절부터 육체를 단련시켰다. 스파르타 청소년을 오늘날 우리 시대의 나약하고 나태한 청소년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예술가가 젊은 테세우스나 아킬레우스 심지어 디오니소스의 모델로서 앞의 사람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를 생각해보라. 어느 그리스 화가가 테세우스를 두고 가지 상이한 자태를 특징적으로 묘사한 있는데, 그와 같은 의미에 따르면 후자의 경우에는 호사스럽고 나약하게 장미처럼 키워진 테세우스가, 전자의 경우에는 육체로 단련된 테세우스가 표현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 청소년들에게 ()경기는 육체를 단련시키는 강력한 자극원이었다. 가령 올림피아 제전은 경기가 열리는 바로 지역인 엘리스에서 10개월의 연습 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최고상은 성인만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핀다로스의 송가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이따금 청소년들의 몫이 되기도 했다. ‘신과 같은 디아고라스 닮는 , 이것이 모든 청소년의 최고의 소망이었다.

사슴을 추월하는 날쌘 발을 가진 인디언을 보라. 얼마나 원기왕성하고 신경과 근육은 얼마나 유연하고 민첩하며, 몸매가 얼마나 날렵한지를 보라. 호메로스는 이와 같이 신들을 묘사하였는데, 특히 아킬레우스를 날쌘 발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의 육체는 체조를 통해서, 그리스 거장들의 조상에서 있듯이 애매모호한 것도 군더더기도 없는 당당하고 남성적인 윤곽을 얻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청소년은 열흘에 번씩 행정 감독관 앞에서 나체로 검사를 받았다. 그때 조금이라도 군살이 붙을 징후가 보이면 감독관은 한층 엄격한 절식(節食) 명령했다. 조금이라도 군살이 붙어서는 된다는 것이 피타고라스 계율의 하나였던 것이다. 오랜 옛적 그리스인들 가운데 투기에 지원한 청소년들에게 훈련 기간 유제(乳製) 식품 이외에는 먹지 못하게 것도 아마 동일한 이유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육체가 손상되는 것을 아주 세심하게 피하였다. 알키비아테스는 젊었을 얼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피리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테네의 모든 청소년들이 그의 전례를 따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리스의 의복은 모두 자연적인 발육에 조금도 압박을 가하지 않게 만들어졌다. 그들의 의복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입는 옷처럼 특히 목이나 허리 혹은 허벅지 여기저기를 압박하여 아름다운 형체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에서는 여성들조차 아름답게 보이려고 몸을 조이는 옷은 입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소녀들은 대개 가볍고 짧은 옷을 즐겨 입어, 사람들은 그녀들을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처녀들이라고 불렀다.

- 요한 요하임 빈켈만, <<그리스 미술 모방론>> 중에서 (민주식 , 이론과 실천)

 

 

그리고 부언하자면, 때는 기원전이었고 도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선 군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시민이라면 군인의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육체에 관심은 당연히 높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가벼운 권총이나 개인용 화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칼이나 창과 그리고 갑옷과 방패를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시대의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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