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22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힘들 때마다 꺼내드는 책들이 있었다. 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오래 전에 출판된 임화의 시집, 게오르그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그러고 보니, 이 책들 모두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엔 이 책들을 읽지 않는다. '힘들다'는 다소 모호하지만, 여하튼 요즘엔 이 책들을 읽지 않는다. 어쩌면 힘들다고 할 때의 그 이유가 다소 달라진 탓일 게다.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보냈던 20대엔 대부분의 고초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30대의 고초는 경제적이거나 업무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 수요일에 파리로 가서, 다다음 주 초엔 터키 이스탄불로, 다시 그 다음 주엔 파리로, 그리고 그 주말에야 비로소 서울로 돌아..

여름 밤의 공포

창을 열어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두텁고 축축한 서른다섯 사내의 불쾌한 냄새를 치우려고 해보지만, 바람이 밀려들어 오는 것도 잠깐, 뒤 따라 들어온 빗방울들은 먼지가 쌓인 책상 귀퉁이를 적시고, 체모가 뒹구는 방바닥을 적시고,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책을 덮치고 내 발은, 내 손은 금세 젖어버린다. 나무로 된 케이스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갈라진 캔우드 리시버 앰프의 불륨을 조절하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풍의 피아노 음악 소리 사이로 비가 지상의 여러 구조물과 만나 부서지고 흐르는 소리를 엿듣는다. 그 소리 속에 이 여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어떤 비결이라도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기대를 해 보지만, 삐친 애인의 숨소리 마냥, 그 비결을 눈치 채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주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