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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한국미술 +28





옥토버 

2017.12.8 - 2018.1.31. 

아르코미술관 제 2 전시실 




몇몇 작품들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대단한 느낌은 없었다. 결국 설치작품들은 규모와 공간의 문제일까. 스펙터클이 중요한 것일까.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작품을 보기 전에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거나 들어야 한다는 것은 작품의 해석과 수용에 치명적이다. 결국 조형 예술이 활자언어에 종속되어 그것의 해석/비평에만 의지하게 된다. 무채색의, 별 감흥없이 서있다가 설명을 듣거나 읽었을 때야 비로서 '아'하고 반응한다면, 그것은 독립적인 조형작품이 아니다. 대체로 이 전시의 작품들이 그랬다. 


현대 미술은 너무 자주 비평적 언어에 종속되어, 먼저 개념적 어젠다를 설정한 후, 마치 개념의 설계도를 따라가듯 작품이 만들어지거나, 그렇게 전시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를 이야기하고자 한 이 전시는 실패했다. 애초에 '러시아 혁명'은 우리로부터, 일반 대중으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 즉 관객과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다. 프랑스 혁명의 귀결이 '나폴레옹'이듯 러시아 혁명의 귀결은 '스탈린 체제'와 '냉전'이다. 차라리 혁명이 아니라, 혁명을 부르게 되는 상황에 주목하고, 그 상황에 대한 보다 나은 해결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 예술가의 역할로 보긴 어렵거나 제한적일 것이다. 


이상엽의 사진이나 양유연, 이우성의 작품은 이미 보았다. 양유연의 최근 작품은 처음이었으나, 그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페인팅에서의 스타일의 변화는 사각 평면에 담긴 것 뿐만 아니라 사각의 평면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페인팅이 담기는 매체, 또는 형태도 중요하다. 이상엽의 사진은 잘 알려져 있는 작품들이다. 



전시 팜플릿에 이번 전시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옮긴다. 



- 지금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체제로의 이행은 역사적 필연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존속하지 않지만, 100년 전 인류의 한 사회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길로 사회주의 혁명을 관철했다. 러시아혁명이라 명명되는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 내재되어 있던 본성을 끄집어낸 사건이었으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라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 이 전시 <<옥토버>>는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러시아혁명에 주목하면서도 한국사회에서의 계급투쟁과 계급적대를 한국의 근현대사와 당대의 운동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 이처럼 <<옥토버>>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지배/피지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며, 더 나은 사회와 체제를 이성적으로 열망하고 희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회의 진보적인 힘에 대해 예술언어는 어떻게 응답하는지를 담아내고자 한다. 




양유연, 얼룩, 장지에 아크릴릭, 198x138cm, 2017




이상엽, 자본주의_모스크바, 종이에 잉크젯, 100x150cm, 2004



이상엽_울란우데, 부랴트공화국_Epson 9800 K3 ink, Hahnemuhle paper, monochrome_17×17 _2006


이상엽_모스크바, 러시아_Epson 9800 K3 ink, Hahnemuhle paper, monochrome_11×14 _2007 



이상엽의 사진 작품 몇 개 더 찾아 올린다. 사진이 좋은 점은 실제 보는 것과 모니터로 보는 것과의 차이가 다른 장르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양유연이나 이우성의 작품은 실제로 봐야 하지만.. 



이우성의 아르코 전시 작품 이미지는 구하지 못했다. 대신 학고재 전시 풍경을 학고재 웹사이트에서 일부 옮긴다. 학고재






2009/02/09 - [예술의 우주/리뷰] - 그림 좋다 展 과 Propose 展 - 순수와 상업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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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가나아트 컬렉션 앤솔러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어느 대담에서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과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 감상을 하고 나온 후, 거리 가로수 이파리의 색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세상 풍경이 더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졌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미술관에 들어가 작품을 둘러보고 나오는 일상이 우리들의 삶과 얼마나 멀리 동떨어져 있는가를 생각할 때면, 참 서글픈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일반인들의 그런 일상을 무너뜨리고 미술 - 순수 미술 - 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한 때 고민하고 실천하기도 했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가람미술관에서 가끔, 인상주의전을 하기만 하면, 비싼 입장료를 내고 길게 줄을 서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더 절망스러운데, 그들 대부분 미술을 좋아하고 그걸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전시에 가게 된 다른 목적 - 아이들의 교육이나 일종의 허영의식 - 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한때 미술 작품 구입도 이와 비슷했다. 적어도 미술을 사랑하고 어느 정도 감식안이 생긴 후에 작품 구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전혀 그렇지 못하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컬렉션이 되는 이들은 아예 갤러리 후원을 하거나 갤러리를 직접 운영해버린다.) 


정작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엔 관람객이 적다. 토요일 오후라면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을까 했으나, 의외로 한가하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한가로운 풍경은 지방의 국공립미술관의 그것을 예상케한다. 그리고 이는 정부나 지자체 예산 문제와 이어진다. 실은 미술관의 태만도 일부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학교에서의 미술을 포함한 예술 교육 전반이 잘못된 것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국공립미술관에 관람객 수가 적다고 하여 예산을 깎기보다는 도리어 학교에서의 예술, 특히 미술 교육과 연계된 국공립미술관의 역량 강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며, 이에 따른 예산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글쎄다. 정치인들 중에 예술 교육에 관심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련지. (명품엔 관심 많겠지만!)


'가나안트 컬렉션 앤솔로지' 전은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로부터 기증받은 200점의 작품 중 24명 작가의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품 28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대부분 1980년대 만들어진 작품으로 정치적 메시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열리고 있는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전(~11월 20일까지)과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이도 보았지만 '민중미술'이라는 한국 미술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하였으며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들의 초기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임에 분명하다.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작가들은 강요배, 권순철, 김봉준, 김용태, 김정헌, 김호득, 김호석, 민정기, 박불똥, 손상기, 손장섭, 신학철, 심정수, 한성금, 안창홍, 오윤, 이종구, 임옥상, 정복수, 홍선웅, 홍성담, 홍순모, 황재형 등이다. 


강요배, 심정수, 손상기의 작품만 스크랩해본다. 조각가 심정수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었거나 예전에 보았으나 무심코 흘려보낸 듯하다. 강요배와 손상기의 작품은 예전부터 좋아했고. 그 외 김호득, 안창홍, 정복수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맥잡기

강요배( 1952~) 

종이에 포스터컬러, 200×200cm, 1983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하지만 강요배의 근작들만 이들에게 위 작품은 참으로 낯선 것이다. 미술관 측의 작품 설명 일부를 옮긴다. 


강요배는 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서, 주로 사회의 모순에 대해 발언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맥잡기>는 작가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장식적인 색채 등 민화풍의 소박하고 고졸한 표현 방식으로 그려진 정사각형의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흰 무명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흰 천을 두른 한 청년이 쭈그리고 앉아있다. 양손에 나뭇가지를 붙잡고 맥잡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검은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배경으로 화면 맨 위 중앙에는 '건곤(乾坤)'의 괘가 그려져 있다. (...) 작가는 급속한 서구화가 가져온 전통 문화의 붕괴 현실을 고발하고, 강한 극복의지를 표출하고자 하였다. - 전시설명 중에서



백로즈음

강요배

 Acrylic on canvas, 97×130cm, 2012

(출처: http://topclass.chosun.com/board/view.asp?tnu=201305100007 )


최근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서정성 밑에 굳고 일관된 역사 의식이 숨겨져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민중미술로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 강요배 작품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꽤 의미 있을 것같다. 



오늘

심정수(1942~)

동, 103x147x64cm, 1990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심정수는 사회와 괴리된기존의 추상적인 경향의 조각에 반대하며 진정한 삶과 사회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려는 조각을 주장하였다. (...) 1980년대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비판적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였다. 특히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의 모습과 시대의 아픔을 가장 한국적인 조형언어로 선보였다. <오늘>은 행동하는 인물 군상을 통해 오늘의 나아가야 할 바를 강하게 제시하는 작품이다.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과 바램이 북을 치고 꽹과리를 들고 있는 인물, 어깨동무하고 행진하는 노동자, 민중의 모습을 통해 전달된다. - 전시 설명 중에서


심정수의 작품은 작지만, 힘차고 역동적이다. 강렬한 표현력으로 공간을 사로잡고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금은 거칠고 덜 세련되었더라도 강인하고 그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생명력있는, 정말로 왕성하게 살아 있는 미술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잃어버리기 전에 우리 미술의 건강성을 찾아야겠다. 편협되고 일방적인 사고의 강요에서 벗어나, 모든 문화, 가치존중의 평등시대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면 어느 누구에게서도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우리 현실의 모습과 역사 그리고 의식과 인식, 또한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건강한 정서, 그 모든 것들을 일깨워내야만 한다.”―심정수, 작가노트 중에서, 1990. 


공작도시 - 붉은 지붕

손상기(1949 ~ 1988)

캔버스에 유채, 111x144cm, 1984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손상기는 풍경화를 통해 서민의 삶을 표현했던 작가이다.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추는 불구가 되어 '꼽추화가'로 불리기도 했는데, 3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초기에는 자연적 이미지를 통해 자전적 이야기를 직, 간접적으로 표현하였으나, 사회와 역사 문제로 작품 세계를 확장시켰다. 80년대 당시 기계화, 산업화로 치닿고 있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도시 풍경으로 그리면서 현실에 대한 인식과 사실적 발언을 도모하였다.

<공작도시> 연작은 붉게 물든 도시의 지붕과 잿빛의 담벼락을 보여준다. 시선의 흐름은 전면에 가로막혀 있는 철조망 너머로 붉은 지붕의 수평면을 따라 점차 희미해지며 이어진다. - 전시 설명 중에서 


손상기의 작품들은 보이는 이의 마음 한 구석을 잡아당긴다. 그의 <공작도시> 연작은 너무나 유명해서 미술애호가라면, 아마 다들 한 두번씩은 보았을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작지만, 무척 실속 있다. 전시 관람은 무료다. (현재 열리고 있는 미디어시티서울 전도 무료!) 전시 관람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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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2010년 아트선재센터의 전시는 꽤 충격적이었다. 즉물적이면서 날카로운 느낌을 자아내면서 동시에 토테미즘적인 분위기는 나에겐 매우 낯선 작품들이었다. 그 세계는 근대적 현실에 기초하고 있으나 근대적 삶을 도려내고 근대의 맨 얼굴을 드러내며 파괴한다. 그리고 그 세계의 복원을 주술적 방식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할까. 이번 전시도 이러한 경향을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맡은 프로젝트로 인해 나는 거의 전시를 보지 못했고, 얼마 전 리움에 열린 양혜규의 개인전도 가지 못했다. 뒤늦은 후회를 만회하고자, 양혜규의 몇몇 문장과 이미지를 저장한다. 


*   * 


"몇 년 동안 블라인드에 빠져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조명이 진하게 지나가는 날카로운 선은 성적인 쾌감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멋있게 보였다. 솔 르윗의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은 원래 선으로만 이루어진 작품이었는데, 그것을 모두 블라인드 면으로 대체해서 표현해 봤다. 그러니까 원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여러 속성이 달라졌다. 원본을 뒤집고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다. 사실 블라인드 자체는 미약한 존재다. 반면 성(城)은 공동체의 구역을 배타적으로 구획하는 견고한 것이다. 허약한 블라인드로 된 '성채'는 이러한 배타적인 '공동체에 도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 양혜규, 2015년 4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 중에서. 








Sonic Crescent Moon - Medium Regular #4

2014

Steel frame, metal grid, powder coating, nickel plated bells, metal rings

173 x 54 x 54 cm (H x W x D), 23.2 kg






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 - Voice and Wind, 2009 




Haegue Yang, Shooting the Elephant 象 Thinking the Elephant, installation view. Courtesy Leeum, Samsung Museum of Art.




Haegue Yang, Yearning Melancholy Red, 2008 



"빛, 움직임, 소리는 공간의 역학 안에 있으면서 '추상'을 조명해주고,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시사하는 관습적인 서사를 잠재운다. 나는 최근 들어 다양한 기능을 부여받은 무빙라이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손을 만지는 것처럼, 빛은 천천히 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다양한 표면을 어루만진다. 나는 이를 투명하지만 실재하는 공기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조명은 또한 그림자를 만드는 기능적인 기계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빙라이트의 빛 세례는 다양한 길이와 선명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의 개별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에 대한 관념을 담고 있다. 빛은 자율적인 형식이다. 물리적 경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설치에는 첨단 극장 조명 장비의 움직이는 빛 세례와 정적인 적외선 히터의 붉은 광열 등 다양한 조명이 사용되었다. 둘 다 광원이면서 서로 다른 효과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설치에는 각 히터는 선풍기와 짝지어져 있어 서로 상반되는 힘을 가한다. 짝지은 두 장비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일종의 열망과도 같은 대화, 바람과 열이 서로를 맹렬하게 부정하는 역설적인 재앙이 발생한다. 서로를 파멸시킬 것처럼 작용하며 이는 나에게 사랑과 혁명의 법칙을 증거한다. 그들의 존재는 이러한 가능한 파괴에서 온 것이며 강점적 에너지를 남용한다. 나는 이를 전복적인 행위로 본다. 이는 절박하고, 근본적으로 비능률적이다." 

- 양혜규, 2008년, 래드캣미술관과의 인터뷰 중에서. (<셋을 위한 목소리> 에서 재인용)




셋을 위한 목소리 - 10점
양혜규 지음/현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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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미술잡지를 보다, 오랜만에 선무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주말 사무실 출근 전 건성건성 읽곤 집에 와서 그의 전시 기사들을 챙기며 메모해둔다. 의외로 선무에 대한 글이 검색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주목받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가지는 드라마틱한 요소, 30년 북에서 살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탈북하여 한국에서 들어온 사내, 새터민 화가, 홍대 미대 졸업, 그리고 이젠 두 아이의 아빠. 그런 그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 세계는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고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선무, 들어라!, 캔버스에 유채, 116×91cm, 2009



특히 그가 배웠던 방식의 작품 스타일(일명 주체미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확한 메시지를 무겁지 않은 화법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보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분단환경을 환기시키면서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전달한다. 



선무, 열다, 캔버스에 유채, 72×60cm, 2009



선무, 선무의 노래, C 프린트, 2014


선무, 창밖의 낯익음, C 프린트, 2014



최근의 작품들에서 그가 적극적으로 서구 현대 미술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선무, 엄마 여기 서울이야, 캔버스에 유채, 91×72cm, 2010



몇몇 작품들은 아프고 슬픈 분단 현실을 드러내지만, 우리들은 그걸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의 한국 예술가들 중에 누가 분단 현실에 대해서 탐구하고 조명하면서 이야기하는가?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서 너무 둔감해진 건 아닐까. 이제 분단예술 따윈 없고, 이미 과거형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무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진다. 



선무, 조선의예수2, 캔버스에 유채, 91×91cm, 2010



한국현대미술에서 선무는 매우 중요한 작가이다. 그는 미래형이다. 탈북자 가족들 중에서 소설가나 시인이 나올 것이며 다문화가정이라는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나와, 한국 사회의 현재를 조명하고 비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정말 그것이 기대된다. 우리에게 참으로 많이 아픈 이야기를 들려줄 테지만, 그러는 동안 한국 사회는 성장하게 될 것이다. 



선무, 꽃보라 Piece of flower, 캔버스에 유채, 190×130cm, 2013



* 선무 / SUNMU / 線無   http://sunmu.kr

* 인터뷰기사 -  [RFA 초대석] 뉴욕에서 개인전 연 탈북화가 선무 

(선무의 인터뷰 기사 실린 '자유아시아방송(영어: Radio Free Asia, 약칭 RFA)은 1994년 미국 의회가 입법한 국제 방송법(International Broadcasting Act)에 의해, 1996년에 미국 의회의 출자에 의해 설립된 국제 방송국'이다. 홈페이지 상단의 언어들을 클릭하면, 해당 언어별로 다른 컨텐츠로 나온다.미국 연방 정부 기금에서 지원을 받아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웹사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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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지음), 최재혁(옮김), 반비 




현대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그녀와 이야기하는 게 어려울까? 그렇지 않을 게다. 그렇다면 그/그녀가 만들고 보여주는 미술 작품은? 정녕 모른다면 친구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동시대 미술(우리에겐 현대미술)을 보고 감상하지 못한다면, 그건 미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우리 시대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주위를 돌아볼 겨를 조차 없이 무언가에 쫓겨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주 전시장을 찾고 자기 자신에 대해 보다 솔직해지고(심지어 자신의 아픔, 상처와 대면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현대 미술은 감상하기 어려운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 마치 이 책의 저자, 서경식 교수처럼. 그는 태생적 아픔으로부터 두 형의 구속 등 그의 인생 자체가 바로 한반도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그는 이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미술 순례 시리즈의 시작점이었을 지도. 

서경식은 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있으나, 전문적인 식견으로 파고 들어 분석하는 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대 미술 작가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작업과 작품에 대해 소개하면서도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고 도리어 감동적이고 내가 우리 미술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구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마음을 울리는 작품 앞에서, 그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작가와의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감동은 커녕, 위선과 위악으로 가득찬 작품 도판을 책에 실고 갖가지 이론을 들이미는 책들을 보면서, 나는 '예술 작품의 감동 앞에선 그 어떤 이론도 무용지물인데'라고 중얼거리곤 한다.(아, 이 중얼거림이란!) 

이 책에서도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윤석남에 대한 챕터에서 길게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 하지만 페미니즘은 그저 시류처럼 흘러 지나가고 여성 작가로서의 윤석남에 대하여, 윤석남이 만드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보다 풍성하게 해주는 곁다리 이야기였을 뿐이다. 

현재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 홍성담, 송현숙, 그리고 월북작가 이쾌대, 조선 시대의 신윤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쉽게 읽히나 가볍지 않고,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울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일들이 있었나 할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아마 그건 이 책의 저자도 이미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였으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이 바로 그런 현대를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여러 예술 서적으로 탁월한 에세이스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서경식의 신작 <<나의 조선미술 순례>>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서 더 좋았다. 2015년, 이 책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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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을 짧게 메모해보았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그는 '한국'이라는 단어 대신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한국'은 그 범위가 작아 자기 같은 재일한국인이나 미희와 같은 해외입양아 등 우리 민족 전체를 보여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단어라 생각했으며, 동시에 '조선'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초혼 1980, 1980 


집에서 그렸을 거예요. 광주항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렸던 그림이죠. 광주 상황이 끝나고 나니까 거지와 넝마주이, 구두닦이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 기간에 다 사라져버렸죠. 그들은 대부분 고아였거든요. 찾거나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언젠가는 광주로 돌아올 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렸던 그림입니다. - 신경호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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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는 피사체가 되는 일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84쪽)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예술가는 사회적인 리더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예술 자체가 하나의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 힘들어도 "아아, 이건 예술이니까, 아트 프로젝트니까 ... ..." 라면서 관대히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 정연두(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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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미인도, 114.2cm * 45.7cm, 비단에 채색, 간송미술관 



바로 이런 인상이다. 나 역시 '미인도'에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남성이 지닌 시선의 폭력에 갇혀 긴장하는 모습도 없고, 거꾸로 거기에 아양 떨며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생각도 없이, 정녕 '자연체'인 것이다. 한 마디로 '미인도'의 여성은 '기호'가 아니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동성인 여성이거나, 혹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기에 가능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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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는 단지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디아스포라가 된 배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강제성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경제건, 전쟁이건, 혹은 입양 제도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갈라지고 헤어진 경험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희(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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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담, 욕조: 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 1999 



섬에서 자란 인간이라서 제게 물은 생산의 이미지입니다. (중략) 힘들 때마다 고향의 푸른 바다를 떠올리면 힘이 났습니다. 

그런데 남산에 있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그 생산과 생명의 물, 생업으로서의 물, 나의 희망으로서의 물이 하필이면 나를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 어떻게 예상했겠습니까? 안기부 놈들이 이른바 나를 물과 맞서게 했고, 결국 그 물에게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날조한 대로 저는 북한에도 두 번이나 왕래한 간첩이 되어버린 거죠.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 후로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되살아나서 완전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도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에 대한 공포를 계속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세계를 이루는 원초적 개념 중 하나인 물에 공포를 가진 채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물과 정면대결하자고 생각했어요. - 홍성담 (333쪽)







나의 조선미술 순례 - 10점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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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영웅', 1998.



서경식 교수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읽고 있다. 여기에 실린 정연두와의 인터뷰는, 그동안 무심코 보아온 그의 작품들에 대해 다시 생각케 했다. 정연두의 스쳐가는 이미지들 사이로, 그의 작가적 개입과 실천을 보지 못한 셈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분당의 풍경이 완전히 변해 있었어요. 같은 규격의 아파트가 장대하게 늘어서서 마치 분당이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아파트 동호수만 보이는 느낌이었죠. 어느 날 거기서 교통사고를 목격했어요. 작은 오토바이가 충돌해서 운전하던 아이가 다쳤습니다. 소년은 아픔을 참으며 달려온 사람들에게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어요. 짜장면을 배달하러 가는 참이었나 봐요. 그 후에 그 아이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고 회복한 다음에 이 작품을 찍었습니다." - 정연두 

(서경식, <<나의 조선미술 순례>>, 반비, 115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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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작가 금보성 전 

- 송정미 카네기홀 콘서트 후원전시회 

금보성 아트센터, 2014. 9. 20 - 10. 12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고 한글의 조형미까지도 이야기하지만, 한글 폰트에 대한 관심이 이제서야 조금씩 늘어나는 것같지만, 순수 미술에 있어서 한글에 대한 관심은 아직 멀기만 하다. 내가 한글에 대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건 주제넘은 일이지만, 금보성의 한글들은 참 이쁘기만 하다. 마치 꼬마 아이가 넓은 마당에서 뛰어 노는 듯, 생기 넘치기만 하다. 




단단하면서도 무척 부드러워 보이고 여기저기 튀어나갈 듯하면서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마치 한글의 창제 원리가 우리 입 안의 움직임들로 이루어졌듯이, 금보성의 한글들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보는 이의 눈을, 마음을 건드린다. 





실은 저 채색된 한글들은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져 있다. 스티로폼이 가지는 가벼움, 거칠지만 쉽게 모양을 만들 수 있는 편의성, 그러나 금보성의 손길 위에서 스티로폼은 그 연약한 물질성 위로 강하고 단단한 조형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한글이 가지는 특유의 생명력, 끈기, 부드러움까지도.  



(* 클릭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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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 전시는 이번 주말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평창동에 위치한 금보성 아트센터는 김종영 미술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특히 이번 한글날, 한글작가 금보성의 작품을 만나러 평창동 산책을 계획해보는 건 어떨까? 아마 한글이 가진 미적 우수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는 김에 근처에 위치한 여러 갤러리와 미술관도 함께 다녀보고, 평창동 구경도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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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보성 작가가 직접 작업을 하는 모습이다. 스티로폼이 인상적이다. 




금보성아트센터 위치 (김종영 미술관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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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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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이우환 Lee Ufan, 대화(Dialogue), 2011 

 



그의 작품들이 좋아서일까, 이 시집은 그의 회화, 조각, 설치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설명서처럼 읽혀진다. 내가 알기로, 예술가들 중에서 이우환만큼 명징(明澄)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옮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현대 철학과 현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실천력으로 현대 일본 미술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국어 교과서엔 이미 그의 글이 실려있고, 일본어라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검증 받은 글쟁이이다.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08)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이우환은 일본과 유럽에 먼저 알려졌고 그런 다음 한국에서 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가끔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양 떠드는 사람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이러한 태도 밑에 숨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태만, 불성실을 감추려는 불순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잘못된 관행, 정치적 낙후성 등마저도 옹호하려고 한다. 


해외에서 유명해져 국내로 들어오는 경우, 한국 내의 텃세는 만만치 않다. 이는 문화예술계는 더 심해서, 그들의 부족함을 상대의 몰이해, 또는 지역의 차이로 환원시킨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우환에 대한 관심은 국내 미술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한다(이우환 스스로도 그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 전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계 한국 작가였을 뿐이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이우환이 구겐하임과 베르사이유 궁에서 전시한 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의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식자들에 의해 거론되는 경우을 보지 못했다. 가끔 월간 현대문학에 실렸던 책 소개를 제외하곤. 이와 비슷하게, 무수한 번역된 소설들이 나오지만, 정작 한국의 비평가들이 번역 소설들을 평론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했다. 문체나 문장을 떠나 어떤 세계관과 태도, 인물과 사건의 구성, 언어 등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짧지만, 울림이 크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언어로 안내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도 옮긴 바 있지만, 가령 이런 시 말이다. 





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 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컫었다. 이러한 시선에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13)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다행히 현대문학에서는 꾸준히 이우환의 책들을 찍어 내고 있다. 이우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좋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십 수년 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 전을 잊지 못하듯, 그의 진수는 작품들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에서의 이번 전시는 아, 내 처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정말 느끼고 싶은 전시였는데. 기하학적으로 올려진 정원을 걸어가다가 무심코 마주하는 '조응'이라 ... 


 



멈춰서서

이우환저 | 성혜경역 | 현대문학 | 2004.11.19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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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균 - 빛 

2014. 06.11 - 06.25 

노화랑 Gallery Rho, 서울 Seoul 





Armani lamp on the Santa Fe bench | acrylic on canvas | 116x78cm | 2013 

출처: http://www.rhogallery.com/ 




연필로 글씨를 쓰는 나는 오치균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이 화폭에 남긴 흔적들에 각별한 친밀감을 느낀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중략) 오치균이 손가락으로 물감을 으깰 때 재료가 육체와 섞이는 그 확실한 행복감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재료를 장악하고 그 재료를 육체화해서 재료를 마소처럼 부릴 수 있는 자만이 예술가인 것이다. 언어는 기호이고 또 개념인 것이어서, 나는 오치균이 색을 부리듯이 말을 부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치균의 손가락을 대책없이 부러워한다. 손가락으로 색을 바르는 행위는 세계의 사물성과 불화일 터인데, 그는 그의 불화의 흔적을 남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흔적들이 모여서, 시간의 지속성, 미래에 도래할 새롭고 낯선 색깔의 흐름을 보여줄 때 그의 화폭은 아름답고 강렬하다.

- 김훈, '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 (2008)  중에서 




"그동안 내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빛이 의도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하고 나면 항상 내 작품 속에서 상징 같은 것이 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번 작품들에서의 '빛'은 나의 신체적 장애와 심리적 불안 속에서 나온 의도된 빛이예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촛불 작품을 봤어요. 촛불이라는 것은 희망과 염원을 담고 있죠. 하지만, 촛불은 작은 흔들림에도 꺼질 수 있는 아주 약하고 순간적인 존재예요. 그래서 나는 그것보다 강하고 영원한 빛을 생각했어요. 심지어 나의 생명이 다해도 남아 있을 수 있는 빛, 영원히 잡아둘 수 있는 빛, 그 안에 내 희망과 의지를 담고 싶었던 거죠."


"사람들은 오치균하면 감나무 작가로 기억해요. 하지만 난 감나무만 그린 건 아닙니다. 보통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면 거기에 몰입하게 되지만, 너무 빠져든다 싶으면 손을 놔요. 한 가지만 계속 그리다 보면, 나중에는 작품을 찍어내듯 그릴까봐 두렵고, 또 다른 걸 그리기가 너무 힘들어져요. 그런데 감나무 그림을 그리면서도 이것저것 관심가는 것들을 그렸는데, 사람들은 감나무만 기억해요. 그러다가 작년에 전시를 마치고 나서 하반신 마비가 왔어요. 나 자신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고, 나의 생명이 다하는 건가 두려웠죠. 나는 계속 작업을 하고 싶고, 이렇게 살아있다고 외치고 싶은데, 작품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집 안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그 때 눈에 띈 것이 실내의 사물들이었어요." 

- 오치균 


* 이은주, <화가 오치균에게 그림이란 무엇일까?>(월간미술 2014년 6월호)에서 재인용. 


  

실내의 사물들에게서 색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안식을 찾는 걸까. 나는 (내 마음 속을, 저 서울 거리들을) 돌아돌아 인사동 노화랑에 가서 오치균의 작품을 보았다. 그 사이 나는 그림을 잊고 지냈고 작품에 집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다시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렴풋했다. 


기억을 더듬어 오치균의 예전 작품을 떠올렸고, 그의 세계가 다소 약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오치균이다. 그는 무너져가는 육체 앞에서 생명력을 되찾는다. 그것이 불빛이다. 오치균의 불빛이다. 



(하루 종일 회사 업무를 보고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되면, 나는 너무 쉽게 지친다. 글 한 줄 읽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 짧은 리뷰를 쓰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 목요일 저녁 갑작스럽게 불러내어 술 마실 친구가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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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13 

Korea Artist Prize 

2013. 7. 19 - 10. 20 

국립현대미술관 





겨울바다

공성훈

캔버스에 유화97x130.3cm, 2010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모습이 가득한 화가 공성훈(1965년생)의 그림은 자연에 대한 외경이나 그로부터 비롯되는 숭고미가 아니라, 더 이상 착취될 수 없을 정도로 착취된, 인간에 의해 한갓 연극 무대장치처럼 가공된 자연을 보여준다. (...)


우리가 이들 그림에서 느끼는 경탄은 그림 속에 재현된 자연에 내재한 숭고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자연은 마치 과장된 옷과 차림새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과 애처로움을 느끼게 하는 피에로처럼 보인다. 자연은 스스로의 장관을 한껏 뽐내고 있지만, 그 한껏 과장된 웅대함의 장관은 화면 한 구석에 조그맣게 등장하는 인간의 흔적에 의해 일거에 풀죽어버리고 만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미술과 떨어져 있는가. 나는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보고 공감하고 자신의 영혼 앞에서 솔직해지며 감동받을 수 있다면 하고 바라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작년 가을에 있었던 올해의 작가상 전시는 2012년에 비해 다소 약한 느낌을 주었다. 후보로 선정된 네 명의 작가, 공성훈, 신미경, 함양아, 조해준의 작품들은 매우 개성적인 작업들을 보여주었지만, 파격적이거나 실험성 측면에서 2012년에 비해 얌전하게 보였다. 


그리고 올해의 작가로 공성훈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회화' 작업이 선정되었다는 점은 고무적으로 보였다. 내 취향으로는 함양아의 작품이 마음에 들고 재미있었지만. (아래 비디오 작품이 전시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youtube에서 구할 수 있는 비디오 작품을 옮긴다.)



Fictionality, 함양아 



전시 기간 동안 보여준 함양아의 <넌센스 팩토리>는 '일종의 부조리극 같은 색채를 띄면서 현대사회를 풍자'했다. 그 점에서 비디오 작업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었고 충분히 재미있었고 그러면서 우리들의 일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비디오 작업이 가지는 미술적 가치를 대중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좋았다. 


 

‘화장실 프로젝트’의 비누조각상. 신미경



신미경(1967년생)은 조각의 영역에서 '번역'을 화두로 하여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의 '번역'은 견고한 재료로 된 각종의 고전적 유물을 부드럽고 무른 일상적 재료인 비누로 옮겨내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자리한 고전적 전범들이 가진 견고함을 무르고 부드럽게 만듦으로써, 그 전범들이 지닌 가치의 영속성에 관해 의문을 품도록 이끈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조해준의 작품은 흥미로운 접근을 보여주었고 예술 실천적 의미가 강했다. 


'조해준(1972년생)은 2002년부터 아버지 조동환과 함께 하는 공동작업을 통해 드로잉 연작을 발표해오고 있다. 이 그림들은 격변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온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를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는 해학넘치게 드러낸다. (...) 이러한 공동작업은 차츰 진화를 거듭하여, 매체 상으로는 드로잉, 설치, 만화책, 영화로 확장되어가고 있으며, 그 시야는 아버지와 아들의 삶뿐 아니라 일가친척의 가족사, 1980년대의 민주화 활동가, 더 나아가 최근에는 동유럽 출신 독일 이주민, 북한 유학생, 아랍 출신 성직자 들 세계사의 변방으로까지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이의 풍경>은 아버지와 아들의 두 세대의 삶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같은 대목으로서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삶의 순간, 세계사의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삶의 면면들, 어느 평범한 생활인의 소박한 창조물들이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어 동시대 미술작품으로 재탄생하는 모습들로 이루어진다. 

- '전시 팜플렛' 중에서 



조해준, 미군과 아버지, 종이에 연필 32자의 드로잉, 39x27cm, 2005-2007년




정리를 하다 보니, 함양아의 작품을 가장 좋았다고 하면서 설명은 가장 빈약하다. 전시되었던 비디오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같은데, 구할 수가 없으니 전시 팜플렛을 옮기는 것도 큰 의미가 없는 듯하여 인용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구하게 된다면, 이 포스팅에 넣도록 하겠다. 








* 위 이미지와 동영상은 '국립현대미술관', 'Akive.org', 'Arko' 등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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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부자들

오진희(지음), 머니플러스 




제목이 꽤 역설적이다. 그림으로 정신적 부자가 될 순 있겠으나, 물질적 부자는 글쎄다. 하지만 책의 제목과 상관없이 미술 시장과 관련된 책이 많이 출판되고 많이 읽혀지는 게 미술 시장 전체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그림부자들>>은 현재 경제신문 기자가 미술 시장을 취재하고 체험하고 공부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미술 시장에 대해서 궁금한 이들, 그리고 미술을 감상의 측면이 아닌 투자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적절하다. 그러나 딱 그 지점까지이다. 


도리어 이 책은 좀 더 좋은 책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에서 멈춰버린 느낌이다. 더 많은 컬렉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더 좋은 작가들과의 인터뷰를 하며 한국 미술 시장과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면 이 책은 좀 더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미술 관계자들에겐 이 책을 권하진 않는다. 





그림부자들

오진희저 | 머니플러스 | 2013.03.22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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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NOT A PINE TREE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YUN SUKNAM 윤석남

10.16 - 11.24, 2013, 학고재 Hakgojae 





너와 11-초록으로 물들고 싶어, 113.5x57.5cm, 2013. 제공 | 학고재갤러리

출처:  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1254774.htm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이 있다. 윤석남의 작품들이 그렇다. 몇 주 전 오랜만에 나간 주말 나들이에서 만난 윤석남의 작품은 어수선하던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다. 


그녀의 작품은 어머니 지구(가이아)로부터 뻗어져 나와 모든 존재에 깃든 모성의 흔적, 혹은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나무'라는 소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작품은 나무의 느낌은 뒤로 밀리고 그 위에 그려진 형태가 먼저 들어온다. 


개를 그렸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마치 나무가 사라지고 나무 위에 그려진 존재만 부각되는 느낌이랄까.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라는 전시 제목 뒤로 '그래서 저는 어디에나 있는 아무 것 아닌 모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는 것같기만 하다. 


 

'1025 연작' 나무위에 아크릴물감 116×91×91cm 2008 ⓒ 아르코미술관 사진제공

출처: http://blog.ohmynews.com/seulsong/255630 



요즘같이 불투명하기만 한 세상에서 지쳐가기만 우리들에게 윤석남의 전시는 따뜻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윤석남의 전시 기사를 보게 된다면 놓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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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17일에 쓴 글을 옮겨담는다. 막상 옮기고 나니, 1990년대 후반인지, 아니면 2000년대 초반부터인지, 나는 이우환을 좋아했다. 이 때, 그의 작품 가격이 얼마 하지 않았던 탓에 작품 구입을 목표로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구겐하임에 이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도 전시된다고 한다. 다시 이우환을 읽어야 겠다. 

(관련 기사 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1/24/2013112402357.html )








점에서 from point




이우환의 작품이다. 그는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모노하'의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이론가이다. 위의 작품은 그의 초기 대표작에 해당된다. 


이우환은 국내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고 국내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하다. 그의 책, <시간의 여울>, <여백의 예술>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아직 그의 작품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은 거의 없는 듯하다. 


이번 전시는 어제로 끝났지만, 오노 요코 전이나 피카소 전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관람객이 방문했을 뿐이다. 


점에서 시작해 선으로 이어지고 선은 바람에 휩쓸려 공간으로 확대된다. 공간 속에서는 조응이 이루어지고 관계항들이 생겨난다. 그의 최근작들은 조응 시리즈와 관계항 시리즈으로 대표된다. 


동양에서는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으로 분류되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평가는 동양적이다, 불교적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선'을 떠올리게 된다 등이다. 그러고 보면 이우환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타자'로서 위치해있는 셈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적'이고 일본에서는 '한국적'이면서 '서양적'이고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다. 


위 작품은 점의 운동에 집중하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캔버스 위의 점들은 일렬로 움직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점들은 어디로 움직이는 것일까. 세상 속일까? 아니면 세상 바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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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전시 소개 어플리케이션인 '올댓 주말미술여행'을 가지고 있은 지도 이제 2년이 되어간다. 초반에는 매월 몇 개씩 올리곤 했는데, 바쁜 직장인이 주말 전시 보러 가는 것도 빠듯한 탓에 개점 휴업 상태였다. 이제서라도 반성을 하며, 전시 정보만 담고 있는 글이라도 자주 올릴까 한다. 나도 놓치는 전시 없고 여길 방문하는 이들에게도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주말미술여행'은 구글플레이나 T스토어에 가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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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은 전시를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전시 보러갈 시간은 없었고 주말미술여행은 개점 휴업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전시를 보았지만, 리뷰를 쓰지 못하면 올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소개하기도 전에 전시가 끝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이제서라도 볼만한 전시 정보만이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원래 가을에는 전시가 많다. 여름은 확실히 비수기이고.







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

10.25 - 2013.1.27

삼성미술관리움 Leeum, Samsung Museum of Art




먼저 추천할 만한 전시는 아니쉬 카푸어 전이다.  현대 조각의 최전선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가도 좋을 것이다. 입장료는 8,000원이지만, 이왕 가는 김에 리움의 상설 전시도 같이 보면 어떨까. 





주명덕: 시작과 시작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2012.10.10 - 2012. 11. 25 



주명덕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만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시작'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일까. 평일 사당역에 내리게 된다면, 사당역 근처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에 들려 주명덕의 사진 작품을 보면 좋겠다. 




한국현대미술 : 시간의 풍경들 Landscape of Moment

10.9 - 11.25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에서는 곧잘 주목할 만한 기획전시를 열곤 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현대미술, 다시 말해 컨템플러리 아트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텍스트가 된 인간 : 이응노, 줄리안 오피 & 소피 칼

TEXT & HUMAN : Lee Ungno, Julian Opie & Sophie Calle

9.26 - 2013.1.13

대전이응노미술관



대전에서 이응노와 만나는 줄리안 오피와 소피 칼을 볼 수 있다. 특히 소피 칼이 기대된다. 이응노의 작품은 이미 많은 이들이 보았겠지만, 소피 칼은 드문 기회가 될 테니 말이다. 




(불)가능한 풍경 (Im)Possible Landscape

11.8 - 2013.2.3

플라토 PLATEAU 


플라토의 기획전시이다. 올 가을부터 내년 늦겨울까지 하니, 전시 일정은 넉넉하다. 한국 현대 설치 미술을 볼 수 있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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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Korea Artist Prize 2012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12. 8. 31 - 2012. 11. 11 




* 아래 전시 설명에 사용된 작품 이미지는 국립현대미술관(http://www.moca.go.kr)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오랜만에 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었다. 완연한 가을 하늘이 펼쳐졌고 도심이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전시를 챙기는 것이 예전만 못하다. 직접적인 돈벌이와 관련없는 일이 된 지 오래 되었다. 가끔 있는 원고 청탁으로 전시를 보긴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일상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전시를 챙기기엔 내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전시 보러 가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고, 더구나 꼬박꼬박 기록하던 전시 리뷰나 메모도 이젠 사라진 지 오래다. 책을 읽고 리뷰 쓰는 것도 밀리기 일쑤이고, 글쓰기에 그만큼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다보니, 글의 완성도도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시간 투자와 완성도는 비례한다. 작품을 보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무조건 시간이 걸린다. 미술 관련 책을 수 권을 읽고 강의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실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걸린다. 하루만에 뛰어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지만, 그 하루에는 긴 시간 동안 쌓여져 온 고민과 치열했던 내적 투쟁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이번 전시도 그런 고민들이 여과없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시라고 해야할 것이다. 정치적인 테마에서부터 예술 지향적인 시선까지. 보는 이들에게는 현대 예술이 가지는 '바라봄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어떤 작품은 몽환적인 감미로움으로 빠지게도 하고, 어떤 작품은 메타적인 관점에서의 끈질긴 접근을 요구하며 예술을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현대 한국 미술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작가들의 작품을 도심의 상업 갤러리에서 만나기엔 한국 미술계는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경 - 쌍둥이 성좌 Constellation Gemini 



'번역된 도자기' 작품들만 보다가,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을 보면서 작가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 것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순수함과 여성성을 드러내며, 몽환적이면서도 숨겨진 자아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다. 내 설명보다 전시 소개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다소 어렵게 여겨지겠지만) 작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 싶다. 



한편, 이수경은 양손을 이용하여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되는 회화를 제작하는 자신의 작품 제작 특질에 주목하여 "대칭"을 전시 주제로 선택하였다. 개인적인 작품 제작 방식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개인적인 특질을 넘어 좌우 대칭의 교방춤, 족자 작업 및 설치로 이어진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인 대칭 이미지는 전시장을 메우며 깨진 상처나 파편화된 수많은 나와 타인들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이러한 작업은 내 안의 나 아닌 존재, 즉 내 속의 타인과 타인 속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자 나와 타자의 같음을 발견하고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시 소개 중에서 



문경원, 전준호 - 공동의 진술 Voice of Metanoia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 작품들은 나에겐 무척 의미심장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예술에 대해 묻고 인터뷰하고 공동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터뷰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이것이 투영된 설치 작업들, 드로잉 등은 서로 겹치고 교차하고 이어지면서 예술에 대해서 되묻고 되묻는다. 실은 결론이 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정답 없는 질문의 연속을 통해서 정의내릴 수 없는 예술에 가까이 가는 것을 작가들 스스로, 혹은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이 전시가 4개의 전시 중 최고였다. 



전시장에 놓인 설치, 드로잉, 영상을 아우르는 통합 작업은 우리 시대 예술의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들은 시각언어보다는 개념 언어가 난무하는 우리시대에 예술이 유지해야 할 범주를 유명 전시 포스터에서 기인한 색상과 설치작업을 통해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 문경원과 전준호는 예술의 본질과 역할을 규정하기 보다는 예술이 인간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담담히 제공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임민욱 - 절반의 가능성 The Possibility of Half 






임민욱은 북한의 김정일 주석과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한 오열하는 주민들 모습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절반의 가능성'을 출품하였다. 슬픔에 가득찬 주민들의 모습에서 국토 전체가 마치 커다란 연극무대가 된 것같은 아이러니함을 느낀 작가는 그러한 연극적 풍광을 조장하는 이데올리기와 미디어의 역할에 주목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교묘하게 섞어 현대 미디어의 속성을 탐구한 임민욱의 작품은 다소 생소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혼자 전시를 보러 갔더라면 열심히 보았을 텐데, 아이와 함께 간 터라 그의 진지하고 도발적인 메시지가 다소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김홍석 - 사람 객관적 - 나쁜 해석 People Objective - Wrong Interpretations 





김홍석은 이번 전시를 위해 '사람 객관적 - 나쁜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세 개의 방을 마련하고 각각의 방을 '노동의 방', '은유의 방', '태도의 방'이라 이름 붙였다. 동일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이 세 개의 방에 대해 작가는 노동, 은유, 태도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작품과 관련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 이야기들은 퍼포머에 의한 전시가이드(도슨트)의 형태로 관객에게 제공된다. 

이를 통해 김홍석은 미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도전하고 동시대의 미술을 미술로 인식하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제공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어 성공하였을까? 참여(도슨트의 설명 듣기)로 완성되는 작품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전시 공간의 한계는 곧바로 작품의 한계로 이어진다. 



4개의 전시는 각기 다른 주제와 접근을 보여주어, 보는 이들마다 선호가 분명히 갈릴 듯 싶다. 나 또한 그랬으니. 하지만 2012년 한국 미술의 현재를 보기 위해 이 전시만큼 좋은 전시가 어디 있을까. 


이번 '오늘의 작가상' 2012 전시는 이번 주까지 이어진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주말 과천국립현대미술관으로의 외출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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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작품 하나. 어, 이 작품 문신 거 같은데... 진짜 조각가 문신의 작품이었다.



문신(文信)은 누구인가. 해방 이후 한국 조각가 중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거의 유일한 조각가이지 않은가.

문신(1923 - 1995).
경남 마산출생.

1947년부터 서울과 부산·마산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유화 개인전을 가지며 양화계에 진출했다. 1950년대까지는 인물·풍경·꽃 등의 주제를 그렸으나 그것은 사실적인 재현이 아닌 표현주의적 창작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보수적인 국전(國展) 참가를 거부하다가 유영국(劉永國)·박고석(朴古石)·한묵(韓默) 등이 1957년에 결성한 모던아트협회에 영입되어 1961년에 파리로 갈 때까지 그 연례 작품전에 참가했다.

파리에서는 세계 미술의 현대적 흐름에 자극을 받은 추상 회화로 새롭게 변모를 보이는 한편, 나무를 재료로 한 순수한 조형 작업의 조각도 손대기 시작하며 작품 행위의 확대를 보여주었다. 여러 외국인 작가들과 접촉하고 친밀 관계를 갖는 가운데 조형 방법과 창작 행위에서 독자성을 부각시키다가 1965년에 귀국, 약 2년간 서울에 머물렀다.

1967년에 다시 파리로 간 뒤로는 회화보다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형태의 스케일이 큰 조각 작업에 더욱 열중하여 파리와 유럽 각지의 국제적인 조각전 또는 조각 심포지움에 거듭 초대되었다. 이 시기 문신의 독특한 조각 형상은 생물적이고 혹은 식물적인 표상이 시메트리(symmetry, 左右均齊)의 공간적 구조를 이루며 신비롭고 무한한 생명감이 매혹적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그 작품들은 초기에는 단지 「작품」·「조각」·「무제」 등으로 발표되다가 말년에 가서는 「환희」·「화(和)」·「우주를 향하여」 등으로 심정적 지향의 구체적 명제가 붙여졌다. 재료도 처음에는 참나무 등을 적당히 이용하다가 어느 기회에 발견한 쇠처럼 단단하고 검은 목질(木質)의 아프리카산 흑단나무와 쇠나무 등을 힘겹게 깎고 파내고 표면을 다듬어 마치 철조(鐵彫)나 청동 작품 같은 느낌의 형상미를 특이하게 창출하는 뚜렷한 독자세계를 구현하였다.

1980년에 귀국하여 고향인 마산에 정착한 뒤에는 그간의 시메트리 조형 작업을 주로 브론즈와 스테인리스 금속 작품의 옥외 조각과 대형 환경 조각을 열정적으로 제작하여, 마산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설치되게 하였다.

타계하기 직전에는 자력으로 자신의 미술관을 마산에 건립하여 스스로를 영구히 기념화하였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마산의 경남대학에서는 문신의 세계적 예술 활동과 향토 문화 공헌을 칭송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또한 1991년 프랑스 정부는 문신의 한·불 문화 교류의 큰 공로를 높이 여긴 ‘예술문학기사(騎士)’ 훈장을 수여했다. 1990년 파리 아트센터 초대전, 199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역사박물관 초대 전시 그리고 1992년 파리시립미술관 초대 회고전 등은 문신을 세계적인 예술가로 확실하게 평가한 유럽에서의 대규모 전시였다.



숙명여대 안에 문신 미술관이 있고, 경남 마산(현재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문신미술관이 있을 정도인 조각가이다. 굳이 작품성에 대해서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제 길을 가다 마주친 문신의 작품은...


아, 이 모습은 무언가. 무관심하게 방치된 저 모습.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화가 났다. 다양한 패션 브랜드를 가진 주식회사 한섬 건물 옆 주차장 입구에,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내팽개쳐진 듯한 모습의 조각은 번화한 청담역 사거리, 조금만 걸어가면 국내 유수의 갤러리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거리 옆에서 21세기 한국의 미술 작품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혹시 한섬 관계자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조각상 관리를 했으면 좋겠다. 최근 몇몇 기업체의 Art Collection이 주목받고 문화예술에 대한 메세나 활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이 때, 문신의 작품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취급받는 모습은 너무 안타까웠다.

어떻게 관리해야 할 지 모르겠다면, 조언을 줄 수도 있다. 기업체가 소유한 작품들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이 작품들을 바탕으로 한 관리나 마케팅에 대한 고민도 함께 높아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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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적으로 문신선생님작품을 좋아합니다.기업인들이 작품을 알리가있겠냐만 내팽게치듯한 문신선생님작품이 저런푸대접받고 있는모습이 예술인으로써 맘이 아픕니다.....

    • 이런 경우가 한국에 좀 많죠. 그런데 제법 유명한 패션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한섬이 ... 저도 실망했습니다. ~. 관심없는 것같아요. 한섬빌딩으로 검색하면 이 포스팅이 상단에 나오거든요. 요즘에는 그 쪽으로 출근하지 않아서 현재 상황은 저도 잘 몰라요. 몇 년 전 일이라, 지금은 나아졌겠죠. ~. 아마도.


21세기 풍경 21C Scape in Mind: Emptiness
2011. 8. 26 - 10. 16
성곡미술관 1관 전관 (입장료 있음)




가을의 길목, 성곡미술관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조용하고 한적하기만 했다. 8월말, 한낮의 주말, 바람은 선선했으나, 기온은 30도 가까이 올라갔다. 성곡 미술관은 주말 나들이 나온 이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2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21세기 풍경' 전이었다.

"첨단 과학의 시대, 물질 만능의 시대, 개발의 시대를 만나고 경험하고, 황량하고 덧없는 공허한 심리 풍경을 이야기하고자 기획되었다." - 전시 설명



전시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시된 작품들은 현대 문명 속에서 상처입은 마음의 풍경을 담아내거나 그것을 은유하고 있었다. 작품 대부분은 슬프거나 비틀어지거나 파괴된 풍경을 보여주었고 보는 이들은 현대 문명, 즉 모더니즘의 결과로 제시되는 문명의 심리적 잔해를 작품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다소 우울해지려는 찰라에, 작품들은 실험적이고 다양한 표현 기법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결국 문명의 슬픔을 이겨내는 것은 '실험적 비틀기'이다. 작품은 일종의 치유 과정 속에 위치했고, 공허한 심리 풍경은 작품 안에서 위로를 받았다. 


김기철, 김덕영, 김주리, 김태준, 김해진, 나현, 박성훈, 이정후, 이주형, 황지희 등 총 10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신문을 구토하다, 황지희,
신문지, single channel, site spectific, 2011

스크린에서는 연신 신문지를 씹는다. 아래 파편처럼 떨어져 있는 것들은 씹은 신문지들이다. 신문지를 씹어 토해낸 흔적인 셈이다. 현대 문명을 하루하루 담아내는 신문을 씹는 행위와 이를 토해내는 행위를 Video로 저장하고 이를 다시 전시한다. 이를 보는 과정도 고통스럽지만, 이를 실제로 행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버려진 풍경, 김해진,
시멘트, 건축폐자재, site specific, 2011


김해진의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다른 작가들도 있었으나, 이미 다른 전시에서 보았던 이들이라 이 리뷰에서는 생략했다) 버려진 풍경은 시멘트로 축조된 현대 문명이 무너진 이후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건축 폐자재 위로 피어나는 새로운 세계의 단초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 흥미로운 발상은 하나의 파괴, 또는 폐허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며, 그 시작은 그 전과는 다른 형태임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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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s in Continuous Change
신소영 Shin, SoYoung 전
이화익 갤러리. 2011. 3. 2 - 3. 15


어린 아이의 얼굴만 봐도 절로 미소가 떠오릅니다. 누구의 시였던가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의 시 '무지개'에서 나온 문구네요. 시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번역본을 구하지 못한 관계로..)

The Rainbow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얼마 전 본 전시에서 저는 어린 아이의 얼굴이 가득 담긴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여러 번 대형 전시에서 본 적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한 곳에서 이 젊은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신소영 작가는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어린 아이의 호기심 어린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런데 그 순수함만 있다면 그녀의 작품은 그저 평범한 작품으로만 머물렀을 것입니다. 작품을 천천히 살피면, 문득문득 제 젊은 시절의 반항 같은 것이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이라는 표현이 참 애매하네요. 그게 열 살 무렵인지, 스무 살 무렵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저 거대한 바깥 세상이 한참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우습게 보이기도 하고 기성 세대가 하는 일이라곤 모든 게 틀린 것이라고 여겼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만 있던 세계에서 나 이외에 누군가가 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 동시에, 나 이외의 누군가들은 다 틀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소영 작가의 작품 속에는 그런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보면 철없는 마음이었지만, 동시에 순수함으로 용서할 수 있는 도전과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신소영.어떠니.162.2x130.3cm.oil on canvas-2011.




하나의 작품은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신소영 작가의 작품은 어린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어린 아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하고 있으며, 언뜻 무표정해보이는 얼굴 속에 그 어린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화상이 숨어 있지요.

그림도 잘 그렸지만, 어린 아이 속에 숨어있는, 기성세대 되어버린, 혹은 되어가는 모습을 숨겨놓은 탓에 작품은 볼수록 애잔해 집니다. 이미 답없는 기성 세대가 되어버린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신소영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네요.



알림)

- 인용된 작품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작가에 있습니다. 대신 작품 이미지를 구한 곳의 출처를 밝혀둡니다.
이화익 갤러리: http://www.leehwaikgallery.com/
아주경제신문 기사: http://www.ajnews.co.kr/view.jsp?newsId=20110223000199 

- 전시 리뷰를 쓸 때면 작품 이미지 때문에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닙니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작가나 갤러리 관계자들 분들께서는 오픈 예정인 전시의 보도자료나 작품 이미지를 메일로 보내주셨으면 해요. 이 전시를 보고 난 뒤에 갤러리 큐레이터에게 보도 자료를 좀 부탁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 본 전시 리뷰는 제가 준비 중인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에도 올라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 대화체의 전시 리뷰를 적어보았습니다. 적고 보니 낯 뜨겁네요. 하지만 현대 미술이 어렵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듯 하여 스마트폰에 올라가는 리뷰나 글은 이렇게 쓸 예정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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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잔디, 윤상윤, 조문기
2011. 1. 20 - 2. 17
GYM Project (청담동 네이처포엠 빌딩)



별 생각 없이 들린 작은 갤러리에서 눈이 환해지는 작품들을 만날 때만큼 기분 좋아지는 일도 없다. 네이처포엠이 있는 작은 갤러리, GYM Project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로 그 진지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번에 내가 본 전시는 김잔디, 윤상윤, 조문기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설명문에 담긴 작가 소개는 아래와 같다.

- 김잔디는 장소에 관한 특정한 경험에 자신의 상상을 더하여 그 장소를 황량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장소’는 사회적 경험에서 나온 작가 개인의 기억이다. 이처럼 작가가 갖는 장소에 대한 애착은 장소의 근원적인 성격에 대한 탐구로 진행되었고, ‘집’이라는 장소로 귀결되었다.

- 윤상윤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실제의 공간과 무의식 속에서 채워지는 상상의 공간이 혼재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조문기는 사회적 위치와 시선으로 억눌려 있는 인간의 욕망을 유머러스하게 표출한다. 그에게 있어서 ‘내숭떨지 않는 솔직함’은 작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주된 원동력이다.



김잔디, PS-8, 캔버스에 유채, 36×26cm, 2008

김잔디, 학교, 리넨에 유채, 20×40cm, 2009


"집에 대한 탐구는 결국 노스탤지어와 결부된다. 최초의 집, 자궁의 메타포, 귀환에의 욕망과 그 원천적 불가능성은 런던작업에서의 주된 관심사였다."  - 2009년 전시에서 작가의 말.


그러고 보면, 김잔디의 말대로, 공간이란 향수(노스탤지어)이며, 추억이고 기억이며 흘러간 시간들을 향한 입구와도 같다. 그리고 김잔디의 작품은 작가의 추억, 혹은 내면에의 입구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잊혀져 가는 장소/공간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현대 회화가 심리적인 면을 가지는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윤상윤, Protem 2, 캔버스에 유채, 135×160cm, 2009


윤상윤의 작품은 풍부한 색채와 율동감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윤상윤의 작품은 쓸쓸하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세계를 가지고 서로 만나지 않는다.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이질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듯이. 어쩌면 작품 바닥을 채우는 표면은 서로 만나기 위한 몸짓일 지도 모른다.


조문기, 전구갈기, 116.8 * 80 cm, Oil on canvas. 2010



조문기, 돌림병,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60.6×72.7cm, 2010


조문기의 작품은 유머러스하다. 하지만 그 유머는 우리가 만나는 일상 속에서 약간만 삐딱하게 바라보면 나오는 풍경이기도 하다. 조문기의 작품 속에서는 우리 모습이 숨겨져 있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기묘하고 낯설음과 마주하게 된다. 


전시는 이미 끝났지만, 이 세 명의 작가를 기억해두고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작품 이미지는 neolook.com 및 기타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작품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본 글은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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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평온함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지난 연말부터 시작된 내 마음의 무너짐은 거침없이, 일상을 불규칙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고, 자주 불투명한 인식과 판단, 혼란과 착오, 표현력의 빈곤과 부딪히게 만들었다.

생각이 사라지는 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 존재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데카르트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 삶이 한 번도 명증한 확실성 위에 있었던 적이 없었고 그저 그렇다고 여겼을(인식했을) 뿐이고, 데카르트도 그랬을 뿐이다.


플라톤의 번역서 한 권을 사러 나갔다. 광화문으로. 근처 흥국생명 빌딩으로 향했다. 망치질 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설치 미술이자 공공미술(public art)이다. 이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유명세를 치를 만 하지만, 일반 대중의 관심사는 아닌 듯해, 우연히 마주치는 느낌은 늘 쓸쓸함과 애잔함이다. (상황이 이러니, 순수미술은 얼마나 대중과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확인할 뿐이다.)

흥국생명 빌딩 3층으로 향했다. 1층에는 현란한 색채의 현대 미술 작품들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2층부터 3층까지는 유리 계단이다. 계단 아래로 1층 바닥이 옆으로, 옆으로는 한 눈에 역사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 계단이 매우 못마땅하다. 옆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심한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이 유리 계단으로 올라가길 포기하지 않는다.

3층 갤러리에는 한국미술, 근대에서 길 찾기 추사에서 박수근까지라는 이름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일요일 오후의 한산함 사이로 갤러리에는 제법 사람이 있었다. 익히 보아오던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컬렉션은 좋았고 마음이 놓였다. 한국 근현대미술은 단절되지 않으려는 우여곡절로 이루어져 있다. ‘추사에서 박수근까지라는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묵의 전통에서 한국 현대 추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정신의 형태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환기의 작품이 있었고 장욱진, 권옥연도 보였다. 파란 빛깔의 보기 드문 이대원 작품도 보였다. 대원군 이하응의 작품은 언제나 보기 좋은데, 그가 쇄국 정책을 펼쳤다는 점은 그의 문화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플라톤의 메넥세노스를 읽었다. 집에 들어와, 청소를 하고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알랭 레네를 만났다. 누보 로망과 분절된 언어. ‘내 사랑 히로시마

사랑이 낯설어지기 전에 사랑을 해야 할 텐데, 일상은 고단하고 마음은 닫힌 채 열리는 법이 없다. 2010년의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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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2010.04.19 10:26 신고

    처음 뵙는 분이고, 글이지만... 깜짝 놀랐습니다. 절로 댓글을 달게 되네요.
    닫힌 마음이라.. 이렇게 깊게 자신을 성찰하고 있다니.. 그 무게와 깊이가 부럽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합니다. 봄같지 않은 봄이지만, 희망만 모아서.. 마음을 편히 하시길~

    • 계절이 변할 때마다 마음이 스산해지면서 뒤를 돌아보게 되는 듯합니다. 뒤를 돌아보는 행위가 앞으로 걸어가기 위한 기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지만, 쉽진 않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 2010.04.20 00:55

    비밀댓글입니다

  • noi 2010.04.20 19:40 신고

    지하련님도 내사랑 히로시마와 대면하셨군요. 사랑하며 "닫힌 마음"(^^)을 열어가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않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느껴지데요.. 50년 전에 저런 영화를 만들다니 요즘 영화들은 어떤 의미에서 퇴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퇴보한 건 비단 영화뿐만 아닐 겁니다. 순수한 예술들 모두 퇴보한 것같아요. 소설부터 미술, 음악까지...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 8점
강수미 지음/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한국미술의 원더풀 리얼리티 - 탐미와 위반, 29인의 성좌
강수미(지음), 현실문화


미술비평가란 존재는 낯설다. 기묘하다. 현대 미술 작품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활자 언어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글로 설명된 미술 작품을 전부라고 믿는 순간, 작품은 은하계 너머 미지의 세계로 달아난다. 활자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어떤 이야기(narrative)를 미술은 시각적 언어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활자언어로 된 비평은 작품의 보조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것이 비평 본연의 업무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작가들마저 아이러니하게도 글(활자언어)로 설명된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싶어 한다. 도저히 현대의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나는 가끔 뛰어난 작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나의 설명을 기다리지만, 나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상황에 못 이겨, 풍부한 비유와 아름다운 단어들로 표현하는 순간, 나는 그것이 그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듣길 원한다. 미술비평의 시작은 그런 설명이 활자언어로 옮겨지고 책으로 나오고 신문에 실리던 때부터일 것이다. 어쩌면 아름다운 여인 디오티마에 대해 이야기하던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지도 모르겠다.

미술 비평집이란 그 탄생부터 이러한 한계를 가진다. 활자언어로 담을 수 없는 이미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또한 대부분의 비평집들이 형편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대로 뛰어난 비평집은 자신의 언어와 작가나 작품의 언어가 평행선을 달리며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예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그러나 이 순간 그것은 비평을 넘어서 하나의 이론이 되고 하나의 창조물이 된다. 그리고 그 창조물은 글쓴이의 소산이 되며, 활자언어를 위해 시각적 언어로 된 미술 작품은 보조적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게 된다. 즉 비평 본연의 업무를 저버린 꼴이 된다.

이 점에서
강수미의 이 책은 매우 적절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된다. 군데군데 생경한 단어와 표현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흩어뜨리지 않는다. 확실히 그녀는 작가와 작품의 편이다. 그녀는 자신이 보았고 느꼈던 것만을 이야기한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과도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동시에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적당한 글쓰기이다. 유혹, 관찰, 경계, 확장, 정치. 책 내용의 구분도 적절하며, 작가의 배치도 적절했다. 다만 도판의 크기가 작은 점은 안타까웠다. 몇 명의 작가와 작품이미지, 그리고 강수미의 설명을 옮긴다.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도 이 블로그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최지영, chandelier, 캔버스에 유채, 145×112cm, 2008

마치 손이 벨벳의 도도한 결을 쓰다듬을 때와 같이, 도자기의 서늘하고 매끄러운 표면 위를 미끄러질 때 그런 것처럼, 조명등의 따사롭고 깊은 빛 아래서 그러듯이, 우리 눈이 그림을 감촉하는 것이다. 이 감촉성, 그 감각적 매혹과 욕망의 충족이 최지영 그림이 무대 위에 올려 상연하는 사물의 실재다.(54쪽)

박홍순, Paradise in Seoul, #006, 2007

그가 한강을 대상으로 작업한 최근 사진들은 작가와 카메라가 '즉자적으로(literal)' 깊고 낮은 시점을 취함으로써, 우리가 실제 한강 주변에서 바라보는 '생활세계로서의 한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140쪽)

정연두, 로케이션 #19, 사진 인화, 122×145cm, 2006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사진이미지에 대해서도 전적인 믿음을 갖지 않는 시대에 오히려 아무런 의도나 개념도 없이 '진짜'를 제시하는 것. 이것이 정연두의 <Location>이 가진 깊은 의도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 풍경'을 '모조 풍경'으로 오인하도록 덫을 놓고, '사실'과 '시뮬레이션'의 요소들이 모두 한 지면에 드러난 사진에서 숨겨진 의도(사실은 없는 의도)와 은폐된(사실은 은폐되지 않은) 사실/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어딘가에서 찾아보는 헛수고를 부추긴다. (152쪽)


* 작품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작가들에게 있습니다. 본 블로그는 비상업적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저작권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작품 이미지를 삭제토록 할 것입니다.
* 작품 이미지는 neolook.com에서 가지고 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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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날라온 예병일 씨의 메일레터에,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갈라파고스는 찰스 다윈에 대해 조금의 관심만 있다는 알고 있을 지명이다. 그런데 갈라파고스 신드롬은 또 무얼까?

몇 해 전 일본의 NTT도코모 홈페이지와 KDDI 홈페이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곳 어딘가에서 일본 사람들이 사용하는 최신 휴대폰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때 한국에서 유행하던 최신 기종의 폰보다 더 나아보였다.

그런데 일본의 휴대폰 제조 업체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 며칠 전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일본의 이동통신 관련 산업은 국제 표준이나 트렌드와는 무관하게 일본 로컬 시장만을 겨냥한 나머지, 글로벌 경쟁력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를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고. 

2주 전 중앙선데이는 영국 런던의 사치 갤러리에서 열리는 Korean Eye-Moon Generation 전시를 크게 보도했다. 뭐 중앙일보가 스폰서들 중의 하나였던 전시라, 크게 보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시선을 끌었던 문장은 지난 일요일 판 중앙선데이의 한 문장 때문이다. 

그(큐레이터 이대형)에게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동안 외국 미술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준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로컬리즘에 강해야 글로벌 시장에서 통한다는 얘기였죠. 런던 문화계 인사들에게 개성 있는 한국 작품을 선보인 것이 적잖은 성과라더군요.
- [EDITOR’S LETTER]날자, 한국 미술, 7월 19일자. http://sunday.joins.com

나는 한국 현대 미술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한국 작품들의 로컬리티가 너무 강해서 그렇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로컬리즘이 강해야 된다? 실은 이 표현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인들이 봐도 이해될 수 있는 보편성 위에서의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로컬리즘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로컬리즘이 먼저일까? 세계적인 보편성이 먼저일까? 이건 한국 예술가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하지만, 한국의 예술가들이 한국이라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갇혀 지내는 건 아닌가 하고 고민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미술 뿐만 아니다.


Korean Eye-Moon Generation - http://www.koreaneye.org/ 
홈페이지를 보면, 쉽게 기획된 전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조직적인 기반 위에서 많은 전시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전시를 기획하고 실행한 이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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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Wars - Episode II

- The Phantom Menace -
UNC갤러리, 2009.2.12 - 3.12


눈이 환해지는 전시가 있다. 그런 전시를 만나면, 그 전시 기획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유심히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전시를 만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늦은 겨울, 오랜만에 들른 사간동 UNC 갤러리에서 나는 그런 전시를 만났다. 

건조한 늦겨울 바람이 불었고 피부는 딱딱해지고 눈은 침침해지는 2월 중순, 바쁜 일상 속에 전시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내는 건 꽤 큰 투자다. 늘 누군가와 함께 전시를 보러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지만, 나를 따라 나서는 전시 관람이란, 그 누군가에게도 꽤 큰 고역이 될 것임에.

늦은 오전, 안국역에서 내려 정독도서관 가는 길에 일렬로 늘어선 갤러리들을 다 둘러본 후, 사간동의 다른 갤러리들을 거의 다 지나쳐 대체로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UNC 갤러리다. 이 정도 되면, 이미 몇 시간이 지난 후이다. 아마 이 여행에 누군가와 동행했다면, 그 다음부터 나와 미술 전시 따윈 보러갈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몇 시간 동안 전시를 보았을 때, 우리는 도시의 빛깔이, 계절의 색채가,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표정이, 거리를 지나치는 자동차의 형태와 속도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 될 것이리라.

'스타워즈 - 에피소드' 전은 UNC 갤러리의 연례 기획전이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하게 년초에 전시를 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가들은 김진, 이림, 이승민, 이재훈, 디황 등의 다섯 명이다. 전시 제목은 전시 내용과 관련이 있다기 보다는 전시의 전체적인 방향, 즉 젊은 작가들이 미술계의, 혹은 우리들의 스타(Star)가 되기 바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의 눈을 먼저 사로잡았던 작품은 김진의 작품이었다.

김진, Untitled0824, 캔버스에 유채, 165×165cm, 2008

김진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 마치 색채의 밀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위의 작은 이미지로는 실제 작품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공간 위로 살아있는 덩쿨들이 여기저기 무정형의 운동으로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은 그 공간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 혹은 그 공간의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듯 느껴진다. 마치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우리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 무수한 생각들의 갈래를 밀림의 덩쿨처럼 표현했다고 할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색채에 대한 감각이다. 김진은 자극적인 색채들을 부드럽고 체계적으로 한 공간 속에 융합시키고 있다. 도리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작품 속 공간을 한 없이 낯설고 이국적인 공간처럼 인식되게 만든다.


이림, The mess of emotion no.3, 캔버스에 유채, 160×160cm, 2008


흰 색과 검정 색이 마치 면도용 크림처럼 온 몸을 휘감고 있다. 마치 꼭꼭 숨기고 있던 감정들이 물밀듯 밀려와 결국엔 피부를 뚫고 나와 감싸는 것처럼. 실은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슬픔일 게다. 뒤죽박죽이 되어있긴 하지만, 이젠 견딜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난 후이고, 이제서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큰 캔버스 가득 채우고 있는 한 인물의 낯선 형태 앞에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품을까. 이림의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당혹스러움을 심어놓는다. 마치 사랑하는 이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했을 때, 고백을 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 혹은 그가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아요 . 당신은 당신의 나를 좋아할 뿐, 저를 사랑하는 건 아니랍니다'라고 말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랄까.

하긴 당혹스러움이라는 감정은 비단, 사랑 고백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The mess of emotion이라는 작품 제목에 계속 시선이 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흰 색과 검정 색으로 뒤죽박죽되어 조용히 분출되고 온 몸을 휘감아 도는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 슬픔이겠지 라고 추측하지만, 내 마음 속의 어떤, 슬픈 당혹스러움은 아닐까.


이승민, 적극가담자-방관자, 캔버스에 유채, 91×116.7cm, 2009

이승민, 적극가담자-방관자, 캔버스에 유채, 91×116.7cm, 2009

초점을 잃어버린 눈으로 어딘가 바라는 낯선 형태의 인물. 부옇고 흐린 파스텔 톤의 유화. 마치 어느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인물. 어쩌면 먼 미래의 얼굴. 결국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느 미래의 디스토피아?

이승민의 작품은 20세기 후반의 대중 문화의 영향을 받은 듯한 낯선 인물들을 그렸지만, 우리는 마치 보여지기는 마치 20세기 초반의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 문명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어떤 세상의 정치학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물은 어딘가 모르게 일그러져 있으며, 무표정하고, 마치 얼마 전까지 풍부한 감성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어떤 이가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탈색되어 나타난 듯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품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재훈, Unmonument-이것은 무엇입니까, 프레스코, 190×102cm, 2008


프레스코화라는 낯선, 하지만 오래된 기법으로 제작하는 이재훈의 작품은 익명성으로 굳어져가는 우리들의 일상을 알레고리로 풀어낸다. 기념물이 되어버린 채, 낡은 기법으로 굳어버린 우리들의 일상.

표현스타일은 현대적이고 기묘하지만, 이와 대비되어 나타나는 표현기법 사이의 거리만큼, 이재훈의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디황, u1, 캔버스에 유채, 유리, 스틸, 118×92cm, 2009

디황, u2, 캔버스에 유채, 유리, 스틸, 118×92cm, 2009


디황의 작품은 실제로 보아야만 한다. 유채로 그려졌지만, 실제 작품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유리와 스틸이 보여주는 육중함이다. 그리고 스틸 위에 거칠게 그려진 유채의 느낌. 마치 거칠게 우리 내면을 긁어내는 듯한 터치. 괴기스럽고 무섭다는 느낌마저 주는 작품.

전시를 본 지도 몇 달이 지난 후에 리뷰를 올리는 것이 다소 터무니 없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겐 꽤 불성실한 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다섯 명의 젊은 작가들은 한 번쯤 기억해두면 좋으리라. 아마 눈 밝은 이들에겐 이미 알려진 젊은 작가들이겠지만.



* 본 블로그는 비상업적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위 리뷰에 쓰인 작품 이미지의 저작권은 작가들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저작권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작품 이미지를 삭제토록 할 것입니다.
* 작품 이미지의 출처는 neolook.co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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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manent Story - 이연주(Lena Lee) 展
2009. 1. 19 - 1. 30, 갤러리 담


이연주, 시간과나, 혼합재료, 60×60cm, 2008



붓 터치의 묘한 감정선들, 그리고 즐거운 방황의 흔적.

아무렇게나 그린 듯 보이는 이연주의 작품은, 실은 오랜 경험과 고도의 테크닉이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쉬운 듯 보이나, 산뜻한 유희를 선사하고 화사한 영혼의 사유를 노래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알고 있는 작가는 무모하게 도전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솔직한 표현법과 유쾌한 접근법으로 깊이 없는 깊이를 담아낸다.

쉽게 '쿨(cool)하다'는 표현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연주의 회화엔 적당친 않다. 현대 예술에 있어서 이 표현은 적당한 절망을 바탕으로 한 도피(현실에 대한 고개 돌림)을 의미하지만, 이연주의 회화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연주, 영원한이야기1, 캔버스에 유채, 110×150cm, 2008


이연주, 원더랜드, 캔버스에 혼합재료, 150×110cm, 2007


도리어 추상화된 형태들 속에서 보이는 상쾌함은 어린 아이와도 같은 순수함을 엿보게 한다. 그래서 작품은 보는 이를 즐겁게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현실을 그래도 살아볼 만한 어떤 것으로 만들고 있다. 








* 전시 리뷰를 꾸준히 올리려고 하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네요. T_T; 그래도 자주, 그리고 전시 기간이 남아있는 동안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본 블로그는 비상업적 목적으로 운영되며, 저작권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작품 이미지를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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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中.之.情 - 민병권 展
갤러리 갈라_GALLERY GALA
2008. 12. 17 ~ 12. 30


민병권, 백제송(百濟松), 한지에 수묵담채, 99×76cm, 2008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소리 내어 읽는다.

<격물론>에서는 ‘소나무 가운데 큰 것은 둘레가 몇 아름이고, 높이는 십여 길이다. 돌을 쌓은 것같이 마디가 많고 껍질은 매우 거칠고 두꺼워 용의 비늘과 같다. 뿌리는 굽어 있고 가지는 늘어져 있다. 사계절 푸르러 가지와 잎의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 봄 2~3월에 싹이 트고 꽃이 필어 열매를 맺는다. 여러 품종 가운데 잎이 세 개인 것은 고자송(枯子松)이고, 다섯 개인 것은 산송자송(山松子松)이다. 송진은 쓴데, 땅 속에서 천년을 묵으면 복령(茯笭)이 되고 또 천 년을 보내면 호박(琥珀)이 된다. 큰 소나무는 천년이 지나면 그 정기가 청우(靑牛)로 변하여 복귀(伏龜)가 된다’고 하였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그렸던 강희안은 그의 책 ‘양화소록’ 첫머리에 노송(老松)에서 대해 적고 있었다. 이런 문장도 있다.

유유주(柳柳州)는 최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소나무는 바위 꼭대기에 나서 천길 높이에 우뚝 서있다. 바른 마음과 굳은 절개를 가지고 그 본성을 견고히 하여 얼음과 서리를 막아 겨울 추위를 이겨내니 군자는 소나무를 본받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강희안이 이렇게 이야기한 지도 벌써 600년이 흘렀다. 그러니 이는 오래 전 그림을 좋아하던 한 선비의 취미일 뿐, 현대 세계에는 너무 낯설고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민병권, 송림(松林), 종이에 수묵, 163×130cm, 2005


민병권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은 현대적이라는 데에 있다. 작가는 거친 도시의 일상을 용케 견디고 있는 현대인들이 바라보는 소나무를, 숲을, 들판을 그리고 있다. 이상적인 이념이나 이상향으로서의 소나무가 아니라 삶이 찌들어가는, 거친 터치 속에서 날카로운 표정으로 악착같이 세상을 견뎌내는 어떤 존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흰 여백은 쓸쓸한 눈물 방울들을 흩뿌린 듯, 나무와 들을 감싸고 흐르며, 작품의 깊이를 더하고 있고, 소나무의 거칠지만 힘있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의 포기 없는 생의 숨겨진 인내를 보는 듯 했다.  


민병권, 야송(野松), 한지에 수묵담채, 70×123cm, 2008 


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고 우리의 인생은 늘 이래야만 되는가라는 푸념이 일상의 빈 자리에 자리잡고 있듯, 작품은 어딘가 고통스러운 흔적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품을 감싸고 도는 긴장감은 한 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 삶의 불안감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수묵화가 전통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는 순간, 작품은 낯설어지고 슬퍼지고 견디기 어려운 어떤 것으로 변하게 된다. 인적이 드문 곳에 터를 잡고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선비의 고매함을 뒤로 물러나고 거친 바람과 쓸쓸함을 견디며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현대인의 기묘한 치열함이 자리잡는 것이다. 

민병권의 작품이 가치 있다면, 그것은 현대인의 삶을, 영혼을 수묵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민병권, 야송(野松), 화선지에 먹, 191×97cm, 2007



* 본 블로그는 비상업적 블로그이며, 작품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작품 이미지들은 neolook.com에서 가지고 왔으며, 위 글에 인용된 두 작품들은 2005년과 2007년 전시 작품임을 알려드립니다.
* 본 전시는 12월말까지 계속되며, 갤러리 갈라(02-725-4250)는 인사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대해서는 http://intempus.tistory.com/80 를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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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_마지막 한 입-everybody's leaving_캔버스에 유채_225×155cm_2008 



술집 테이블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그녀도 자리를 떠나려던 차에, 마지막으로 한 입 먹는다. 적당하게 오른 취기와 추운 새벽의 허전함을 텅빈 테이블 위의 남겨진 안주가 조금의 위안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막상 되돌아 생각해보면, 꼭 그럴 때마다 드라이크리닝까지 해서 입고 간 외투에 뭔가 떨어뜨리기 일쑤다. 다음 날 오전, 술자리를 후회하게 만드는 '마지막 한 입'인 셈이다.  

작가는 일기를 쓰듯, 자신의 주변을 기록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회화의 본질은 주술이면서 기록이었다. 뭔가 바라는 마음으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 벽에 벽화를 그렸고 근대 사람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초상화를 의뢰하였다. 결국 우리는 자력으로 뭔가를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세월이 흘러 자신의 삶이 어두운 세월의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박진아_긴 저녁_the long evening_캔버스에 유채_168×180cm_2007 


하지만 결국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건 우리 자신의 무력함이다. 자신만만하게 시작되었던 바로크적 근대주의(데카르트)가 현대에 와서 무너지는 것도 이제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약간 흐트러진 듯한 작가의 터치는, 마치 이룰 수 없었던 무수한 열망들로 가득찬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나와 이제 적당한 포기와 방기를 의미하는 듯하다. 적당하게 자신을 놓아두고, 주위 사람들을 놓아두고, 세상을 놓아두고, 이제 쓸쓸한 박제가 되어버린 지난 사랑마저 잊어버려고 노력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회화가 가지는 매력은 캔버스 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불규칙하고 감정적이며 거친 물감들의, 이제 정지된 채 굳어 있는 어떤 운동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붓이나 나이프에 물감을 묻히고 자신의 손 끝으로 자신의 감정을 실어 보내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언어를.

그리고 작가는 적당하게 그림을 풀어주고 자기 자신을 놓아두려고 한다. 완결성이란 기계적 폭력성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니 디테일보다는 분위기를 잡으려고 하고 그 분위기 속에서 우리 청춘의 무의미한 일상을 쓸쓸하게 담아내려는 것이다.


박진아_김밥먹는 Y_린넨에 아크릴_145×112cm_2004


꼭 사랑을 고백해버리자, 떠나버리는 연인의 뒷모습처럼, 그림은 쓸쓸하고 과거의 어느 때를 회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후회나 절망 보다는 '멋쩍은 웃음'에 가깝다. 기필코 이루려던 어떤 열망이 실패로 결론나자, 도리어 어떤 자유를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박진아의 회화는 일상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지 않고 회화의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화를 자유롭게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유를 갖게 만든다.


박진아_잠 Sleeping at the Corner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08 


하지만 너무 바쁜 현대인들이 박진아의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여유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 하긴 그 여유는 적당한 포기와 실패, 자기 삶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에너지가 있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일 테니.





* 작가 박진아는 1974년 생으로, 서울대 서양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런던 Chelsea College of Art & Design에서 수학하였습니다. 현재는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제가 보았던 여러 작가와 작품들 중에서 좋았던 작가들 중의 한 명입니다.
* 본 블로그는 비상업적인 블로그입니다. 위에서 사용된 작품 이미지는 네오룩(www.neolook.com)에서 가지고 왔으며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생길 경우, 삭제토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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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전 일찍 나와, 세느강 옆을 걸었다.

서울은 마치 표준화, 규격화, 효율화의 전범처럼 꾸며져 있다면, 파리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르다. 얼마 전 서울시 청사의 재건축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 문화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느강 옆을 걸으면서 보게 된 강 옆에 놓인 배들의 모양 하나하나는 각각의 개성을 살려 설계되고 장식되어 있었다.

동일한 디자인의 아파트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서울은 꼭 20세기 초 근대주의자들의 잃어버린 로망을 되살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보인다. 하나가 잘 되면, 그 하나를 따라하기 바쁘다. 한국 사업가들이 '벤치마킹'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문화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 있어 세계가 놀랄 정도의 시간 단축을 보여주었지만, 개성화나 창조성의 부분으로 들어가버리자 여기저기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 정부가 떠들고 있는 '잃어버린 10년'이 바로 '삐걱거리기 시작한 10년'이다. 이는 좌파(이 표현만큼 부적절한 것도 없을 텐데. 실은 전혀 좌파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편의상 사용한다.)적 정책과는 무관하다. 현 정부의 잘못된 정치적 주장이 잘못된 정책 수립과 집행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잠시 유예된 미래를 파리에서 보내고 있는 나는 마자랭 72번지 갤러리 프레드릭 모아장(Galerie Frederic Moisan)에서 하루의 반을 보낸다. 그리고 갤러리 닫는 시간 쯤, 오데옹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샤틀레 역에서 일드프랑스로 나가는 A4 전철로 갈아타고 뷔시 생 조지 역에서 내려 숙소가 있는 골프장 마을까지 걸어간다.

어제서야 비로소 미술관을 갔다.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은 이 곳이 19세기 중후반 미술에 있어서 거의 독보적인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는 뮤제 오르세임을 알게 해 주었다. 약 3시간 동안 관람을 했다. 하지만 나는 빈 노트 하나 들고 나와 하루 종일 앉아 작품 보면서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많은 전시와 아트페어를 다니면서 무수한 현대 작품들을 보아왔으나, 19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근대 미술 작품 앞에서 얼마나 많은 현대의 예술가들이 절망했을까 하는 생각을 들었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미술(부게로, 제롬 같은 이들) 앞에서 A3 사이즈의 정도의 작품들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매혹시켰으며 끊임없이 물결치는 위대한 예술의 바다를 창조해낸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자들과 그 후예들을 만나면서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르세를 나오는 길에 책 몇 권을 사들고 나왔다. 잠시 한국 미술에 대해 생각했다. 온통 꽃 그림들과 과일 그림들로 도배된 한국 현대 미술을 보면 얼마나 참혹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도대체 몇 명쯤이나 알까. 아니면 숲 풍경?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한국 미술인 셈이다.


세느강변 산책로

드가(Degas)의 조각 작품들.

조르주 쇠라의 작품들. 어쩌면 후기 인상주의자들이야 말로 현대 추상 미술의 시작을 알린 예술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모네, 피사로, 시슬리 같은 인상주의자들을 넘어서기 위해 쇠라, 시냑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어떤 이는 일찍 죽은 조르주 쇠라를 아쉬워 하기도 한다.

Comment +2

  • skynsea 2008.10.23 16:00 신고

    혼자서 오르세 갔다가 위통이 생겨서 거의 기절해서 일층 로비에 누워 있다시피하다가 온 기억이 나는 군요.. 기절 끝에 황홀경이라니,.. 복통 중 인상파의 거장들 앞 의자에 앉아 한참을 고통과 감동의 두가지 감정이 복받쳐서.. ^^;



지각과 충동, 2008. 8. 13 - 8. 26, 관훈갤러리



인사동에 나가면 나는 두 가지에 자주 놀란다. 그 하나는 인사동 거리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주말은 말할 것도 없이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사동을 지나간다. 그런데 나는 그 많은 사람들과 대조적인 텅 빈 갤러리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인사동 갤러리에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오픈식이 있는 수요일 오후를 제외하고). 많은 갤러리들이 청담동, 신사동으로 떠나고 새로 오픈하는 갤러리들은 주로 사간동이나 삼청동에 자리를 잡는 요즘, 인사동은 참 애매한 공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관훈갤러리는 믿음직스럽다. 그리고 최근 관훈갤러리에서 개관 30주년 기념전 '지각과 충동'을 했다. 주로 대관 위주로 전시되는 인사동에서 보기 드문 전시였다. 주목할 만한 한국의 젊은 화가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특정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2008년 젊은 한국 미술을 경험할 수 있는 즐겁고 유쾌한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내 눈에 들었던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에 대해서 적어보기로 한다. 

김병호, Silent Pollen - sowing, Silent Pollen - gathering SIZE: 225(width)x60(height)x43(depth)cm, MEDIUM: aluminium, microspeaker, DTMF generator 
출처: http://aliceon.tistory.com/797 (김병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익한 아티클이 있음)

김병호는 미디어, 특히 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듣는다'는 행위 위로 그는 조형적 미학을 덧붙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설치 미술이거나 현대적 방식의 조형물 처럼 보이지만, 실은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미디어 아트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조형적 아름다움에 있다. 그리고 그 장점 속에서 '소리'를 찾게 만든다. 어쩌면 현대적 매체들 속에 숨겨진 본질적인 어떤 것에 대한 탐구일 지도 모른다.

김병호_"그들의 꽃 Their Flowers"
황동, 콘덴서마이크, 마이크로스피커_가변설치_2006
출처: www.neolook.net (2006년 갤러리 쿤스트독 전시 사진)


전정은의 사진은 이질적 공간의 조합이 특징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폐허로 변한 인간의 공간 너머로 자연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 기묘한 대비로 인해 그의 사진은 낯설어지고 보는 이를 끌어당긴다. 꼭 로마 후기 회화의 환영주의적 양식 처럼, 어쩌면 우리는 거대한 자연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반대로 도시, 혹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공간에 지쳐가고 있는 지도.

전정은_Landscape of egoism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07

전정은_Landscape of egoism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07

전정은_Landscape of egoism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07
출처: www.neolook.net  (2008년 5월 관훈갤러리 전시 자료 중에서 인용함)


좋아하는 작품이란 있기 마련이고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전문적인 지식의 양과는 무관해진다. 대신 (예술)경험의 폭과는 비례한다고 생각된다. 이번에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는 이지원의 작품은 '무미건조한 도시에서의 서정성'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서정성이라, 실은 빨간 옷을 입은 꼬마아이가 다리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과 이 단어를 연결짓는 내 감성이 다소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엎드려 있는 행위를 한 번이라고 해본다면, 그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회화 경향 중의 하나가 낯설 풍경을 과감한 색채나 터치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지원의 작품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뭐, 이건 최근의 트렌드이고, 나는 이 작가를 알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했지만, 이 작품은 묘한 감동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이지원, 도시에서의 삶no.1, 162.2 x 130.3 cm, Oil on canvas, 2008
(출처: 전시도록에서 간단하게 사진촬영함. 스캔은 저작권에 심하게 위배됨으로 사진촬영으로 대신하였음.)


'프리허그'라는 낯설고 낯뜨겁고 심지어는 한국 사회마저도 개인주의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되었는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행위가 한동안 전파를 타고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하긴 나를 포함해 한국에서는 포옹을 할 일이 거의 없다. 요즘은 모르겠으나, 내 기억 속에는 가족끼리도 포옹을 하는 것이 낯설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포옹'을 그린 김윤정의 작품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쓸쓸해보인다. 어둡고 건조한 배경 속에 서 있는 두 인물의 표정은 창백하고 포옹하고 있으나, 그 포옹의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 그 느낌을 찾기 위해 자신의 쓸쓸함 속으로 여행을 떠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외롭고 쓸쓸한데, 그것을 다들 숨기기 위해, 아니면 회피하기 위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자신을 내몰며, 자기 자신을 잊어버려고 노력하는 건 아닐까. 이 점에서 김윤정의 작품이 가지는 여운은 꽤 길고 부드럽고 슬프다.


김윤정, untitled, Oil on canvas, 193 x 130 cm, 2008

김윤정, untitled, Oil on canvas, 193 x 130 cm, 2008
(출처: 전시도록에서 간단하게 사진촬영함. 스캔은 저작권에 심하게 위배됨으로 사진촬영으로 대신하였음.)



* 위 인용된 작품 이미지들은 저작권을 득하지 않았음으로, 저작권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 삭제토록 할 것입니다. 이지원 작가와 김윤정 작가의 작품 이미지를 구하고 싶었으나, 온라인에서 그들의 작품 이미지를 구하지 못한 관계로, 도록에 실린 작품 이미지를 카메라로 찍어 올립니다.
* 본 리뷰와 관련된 문의는 yongsup.kim@yahoo.com 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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