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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2004년에 쓴 포스팅이라니. 벌써 12년이 흘렀구나. 함민복과 채호기의 시다. 


*** 2004년 1월 27일 *** 


강화도 어느 폐가에 들어가 산 지 꽤 지난 듯 하다. 세상의 물욕과 시의 마음은 틀리다는 생각에 인적 뜸한 곳으로 들어가버린 시인 함민복. 그의 초기 시들은 무척 유쾌하면서도 시니컬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연시들이 많아졌다. 외로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광고를 위해 지은 그의 시 "설중매"는 세상의 술에 취한 영혼을 살며시 깨우고 저기 멀리 달아나는 그리움을 조용히 잡아 세운다.



설중매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 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내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이 시 때문에 설중매를 얼마나 사 마시려마는, 내 마음 외로운 탓에 차가운 겨울 오후부터 술 생각 동하게 만드는 건 함민복의 시가 가진 힘일 게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어 술을 마시면 좋을련만, 그 꿈 접은 지 오래. 하지만 꿈을 가지는 상상은 때로 좋을 때가 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오래된 시 한 편 읽어본다.



몸 밖의 그대 1


1

그대와 마주앉아 그대의 술잔에 술을 따릅니다. 그대의 몸
을 조금씩 채워가는 술. 그대와 마주앉아 내 몸에 따르어지
는 그대를 봅니다. 내 몸 속에 채워지는 그대. 술은 그대 핏
속으로 스며 구멍마다 붉은 꽃송이 내질러 숨막히는 향기로
내 몸을 묶어놓습니다. 그대는 내 몸으로 들어와 영혼을 점
령하고 옴쭉달싹 못하게 합니다.


2

내 몸 속에는 그대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죽
었다고 하지만 내 몸 속에는 그대가 온전히 살아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의 사막에 홀로 버려
질 때 그대는 내 몸을 찢고 밖으로 나옵니다. 내가 그대를
그토록 사랑했듯 그때야 비로소 나는 없고 오로지 그대만이
있습니다.


********


어느새 십이년이 넘어버린 채호기의 시다. 술에 취해 이 시를 읽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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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산문집, 이레


열어놓은 창으로 차가운 새벽 공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초가을 모기까지 들어와 날 괴롭힌다. 제 철이라 핀 코스모스는 바람의 상쾌한 노래 소리에 몸을 흔들지만, 그걸 곱게 봐 줄 사람 없는 도로 한 복판에 피어 지나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기에게 물린 발등의 자국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모기 소리는 계속 내 귓가를 맴돌며 흘러 다닌다. 이 모든 것들은 가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그것도 오염된 가을이.

오염된 몇 번의 가을을 거치자, 나도 오염되었다. 이제 매우 불순한 상태로 오염된 내가 몇 달 동안 읽은 함민복 산문집. 처음은 좋았으나, 중간은 피곤했으며 끝은 알 턱 없이 슬펐다. 나는 함민복 씨를 만나본 적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의 첫 번째 시집에 서가 구석에 있기는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시집에서 그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주 오래 전에 그가 강화도 어느 폐가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는 말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을 때, 시인으로 살기 어려운 시절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드문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의 산문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 진실했으며 때로 슬펐지만, 그 뿐이다. 내 감성은 악착같이 그의 언어에 동화되길 거부했으며 거부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젓이 살아남아야만 하는 나로선 그의 언어는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 이제 조용히 서가로 꽂히게 될 이 책은 그 숨결을 숨기고 잠잠해질 것이다. 기억은 영원하지 않고 그것보다 더 내 삶은 짧을 것이므로.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영향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면으로 덧씌워진 내 삶의 자유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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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고 하더니, 하늘은 흐리기만 할 뿐 기척이 없다. 하루 사무실에서 엎드려 잠을 잤더니 몸 여기저기가 쑤시는 듯 하다. 세수를 하고 진한 커피 한 잔을 해 마신다. 그리고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3곡을 무한 반복시켜 놓고 4월 1일 토요일의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젠 술이 고파,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 많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며칠 전 교보문고에 가서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를 샀다. 그리고 오늘 책들이 쌓여있는 구석에서 함민복의 '우울氏의 一日'을 꺼낸다. 1990년 10월 초판, 1991년 1월 2쇄. 이 때만 해도 시집이 잘 나갔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얇게 웃는다.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 한번 못 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 지도 모를 질문의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며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린다.

  - 함민복, '우산 속으로도 비소리는 내린다', 3연과 4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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