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하련 2009. 6. 28. 13:41

고도를 기다리며 - 10점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꽤 큰 도전이다. 지금 그 도전을 하고 있다. 지난 주 내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이번 읽는 것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매번 읽을 때마다 시선이 가는 문장이 다르고 연극을 다르게 해석한다. 다음에 읽을 땐, 또 어떤 느낌일까. 

과제물로 제출한 간단한 페이퍼를 올린다.  조금 형편없이 쓴 글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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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의 뽀조와 2막의 뽀조는 서로 대비되면서 마치 눈을 가린 현자, 혹은 운명의 여신처럼 보인다. 명령을 내리듯 말하고 모든 걸 아는 듯 단언적이다. 럭키는 이런 뽀조 옆에서 혼자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뽀조의 명령 체계 속에서 정해진 대로 움직일 뿐이다.

뽀조와 럭키가 대변하는 인물은 너무 분명하고도 명확하다. 뽀조가 이 세상에 마치 진리가 있는 듯, 그리고 그 진리를 알고 있다고 떠벌리고 돌아다니며, 남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 또는 자신의 생각과 언어가 마치 이 세상의 도덕이며 가치 기준이라고 믿는 종교인이나 사상가, 권력가를 상징한다. 그리고 럭키는 대다수의 무능력하며 다수의 뽀조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세계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뽀조와 럭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는 고도란 무엇일까. 그 전에 먼저 기다린다는 행위를 무얼까. 그것은 어떤 바람이나 소망을 상정하는 행위이며, 언제나 고통스럽거나 결핍된 현재와 대비되어 나타나는 미래의 출현을 뜻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으며 아무도 떠나지 않는 정말 지긋지긋한' 공간 속에서의 '고도'라는 미래의 출현은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실은 극이 끝나기 전에 고도가 무대에 등장한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희곡이 놀랍고 천재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대에 등장한 고도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던 그 고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고도가 아니라 기다린다는 행위일 것이다.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린다는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애초에 고도란 없고 임의로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일 뿐이다. 이 두 주인공은 기다림이라는 행위, 끝없이 뒤로 유예되며, 결론나지 않을 어떤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건조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무대는 부조리하다.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지만, 그들은 동시에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자기 방어적이며 자기 기만적이다.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에 널려 있는 뽀조들이 될 수도 없고 럭키들이 될 수도 없다. 디디와 고고는 어떤 행위를 선택했지만, 그 행위의 귀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선택에 대해 따져묻지도 않고 그저 선택을 했음을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이 희곡이 부조리하면서 암울하고 슬픈 이유는 디디와 고고가 아무 것도 묻지 않는 데에 있다. 그들이 한 번이라고 자신들의 상황을 따져묻는다면, 조금은 더 슬플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묻지 않을 것이고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그들 앞에 고도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고도를 부정할 것이고, 다시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고도를 기다림으로서 그들의 삶은 뒤로 밀려날 것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듯, 그들은 그 부조리를 뒤로 끊임없이 유예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