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달팽이, 또는 달팽이사내

지하련 2003. 9. 6. 11:18



1.

기사 식당에서 혼자 삼겹살에다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파아란 상추에서 새끼손가락 손톱의 4분의 1 정도 크기의 달팽이를 발견했다. 신기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는 동안 물수건 위에다 놓아두었다가 식사를 끝내고 보라매공원까지 걸어가 풀숲에다 녀석을 놓아두었다. 가는 내내 내 왼손, 가운데손가락 위에서 꿈쩍하지 않더니 기다란 풀입 위에 놓아두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자동차들의 불빛에 놀라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정원없는 내 거처를 탓해야만 했다.

그 작은 달팽이가 보라매역 근처 기사 식당까지 오게 된 사연을 생각해보면, 그것을 달팽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식당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손가락 하나를 펼쳐놓고 있는 모습을 본 식당 아줌마가 손을 데였나고 물었다. 난 잘 보이지도 않는 달팽이를 보여주었더니, 그걸 어떻게 할 거냐고 다시 묻는다. 그래서 근처 풀숲에다 놓아주려고 한다니까,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런, 다음부터 날 '달팽이사내'로 부르는 건 아닐까. 보라매역 근처, 신길 6동에 사는 달팽이 사내라고 말이다. 작은 풀숲이지만, 그 작은 달팽이가 살아남는다면, 난 기쁜 마음으로 '달팽이사내'로 불림을 당할 것이다. 오우. 달팽이 사내. 오우. 달팽이 사내.


2.

며칠 전부터 삼겹살을 먹고 싶었다. 느닷없이 삼겹살을 먹고 싶었던 까닭은 부산에서 올라온 후배 덕분이었다. 홍대 고기 골목(* 난 이제 그 길을 고기 골목이라고 부르리라) 끄트머리에 위치한 지하 까페에서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부엌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까페는 부엌에 어울리지 않게 하얀 별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곳으로 가기 위해선 기다란 고기 골목을 지나쳐야했고 입은 옷 군데군데 고기 굽는 냄새가 배였고 심지어 영혼 까지 고기 굽는 냄새로 물들 지경이었다. 더구나 커다란 창을 가진 고기집에서 짧은 검은색 스커트를 입은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고기를 먹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기라도 하는 순간에는, 난 서른하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선망의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와 함께 고기를 먹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곤 하였다.

난 세련된 옷차림에, 날씬하고 긴 머리를 가지고 얼굴이 하얀 여인을 좋아하는데, 아마 이런 여자는 날 좋아하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면 난 세련된 옷차림을 하지도 못하고 늘어나는 허리 둘레로 고민하고 얼굴마저 거무틱틱하기 때문이다. 내세울 게 있다면 요즘 빠져들기 시작한 오디오와 더 미치고 있는 재즈 밖엔 없는 것같다. 악기라도 하나 다룰줄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

그 달팽이를 만나게 된 것도 삼겹살 때문이고 보면, 그 후배는 생명을 건지는 힘을 가진 듯하다. 달팽이까지. 그 달팽이가 살아간다면, 그 달팽이는 그 후배에게 고마워해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난 '달팽이사내'로 계속 불리고 싶다. 포기할 수 없어.


3.

알콜 중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위안이 되었다.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하루에 6병씩, 20년은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알콜 중독은 아니었다지만, 그와 너무 많이 마셨다. 그는 서울에 있는 내내 술을 마셨고 그 중 세 번을 나와 마셨다. 그가 소개해준 제이앤비리저브는 맛이 일품이었다.

그와 알게 된 것이 90년대 중반이었으니, 그 사이 대통령만 세 번이 바뀌었다. 그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가, 의사가 되었다. 난 작가로서의 삶이나 학자로서의 삶을 꿈꾸었지만 성과는 좋지 못했다. 성과가 좋지 못했던 사이, 난 원래 세상이 그렇구나 따위를 읊어대는 유치한 작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한달 한달 월급으로 살아가는 샐러리맨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그와 7-8년만에 만나게 된 까닭도 그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인 탓이었고 그가 내가 속해있는 작은 모임에 기꺼이 와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요일 걱정은 하지 않고 화요일 저녁에 그를 만난 것일까.

그와 대화를 하면서, 원래 유별났던 사람이 유별난 사람들만 대하는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재미있었고 한편으로는 불안해보였다.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면서 타인의 영혼과도 싸우면서 치유해간다는 건, 나로선 꽤나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또한 매일매일 스트레스와 뜻하지 않은 충격들로 인해 만신창이 되어버린 현대인은 이미 한 두가지의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남모를 고통과 싸우고 있다가 맞은 편에 앉은 이가 정신을 치유한다고 알려진 의사라는 사실을 알곤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다가 남이 알지 못하는 치부를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다시는 그와 만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노란 명함은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다음에 서울에 올라오면 명함 하나 선물 해줘야할 것같다.토요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일요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다시 화요일 새벽 네시 까지 술을 마셨으니, 수요일 제대로 출근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나의 거짓말-스트레스와 피곤으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는-에 다들 속아주었으니 망정이지. 실은 몇 주동안 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그와의 대화는 매우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날 들키면 안 된다는 느낌. 그러면서도 반올림하면 십년 가까이 알아온 와중에 서로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 하나둘 이야기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나저나 문제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보다는 나긋나긋한 그의 말투에 있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그의 말투에 있는 것같다. 경상도 사투리는 꽤나 정신없는데 말이다.


4.

아주 오랫만에 달리기를 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운동을 하면서 다들 살아가듯이 단순하게 정신적 삶을 영위해야겠다. 먹고 자고 읽고 마시고 듣고 걷고.... 그러면서 달팽이적 삶을 보여줘야겠다. 신길 6동의 '달팽이사내'의 존재의의를 보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