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 호시노 도모유키

지하련 2003. 12. 19. 18:02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
호시노 도모유키 지음, 김옥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전기가 흐르고 있는 듯한 밤이었다. 하늘 높이 매달려 있는 달은 거대한 백열전구가 되어 붉은 흙이 드러나 보이는 고원과 억새 들판을 빙하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개구리를 대신해 울기 시작한 가을 벌레가 지지직 하고 전자파를 보내, 나를 사로잡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 군청색의 투명한 대기를 뚫고 서늘한 공기가 섞인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 백금색으로 빛나는 억새 이삭을 흔들어, 밀려오는 파도와도 흡사한 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있다.
- 7쪽

미쓰오가 지금 빨고 있는 내 가슴도 오랫동안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처럼 생기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미쓰오는 눈치채지 못한다. 나는 화가 나, 좀더 나를 물체처럼 다루어달라고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이 말했다. 낮의 세계로부터 자취를 감추어버린 당신에 비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언젠가는 썩어버릴 하찮은 물체에 지나지 않으니까.
- 10쪽~11쪽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이상하고도 낯선, 경박하면서 천박하기 그지없는 소설보다 호시노 도모유키의 소설을 읽으면 어디 덧날까 싶다. 하긴 호시노 도모유키의 소설은 재미없고 스토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며 아름다우며 시적인 문장만 눈 앞에 어른거려 한 페이지를 다시 읽게끔 만드는 소설은, 지하철이나 직장 사무실에서 읽기에는 좀 버거운 소설이긴 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면 딱 마음을 잡고 집 책상이나 햇빛 잘 드는 카페에 혼자 앉아 읽어야만 읽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소설이다. 그 외 무슨 말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