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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티머시 스나이더(지음), 조행복(옮김), 열린책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터무니없이 바빠졌다. 지금도 바쁘니, 이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서평은 기대할 수 없겠지. 나는 아마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것이고, 다시 흥분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일종의 행운이었다. 점심 시간 잠시 들른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책을 사지도, 읽지도,  토니 주트라는 역사학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전 주위에 책을 읽던 사람들이 많았을 때,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책들을 나에게 소개해주곤 했지만, 지금은 주위에 책을 읽는 사람도, 책을 추천해주는 사람도 ...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특히 인문학 책은 제대로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긴 내가 이상한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향해 가던 토니 주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티머시 스나이더. 그가 모아 정리한 이 책은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아온, 거의 전공자가 없는 동유럽역사 전공자이면 유태인이며 활발한 기고로 세계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 어느 지식인의 지적 여정이면서 동시에 20세기를 개괄하는 탁월한 지성사이다. 



1. 유대인와 아우슈비츠, 이스라엘과 미국 


앞서 언급했듯이 토니 주트는 유대인이다. 그는 유대인 사회의 문화를 자세히 알고 있으며, 젊은 시절 이스라엘에 가서 공동체 생활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는 유대주의와는 거리를 둔  세계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왜 유대인들이 20세기 초 비난, 공격, 학살의 대상이 되었는지 언급한다. 19세기말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독일어를 구사하던 유대인 지식인들이 왜 희생양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유대인 사회의 폐쇄성을 지적한다. 아우슈비치의 비극에 대해, 그리고 이 비극을 현대 이스라엘은 어떻게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만들고 아랍 사회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며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가를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과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유대인이면서 유대주의와 이스라엘을 철저히 분석한 탓에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2. 역사학자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분석들을 읽다보면, 문학비평가의 글보다 역사학자들의 글이 더 정확하고 깊이 있으며 탁월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마 컨텍스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의 차이 탓일 게다. 토니 주트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파트릭 모디아노는 노벨문학상은 받는데, 아직도 밀란 쿤데라는 받지 못할까 늘 의문스웠다. 이 점에 대해 토니 주트가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밀란 쿤데라에 대해 언급하며 쿤데라를 싫어하는 체코 지식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간 쿤데라의 탁월한 작품성에 대해서만 이해했지, 그가 점하고 있는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의 독특한 위치에 대해선 간과해왔던 것이다. 


토니 주트가 이야기하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작가는 아서 케스틀러일 것이다. <<한낮의 어둠>>이 번역되어 있으나, 나는 아직 읽지 못한 탓에 깊은 공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토니 주트는 작품과 작가의 태도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는다. 특히 조지 오웰에 대한 분석은 읽어볼 만하다. 


작가들 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케인즈, 하이에크, 에릭 홈스봄, 알튀세르 등에 대한 언급은 재미있었다. 에릭 홉스봄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면서 보수적인 학계에서 머무는데 성공하였다고 말하고 알튀세르에 대해선 형편없다고 비난한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문화연구라는 흐름은 더 이상 호소력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켰다고 말하기도 한다. 간단하게 몇 문장을 옮긴다면,  '하이에크의 정치적 자폐성으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정책들 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명백하게 나타난'다고 욕하며, '루이 알튀세르 같은 당 이데올로그들은 몽둥이를 들어 이를 공격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인식론상의 단절이 있다는 주장, 마르크스가 1845년 이전에 쓴 글은 무엇이든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그 주장은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공격한다. 


이런 토니 주트의 가감없는 지적들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지적 경향을 무분별하게 수입하고 읽어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 현실 정치 


'진실을 말하자면,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참사로 끝난 뒤에 정치로부터 벗어나는 탈정치 현상(여론의 개인화)이 매우 현저해졌다.' 


이 문장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마치 한국 사회도 광우병과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시위 이후, 그리고 세월호 이후, ... 탈정치 현상이 이어지고 여론이 개인화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치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 사회가 비판적 활력을 잃어간 것처럼 말이다. 


토니 주트가 유럽 사회의 정치적 지형 변화에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끊임없이 한국 사회의 20세기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민족자결주의와 파시즘 간의 연결고리를 읽으며, 한국 민족주의도 이런 영향권 안에서 생겨났음을,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진보적 지식인들의 희안한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책 후반부의 내용들은 한국 자본주의와 정치 상황의 암울한 전망을 하게 만들었다. 


'카지노의 논리란 결국 금융 차원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최종적 형태이다.' '돈이 돈을 낳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 정치는 경제를 이기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필수 요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정부라면 바로 다음 선거에서 그들을 쫓아내려는 정당에 밀려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4. 좌파 


이 책 속에서 토니 주트는 자유주의자로 읽힌다.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도리어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종종 현실에 비판적이면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한다. 진보적이라고 하면 마르크스에 대해 우호적일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동시에 보수주의자라고 하면 정부에 우호적일 것이라 믿는다. 이 얼마나 편협하고 무식한 태도인가. 


<<평평한 세계>>를 쓴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저널리스트들의 무능력과 무책임함을 지적하며 토니 주트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 그러면서 경제 대신 정치에 무게 중심을 둔다. 그렇다고 해서는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도리어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좌파의 어리석음을 개탄한다. 가령 사르트르같은 이들. 


어쩌면 한국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스스로 진보라고 규정하는 데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동시에 진보라고 하면 좌파여야 하고 사회주의자이거나 마르크스주의자여야 한다고 믿는 건 아닐까. 자유주의자이면서 진보적일 수 있으며 보수주의자이면서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이 점에서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을 돌이켜 보았다. 대부분 현실 비판적인 책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스스로 진보 좌파라고 하는 이들의 책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그 책들 대부분은 너무나 반-자본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너무 이상적이어서 너무 공허했다고 할까. 문득 지금 한국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만 매몰된 채 달려가기만 한 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여기에까지 미쳤다. 



책은 꽤 두껍고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20세기 지적 흐름이나 그 흐름이 가지는 함의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나의 경우, 너무 바쁜 시절 이 책을 읽었던 탓에, 다시 여유로워지면 다시 읽을 계획이다. 그 때 같이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제법 긴 서평을 적어보기로 하자. 












20세기를 생각한다 - 10점
토니 주트 &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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