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스티누스 - 1에 이른 글임. 몇 권의 책(로버트 램의 ‘서양문화의 역사’ 2권(사군자), 슈퇴릭히의 ‘서양철학사’(분도출판사), 프리틀라인의 ‘서양철학사’(서광사) )을 읽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정리임. 대부분 슈퇴릭히의 '서양철학사'를 발췌요약한 것임.
三位一體說
‘무엇 때문에 그대는 바깥세계를 헤매고 다니려 하는가? 어서 그대 자신의 내면세계로 되돌아가라, 왜냐하면 바로 그 내면 세계에 진리가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의 여러 신비주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단지 인간의 내면적인 힘과 동일시될 수만은 없는 하나의 동력인, 또는 어떤 무비(無比)의 존엄성을 발휘하는 우월하고도 은혜를 안겨주는 위력적 요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소리의 반향일 수만은 없는 다름 아닌 진리의 소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른바 기억이라고 불리는 나의 능력을 초탈함으로써, 그 다음에 가서는 감미로운 빛과도 같은 당신에게 다가가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신에게서 진리와 광명을 발견하려고 하되, 그러나 우리는 이 신을 인식하거나 포착할 수도 없으며 또한 그러한 신 앞에서는 우리의 사유와, 그리고 우리의 모든 범주기능까지도 마비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양적인 한계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그 질을 측정할 수도 없으리만치 선하며 또한 공간을 떠나 있는 상태에서도 우리 앞에 현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세계를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신은 오직 신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될 따름인 것이다.
그는 마침내 세계를 인간 정신의 산물로 간주하려는 온갖 철학과 그리고 오직 인간 내심에 몰입하는 것만으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를 뿌리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인식대상이란 결코 인식행위에 의해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사유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존립하는 하나의 현실인, 다름 아닌 신의 질서와 현실이 있는 것이다.
신적실체(神的實體)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삼자적 위격체내(位格體內)에 존재하며 동시에 그 신적실체는 이 모든 위격 속에마다 완전히 현현되어 있는 것이다.
즉, 존재와 생명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혹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존재와 지식과 생명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영혼이 하나의 통일적 본질을 형성하듯이, 역시 이것은 하나의 불가사의한 신적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것이 결코 단순한 비교일 수 만은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곧 신상과 동일하게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창조와 시간성
시간이란 우리의 의식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란 오직 세계가 있는 곳, 따라서 변화도 역시 존재하는 곳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시간과 영원성을 구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반드시 변화와 유전을 수반하게 마련이지만, 영원성에서는 그와 같은 변화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정한 상태의 변화까지도 그 자체 내에 포괄하는 어떤 종류의 운동 현상이라고 할 피조물의 생성이 없이는 시간도 역시 있을 수 없었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이와 같이 활력적인 형태의 변화와 또한 동시적으로 결코 병존(竝存)할 수 없을 그 어떤 양자간의 선후관계를 통해서나 혹은 어떤 한가지가 자리를 비우면 또 다른 어떤 것이 그 자리를 메꾸어감으로써만 생겨날 수 있을 짧고도 긴 갖가지 중간 과정에 의하여 비로소 시간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은 그 스스로의 영원성을 바탕으로 하여 일체의 변화와 유전을 배제하는가 하면 또한 시간의 창조자이자 바로 그의 통제자이기도 한 까닭에, 결국 나의 생각으로는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 가서야 비로소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였으리라고는 볼 수가 없을 듯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으로부터의 논증, 즉 세계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피조물이 있었음을 물론, 바로 이 피조물이 운동을 개시함으로써 비로소 시간의 유전도 시작되었다고 하는 결론만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세계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으리라고 보는 편이 옳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시간 속에서 생기하는 것은 모름지기 시간 이전이나 아니면 시간 이후에 - 다시 말하면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것보다도 늦게이거나 혹은 아직도 앞으로 있게 될 어떤 것보다 앞서서 생기한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세계보다 앞서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왜냐하면 그와 같은 상태 하에서는 다름 아닌 스스로의 활력적인 변화 작용에 의하여 비로소 시간을 생성 시키기데 될 바로 그 피조물조차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시간과 함께 세계도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보아야만 하겠는바, 왜냐하면 오직 시간과 더불어서만 다름아닌 운동, 즉 상태의 변화도 시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유와 예정설
영국인 수도자였던 ‘펠라기우스’(Pelagius)는 인간이라 원래 아무런 죄도 지은 것이라곤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태어난 고로 결국 이 인간은 그리스도의 선행과 교리를 지켜나감으로서 스스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특히 동방교회 내에 수많은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를 반대하는 최선봉에 나섰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유명한 ‘예정(豫定, Pradestination, 神의 섭리)설을 들고 나오면서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예정설에 의하면 인간의 시조였던 아담 만이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죄악을 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가운데 오직 신의(神意)를 좇아서 불멸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아담이 죄악에 말려든 탓으로, 결국 모든 인간도 원죄의 씨를 물려받아서 마침내 죄악을 범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더이상 자유로울 수 없게 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악에 물든 채 죽음 - 聖 바오로에 의하면 이것은 죄악의 代價라고 한다 - 에 내던져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신은 그들에게 은총을 베풂으로써 중생을 구원하시기는 하되,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그러한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神은 그들 중의 일부에게만 은총을 베풀 뿐, 그 나머지는 선택범위에서 제외시키는 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이 오직 ‘신의 意思에 따라서 결정지어지는 현명하고도 불가해한 好意’는 자의성을 띤 것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리하여 결국 영원한 신의 의사에 따라서 어떤 인간의 경우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또한 그 나머지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진 주인공이라고 하는 우리들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불가사의한 감정에 위배하는, 그의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예정설은 일부 특정인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교회의 의사와 이익에도 위배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스스로 지론을 완화하여, 神은 애당초부터 인간을 구원의 길로 유도하였거나 혹은 저주한 것도 아니고 다만 스스로의 전지전능한 힘에 의하여 유한자로서의 인간적 결단의 방향을 사전에 ‘파악한다’는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예정설 속에서 오직 신의 의지만을 설명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결국 세계 내에서의 ‘악’의 발생에 대해서는 설명을 내리기가 극히 힘들게 되었다. 그는 자기 논문의 여러 곳에서 마치 암흑을 단지 광명이 결여된 상태라고 보듯이 악에 대해서도 단순이 선이 결여된 상태 정도로 보았다. 이 문제에게 그는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확정짓지 못했다.
역사와 신국
그의 신국론에서 천지창조로부터 자기가 생존하던 시대와 다시금 그 이후로부터 모든 역사의 종말에까지 이르는 인류의 전역사를 신의와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진행되는 일회적 역사과정으로 보고 있다. 괴테가 말한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도 역시 종교와 반 종교간의 투쟁이 이 세계사의 중심문제라고 하는 근본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은총을 누리는 자는 ‘신국’을 건설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는 파멸이 있을 뿐인, 저부받은 자들에게만 필요한 세속국가적 질서가 대립된다. 이에 현세의 교회야말로 신의에 따라서 구원을 누리게 된 자들을 한데 모은 그리스도의 교단으로서 이와 같이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디서도 구원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