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미학연습

아우구스티누스와 현대

지하련 2007. 4. 15. 20:34

*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두 개의 글로 요약하면서  느낀 바를 적은 글이다. 매우 개인적인 견해를 담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겠다.


나에게 종교의 문제는 가끔 매우 첨예하게 다가온다. 나같이 유약한 이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불가사의함이란 때로 견디기 힘든 공포와 유혹으로 다가온다. 한 때 현세에서의 고독이나 무력감, 허탈함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주는 자기 내면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로마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세계에 풍부한 영감을 던져주었으며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서 거대한 방향을 설정하였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신의 목소리(계시)를 발견하고자 하였으며, 때로는 신비주의적 면모까지 엿보이게 한다.

이러한 내면의 발견은 종교 개혁 이후의 기독교에서도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된다. 즉 성경만 있으면 어디에서든지 자기 내면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개인화된 신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보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뱅에 의해 주도된 종교개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초기 교회의 시대로.)

하지만 이러한 내면의 발견이 자아나 자유의지에 대한, 외부 세계에 대한 명확한 확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 교회 중심의 신앙 생활의 강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정신주의적인 중세적 경향을 특징짓게 된다. 이러한 정신주의적인 태도는 현대 기독교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경향이라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와 현대가 그리 멀지 않음을 엿보게 한다.

시간의 문제는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 신의 본성을 깨닫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신은 유한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성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시간을 평면적으로 인식하는 존재이다. 신은 만물과 만물의 유전을 눈 앞에 펼쳐진 대로 보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며,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보는’ 것일 뿐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것이 그가 ‘예정설’이라고 하는 과격한 결정론적 관점을 다소 완화시키는 방향이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지만 이미 신의 앎 속에서 과거-현재-미래는 결정되어 있음을 우리 인간은 예정된 어떤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중세를 물들이는 어떤 절망이나 당혹스러움, 불안함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표현하였던 이런 세계관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을까.

데카르트적 세계관이 현대에 와서 ‘독단론’, ‘기계론적 인과주의’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는데, 반데카르트주의자들이 보여주는 정신주의적, 심미주의적 태도는 혹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향하였던 바의,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냥 이런 의문이 밀려든다. 눈 앞에서 보이는 불안함, 불가해함, 유한한 시간, 유한한 인간이 느끼는 어떤 절망을 극복하기 위하기 위해 영원한 신의 진리로 귀의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현대의 정신주의는 데카르트적 세계관가 실패했다는 당혹스러움을 바탕에 깔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불가해함을 받아들이고 어떤 가상적 세계를 향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