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Grim

지하련 2003. 4. 13. 16:50
  Grim... 독일의 어느 학자 형제의 이름이 아닌가. 아니면 그냥 그림(畵)를 뜻하는 것일까. 찾아보니 그림동화책을 만든 그들의 이름은 Grimm이다.

  대학로에 있는 술집이름인데, 이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가 오랫만에 마음에 드는 여자로 등장했다. 술에 취해 쓰러져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등장하는 인물은 늘 새로웠다. 하지만 이 새로움은 술 기운과 함께 몸 속에서 사라져간다.

  어제 다시 그 곳을 들렸는데, 그 친구는 자리에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L양이 이 곳의 컬렉션은 정말 형편없다며 투덜댄다. 앞에 있는 C양과 C군은 계속 싸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이다.

  어느 모임 게시판에 올라온 Michel Petrucciani Trio의 음악을 듣고 있는데 무척 좋다. 이런 음악 들으며 차가운 봄바람 속에서 맥주 캔 하나 입에 물고 있었으면 좋겠다.

  기억은 사그라지지만, 비가 내려 아스팔트 위를 뒹굴다 구름을 비집고 등장한 태양의 가늘고 기다란 적외선으로 데워져 하늘로 기화하면서 남겨놓는 추억들이 계절 위를 떠돈다. 내 추억 속에 머물고 있는 J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친구. ... 동해안의 어느 모퉁이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 사그라지는 기억들을 비집고 슬픈 목소리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화를 걸어 내 안부를 확인하던 그녀는 몇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을까.

  술에 취해, 내가 있는 세계는 '신파(新派)'라고 했다. 1930년대 통속적인 주제로 올려지던 그 연극들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간다. 어느 지방 도시의 겨울, 술에 취해 내 손을 잡은 채, '나, 오빠 따라서 서울 가면 안 될까'라고 하던 21살의 청춘 앞에서 난 언제나, 늘 미안하고 그렇게 세상에 대한 내 실망과 미움은 시작되었다.

  내가 연주하는 음악도 끝나갈 것이고 내가 기거하는 이 공간이 저 휘몰아치는 세파에 남겨지긴 어려울 것이다. 어제 그림 속에서 나오면서 내 이름이 담긴 종이 하나 남겨두고 왔다. 늘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그건 바램일 뿐이다. 헛된 바램보단 빠른 포기나 절망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종이 한 장의 바램은 뒤로 하고 사무실로 나가야 된다. 통속 드라마 속으로 내 인생을 밀어넣는다. 그 속에서 나는 다른 인생들과 만난다.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에 둔감한 인생들과 만나 같이 일하고 싸우고 ...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