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아비정전

지하련 2003. 4. 6. 22:02



아비정전을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꽤 오래 전에 디자인을 전공하던, 나보다 세 살 많은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꿈에서 만나자를 이용했지만, 특별하지 않았나 보다. 따지고 보면 난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그런 걸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얼굴은 옆모습을 그려져 있으면서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이를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면성의 법칙은 권위에 대한 인정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주인공들의 대사는 운문으로 처리되던 근대 초기의 희곡도 정면성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말을 머뭇거리고 등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이러한 정면성의 법칙이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난 정면성의 법칙 속에 있지 않았다.(정면성의 법칙 속에 빠져 허우적댄 적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곳을 벗어날 수 밖에 없었을 때 너무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아침에 일어나 소설을 조금 쓰다 커피를 마시고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곤 비명을 질렀다. 에릭 사티를 듣고 있었다. 고대의 도시 위를 지나가는 탱크들 사이로 희망은 피어오를까.

이제 내 나이도 서른 하나다. 소설가가 될 수 있겠고 평론가가 될 수도 있다. 가난을 벗삼아, 쓸쓸함 속에서 생을 마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가가 되면 뭐하고 평론가가 되면 뭐하겠는가. 내 스스로 날 구원할 없고 날 구원해줄 사랑도, 신도 없는데.

장국영이 호텔에서 뛰어내렸다. 질 들뢰즈였나. 아니면 챗 베이커였나. 호텔에서 뛰어내렸던 무수한 이들. 난 어느 호텔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내가 뛰어내릴 때, 바람은 나에게 와서 날개가 되어줄까. 별들은 나에게 와서 노래를 들려줄까.

상큼한 봄바람이 분다. 봄바람 속으로 내 영혼을 침몰시킨다. 사랑만큼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다. 사랑 대신 택할 수 있는 건 죽음 뿐인 셈이다. 난 이미 죽은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