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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지음), 최성은(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왜 내가 새삼스럽게 외국 번역 시집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번역된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아마 언어 너머로도 전해지는 시적 감수성, 또는 해석의 가능성, 그리고 지역과 언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태도 같은 것에  감동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쉼보르스카의 시들은 한글로 옮겨지더라도 그 시적 매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는 역자의 노고일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 자체가 가진 힘을 그만큼 대단한 것일 게다.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침대 밑에서, 계단 아래에서

오래된 주소에. 


무의한 것들, 터무니없는 것들로 가득찬

장롱 속을, 상자 속을, 서랍 속을 샅샅이 뒤졌다.


여행 가방 속에서 끄집어냈다,

내가 선택했던 시간들과 여행들은.


주머니를 털어 비워냈다,

시들어 말라버린 편지들과 내게 발송된 것이 아닌 나뭇잎들.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녔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들,

불안과 안도 사이를. 


눈(雪)의 터널 속에서

망각 속에서 가라 앉아버렸다.


가시덤불 속에서,

추측 속에서 갇혀버렸다.


공기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잔디밭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끝장을 내보려고 몸부림쳤다,

구시대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전에,

막이 내리기 전에, 정적(靜寂)이 찾아오기 전에


결국 알라내길 포기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과연 무얼 찾고 있었는지


깨어났다,

시계를 본다 

꿈을 꾼 시간은 불과 두 시간 삼십 분 남짓


이것은 시간에게 강요된 일종의 속임수다

졸음에 짓눌린 머리들이 

시간 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이 번역시집은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을 번역한 것으로, 책 뒷편에서는 쉼보르스카의, 죽기 전 육필 원고가 실려 있기도 하다.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쉽게 읽히면서도 시적 유머나 휘트, 풍부하고 다채로운 비유들은 읽는 이들을 시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이혼 




아이들에겐 첫번째 세상의 종말,

고양이에겐 새로운 남자 주인,

개에겐 새로운 여자 주인의 등장,

가구에겐 계다과 쿵쾅거림, 차량과 운송. 

벽에겐 그림을 떼고 난 뒤 드러나나는 선명한 네모 자국.

이웃들에겐 이야깃거리, 잠시 따문함을 잊게 해주는 휴식.

자동차에겐 만약 두 대였다면 훨씬 나은 상황.

소설책과 시집들에겐 - 좋아, 당신이 원하는 걸 맘대로 가져가

문제는 백과사전과 비디오 플레이어, 

그리고 맞춤법 교본이다.

앞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쓸 때 어떡하면 좋을지 적혀 있을 텐데 -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두 이름을 분리하기 위해 마침표를 사용해야 하는지. 



시란 무얼까? 시를 읽는다는 행위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최근 자주 시집을 읽는다. 내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해볼 일이다. 쉼보르스카의 시집, 추천한다. 정말 좋은 시집이다. 

 




Wisława Szymborska (1923 - 2012)




충분하다 - 10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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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Paul Celan / unter judaisierten Deutschen 

장 볼락Jean Bollack(지음), 윤정민(옮김), 에디투스, 2017




<죽음의 푸가>로 잘 알려진 파울 첼란의 연구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흔아홉의 나이에 파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시인.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가 그 말을 번복하게 만든 작가. 하지만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 한국 시인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파울 첼란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 때, 이 책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울림은, 번역된 시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진하다. 길지만 <죽음의 푸가>를 옮기면,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타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중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시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연민과 고통, 그것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서정적이지만 아프고 아름답지만 고통스럽다. 1960년 파울 첼란이 뷔히너 상 수상 연설인 <자오선Der Meridian>은 그의 시론, 문학관을 잘 알 수 있는 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글로 제대로 번역된 글은 없으니...)



“어떤 시인도 결코 타인의 문제로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만 말할 뿐이다. (… …) 말해진 것은 제 각각의 판단에 맡겨진다.” 

- <자오선> 중에서, 파울 첼란



이 책에서 장 볼락은 파울 첼란에 대해서,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이면서 독일어로 글을 쓴 시인이라는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몇몇 작품에 대해, 시어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깊이 있는 분석을 전개한다. 단어 하나하나 짚으며 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한, 뛰어난 예를 보여주고 있다(이 점에서 이 책은 문학 평론가들, 혹은 평론을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첼란의 모든 시는 시가 갖는 진리에의 요구와 씨름하며, 그런 이유로 그의 시는 시로서의 자기 특성을 부각합니다. 

- 37쪽



첼란의 시문학은 일종의 사유 양식입니다. 첼란은 그것을 기억과 동일시합니다. 이처럼 응축된 사유형태는 철학으로도 신학으로도 분류될 수 없습니다.

 - 51쪽




유대인으로서의 첼란, 예술과 시, 그리고 첼란의 문학에 대한 태도, 몇몇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답고 있는 이 책은 작지만, 탄탄하고 깊이있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장 볼락Jean Bollack(1923 - 2012)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 10점
장 볼락 지음, 윤정민 옮김/에디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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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History of Philosophy

윌리엄 사하키안William Sahakian(지음), 권순홍(옮김), 문예출판사 





1. 

서로 얽혀있는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찾고 이를 지성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의 분투가 필사적으로 이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가 불완전하고 저기 완전한 세계가 존재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관계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것의 역사를. 


철학의 입장이 아닌 예술사의 입장에서 이 곳과 저 곳의 대비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 인식의 시작이며, 어떤 절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 이 세계 전반에 물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톤적 신비주의가 밀려들 것임을 예감케 한다.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는 중세의 신으로 변화하고 칸트에게 있어서는 다시 ‘물자체’가 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식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한다. 중세의 유명론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보편개념은 이름 뿐이듯,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은 경험 너머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였고 칸트에 이르러, 저 영원불변하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닫아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위를 향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세계는 아주 조금 그 쓸쓸한 베일을 벗는다.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포기, 쓸쓸함과 자조, 방관의 자세를 불러올지라도. 



2. 

서양철학사를 읽었다. 십 수 년 전 한창 공부할 때 이후 처음인 듯하다. 그 사이 몇 권의 지성사 책을 읽긴 했으나, 철학사와 지성사는 그 진행 방식이나 언급되는 내용이 매우 상이하다. 철학사는 개별 철학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성사는 지적 세계의 변천에 그 관심을 기울이며 당대의 지적 흐름을 설명한다. 그래서 전자는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이들이 읽기 유리하거나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인내를 가지고 읽는 책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전자보다 더 폭넓은 주제와 인물을 다루며 좀 더 방대하지만 읽기는 상대적으로 편할 수 있겠다. 내가 이렇게 적고 있긴 하지만, 두 부류의 책을 일반 독자가 소화하긴 어렵긴 매 한가지일 게다. 


윌리엄 사하키안의 <서양철학사>는 다른 철학사와 비교해 다소 평이한 서술로 이루어진다. 딱딱하지 않고 짧은 분량에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들은 다 거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19세기 이후의 철학자들에 대한 서술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미 철학에 대한 비중은 너무 높아서 베르그송에 대한 언급보다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1859-1938)에 대한 설명이 더 길 정도다. 심지어 나는 사무엘 알렉산더라는 철학자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것은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될 것이다. 근현대 철학에 대한 여러 시각을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그것이 영미철학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편협성을 띄기 때문이다. 



3.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을 단 책들 중 그 분량이 적은 편에 속하며 단숨에 고대철학에서 중세철학으로, 다시 근대철학으로 넘어가는, 다소 빠른 전개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요한 철학자에 대해선 적절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현대 가까이 오기 전까지 저자의 시각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에 대한 설명은 매우 좋아, 이전에 읽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개론서보다 더 압축적이면서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다만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된 지 오래되긴 했으나, 재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 때 구입해서 꼭 읽어보길 바란다. 




(아마존에는 딱 2개의 리뷰가 있는데, 둘다 평점이 다섯개. 그리고 중고 가격은 2.5달러. 그러나 1968년에 출간된 이후 다시 나오지 않은 듯싶다. 하퍼콜린스의 대학교재 시리즈인듯한데, 새로운 책이 나왔고 그 책은 평점이 그다지... )



서양철학사 - 8점
윌리엄 사하키안/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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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바꿔야 할 시기가 지났다. 나를,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신경쓰이게 한다. 글자가 흐릿해지는 만큼 새 책이 쌓이고 잠이 줄어드는 만큼 빨리 지치고 상처입는다. 변화는 예고 없이 방문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곤 사라지며 흔적을 남긴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빠르게 늘어나 거의 매일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노트북이 가벼워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가벼워질수록 이 녀석이 자주 나타난다. 사무실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까페에서, 심지어 집 거실에까지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메일이 오고 문자가 오고 전화가 온다. 


미팅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근처 카페에 들어와 메일을 확인하고 일을 한다. 그렇게 오후에서 저녁이 되었다. 또 야근이었다.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합정역 인근의 커피숍. 높은 천정. 단순한 인테리어. 직사각형의 공간. 낮은 테이블 맞은 편으로는 높은 선반 위에 그 모습을 뽐내는 커피머신들. 그리고 혼자 샵을 지키는 소녀. 커피를 내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퍼지고. 





무심코 시킨 아메리카노.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움. 커피는 매우 근사했다. 견고한 아로마. 고소하면서도 깊이 있는 풍미. 끝 여운 속에서, 일부는 부드럽게, 일부는 거칠게 입 안을 휘감아 돌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여기저기 전화를 받았고 전화를 했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잠시 내 삶을 생각했고 길게 그동안 내렸던 내 의사결정들을 후회했다.






스트라다 로스터스의 커피에 매료된 나머지, 드립용으로 분쇄한 커피를 사가지고 왔다. 오래된 칼리타 서버, 드리퍼도 작은 것으로 새로 장만하고 드리핑을 했다. 물줄기는 얇게, 속도는 천천히, 그렇게 빙빙, 빙빙,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빙빙 돌아 여기로 온 걸까. 물줄기는 빙빙 돌아 커피와 섞여 근사한 드립 커피가 되는데, 나는 빙빙 돌아, 돌아, 왜 뒤쳐진다는 생각만 드는 걸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다시 읽으며 문학과 연극, 예술과 삶에 대해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에 대한 결론은 없고 오직 죽음만이 우릴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칼 야스퍼스였던가. 오직 죽어가는 나만 있을 뿐...이라고. 어쩌면 실존이란 바로 저것이다.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 나와 너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 



햄릿: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참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마음 속으로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고난과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을 물리쳐야 하는냐. 어느 쪽이 더 고귀한 일일까. 남은 것이 오로지 잠자는 일뿐이라면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들면서 시름을 잊을 수 있다면, 잠들면서 수만 가지 인간의 숙명적인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는 최상의 것이로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 아마도 꿈을 꾸겠지. 아, 그것이 괴롭다. 이 세상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가 망설여진다. 

- 셰익스피어, <햄릿>, 제 3막 1장 



하지만 다행이다. 작은 것들은 지친 우리를 위로해주고 있으니. 저 커피처럼. 


혹시라도 합정역에 가게 된다면 저 커피숍에 가길 바란다. 최근 몇 해 동안 마신 커피 중 최고였다. 스트라다 로스터스 Strada Roa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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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지음), 난다(문학동네 임프린트)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다행이다. 이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는 건 좋은 일이다. 불문학자인 황현산 교수가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은 이 산문 모음집은 출간 후 몇 년간 많은 이들의 밤을 조용히 채웠을 것이다. 


글들은 대체로 짧고 읽기 편하며 담백하다. 실은 이런 글 읽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탓에, 이 책의 유명세는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나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약간 밍밍한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취향의 문제일 뿐,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편안하게 권할 수 있는 산문집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문학, 특히 시는 이 밤에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시인들은 낮에 빚어진 분열과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말이 "어둠의 입"을 통해 전달되리라고 믿었으며, 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밤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것들을 소생시키려 했다.

- 220쪽 




  





밤이 선생이다 - 8점
황현산 지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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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La Pesanteur et La Grace 

시몬 베유 Simone Weil(지음), 윤진(옮김), 이제이북스 




신은 오직 부재不在의 형태로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 

- 183쪽 




나이에 따라 읽는 책, 읽히는 책은 달라진다. 새삼스럽게 지루하던 고전이 재미있어질 수 있고 웃고 열광하던 대중 소설이 식상해질 수도 있다. 이건 책의 탓이 아니다. 나이의 신비일 뿐이다. 


성당을 다닌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렇다고 미사에 쓰이는 모든 기도를 외우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시몬느 베유(1909-1943)의 마음을 알 것같기도 하다. 


이 책은 세계2차대전, 그야말로 전쟁통에 쓰여진 짧은 아포리즘 모음집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존재를 끌어당기는 ‘중력’ 앞에서 신을 향해 상승하려는 신앙의 은총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종, 자주 기독교적 테마가 극적인 불행,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속에서의 믿음, 신앙의 확인, 은총과 기적, 마치 그리스 고전비극의 한 장면들처럼 극적인 비애감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렇기 때문일 테고, 최선을 다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지켜 살아가는 선량한 우리-신앙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종교나 신앙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들이 살아가게 되는 삶의 서사구조일 탓이다.


책은 기독교적 테마로 가득하지만, 비극적인 상황,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또는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신, 보이지 않는 질서, 저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우주 그 자체에 의지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비애조로 노래한다.



창조는 사랑의 행위이며 영원하다. 매순간 우리의 존재는 곧 우리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그러나 신은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이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해 주는 신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겠다고 동의할 때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의 존재는 오로지 이와 같은 신의 기다림과 그리고 존재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동의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한 신은 우리들 곁에서 영원히 그 존재를 얻으려 애걸한다. 우리에게 주고 나서 바로 얻으려고 애걸하는 것이다. 

- 58쪽 



 



13살 때의 시몬느 베유




* 책에서 몇 개의 문장을 더 인용한다. 



인간에게 애원하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치 체계를 타인의 정신에 억지로 강요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다. 반대로 신에게 애원하는 것은 신의 가치를 자기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가치들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며, 내 안의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47쪽) 



두통, 때로 통증을 우주를 향해 던져 버리면 조금 줄어든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주가 변질된다. 통증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면 두통은 더욱 심해지지만, 나의 내부에는 고통 받지 않는 어떤 것이 있어서 변질되지 않은 우주와의 접촉을 잃지 않는다. 정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행할 것. 무엇보다도 모든 고통들을 이와 같이 다룰 것. 고통이 사물에 다가가지 못하게 할 것. (18쪽)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빈 자리를 견뎌 내는 것.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죽음과 같은 곳에 있다. (26쪽) 





중력과 은총 - 10점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이제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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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밴 David Vann 인터뷰 중에서 (Axt 2017. 11/12)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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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국립묘지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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