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0

비는 더 이상 마음을 적시지 않고

내 마음에 비가 내리면 그대 마음에도 비가 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한 번 낙엽이 지고, 두 번 낙엽이 지고, 또 낙엽이 지고, 지난 번 낙엽 질 때 나와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벚꽃 피고 지고, 봄이 가고 오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그대 입술 옆으로 퍼지던 웃음의 향기에 취해 비틀거리던 여름날 그 바다 파도소리가 싱그러웠다. 그대 얇은 손길에도 가슴 조이며 땅 밑 뜨거운 용암의 흔들림을 느끼곤 했다. 그 열기에 내 마음이 녹아내리고 내 이성이, 내 언어가 녹아내려 흔적없이 사라지던 계절이었다. 그 계절이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또 가고, 더 이상 그 계절이 오지 않았을 때, 저 창 밖엔 거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지만, 그대 없는 내 마음엔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들..

추억은 술을 마시고

입구는 좁았다. 대형병원 한 쪽 귀퉁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전부였다. 몇 명이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지하와 지상 사이를 빙글빙글 오가기만 할 뿐, 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그리곤 금세 희미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앞에 현금인출기 한 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죽음이 왔다가 가는 공간 앞의 외로운 ATM. 그 앞에서 사람들은, 나는 현금을 뽑기 위해 서있었다. 작년치 성당 교무금이 두 달 밀려 있어서 그 돈까지 같이 뽑았다. 이젠 현금이 드물어진 시대다. 천천히 걸어나와 복도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조의금 봉투들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차가운 현금인출기 속에 있던 만원 짜리 다섯 장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조의금 봉투를 전달하며, 조의를 표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전에 ..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의 여울 사이로 떠오르는 한줌 알갱이들. 정체모를. 아름다운 시절들은 다들 노랫말 속으로 잠기고 고통은 리듬으로 남아 바람 속에 실리기도 하고 햇살에 숨기도 하는데, 하나의 계절이 가면 어김없이 하나의 계절이 오고 계절풍이 불고 나무들은 빛깔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조수의 리듬에 영혼을 밀어넣고 흔들흔들, 노래를 부른다. *** 위 글은 2002년 10월 27일에 쓴 것이네. 그 사이 화양연화 OST는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은 건 상당히 지난 듯싶어. 상당히 쓸쓸할 듯 싶은 이 봄,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다시 보면 어떨까. 살짝, 아주 살짝 ... )

혼술과 커피에 대한 실존적 고찰

매일 아침 저녁, 또는 시간 날 때마다 일기를 쓴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냥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과 종교적 기원을 적는다. 오늘 하루가 어떤 일들로 구성되었는지 적지 않는다. 그걸 적으려고 보니, 너무 길어질 것같기도 하고 그럴 정신적 에너지도 남지 않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은 나이다. 앞으로 그 비율은 더 심해질 것이다. 딱히 지혜나 통찰을 가지지도 못했고, 그나마 있던 지식이나 상식도 얇게 스쳐가는 바람에 휘익 쓸려 날아가고 있는 늦겨울, 혹은 초봄이다. 낯선 이들과 교류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젊은 이들과 술을 마시거나 대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감수성이 무뎌지거나 슬픔이 덜 하거나 쓸쓸함이나 고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외면할 뿐. 다시..

텅빈 주말의 사소한 희망

설 연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종일 집에 틀어박혀 두 권의 책을 다시 펼쳤다(리뷰를 쓰지 못했기에). 젤딘의 과 바라트 아난드의 . 그리고 한 권의 책, 게오르그 짐멜의 를, 억지로 다 읽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과 를 정리해 블로그에 올렸다. 오랜만에 트래백(trackback)을 해볼까 했더니, 네이버 블로그엔 그런 기능이 아예 없었다. 아난드는 콘텐츠의 미래는 '연결관계connection'에 있다고 했는데... 아이와 함께 노량진수산시장에 가서 전복과 산낙지를 샀다. 며칠 전부터 전복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주말에 간 것인데, 살아있는 낙지를 보더니, 그것도 먹고 싶다고. 결국 전복과 산낙지를 사와 집에서 산낙지부터 회로 준비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걸 자르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거의 ..

렘브란트와 짐멜

짐멜의 를 열심히 읽고 있다. 2018년 독서 결산 포스팅도 못하고, 작년 연말에 읽었던 몇 권의 책 서평도 못 쓰고 있다. 대신 짐멜을 열심히 읽고 있다. 책은 딱딱하고 난삽하지만, 마치 뵐플린이 양식의 측면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조망하듯, 짐멜은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를 르네상스, 혹은 그 이전의 예술가들과 보편성/개별성의 관점에서 비교하며 근대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은 개별성에 집중하면서 각 인물마다 개성적인 포즈와 역동성을 부여하여 르네상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걸작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내 독서는 늘 파편화되어 있는 탓에, 절반 정도 읽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구절도 없이 어렴풋하게 펼쳐질 뿐이다. 여유라도 되면 '짐멜 읽기' 모임같은 거라도 하면 좋을련만..

이사와 근황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겹쳤다. 결국 감행했다. 그리고 책을 버렸다. 백 권 넘는 책들을 버렸다. 어떤 책은 지금 구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책은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한 것이다. 책마다 사연이 있고 내 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주인집 할머니의, 폐기물 사업을 하는 지인이 가지고 가기로 하였으나, 몇 주 동안 그대로 있길래 동네 헌책방 아저씨를 불렀다. 아침 일찍 아저씨는 작은 자동차를 끌고 와서 책을 살펴보았다. 권당 만원씩으로만 따져도 백만원치였지만, 아저씨는 나에게 삼만원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요즘에도 이렇게 책을 읽는 이가 있구나 하는 혼잣말을 했다. 그 옆에 서서 삼만원을 들고 서 있던 나... 버릴 예정이었으니, 삼만원도 큰 돈이다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일이 너무 많아, 책..

일요일 오후 사무실

주말 난지캠핑장에 갔다. 동네 지인들과 함께 간 곳은 잠을 자러 온 곳이라기 보다는 술을 마시러 온 공간 비슷했다. 사진 속으로 보이는 공간들은 모두 잠을 잘 수 있는 곳이긴 하지만,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이 흙먼지로 쌓여 있었다. 몇 번을 닦아냈지만, 계속 흙이 묻어나와 불편했고 결국 아침까지 술을 마시다가 집에 올 수 밖에 없었다. 밤바람이 다소 시원해진 탓에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긴 했지만, 토요일은 종일 잠만 자는 불상사가.... 토요일 잠에서 깨어 창 밖을 보니, 어둠이 내려 앉은 도시의 풍경이 들어왔다. 매번 보는 풍경이라 익숙하지만, 이 풍경도 보지 못하면 꽤 보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하긴 매일 바다를 보던 시절도 있었는데. 아직도 나는 바다 앞에 가서 살고 싶은 바람을 버리지 못했다..

자정의 퇴근길

자정이 지난 지하철 9호선. 선정릉역에서 김포공항역으로 달려가는 급행. 신논현역. 즐거운 유흥을 끝낸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수다를 나누며 등장. 자신의 취하고 지쳐보이는 얼굴 사이로 피어나는 웃음의 어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별안간 낯설게 여겨졌다. 실은 요즘 내 모습에 스스로 상당히 낯설어 하곤 있지만, 어쩌면 나이 들면 갑작스레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나오자,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고 택시마저 보이지 않고, 대신 밤을 지키는 술집들이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다행이다. 밤을 지키는 술집들이 있다는 건. 어쩌면 아직 살만한 곳임을 알리는 징표 같은 게 아닐까. 수백년 전 밤길을 가던 나그네의 눈에 비친 주막의 불빛처럼, 그렇게. 찰칵..

슬퍼하는 아테나Mourning Athena와 나이가 든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 하나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비밀스러운 속살이라기 보다는 굳이 알 필요 없는 구차함에 가깝다. 인과율의 노예라서 '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유나 배경으로 끼워 맞출 수 있다는 것 이외에 쓸모없는 것들이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쌓이면 이 세상이나 우리 삶은 참 슬픈 것이라는 생각에 휩싸인다. 아마 하우저가 그리스 고전주의 정점을 'The Contemplating Athena'로 여기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게다. 부연하자면, 알기 때문에 피하게 되고 알기 때문에 멀리하게 되며 알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게 된다. 알기 때문에, 결국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회한과 눈물의 밤을 보내고 젊음을 부러워하고 되돌릴 수 없는 추억에 자신의 마음을 맡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