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298

얼굴 없는 인간, 조르조 아감벤

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지음), 박문정(옮김), 효형출판 배가 침몰 중인데, 우리는 배에 실린 화물을 걱정하고 있다. - 히에로니무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마스크를 둘러싼 논쟁이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었다. 한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는 마스크를 잘 쓰고 다녔지만, 서구인들은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며, 각자 생각하는 것도 다를 듯 싶지만, 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모자도 잘 쓰지 않고 마스크도 잘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스크를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스크를 둘러싼 논의는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아감벤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으며 깊이 생각해볼 문제..

타인을 기록하는 마음, 이수정

타인을 기록하는 마음 이수정(지음), 메디치 이런 책들이 늘어나야 된다. 어제처럼 외부로, 세계로, 선진국으로 시선을 돌려 남의 것들을 수입하고 배우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우리 내부로 눈을 돌려 관찰하고 보듬으며, 보다 행복한 미래를 모색해야 되는 시절이 왔다. 그래서 이 책은 참 소중하다. 스스로 발품을 팔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이슬람사원, 모스크를 찾아 그 곳 사람들을 만나 기록하며, 진솔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 바로 이다. 솔직히 기시 마사히코같은 사회학자가 써야 할 책이다. 기시 마사히코를 적기 전에 한국의 사회학자들을 더듬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없었다. 저자인 이수정은 아랍어 전공이라는 이유로, 그나마 아랍, 혹은 이슬람에 대한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모스크를 돌아다니며 이 책을 쓴 ..

아카이브 취향,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Le Goût de l'archive 아를레트 파르주(지음), 김정아(옮김), 문학과지성사 그 순간의 삶을 설명하는 몇 마디의 말과 그 순간의 삶을 단 번에 우리 앞에 끌어내는 폭력 사이에 간신히 낀 채로 존재하는 삶들이다. (36쪽) 작년 마지막 몇 달간 읽은 책이다. 짧고 단단하다. 역사가가 어떤 이들인지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다. 역사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자기 이야기가 왜 진실한 지 그 이유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이다. 그러니 역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착각은 역사가 궁극적으로 진실을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착각이다. 역사는 세부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실 담론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 어법, 정격(학문적으로 엄정한 형..

일본산고, 박경리

일본산고日本散考 박경리(지음), 마로니에북스 어수선하다.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만 한국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촛불을 들고 탄핵을 지지했다고 해서 근본이 바뀌진 않는다), 또한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져 온 진보와 퇴보의 순환 속에서 지금은 퇴보의 순간이며, 그것을 막기 위해 정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그랬다. 바진의 에 아우슈비츠가 날조된 거짓이라고 믿는 서독 청년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 한국이 똑같은 꼴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때문일 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의 난무는 진짜 정보(진실)마저 사라지게 하며 가짜 뉴스를 믿는 사..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피터 자이한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Disunited Nations 피터 자이한 Peter Zeihan (지음), 홍지수(옮김), 김앤김북스 돌이켜보건대, 젊은 시절 나는 확실히 세상살이를 좀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비관적으로 해석하여 포기의 마음이 한 켠에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후자에 가까워 보이긴 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사정이 딱히 달라진 건 아니라서 지금도 가끔 모든 걸 내려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피터 자이한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너무 한 쪽 분야의 책들만 읽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나름 서양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고 철학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자이한이 가지는 동시대에 대한 정보는 남다른 데가 있..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지음), 최덕수(옮김), 열린책들 은 전설이 되었다. (149쪽) 정조 이후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지 못한 듯 싶다. 이후는 세도정치 시기였는데, 이 부분을 이야기해봤자 가슴 아픈 이야기 밖에 나오지 않으니(그야말로 조선 왕조가 가장 무능했던 시기, 어쩌면 임진왜란 시기보다 더 심했을 지도), 그냥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수십 년 전 버전이니, 지금 역사 교과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끔 한국도 일본처럼 서구 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상황은 동일했을 듯 싶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경우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 즉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정치문화였다. (16쪽) 조선의 성과이면서 한계..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앨버트 O.허시먼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 Exit, Voice, and Loyalty: Responses to Decline in Firms, Organizations, and States 앨버트 O. 허시먼 Albert O. Hirschman(지음), 강명구(옮김), 나무연필 앨버트 허시먼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 대중에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경제학과 정치학 사이의 미묘한 영역으로 들어가, 통찰력 있는 주장을 담은 책들 때문일 것이다(실은 정치학에 가까운 책들이다). 이 책, 또한 경제학과 정치학 모두를 아우르며 모든 조직들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퇴보, 위기 상황 앞에서 그 조직의 고객/구성원/이해관계자들은 어떻게 대응하며 움직이는지, 그 양상들이 ..

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지음), 박문재(옮김), 현대지성 사람들로부터 받는 해악을 미움, 시기, 경멸에 따라 생기는데, 현자는 이성적으로 극복한다. (99쪽) 고전 그리스가 끝나고 혼란스러운 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시작된다. 알렉산더는 지금의 인도까지 내려갔다. 이 정복 활동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하였고 서로 다른 문화들이 섞였다. 안정되고 예측가능했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마을의 일상은 새로운 사람들과 문물들로 채워지고 내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으며 세계는 나와는 거리를 두며 서로 긴장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헬레니즘 시대 전반을 채우는 이러한 분위기를 예술의 역사에서는 고전주의 뒤에 이어지는 낭만주의적 시대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철학까지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이 점..

이상한 날씨, 올리비아 랭

이상한 날씨 (Funny Weather - Art in an Emergency) 올리비아 랭Olivia Laing(지음), 이동교(옮김), 어크로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만든다. 이미지로 하여금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가고, 더는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한다. (205쪽) 예술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즉흥적으로 도달한 비상구, 한때 사람이 살았던 섬뜩한 공간을 오가는 일이다. (209쪽) 오랜만에 예술 관련 책을 읽었다. 좋았다. 그건 예술 관련 책이라서기보다는 올리비아 랭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의 글은 상당히 좋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있고 예술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그녀는 예술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랑하는지 안다. 그래서 글은 깊이 있으면서도 따뜻한 진지함..

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 데이비드 섬프터

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 데이비드 섬프터 David Sumpter(지음), 전대호(옮김), 해나무 우리는 언제나 지독한 편견과 싸운다(안타깝게도 싸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강요하는 편견, 인류 문명이 강요하는 편견, 우리의 생물학적 특성이 강요하는 편견, 우리의 부모나 일가친척, 선생들과 친구들이 강요하는 편견, 그리고 그 편견들 속에서 자라난 우리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자신만의 편견. 그렇다면 편견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정상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고치려고 할 것이다. (아! 한국사회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편견을 고집하고 있는지!) 이 책은 페이스북이나 구글의 서비스,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러한 서비스나 AI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