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936

슈가 맨, 장정일

슈가 맨 아 - 입 벌려요. 너는 마른 휘파람을 불기 위해 입술을 모았고,나는 그게 지겨웠어.슈가 맨, 벤츠를 사 줘. 너는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훔쳐 왔지.꽃집에서 버린 시든 꽃을 주워 왔지.아울렛에서 싸구려 팬티를 사 왔지.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넣었어. 슈가 맨, 너한테 없는 것을 줘.다이아몬드 - 은빛 배 - 파리로 날아가는 전용 비행기 - 번뜩이는 빌라의 지붕 - 금빛 넘실거리는 전자 오르간 - 아 - 입 벌려요. 너는 녹아 사라지고,깊게 썩은 입이 말하기 시작했어. 가엾은 슈가 맨.너는 노래방에서 ... ... - 장정일, , 2015년 여름호 도서관에서 문학잡지를 읽는다. 밖은 낮아지는 구름, 어두워지는 대기, 사랑을 꿈꾸지 않는 젊음, 어긋나버린 시간들로 채워지고, 나는 흔들리며 가라앉는 ..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티머시 스나이더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티머시 스나이더(지음), 조행복(옮김), 열린책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터무니없이 바빠졌다. 지금도 바쁘니, 이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서평은 기대할 수 없겠지. 나는 아마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것이고, 다시 흥분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일종의 행운이었다. 점심 시간 잠시 들른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책을 사지도, 읽지도, 토니 주트라는 역사학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전 주위에 책을 읽던 사람들이 많았을 때,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책들을 나에게 소개해주곤 했지만, 지금은 주위에 책을 읽는 사람도, 책을 추천해주는 사람도 ...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특히 인문학 책은 제대로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긴 내가 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더구나 꼼꼼한 연구서의 면모까지 지닌 이 책은 아비 부르부르크 생애 뿐만 아니라 주요 연구 성과, 그것에 대한 평가, 그리고 '미술사 연구'의 시작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두서없는 리뷰를 양해해주길 바란다. 다나카 준의 꼼꼼한 서술을 따라 읽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겨우 다 읽은 후 쓰는 이 리뷰는 바르부르크의 주된 테마를 언급하는 데 그칠 것이고, 이 소개가 비전공자에겐 다소 재미없고 전문적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이 책은 전문 서적이다. 인문학의 꽃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학이며, 역사학 중에서도 ..

피로사회, 한병철

피로사회 한병철(지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베스트셀러가 된 철학책을 읽었다. 한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병철의 . 몇 해 전 이 책으로 떠들썩할 때, 나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책의 내용보다는 마케팅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초 집 근처 구립도서관 서가에 새로 들어온 책 서가에 한병철 교수의 몇 페이지를 읽고 난 다음, 바로 그의 책 세 권을 주문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인상적이고 놀라웠다고 할까. 단정적인 논조였지만, 일관성이 있었고 나에겐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고 해야 할까.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

물, 프랑시스 퐁주

물 프랑시스 퐁주 나보다 더 낮게, 언제나 나보다 더 낮게 물이 있다. 언제나 나는 눈을 내리깔아야 물을 본다. 땅바닥처럼, 땅바닥의 한 부분처럼, 땅바닥의 변형처럼. 물은 희고 반짝이며, 형태 없고 신선하며, 수동적이라 못 버리는 한 가지 아집이라면 그것은 중력. 그 아집 못 버려 온갖 비상수단 다 쓰니 감아 돌고 꿰뚫고 잠식하고 침투한다. 그 내면에서도 그 아집은 또한 작용하여 물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순간순간 제 형상을 버리고, 오직 바라는 것은 저자세, 오체투지의 수도사들처럼 시체가 다 되어 땅바닥에 배를 깔고 넙죽이 엎드린다. 언제나 더 낮게, 이것이 물의 좌우명. '향상(向上)'의 반대. (역: 김화영)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오랜만에 읽는 이름. 프랑시스 퐁주. 물에 대한 시다. 물은 ..

눈,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 윤상인, 박이진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이런 인터뷰집은 감동적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인터뷰를 위해 그가 냈던 소설들을 다시 읽었고(거의 50여 권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한 오자키 마리코는 질문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은 지 십 수년이 지난 나에게도 이 책은 , , 을 읽던 그 때 그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리어 최근 들어 오에 겐자부로를 읽지 않았구나 하는 후회까지 들게 만들었으니.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가의 일반적인 인터뷰집이라고 하기엔 문학(이론)적이고 다양한 작가들-일본 작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작가들-이 등장하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고 ..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Downsizing Democracy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Downsizing Democracy 매튜 A. 크렌슨, 벤저민 긴스버그(지음), 서복경(옮김), 후마니타스 1. 정치의 중요성 몇 년전부터 정치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일상의 상당 부분이 정치, 정치적 활동, 현실 정치 -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 등으로 인해 좋아지거나 나빠진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들과 그들이 만드는 모습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 그만큼 중요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술자리에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일행 중 한두명은 싫어한다. 더구나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싸우기라도 하게 되면 괜히 꺼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