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58

음반들, 그리고 우리들의 기다림

몇 번의 이사,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생의 변화 앞에서 음반들은 그 특유의 친화력과 생기를 잃어버렸다. 한 때 자신들의 소리를 보여줄 도구들마저 없었을 때, 아마 그들은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주중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전, 음반들 한 무더기를 꺼내 한 번 정렬해 보았다. 다들 오래된 음반들이다. 심지어 존 케이지(John Cage)를 연주한 음반도 눈에 보이지만, 몇 번 들었던가, 언제 마지막 들었던가, 그런 기억마저도 없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알아줄 이를 만났을 때에만 그 빛을 발한다. 그건 그녀도, 그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대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알리고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구차하고 쓸쓸한 일인가를, 한 번이라도 ..

독재라고 불리는 이 나라

우연히 받아보기 시작해 이젠 끊을까 생각하고 있는 신문, 중앙일보에 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단국대 영문과 오민석 교수의 칼럼이다. 종종 뛰어난 산문으로 가끔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데, 이번 칼럼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었더라. "독재타도"라는 말도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이 말이 진정성을 가질려면 이 말을 하는 주체가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체포, 구금, 고문, 죽음 등의 공포를 경험할 수도 있는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이 말엔 그런 처절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이 말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고난의 삶들을 횐기한다. 그러나 지금의 누구가 이런 말을 해도 잡혀갈 일이 없다.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울려퍼지는 이 말이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유가 바로 ..

기다림

기다림은 시간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는, 느린 걸음이다. 동시에 마음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심적 동요이기도 하다. 그것은 너무 미세해서 알아차리기 힘든 진동이자 떨림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예측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희망이라든가 바람만 있을 뿐. 몇 분, 혹은 몇 시간 후, 또는 더 먼 미래의 어떤 결론을 알지 못하기에 기다림은 모험이며 방황이며 결국 우리의 영혼에게 해악을 끼칠 위험한 존재다. 그러면서 기다림은 누구, 언제, 어떤 일로, 어떻게에 따라 그 무늬와 색채가 달라지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기다림은 다채로운 변화이며 파도이고 햇빛이 잘게 부서지는, 빛나는 물결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별의 운동처럼 한참을 들여다 보아야만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이런 봄날이었을까

이런 봄날이었을까, 가벼운 흰 빛으로 둘러싸인 꽃가루가 거리마다 마을마다 흩날리던. 내가 앙드레 드 리쇼의 을 읽고 아파했던 날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결혼하기 전이었고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지금도 있으려나, 그래서 봄이면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금기). 그리고 그 환상으로 사랑을 잃어버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으며(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사랑에 대해선 더더욱 까막눈이었다(지금도 그런 듯). 그 때 그 시절, 나는 을 읽었다. 기묘하고 아름답고 슬펐다. 알베르 까뮈가 격찬했고 조용히 번역 출판되었다가 거의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 소설이었다. 몇 해 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되었다.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기억을 더듬을 ..

최근

1. 최근 블로그 상에서 바로 글을 써서 올린다. 그랬더니, 글이 엉망이다. 최근 올린 몇 편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읽어보니, 문장의 호흡은 끊어지고 단어들이 사라지고 불필요한 반복과 매끄럽지 못한 형용어들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몇 번의 프린트와 펜으로 줄을 긋고 새로 쓰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끼인 세대인 셈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끼인 세대.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지만, 읽기는 무조건 종이로만 읽어야 하는. 그래서 최근 올렸던 글을 프린트해서 다시 쓰고 고쳐 새로 올릴 계획이다. 얼마나 좋아질 진 모르겠지만. 2. 헤밍웨이의 를 읽고 있다. 무척 좋다. 번역된 문장들이 가지는 태도가 마음에 드는데, 원문은 얼마나 더 좋을까. 영어 공부를 열심해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된 셰익스피..

내 마음은 철거 중

낡은 마음을 부수고 새 마음을 올린다, 올리고 싶다. 늙은 마음을 허물고 젊은 마음으로 교체한다, 하고 싶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철거중 #내마음 #재건축 #들어간 #내마음 #내일상 #봄날 YongSup Kim(@yongsup)님의 공유 게시물님, 2019 4월 8 7:42오후 PDT 내 발걸음은 바람을 달고 앞으로 무한 반복 중. 그러다 보면, 끝에 가 닿겠지. 그 끝의 풍경은 어떨까, 하고 한때 상상했지만, 상상은 현실 앞에 무너지고 사라지고 그저 그 끝도 오늘의 반복이거나 복사이거나 혹은 어제의 모습.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걷는다 #터널 #끝은어디일까 YongSup Kim(@yongsup)님의 공유 게시물님, 2019 3월 29 4:25오전 PDT 키케로의 말처..

블랙홀

'어쩌면 내일이 지구의 종말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저 끝없는 우주에 어떤 생명체가 있을 지 모르고, 늘 세상은, 이 우주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곳이니, 생명체, 아니 외계인이 있고, 그 외계인이 내일 별안간 침공할 수도 있을 테니.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며, 꽤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한 번 현대물리학에 대해 공부했지만, 이 지구에서 시간과 공간이 하나라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어제 블랙홀 사진을 공개되었다. 20세기 초 그 존재조차 의심스러웠는데, 어제 실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래 동영상은 블랙홀에 대한 것이다. 지구 정도의 행성이 블랙홀이 된다면 1cm 정도의 크기가 된다고 한다. 1cm 정도의 크기인데, 중력은 ..

비는 더 이상 마음을 적시지 않고

내 마음에 비가 내리면 그대 마음에도 비가 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한 번 낙엽이 지고, 두 번 낙엽이 지고, 또 낙엽이 지고, 지난 번 낙엽 질 때 나와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벚꽃 피고 지고, 봄이 가고 오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그대 입술 옆으로 퍼지던 웃음의 향기에 취해 비틀거리던 여름날 그 바다 파도소리가 싱그러웠다. 그대 얇은 손길에도 가슴 조이며 땅 밑 뜨거운 용암의 흔들림을 느끼곤 했다. 그 열기에 내 마음이 녹아내리고 내 이성이, 내 언어가 녹아내려 흔적없이 사라지던 계절이었다. 그 계절이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또 가고, 더 이상 그 계절이 오지 않았을 때, 저 창 밖엔 거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지만, 그대 없는 내 마음엔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들..

추억은 술을 마시고

입구는 좁았다. 대형병원 한 쪽 귀퉁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전부였다. 몇 명이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지하와 지상 사이를 빙글빙글 오가기만 할 뿐, 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그리곤 금세 희미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앞에 현금인출기 한 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죽음이 왔다가 가는 공간 앞의 외로운 ATM. 그 앞에서 사람들은, 나는 현금을 뽑기 위해 서있었다. 작년치 성당 교무금이 두 달 밀려 있어서 그 돈까지 같이 뽑았다. 이젠 현금이 드물어진 시대다. 천천히 걸어나와 복도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조의금 봉투들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차가운 현금인출기 속에 있던 만원 짜리 다섯 장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조의금 봉투를 전달하며, 조의를 표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전에 ..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의 여울 사이로 떠오르는 한줌 알갱이들. 정체모를. 아름다운 시절들은 다들 노랫말 속으로 잠기고 고통은 리듬으로 남아 바람 속에 실리기도 하고 햇살에 숨기도 하는데, 하나의 계절이 가면 어김없이 하나의 계절이 오고 계절풍이 불고 나무들은 빛깔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조수의 리듬에 영혼을 밀어넣고 흔들흔들, 노래를 부른다. *** 위 글은 2002년 10월 27일에 쓴 것이네. 그 사이 화양연화 OST는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은 건 상당히 지난 듯싶어. 상당히 쓸쓸할 듯 싶은 이 봄,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다시 보면 어떨까. 살짝, 아주 살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