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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히페리온의 노래 

J. Ch. F. 횔덜린(지음), 송용구(옮김), 고려대 출판부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 보르헤스, <시라는 수수께기> 중에서(<<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11쪽) 



시는 아무래도 원문 그대로 읽어야 제 맛이다. 번역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동일한 단어라고 언어마다 그 어감이나 뉘앙스, 풍기는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옮겨서 밋밋한 시라도 원문으로 읽으면 풍성한 느낌을 주는 시일 수 있다. 몇 해 동안 영시를 읽으면서 배운 바라고 할까. 


횔덜린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으나, 그의 시를 제대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백 여년 전 독일 튀빙겐, 헤겔과 셀링이 있었고, 루소의 사상과 나폴레옹의 혁명 공화정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신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이 뒤섞여, 서서히 싹트던 민족주의적 이상을 노래하던 그 때,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든 이들이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하다. 


만약 내가 독일인이라면, 그의 <독일인의 노래Gesang des Deutschen>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호소력 짙은 시가 될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그 당시에는 어땠으랴. 하지만 한글로 읽는 이 시집은 횔덜린을 앍고 그 시절의 분위기, 그리고 강렬한 이상과 염원으로, 그리스 고전주의적 미학을 성취하고자 할 때의 시학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지만, 시 특유의 감미로움이나 위안, 서정적인 표현이나 비유를 즐기기에는 너무 관념적이라고 할까. 


그래도 시 읽기란, 잠시 내 몸과 마음을 놓고 쉬어갈 수 있는 휴식일 것이다. 


이 시집만 읽는 건 재미있을 듯하지 않고 그 당시 독일의 분위기라든가, 독일 문학 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더 흥미로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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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태도 - 대중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사회주의적이며 카발라적인 진지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그 속에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 에서도 기인하지만,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책은 벤야민 글쓰기의 급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러한 글쓰기의 급진성으로 이미 조각난 시간, 조각난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꽤 적절한 책이 되었다(그러나 가끔 만나게 되는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 앞에선 아쉽긴 하지만). 


고전적 예술 양식은 이미 사라지고 그 흔적들이 광고 문구 -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에서 따오거나 유래한 비유적 문장들로 즐비한 - 나 디자인 소품 - 이미 고전 예술을 넘어 현대적 예술 양식의 하나로 인정받는 - 으로 남겨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란 24시간 꺼지지 않는 케이블 방송처럼 끊임없이 변하며, 이 세계의 본질마저 이미지들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연속체, 즉 영화적인 병렬적 구성 -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구성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는 각 단락을 나누고 그 단락마다 에피소드를 담는다. 마치 각기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선 아케이드를 지나는 산보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거리 풍경처럼, 이 책도 그런 구성을 띄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산책할 때나 그 산책을 끝내고 혼자 있을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끝없는 허전감, 쓸쓸함 - 혹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행인들 사이에서 경험하는 익명성의 공포 - 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벤야민이 향하는 곳은 그 산책의 본질을 호도하고 그 산책의 외관으로서의 글쓰기 형식 자체이거나 그 산책의 쓸쓸함을 극복하기 위한, 비현실적 이상향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여러 문학작품들에 빗대어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을 통해 현실 변화의 단초를 읽기 보다는 이미 변해버린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실은 너무 늦게 우리가 벤야민을 읽기 시작한 것이며, 너무 일찍 벤야민이 절망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나마 이런 글쓰기를 통해 변해버린 현실을 알려주는 이마저도 드문 탓에, 벤야민은 우리들의 숨겨진 친구가 된다. 


이 책은 벤야민의 주저가 아니다. 일종의 산문집에 가까우며, 짧은 글들의 연속으로 인해 도리어 독서의 혼란스러움만을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을 지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벤야민저 | 김영옥외역 | 길 | 2007.1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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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 10점
엘렌 호지슨 브라운 지음, 이재황 옮김/이른아침

 


“내게 이것은 조직범죄나 마약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잭슨 시장은 클리블랜드 신문 ‘플레인딜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것은 주민들에게 마약과 똑 같은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우연히 합법의 요소를 지닌 일종의 조직범죄다.” 그는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소송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다.” (707쪽)



클리블랜드 시장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은 도이체뱅크,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웰스파고, 아메리카 은행, 시티그룹 등 21 개 주요 투자 은행을 상대로 2008년 1월 소송을 제기했다.

아직 우리는 이 소송 결과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소송은 현재 진행중일 거라는 것과, (매우 기분 나쁜 예상이지만, 늘 그래왔던 것처럼) 소송 중에 프랭크 잭슨은 시장 직에서 물러날 것이고, 소송은 적절한 합의나 소송 취소 등으로 끝나지 않을까. 또는 이 소송이 그 동안 은행이 저질러왔던 끔찍한 악행에 대한 심판이 된다면(뭐,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프랭크 잭슨은 유무형의 압력에 시달릴 것이고 링컨이나 케네디처럼 암살 당하거나, 결국 소송은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한 건데, 그 때 나는 이 책의 300페이지쯤을 지나고 있었다. 실은 무려 700페이지(활자가 제법 크다고는 하나)를 약 열흘 남짓 읽는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고, 책의 내용 또한 빠른 독서가 아니라 노트와 밑줄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 책은 매우 중요하고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이자’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 사회에는 이자에 해당되는 현금(동전이나 지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은 찍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누군가는 그 이자에 해당되는 빚을 안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할 뿐이었다.

무늬만 ‘연방정부기구’인, 실제로는 민간 은행들이 주주로 된 민간법인인 연방준비은행(FRB)은 자기 멋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고, 미국 정부는 FRB에서 달러를 빌려오고, 전 세계 나라들은 IMF가 권고하기도 하고, 전 세계 금융가들이 지지하는 변동환율제 속에서 자기 나라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달러를 사 모은다.

현대 금융 시스템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돈을 찍어낸다. 그 과정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놀라운 속임수의 명작일 것이다. 금융업은 불공정 속에서 잉태되고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 … 은행가들이 지구를 소유한다. 그들에게서 지구를 빼앗아도 돈을 찍어낼 권한이 있는 한, 그들은 펜을 한번 휘갈겨 그것을 다시 사들일 만한 돈을 찍어낼 것이다. - 조시아 스탬프(Josiah Stamp) 경, 잉글랜드은행 이사이자 1920년대 영국에서 두 번째 갑부였던. (23쪽)

다른 나라에서 아무리 중앙 정부가 돈을 찍어낼 권리를 가진다고 한들, 달러와 연동된 변동 환율제를 가지고 있는 이상,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화폐 시스템(금융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저항했고 때론 성공했으나, 결국 현재와 같은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상황을 잘 살펴보라. 어느 은행가가 자신이 가진 부를 잃어버렸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은행이 정부로 넘어가더라도 은행가들은 가난해지지 않고 그 동안 번 돈으로 잘 살아가는 대신, 무수한 기업들이 문을 닫고 수를 셀 수 없을 정도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하고도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이 책의 저자 엘렌 호지슨 브라운은 달러를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는 금융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한 줄도 인용하지 않으면서(한 두 번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가 무엇이 문제인지 설득력 있게 지적한다.

저자는 미국의 독립전쟁도 실은 화폐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탄 지경에 이른 독일이 곧바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게 된 것도 화폐 개혁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공공연히 IMF를 무시하고 전 세계 금융가들을 비아냥거렸던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서도, 그것이 왜 옳은 것이었나를 이야기한다.

그는 현재의 달러 대신 미국 중앙 정부가 책임지고 찍어내는 새로운 화폐,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번번히 유럽의 은행가들(특히 영국)에 의해 좌절되었던 그린백(greenback)의 발행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이런 말들을 했다.

미국인들이 은행들에게 통화 발행을 통제하도록 허락하기만 하면, 그들 주변에서 생겨나게 될 은행과 회사들이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번갈아 일으켜 국민의 재산을 몽땅 빼앗아갈 것입니다. 그 자식들은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집도 없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126쪽)

나라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재무부는 돈을 가진 체하는 뻔뻔스러운 빈털터리인 모험가들과 은행가들에게 스스로 손발을 묶어 바쳤습니다. 당장에라도 박살내버릴 수 있는 대상에게 말입니다. (130쪽)


하지만 제퍼슨은 실패했다. 하지만 제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성공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국가 부채의 마지막 대금을 지불하여 국가 부채를 제로로 만들었고, 잉여금을 축적했다. 그는 “그 은행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는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됐으나, 총알 두 알이 모두 빗나갔다. 하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136쪽) 

이 책은 화폐, 금융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있었던 많은 사례들을 들며, 현재의 금융 위기가 필연적으로 올 수 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위기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금융가들, 자본가들이 조장하기도 했으며(20세기 초의 미 경제공황처럼), 결코 이런 위기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화폐 개혁이 이루지 않는 이상.

마지막으로 이 책의 일부를 그냥 인용하겠다. 애초 이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서평은 어려운 상태였다. 내 전문 분야도 아니고 책은 두껍고 무수한 인용과 사례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동안 당연히 여겼던 어떤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자, 이 세상 전체가 이상한 곳이 되어버렸다고 할까. 나는 언제나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이 궁금했다. 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나라가 엉망이 된 상태에서 어떤 경제력으로 다시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것이었을까. 이 책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라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스스로 돈을 찍어낼 특권을 차지했습니다. 유형의 돈뿐만 아니라 금융적인 것까지도요. 그는 써먹지 않던 위조 기계를 손에 넣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이를 돌렸습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 그것이 다른 여러 나라에 전파되고 자족경제 시대를 만들어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자족경제는 자급자족을 이루고 수입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가 경제 정책이다. 보호무역을 선호하고 자유무역을 막으려는 나라들은 종종 자족 경제로 표현되기도 한다. 라코프스키의 진술은 ‘런던 타임스’에 실린 사설을 상기시킨다. 링컨의 그린백 계획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정부는 비용을 치르지 않고 독자 통화를 갖게 될 것이다. 정부는 빚을 갚고 빚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통상을 하는 데 필요한 돈을 충분히 갖게 될 것이다. 세계 문명사에 일찍이 없었던 번영을 누리는 정부가 될 것이다.” 독일은 이 목표들을 이루어가는 중이었다. 헨리 C.K.류는 이 나라의 놀라운 변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치스는 1933년 독일의 권력을 잡았다. 경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이 강요되고, 외국의 투자나 융자도 들어올 전망이 전무했다. 그러나 주권신용이라는 독립적인 통화정책과 완전고용의 공공사업 프로그램으로 제3제국은 파산한 독일을, 수탈할 해외식민지를 빼앗기고도 4년 안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군비 지출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셸던 엠리 역시 <은행가에게 거금을, 국민에겐 빚을>에서 독일이 파산 상태에서 세계 강국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것은 독자 통화를 발행한다는 결정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독일은 1935년부터 1945년까지의 모든 정부 지출 및 전쟁 수행에 따른 비용을 금이나 빚 없이 조달했다. 독일 세력을 무너뜨리고 유럽을 다시 은행가의 지배 하에 놓기 위해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 세계 전체가 달려들어야 했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 공립학교 교과서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354쪽~356쪽)

 



* 덧붙이는 글.

달러가 기축 통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석유 구매를 달러로만 가능하게 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조만간 달러가 기축 통화의 자리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잃어버렸을 때의 세계 경제에 미칠 파장은 예측 불허다. 오늘 기사를 보니, IMF와 같은 위기는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런 위기는 오지 않는다. 올 가능성도 없다. 다만 '세계 기축 통화의 변화'와 같은 예측하기 어려운 어떤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전에 썼던 '달러' 리뷰: http://intempus.tistory.com/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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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놓인 낯선 요리를 본다. 꼭 이국의 젊은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눌 듯한 느낌이다. 포크로 조심스럽게 하나를 찍어 먹는다. 창 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비가 내린다. 한 나라의 요리는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내 천박한 허기는 낯선 요리를 깊게 음미할 기회를 여지없이 박탈해버린다. 마치 대부분의 소년들이 가진 거칠고 사나운 욕정이 순결한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들에게 상처를 내듯이(아니면 그 반대든지).

낯선 요리에 반한다는 것은 이국의 대기와 대지 속에 온 몸의 감각을 맡기는 것과 같다. 독일 요리는 순박하다. 화려한 기교나 장식은 없다. 낯선 이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수줍은 듯 말을 건네다가, 상대의 호의를 느끼는 순간 편한 미소로 다가온다. 독일의 요리는 이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 보였다.

하지만 입맛만큼 세상에 보수적인 것은 없다. 어느 과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서른세 살 이후 먹게 되는 낯선 음식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서른세 살 전에 먹었던 음식의 맛을 기억해두고 이를 계속 찾게 된다는 것. 외국 생활을 오래 했지만, 밥이나 김치, 고추장을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도 우리들의 보수적인 입 탓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여러 번 낯선 음식에 당황스러워한 경우가 있다. 이 점에서 호텔의 가지런한 아침식사만큼 부담 없는 것도 없다. 빵과 우유, 주스, 햄과 샐러드, 계란으로 이루어진 아침 식사는 지친 여행객에게 건조하지만 짧고 깊은 편안함을 선사한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메세 칼스루헤로 향하는 길. 밤새 내리는 비는 온데간데 없고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거리에 부서져 내렸다. 눈이 부셨다. 몇 천 명 정도 사는 듯 보이는 배드 해른알브는 우리의 작은 읍을 연상시켰다. 칼스루헤에서 배드 해른알브까지 전철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이렇게 보면 그렇게 멀게 생각되지 않지만, 자동차로도 삼사십 분 이상 달려야 하는 꽤 떨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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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인구밀도가 부러웠다. 그래서 독일의 자연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삶은 윤택해보였다. 다만 사람들 성격들이 내성적이고 조심스러워, 다소 심심하거나 쓸쓸할 경우가 많은 듯 보이는 것을 제외한다면.


아트페어의 첫 날은 VIP 프리뷰이다. 아트페어는 그 나라나 그 지역의 사회 저명 인사나 미술 수집가, 언론매체 종사자 등 VIP로 볼 수 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먼저 프리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아트페어마다 프리뷰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 어느 아트페어의 경우에는 프리뷰 때 상당수의 작품이 팔려나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느 아트페어에서는 프리뷰 땐 살만한 작품을 점 찍어 놓고 며칠 지나 구입해 가는 경우도 있다. 어느 때에는 마지막 날 아트페어 대부분의 매출이 발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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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로 붐비진 않지만, 가장 신경쓰이는 날이 바로 첫날 프리뷰 때이다. 프리뷰 때 방문한 고객들 중 작품을 구입할 생각이 있는 일부는 아트페어 기간 중에 다시 들려 작품을 구입해 간다.


최근 들어 미술 비엔날레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아트페어의 위상이 높아지고 대한 미술계와 대중의 관심도 늘고 있다. 전자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전시인데 반해, 후자는 갤러리들과 고객들을 위한 대규모 시장이다.

새로움으로 포장한 평론들, 일반인들에게는 어렵지만 현대 미술의 방향을 결정지을 지도 모르는 작품들, 현대적인 용어들로 작품들을 나누고 설치하고 설명하는 비평가들과 전시 기획자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예술가들. 관람객들은 작품들을 보기 위해 들어온다. 갤러리스트들도 있을 것이고 미술 잡지의 기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엔날레의 주인공은 예술가와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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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 칼스루헤와 서울 삼성동 코엑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직 아트페어를 보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흰 벽면에 작품이 걸리고 그 옆에는 제목, 작가이름, 크기, 재료, 제작연도, 그리고 가격이 적힌 메모가 있다. 갤러리스트들은 어느 관람객이 작품을 구입할 사람인지 유심히 살핀다. 콜렉터들은 손에 작은 수첩 하나를 들고 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을 경우에는 갤러리 이름, 부스 번호, 그리고 작품 이름과 가격을 적는다. 적게는 몇 천 유로에서 많게는 몇 만 유로 이상 나가는 작품을 사기 위해서 그들의 들이는 노력은 매우 대단하다(미주1). 여기에서 예술가는 매우 드물게 노출된다. 한 점이라도 더 팔려는 갤러리스트들과 좋은 작품 하나를 고르려는 콜렉터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고 불안한 표정의 예술가들로 구성된 것이 바로 아트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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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Schiela의 작품이다. 그의 홈페이지는 http://www.schiela.de/ 이다. 꽤 흥미로웠던 수채화였다. 한국에서도 극사실주의 작품이 유행이지만,  세계적으로도 추상 작품보다는 구상 작품들이 최근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재털이, 병뚜껑, 옷감, 과일 등이라면 외국 작가들은 일상의 풍경, 사람의 표정, 어떤 몸짓이라는 점이다. 어느 작가가 살아남느냐는 작품의 시작부터 이미 결정이 나있는 셈이다(그런데 가격도 보이는데, 지워야 되는 건가).



주1) 한국과는 달리 미술 작품에 대한 투자의 개념이 달라서, 유럽에서는 작품을 구입해 오래 보관한다. 젊은 청년이 구입한 작품은 그가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작품은 그 때 그 자리에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작품의 가격은 오랜 시간 후에 작품의 가격은 극단적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구입했던 때보다 오른 경우가 많고 어느 경우에는 문화재로 인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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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이면 조용하고 은밀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것은 곱고 차가운 햇살 아래에서 다듬어지며, 창 밖의 불길한 어둠을 가르며 내리는 흰 눈으로 감추어진다. 가끔 깊고 무거운 막다른 골목길까지 걸어 들어오는 행인의 구두 밑에서 사각대는 눈 소리는 내 사각의 방이 가진 쓸쓸한 온기를 터질 듯 한 컷 부풀인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전, 서울엔 눈이 내렸다. 그것이 내가 올해 본 마지막 눈이었다.

사진

공항 가기 전 날 찍은, 어느 건물 옥상 사진. 옥상에 새겨진 저 무늬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곧바로 Art. Karlsruhe가 열리는 Messe Karlsruhe로 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중이었고, 유럽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이미 와서, 전날 항공화물로 도착한 작품들을 꺼내 놓고 작품을 전시장 벽에 설치하고 있었다.

작품 설치 중

Painting과 Photo 작품들 뿐이라 그리 어렵지 않지만,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평행선을 벽면에 비추어주는 기계다. 저 기계, 건축 현장에서나 볼 만한 기계라고 생각했는데, 작품 설치 때 꽤 요긴하게 쓰인다.


한 시간 정도 작품을 설치하다가 미리 예약해놓은 호텔로 갔다. Karlsruhe 인근의 Bad Herrenalb에 있는 Treff Hotel이었다. 그런데 ‘Karlsruhe 인근’이라기 보다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우리는 Karlsruhe에서 나와, 숲 속으로 무려 30분이나 들어갔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낯선 브랜드의 GM 자동차에 붙은 네비게이션 뿐이었다. 그것도 딱딱한 독일식 억양의 아줌마 목소리의 영어로 설명하는.

서울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칼스루헤로, 칼스루헤에서 배드 헤른알브로, 나는 지쳐 금방 잠이 들었다. 시차도 피곤함에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새벽에 깨는 잠은 어쩔 수 없었다.

호텔방

두 명이 쓸 수 있는 방에 혼자 머물렀다. 지금 보니, 약간 우울한 풍경이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고 정신없는 일정이었다.


아침이 왔다. 낯선 풍경이었다. 독일의 숲이란 이런 모습이었구나. 침엽수로만 이루어진 유라시아 대륙 서쪽중간에 위치해 있는 숲은 겨울에서 봄을 향해가고 있었다. 간간히 새소리가 들렸고 어디선가 교회 종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집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올랐다. 아침을 알리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메시지. 그러고 보니 호텔 조식 사진을 찍어둘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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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이란 단어는 이국에 나가보면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그 기분도 사라진다. 일상의 힘은 놀랍다. 끊임없이 뭔가를 처리해야만 하는 일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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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조금만 운전해 가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것이 산인데, 독일에선 그렇지 않았다. 낮은 언덕을 만나기도 어렵다. 이 곳이 난 어딘지 모른다. 베드 헤른알브에서 메세 칼스루헤로 가는 길 중간에 맞주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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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트스피드를 잘못 맞추었다. 여유를 가졌다면 사진을 많이 찍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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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루헤 인근에 바덴바덴도 있고 베드 헤른알브가 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도 인근이다. '인근'이라는 표현이 좀 모호한 감이 없진 않지만. 프랑스, 스위스, 독일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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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6

  • 독일에 다녀오셨군요.....+_+
    사진을 접하는 저에겐 이국적인 느낌이 화악 다가오네요. ^^

  • noi 2008.04.24 21:58 신고

    건물 옥상 사진이 특이하네요. 미술 작품인 줄 알았어요.. 방 사진도 전 좋은데요. 고적해 보여도 분위기 있고.. 창밖 풍정도 좋고..
    건강하시죠?^^

    • 저 옥상이 최근 어떻게 변했는지 조만간 올려볼께요. ^^.. 아, 요즘 건강이 아주 안 좋아졌어요. ㅡ_ㅡ;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술로 해결하려는 습성이 20대 초반부터 굳어진 탓인지, 건강 해치는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있네요. 크크.

    • noi 2008.04.26 00:00 신고

      이런, 건강을 해치시면 아니되지요. 술 많이 드시나봐요.. 사알짝 줄여보심이.. 헬스 하시는 거 같던데 운동도 좀더 하시구여.. 말이 쉽지만서두^^

    • 바쁜데 해야할 일은 계속 쌓이고 스트레스는 받고 ... 아, 디오니소스는 우리들 청춘과 너무 가까이 있는 것같아요. 한강에서 자전거 탄 지도 꽤 되었네요. 피트니스 센터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가는데, 좀 분발해야겠어요. 그리고 감사. 꾸벅. ^^



2월 26일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3월 5일에 돌아왔다. 그 사이 할머니께서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서울에 돌아오니, 그 사실이 주위를 떠나지 않으면서 날 아프게 했다. 부쩍 나이가 들어버린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말씀이 없어셨고 이미 창원에는 봄이 온 듯 따뜻하기만 했다.

독일 칼스루헤는 신기한 듯 조용하고 깨끗했다. 국제 아트 페어라고 했지만, 모든 자료들은 독일어로만 제공되었다. 의외로 영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적었다. 역시 유럽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었다. 방해받지 않는 사적인 공간이 있었고 사적 공간의 폐쇄성을 의식한 듯 독일인들은 대화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나오게 되는 계기도 이러한 독일의 특수성에 기인한 듯했다. 독일인들은 친절했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에 비하면, 한국인들은 대부분 불친절하고 웃음이 없다.

특히 물가는 서울보다 상당한 수준으로 낮았으며, 생필품의 질도 우수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찍어온 사진 정리만으로 몇 시간이 걸릴 것같다. 커피와 와인을 사왔다. 한국에서는 2만원은 줘야 살 수 있는 커피가 그 곳에서는 5천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 프랑스 와인이 프랑스보다 더 싸다고 할 정도이니. 몇 달 정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들었다. 그러나 오래 있으면 분명 외로움을 심하게 느낄 수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Messe Karlsruhe Hall 2에서 작품을 설치하고 있는 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다음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반 공개에 앞서 VIP 프리뷰를 한다. 프리뷰를 통해 작품 구매에 대한 우선권을 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호텔 창 밖 풍경. 호텔은 Karlsruhe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Bad Herrenalb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옆이 스위스 바덴바덴이라서 그런지 욕실 물이 매우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지막 날 하이델베르그 성에 갔다. 흥미로웠다. 최초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현재 볼 수 있는 건물들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2차 세계 대전 때 상당수의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이후 복원되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이델베르그 성에서 한 장 찍었다. 사진 찍지 않기로 유명한 나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독일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대륙 중간의 변덕스러움이 있었지만, 노란 개나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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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8

  • 사진 잘봤습니다.
    할머님께서는 좋은 곳으로 가셨을겁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외국에서 가족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더군요. 감사합니다.
      사진 찍기가 조금씩 늘어가는 듯했는데, 사진은 더 안 좋아진 것같아요. 그냥 오토로 놓고 찍으면 될 것을 셔트속도나 ISO나 조리개 등을 맞추고 찍다 보니, 엉망이 된 사진들이 꽤 많이 나왔어요. T_T;

  • 윤민맘 2008.03.09 17:37 신고

    그새 나이가 많이 들었네요, 지하련씨.

    • 아트페어가 끝나고 엄청 피곤한 상태에서 사진을 찍어서 그런거야. T_T;; (그러게, 아직까지 싱글인데, 피부가 예전만 못하니)

  • 보선 2008.03.09 22:33 신고

    실물보다 훨 좋은데,,,,
    멋진풍경과 잘어울리는데요~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동안 안보이시길래 독일 가셨나했더니.. 역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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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울력.





‘지난 시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 1891년의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봄의 깨어남 Fruhlings Erwachen>, 에밀 슈트라우스 Emil Strauß의 <친구 하인 Freund Hein>(1902),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소설들과 함께 무질의 이 소설 또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1)

하지만 나이가 너무 든 탓일까. 아니면 그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가 틀리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바지니, 이렇게 네 명의 소년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학교 모험담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쉽게 말해 나이를 어떻게 먹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까 연약한 친구에게 행사하는 폭력, 비난, 따돌림, 성적 수치 등등을 통해 우리의 퇴를레스는 혼란을 거치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지? 한 편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한 편으로는 모든 걸 다 아는 척 해대는 이 소설은 현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리석음의 한 쪽 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근대 교양주의가 현대 소설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읽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번역된 무질의 다른 소설, <<세 여인>>(문학과지성사)은 언제나 추천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젊은 소설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뜻 모를 단어와 문장으로 설교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지극히 나쁜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

진지하고 슬픈 퇴를레스는 이미 없고 영혼의 성장이라는 테마는 현대에서는 오래된 유물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늙은 채로 태어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에 얼마나 더욱 잘 적응하는가의 다른 말일 뿐이다.



(1) http://hesse-library.mokwon.ac.kr/archiv/HeFo6-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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