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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어빙 펜(Irving Penn)의 사진을 자주 보았지만(그만큼 유명한 탓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형적이라고 여기게 된 것은 어빙 펜 이후의 많은 패션 사진 작가나 사진기자들이 어빙 펜의의 사진을 따라하였기 때문임을. 최봉림의 글을 읽으면서 어빙 펜과 함께, 어빙 펜이 찍은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새롭게 알게 되었다기 보다는 아마 관심에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미스에 대해서. 회화에 잭슨 폴록이 있다면 조각에는 데이비드 스미스가 있다고 해야 하나. 


 
Portrait of Smith by an unknown photographer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는 피카소, 홀리오 곤잘레스(Julio Gonzalez)에 뒤이어 직접 금속 조각(direct-metal sculpture), 즉 금속을 직접 절단, 용접하여 형상을 제작하는 조각에 30년대말부터 몰두하여, 현대 조각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예술가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미국에서 최초로 금속으로 공간을 소묘하는 예술을 도입했고, 최초로 용접기와 철, 합금속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피카소, 곤잘레스에게서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일종의 콜라주 조각, 즉 기계 부품을 있는 그대로 취하거나 혹은 새롭게 배치하는 조각을 최초로 시도했다. (... ...) 우리가 찬탄하는 것은 그가 이룩한 작업 방식의 혁신이 아니라, 스미스 예술의 개성과 독창성이다." (205쪽) 


Dan Budnik, David Smith Welding “Primo Piano II” in His Bolton Landing Workshop, 1962, (c)Dan Budnik



"무수한 담론으로도 채울 수 없는" 스미스의 전체성에서, 초상이 '선택하고,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도 쇠와 불을 다루는 장인으로서의 스미스다. 그의 허름한 복장, 험한 작업으로 망가진 엄지손톱, 담배파이프를 움켜진, 불에 단련된 손, 초점을 잃은 시선, 육감적인 혹은 야수적인 입술과 코 등 화면의 어떠한 요소도 지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담고 있지 않다. 지성과 창조적 상상력의 조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속 용접에 생계를 기댄 단순노동자의 외모다. 어빙 펜은 데이비드 스미스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쇠를 두드리고, 자르고, 용접하는 대장장이로 '조직한다'(205쪽) 



David Smith, Cubi I, 1963, Detroit Institute of Arts, Founders Society Purchase, Special Purchase Fund, (c) The Estate of David Smith/VAGA, New York, photo (c) Detroit Art Institute of Arts/licensed by The Bridgeman Art Library



"예술은 자신의 물리학, 광물학을 건설한다. 예술은 손을 사물의 뱃속에 집어 넣어 사물에 자기 마음에 드는 형상을 준다. 예술은 우선은 장인이며 연금술사다. 예술은 육중하고, 불타는 것과 겨룬 나머지, 시커멓고 찢어진 손바닥을 갖는다. 이 거센 손의 격렬함과 정신의 술수 덕분에 인간이 있다." 

- 앙리 포시옹 



David Smith - Cubi XXIII, 1964  Image via huma3.com



"얼굴은 살아있는 형태로 개인의 미세한, 그러나 절대적 차이를 묘하게 번역한다. (...) 얼굴은 인간의 실존이 의미를 갖는 원초적 장소다. 얼굴을 통해 각자는 자신을 확인하고, 타인에게 명명되며, 남성 혹은 여성임을 표한다.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얼굴의 미세한 차이는 각자에게 자기 존중의 감정,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는 감정을 각 행위자에게 추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작용이다. 단 하나만 존재하는 각 인간의 얼굴은 각자의 유일무이한 인생 역정에 부응한다."

- David Le Breton, Des Visages, Paris, Me'tailie', 1992 


어빙 펜의 데이비드 스미스는 예술가라기 보다는 용접공이 어울려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천루의 미국에서, 용접기와 철로 작품을 만든 최초의 예술가였다. 그에게 작품의 도구와 소재는 공장에서 사용되던 것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전형적인 미국적 모더니티를 창조해낸다. '정말 미국적이다'라고 한 번 더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아래는 어빙 펜의 데이비드 스미스 사진들이다. 


데이비드 스미스에 대해서 길게 적긴 했지만, 실은 어빙 펜의 사진에 더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위의 사진들과 아래 사진들을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실은 데이비드 스미스 사진이 잘 검색되지 않아, 비교할 만한 사진들이 많진 않지만. 어빙 펜의 사진 스타일은 이제 전형적인 어떤 것이 되었지만, 어빙 펜이 바라보고 해석하는 대상으로서의 인물(혹은 얼굴)은 아직도 그 생생함을 잃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David Smith, New York, 1964 Gelatin silver print. Photo Irving Penn.


Irving Penn (American, 1917 - 2009)
David Smith (B), Lake George, Bolton Landing, New York, October 1964, printed June 2002
Copyright The Irving Penn Foundation



* 위 글의 인용문들은 모두 아래의 글에서 인용됨. 

최봉림, <사진 초상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홍디자인출판부, 200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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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한 허스트의 작품



제프 쿤스도 그렇고 데미안 허스트도 그렇고 현대 미술에서 잘 나가는 스타 예술가들을 보면, 진지함보다는 번뜩이는 재치와 탁월한 유머와 놀라운 비즈니스 감각과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풍부한 비평적 언어와 적절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재/주제를 제시하고 어느 공간에서나 어울리면서 그 중심에 예술 작품이 위치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궁금하게 한다. 예술작품 앞에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사람이 무조건 한 두 마디를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실패하지 않는 작가가 된다. 다른, 심각하고 진지한 예술가 앞에 서서 현대 미술을 주도하는 예술가가 되는 셈이다. 


현대를 가벼움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 현대의 공기일 것이다. 느린 속도는 태도의 진지함을 부르고 빠른 속도는 사고의 가벼움을 부른다. 연예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만남도 그렇다. 현대는 본질적으로 허무함이 극에 이른 시대다. 이는 보들레르가 진단한 바, 덧없는 모더니티의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백년 전에는 그것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면 지금은 삶의 일부로 허무함이 내려앉아 익숙해진 시대라, 그 체감 온도는 다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현대의 허무함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장 보드리야르처럼 그 덧없는 허무함에 삶과 인생을 기대고 그 속으로 사뿐하게 내려앉는 꿈을 꾼다. 아니면 기존의 모든 것들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거나 해체하며 새로운 것을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미 가고 아직 오지 않는 시대'가 현대가 된다. 종종 현대를 고전적 현대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이는 아주 짧은 순간, 20세기 초반 세잔, 젊은 피카소,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등에게서 언뜻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결국 저 허무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연인이라는 존재는 결국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연인이며, 뜨겁던 사랑은 결국 차갑게 식어갈 것이기 때문에 사랑인 것이다. 


프로젝트 초반부터 삐걱대는 곳에 와서 뭔가 해결 책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어느 프로젝트에선 예상했던 것보다 품질 수준이 높고 난관이 예상된다. 다행인 것은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 그런데 그 시간이 흘러서 뭘 할까. 결국 허무할 것을. 


내가 바로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허무함을 인지하면서도 고전적 태도로 직진했기 때문이다. 바니타스 작품들이 나왔으나,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삶의 반성이거나 도리어 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느냐였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17세기 유럽이 아니고 나 또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그래서 뭘.... (체력도 예전만 못하고 상황도 여의치 못해 술마저 줄이고 있는데...아, 디오니소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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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10점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새물결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지음), 김덕영, 윤미애(옮김), 새물결 



국내에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 ~ 1918)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였으며(신칸트주의자이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다), 사회학, 미학, 문화비평을 아우르며, 동시에 그의 글들은 대부분은 현대 문명이나 문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정신, 일상, 태도, 형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고, 그의 문장은 짧으면서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런 글을 썼다는 점에서 놀라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발터 벤야민 이전에, 그 누구도 이런 식의 글을 본격적으로 선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57쪽)이고, 이 형식 밑에는 ‘모방’이라는 태도가 흐르고 있다. ‘모방은 우선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투자되는 에너지가 헛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56쪽).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이 거의 없는, 쓸모 없는 개인적 차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게오르그 짐멜을 읽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확실히 그는 한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새벽에 읽어나, 지난 몇 주간 읽었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끝냈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번뜩이는 짐멜의 통찰력은 놀라웠지만, 전체적으로 '짐멜의 사회학이란 배부른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쓸모없는 지적 유희'라는 주류 학계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부분적 동의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짐멜은 그의 지적 재능을 낭비한 경향이 심했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은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역자가 고르고 고른 글이었을 텐데 말이다. (2013. 4. 8) 


적어도 그는 전통적 인문학이 원하는 바의 '어떤 체계'를 벗어나 인상적이고 표피적인 일상의 현상을 분석하였다. 그는 편지, 식사, 유행, 손잡이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글을 썼다. 그의 글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시도 자체가 마치 유행과도 같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어떤 것에 대한 감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감상이 아무리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도 하더라도 그는 짧은 글들을 적었고 학문의 체계를 향하던 그 당시 다른 학자들 - 뒤르켐, 베버 등 - 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력하게 짐멜 읽기를 권하는 것은, 내일 아침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무너져 저 깊은 아래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가지고, 돈과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불편한 타협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게오르그 짐멜 만한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짐멜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험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삶의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형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전체성이란 개별적인 내용들이 아무리 뚜렷하고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를 지라도, 그 안에는 통일적인 삶의 과정이 관통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 외부는 내부의 형식이 된다. 비록 멀고 친숙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적 삶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 때문에 모험에 대한 기억은 쉽게 꿈과 같은 색채를 띤다. 
(204쪽) 


20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게오르그 짐멜의 전체를 알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짐멜이 어떤 사상가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래는 20개의 글 제목이다. 

- 현대 문화에서의 돈
- 대도시와 정신적 삶
- 유행의 심리학. 사회학적 연구
- 장신구의 심리학
- 이방인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손잡이, 미학적 접근
- 얼굴의 미학적 의미
- 양식의 문제
- 알프스 여행
- 식사의 사회학
- 감각의 사회학
- 감사. 사회학적 접근
- 신의. 사회학적 접근
- 편지. 비밀의 사회학
- 모험
-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
- 비밀, 사회심리학적 스케치
- 분별의 심리학
- 다리와 문 

특히 몇 편의 글들은 놀라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현대 문명/문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미학적 분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분한 호소력을 가진다.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경건함, 곧 신에 대한 열망을 인간 영혼의 항구적인 상태로 만든 최초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서 그 이전의 신앙 형식들은 종교적 분위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연결시켰다.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돈이 바로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사람들이 빈번히 탄식하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물론 거기에서 돈에 대한 표상과 신에 대한 표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관련성들을 밝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심층적인 본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과 대립은 신을 통해서 통일성에 도달하게 되며, 또한 신은, 중세 말기의 저 특기할 만한 근대정신인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sa,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순의 지양 - 또는 대립의 지양 - 이라는 사실이다. 존재의 모든 낯섦과 화해 불가능성은 신에서 통일성과 화해를 발견한다는 이 이념으로부터 평화, 안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 유래하는데, 이 감정은 신에 대한 표상 및 우리가 신을 소유한다는 표상과 결부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돈이 자극하는 감정들은 이것과 심리학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27쪽- 28쪽) 


그의 돈(화폐)를 둘러싼 현대 문명에 대한 분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 분석은 철학적이며 문화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역자는 짐멜의 이러한 넓은 관심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다소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한 편 짐멜을 사회학자만으로 보기에는 그의 지적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원래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학 이외에도 철학, 미학,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인식 도구와 수단을 구사하면서 방대한 모더니티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거장이다. 우리는 아마도 짐멜의 지적 세계를 인식의 다신주의, 아니 어쩌면 인식의 범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85쪽) 


두서없는 서평이지만,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권한다. 이 책 이외에도 짐멜 선집 2권이 더 번역되어 있으니, 다른 책을 구해서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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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는 광주비엔날레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큐레이터이다. 그는 지난 2009년 니콜라스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기획한 '얼터 모던 Altermodern' 전(영국 런던 테이트미술관)의 카탈로그에서 네 개의 모더니티를 제안하였고 그 내용을 오늘 읽은 '시선의 반격' 도록에서 김현진의 글에서 확인했다. 간단하게 인용하자면 이렇다. 



오쿠이 엔위저는 모더니티를 서구 1세계의 supermodernity, 아시아의 고속개발국가들의 andromodernity, 이슬람권의 speciousmodernity, 아프리카의 aftermodernity로 분류.



큐레이터 오쿠이 엔위저는 자신의 글에서 네 개의 서로 다른 모더니티의 모델을 규정하면서 한국, 중국, 인도와 같은 나라들의 모더니티를 '앤드로 모더니티'andromodernity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서구의 supermodernity를 모델로 받아들여 발전과 선진화에 방점을 두는 개발적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개발의 대안적 모델들을 고민하면서도 일종의 고속 개발을 통해 성취되는 이 하이브리드형 모더니티라고 설명하면서도 남자를 뜻하는 andro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우고 부수면서 건설하고 전진해 나가는 남성적인 속성이 여기에 잠재해있다. 


- 김현진(큐레이터) 




내가 위 내용이 무척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아직도 '모던modern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고, 그 모던-유럽에서 시작된-이 세계 각지로 흩어져 변형되는 것을 오쿠이 엔위저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엔위저가 설명하고 구분한 네 개의 모더니티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각기 다른 모더니티임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시각에서 각 로컬 모더니티를 바라보고자 하는 일반적 접근에 대해 그의 구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9년 12월에 진행된 전시 도록이다. 아트선재 센터에서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한 권 사서 서재에 놔두었다가 오늘 펼쳐보았다. 


위에서 언급된 오쿠이 엔위저의 의견을 볼 수 있는 글은 'Modernity and Postcolonial Ambivalence'이다. 전자 논문으로 확인할 수 있고 잘 검색하면 복사본 pdf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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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 권의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했다. 한글로 된 책도 밀려 쌓여있는데, 영어로 된 책을 세 권이나 주문했으니. 당분간 책을 사지 않고 쌓인 책들만 읽고 밀린 리뷰를 올려야 겠다. 


오늘 온 세 권의 책은 아래와 같다. 


루이 뒤프레(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 Andy Warhol

도널드 바셀미(Donald Barthelme), Sixty Stories 


집에 와, 루이 뒤프레의 책을 잠시 읽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 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책으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있었던 학자였다. '모더니티의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법한 이 책은 모더니티를 지성사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책 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Did modernity begin with the Renaissance and end with post-modernity? In this book a distinguished scholar challenges both these assumptions, discussing the roots, development, and impact of modern thought, trac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modernity to the late fourteenth century, and affirming that modernity is still an influential force in contemporary culture. 



14세기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모더니티의 흐름(passage)를 고찰하면서 현재 진행형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되새기고 있다. 무척 흥미롭다. 루이 뒤프레 스스로 서문에서 다소 거칠게 씌여졌다고 인정할 정도로 기존의 모더니티 연구서와는 다른 면모를 가진 책이다. 그런데 언제 다 읽어?


아서 C. 단토의 'Andy Warhol'은 열받아 구입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선 몇 주 전에 한 번 포스팅한 적이 있고, 또 다시 포스팅할 예정이다. (관련 포스팅: 2012/04/01 - [책들의 우주/예술] - 아서 단토의 앤디 워홀?? ) 이 책은 이미 번역되어 있는데, 그 번역서의 실체가 너무 황당해서 실제 단토의 책을 확인하고자 책을 구입한 것이다. 순수 미술책이 아무리 안 팔린다고, 미술 전문가가 굳이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는 책을 낼 수 있는 그 대담한 용기를 다시 확인하고자 실제 책을 구입했다. 


도널드 바셀미를 알게 된 것은 이미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그 사이 번역된 것은 몇 편의 단편 소설 뿐이었고, 원서는 대학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어려웠던 터라, 번역된 몇 편의 단편에만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바셀미를 다시 읽기로 했다. 나도 좀 자유로운 처지라면, 하루키 처럼 소설을 번역하면서 내 소설 구상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럴 형편은 안 되고, 열심히 읽기라도 할 생각이다. 소설 앞에 David Gates의 소개가 있는데, 이는 한 번 번역해서 포스팅을 해봐야겠다. 


벌써 11시 40분이다.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주일이, 한 달이, 쏜살같이 지나쳐간다. 어찌된 영문인지, 여유 부릴 틈도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술 한 잔 하면서 지내고 싶은데 말이다. 봄이 가기 전엔 한 번 만날 순 있겠지, ... 그렇게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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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n 1호 - 10점
Noon 편집부 엮음/GB(월간지)



2009년에 창간호가 나온 후 소식이 없는 잡지 ‘noon -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and visual culutre’를 읽었다. 주제는 violence of the spectacle이다. 아마 몇 명은 바로 예상하겠지만, 이 주제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언급된 그 스펙타클에 대한 것이다. 기 드보르는 이 놀라운 저작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스펙타클을 새롭게 정의 내린다.


“스펙타클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기 드보르는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들의 구성체로서의 스펙타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스펙타클 환경(상황)에 주목하고 과감하게 이것을 스펙타클이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측면에서 히사시 무로이의 아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오늘날 인간은 각종 매체를 통해 조성된 ‘현실의 연장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의 연장세계란 인간이 ‘현실’이라고 믿는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호와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기 드보르의 책을 번역본으로 두 번 정도 읽었지만, 그 땐 - 벌써 십수년 전의 학부시절 -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잡지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는 실베르 로트랑제와 배영달은 기 드보르 -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 르페브르Henri Lefebvre -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를 연결 지으며 스펙타클 사회의 비극을 학구적 언어로, 아주 건조하고 논리적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보드리야르 사상이 가지는 비극성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이론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의 참혹함과 그 이론의 무책임함에 주목하지 않은 채 열광하는 철부지 인문학 수입상들을 경멸해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은 보드리야르의 문제가 아니라 보드리야르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들 탓이겠지만.


“사람들은 유희 속으로 들어가는 한, 스펙터클 속에서 가짜인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 보드리야르



그리고 21세기 초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분간하지 못하는 뉴미디어 시대가 펼쳐졌다. 이는 미디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스펙터클에 현혹된 우리들의 문제이다. 미디어가 감각을 기만하고 기만당한 감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감각이란 없다. 대신 비판적 이성이 있을 뿐이지만, 이미 그 이성은 탐욕적 금융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 만드는(making money) 도구적 이성이 된 지 오래다(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21세기 초를 경험했다면 어떠했을까?).

이런 올드-뉴미디어들의 총체적 문제가 바로 21세기적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이 ‘재현’으로 물러난다.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어떤 것 속에 우리들의 삶이, 일상이 퍼즐처럼 끼어 맞춰지는 형국이다. 실베르 로트랑제는 폴 비릴리오을 이렇게 인용한다.


사회적-정치적 공간의 동질화 - 원격 현전(telepresense), 편재성 환영(illusion of ubiquity) - 는 속도로 생산된다. 속도가 폭력의 형식인 것이다. 즉석 응답은 공간을 폐기하며, 즉석의 시간성은 실재의 일반화된 탈실재화를 유발하면서 기억과 역사를 말소한다. (The homogeneisation of the socio-political space - telepresence, the illusion of ubiquity - was produced by speed, and speed is a form of violence. lnstant response abolishes space, instantaneity cancels memory and history, provoking a generalized derealization of reality.)


다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공간의 거리는 무의미하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간은 동질화된다. 이 동질화란 하나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이 거의 동시에 전 세계를 휘감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9.11 사태가 터졌을 때 모든 미디어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SNS는 내 물리적 존재가 가지는 공간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편재하는 가상의 실재가 되며, 인터넷 상의 프로파일과 히스토리로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은 바로바로 수정, 삭제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건 구글Google 서버에 저장된 기록이 전부일 것이다. 동질화된 공간의 무자비한 속도는 축적되는 기억과 지나간 역사를 지우며, 브레이크가 상실된 가속패달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진짜와 가짜가 사라진 액체 형태의 스펙터클 시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술로 더욱 강력하게 무장하고 확장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미술 잡지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못하고 있다. 다만 잡지 서두에 실린 니콜라 부리요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볼까 한다.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 형식은 단연 얼터모던의 중심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호연결된 단수성을 정의한다. 오늘날의 모더니티는 독립된 소군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론을 통합한다기보다는 아이디어와 형식, 인물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통로이며, 표준화되거나 동질화된 영역이라기 보다는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서 제시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은, 니콜라 부리요의 언급처럼 상호연결된 단수성으로 저항하고 있지 않을까. 스펙터클의 분석과 해체야 말로 21세기 예술가들의 사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 부리요의 저 언급은 짧지만, 무자비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예술 실천의 단초로 해석될 수 있다. 



* 아래는 위 본문에서 언급한 책들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한 리스트다. 읽기 쉬운 책들은 아니지만.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옮김) 현실문화연구(* 현재 절판)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적인 저서. 그러나 현재 절판이고 번역에 대해서도 다소 말이 있었던 책. 아래는 영역본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역본)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그리고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기 드보르의 Comments!


토탈 스크린
장 보드리야르 저/배영달

장 보드리야르의 토탈 스크린! 보드리야르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겐 읽어봐도 좋으리라.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저/박정자

앙리 르페브르의 이 책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실은 그만큼 번역이 어려운 책이었던 셈이지만, 박정자 교수의 노고가 안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Classics in Communication and Mass Culture)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영역본)


관계의 미학
니꼴라 부리요 저/현지연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 번역본이다. 번역된다는 소문만 전해들었고, 실제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오늘 검색해보고 알게 되었다. 니콜라 부리요는 미술계에선 꽤나 유명한 이론가이며, 그의 관계 미학은 한 때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기도 했다. 학문의 세계 종사자들과의 인연이 사라진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독서가 전부다.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저/이재원 역

폴 비릴리오. 아직 읽지 않은 비릴리오. 한 번 읽어봐야 겠다.


noon은 창간호를 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낸 책인데, 반응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론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미술 전문 잡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사례를 다시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아르코에서 나왔던 '볼'은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고(황당한 사건들 중의 하나), ... ...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듯 싶지만, 그건 호사가들의 수다에 지나지 않고 진지한 관심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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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 나오는 주석인데, 바로크Baroque 문화, 혹은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렇게 메모해 둔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화사나 지성사에 있어서도 바로크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 그리고 현대적 삶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근대, 그리고 바로크는 그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는 루이 뒤프레(Louis Dupre')에 기대어 바로크에 대해 언급하였고, 아래 내용은 그 각주이다. 그리고 이 글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저장이다. 이 각주에서 엿보이는 뒤프레는 바로크에 와서야 중세적 질서가 근대적 질서 속에 종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합의 긴장이 바로크 양식을 이룬다는 것.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너무 중세적 질서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닐까 싶다.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있듯이 어쩌면 중세적 질서(창조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질서와 이 질서에 유비된 현실적 질서)마저도 바로크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진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슬쩍 지나가는 언급 뒤에는 거창하고 복잡한 명제가 놓여 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바로크 문화란 일종의 종합명제라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내면적이고 창조적인(poietic) 존재라는 근대적 이해방식과 형상(Form)에 의해 틀 지어진 우주(cosmos)로서의 세계라는 더 오래된 이해 방식 간의 종합 말이다. 나중에야 우리는 이 종합 명제를 불완전한 것이며 교체될 운명을 지닌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바로크 문화 속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긴장을 볼 수 있다. 그 긴장은 질서와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즉 거기에 이미 존재하는 위계적인 질서 그리고 자신들의 구성적 활동을 통해 그 질서를 지속시키고 완성하는 행위자들 사이의 긴장인 것이다. 이 행위자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위계 질서의 바깥에 있고 평등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그와 필적한 것의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루이 14세의 말과 같은 혼성적 정식화는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뒤프레(Dupre)의 책에 제시된 바로크 예술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Dupre, Passage to Modernity, pp. 237 ~ 248. 뒤프레는 바로크가 인간 행위주체성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세계 사이의 "최후의 포괄적인 종합 명제"라고 말한다. 거기서 이 행위주체성에 의해 발생한 의미들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발견한 의미들에서는 어떤 관계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찬 종합명제이다.

바로크 교회는 정적인 질서로서의 우주보다는 신에 이러한 긴장의 초점을 맞춘다. 이 신의 힘과 신성은 우주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하향성의 힘은 인간의 행위주체성에 의해 취해지며 또 앞으로 나아간다. "따로 떨어진 권력의 중심으로 개념화된, 신적인 질서와 인간적인 질서 사이에서 근대적인 긴장을 빚어내면서"(226) 말이다.

뒤프레는 바로크 문화가 "포괄적이며 영적인 비전"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발생 중인 세계에 형식과 구조를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개인이 있다. 하지만 - 그리고 여기에 그것의 종교적 의미가 있다 - 그 중심은 여전히 초월적인 근원과 수직적으로 연결된 채 남아 있다. 인간 창조자는 매개체들이 하강하는 단계를 거침으로써 그 근원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 인간적이며 신적인 - 이중의 중심이 바로크의 세계상을 중세의 수직적인 세계상과 구별 짓는다. 중세의 세계상에서는 실재가 단일한 초월적 지점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몇몇 특색 안에서 미리 나타난 바 있는, 이후의 근대성이 지닌 확실하게 수평적인 세계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중심 사이의 긴장이야 말로 바로크에 복잡적이고 불안정하면서도 역동적인 특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237)
-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128 -129


아래 관련 글 2개를 올린다. 하나는 찰스 테일러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이고, 하나는 바로크 예술에 대한 글이다. 서양미술사 책을 내기 전에 요약, 메모해놓은 글이다. 이젠 미술 관련 글을 쓸 시간조차 없이 바쁘니...





뒤프레의 책도 꽤 재미있을 것같은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ㅡ_ㅡ;;


 
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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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사회적 상상

찰스 테일러 지음, 이상길 옮김, 이음



기대했던 것만큼 책은 재미있지 않았다. 하긴 이런 인문서를 읽으면서 재미를 바란다는 것도 다소 당황스러운 종류의 일일 게다. 찰스 테일러는 역자의 말대로, '현재 도덕철학과 정치철학 분야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서구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찰스 테일러의 이름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찰스 테일러의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의 다른 저작, ' The Ethics of Authenticity'(불안한 현대 사회)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불안한 현대 사회'과 비교한다면, 다소 재미있는 구상이긴 하지만 호소력 있는 저작은 아니었다. 도리어 헤겔주의자로서의 찰스 테일러를 드러내며, 근대의 여러 기획들은 계속 이어지며,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의 독특한 시각, 근대(modern) 형성의 깊은 영향을 끼친 물질적 자본주의(혹은 경제적, 물질적 사회형태)의 변화 대신 근대의 관념적인 기획으로만 근대의 형성을 서술하면서, 단일화된 근대성이 아닌 다원적 근대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이 책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근대성의 역사이자, 그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자의식'과 '자기비판'은 그 자체로 근대적 에토스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테일러는 다원적 근대성 개념을 통해 자신의 분석 대상을 '서구적 근대성'으로 상대화시킨다. 다원적 근대성 개념의 핵심은 근대성이 어디서나 동일한 형식으로 발전하게끔 되어 있는 동질적이고 수렴적이 과정이라는 시각을 거부하는 데 있다. 즉 근대적인 관념과 실천, 제도와 생활 양식은 배경 맥락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고, 따라서 언제나 복수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의 역사적 사례를 근대성의 다양한 모델 가운데 하나로 '지방화'해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타자에게 함부로 부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면에 깔고 있다.
- 역자 후기 중에서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라고 할 것은, 철학서 답지 않게 문화적 양식 분석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종 흥미로운 사례와 분석이 등장하여 흥미로움을 더하기도 한다.

찰스 테일러와 근대의 시작과 발전에 대한 색다른 분석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읽을 만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찰스 테일러의 또 다른 서적을 한 권 주문했다. 주문한 책은 그의 헤겔 연구서이다.



찰스 테일러의 다른 책(강력 추천)
- 불안한 현대 사회, 찰스 테일러 http://intempus.tistory.com/1323 



 

근대의 사회적 상상 - 8점
찰스 테일러 지음, 이상길 옮김/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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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 10점
앙투안 콩파뇽 지음, 이재룡 옮김/현대문학




지난 가을에 두 번이나 정독한 책이다. 국내에 출판된 책들 중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참고서로 읽힐 이 책은, 불행하게도 아무런 주목도 못 받은 것처럼 보인다(일일이 신문이나 잡지 서평을 찾아보지 못했지만). 두 번이나 읽었지만, 그간 서평을 쓰지 못했던 것은, 서평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서평이라는 낯익은 접근방식은 이 책이 가지는 유용함을 깎아 먹을 가능성이 더 높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문 - 현대적 전통, 현대적 배반
새로운 것의 권위: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 보들레르, 마네
미래에 대한 종교: 전위주의자들과 정통주의
이론과 공포: 추상파와 초현실주의
바보들의 시장: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막바지: 포스트모더니즘과 개영시(改詠詩)
결론 - 다시 보들레르로


이 책의 미덕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 논쟁적인 부분들을 풍부한 인용과 사례로 예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설득력 있는 저자의 논리는 모더니즘의 탄생에 주목하면서, 나아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까지 아우른다.


그러나 단절의 전통은 필연적으로 전통의 부정인 동시에 단절의 부정이 아닐까? 옥타비오 파스는 '수렴점.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에서 현대적 전통이란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뒤집어진 전통이며, 이 역설이 그 자체로 모순인 미학적 모더니티의 숙명을 예고한다고 했다. 현대적 전통은 예술을 긍정함과 동시에 부정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 자신의 위대성과 퇴락을 한꺼번에 선포한다. 반대되는 것들끼리의 결합은 현대적인 것이 전통의 부정, 다시 말해 필연적으로 부정의 전통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의 논리적 모순 혹은 논리적 막다른 골목을 고발한다. (8쪽)


그의 시선은 모더니즘에 향해 있으며, 모더니즘의 시작부터 논쟁거리였음을 예증한다. 인문학 전공자이거나 현대 예술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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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련님의 리뷰를 읽고 이책을 구입했습니다.
    한국에서 공수해오느라 시간이 조금 걸려서 이제야 읽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좋은책 만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나간 미래 - 10점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문학동네


지나간 미래 Vergangene Zukunft
라인하르트 코젤렉 Reinhart Koselleck 지음, 한철 옮김, 문학동네



겨우 이 책을 다 읽었다. 대중 교양서라고 하기엔 너무 전문적이고 그렇다고 손을 놓기에는 너무 흥미진진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역사적 기본개념들, 정치적-사회적 언어에 대한 역사사전>>이라는 방대한 사전의 편집자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그리 유명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몇 달 동안 이 책을 잡고 있었는데, 읽고 난 다음 느낀 바를 크게 아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1. 역사 서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실제 경험한 사실, 목격자의 증언, 또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역사 서술은 ‘서사’와 ‘묘사’를 바탕으로 하면서 과연 ‘허구’와 얼마나 많은 거리를 두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역사 서술에 사용되는 개념 분석은 매우 인상 깊었다.

2. 근대Neuzeit에 대한 깊은 이해: Modern으로 옮겨지는 근대에 대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많았지만,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분석은 그간 읽어온 그 어떤 글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근대에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 때까지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p.399) 즉 미래에 대한 기대가 대중에까지 미치게 된 시기는 18세기이며 이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 ‘새로운 시대’가 대중적인 단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근대적 삶에 대한 이해: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지게 된다는 것은 경험된 것들 이상의 의미를 미래에 부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예측 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가 더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에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서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높게 보았으며 인간 이성에 대한 강력한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러한 신뢰와 지지를 부분적으로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예측 불가능함, 즉 ‘우연적 요소’에 더 큰 무게 중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의 물질만능주의(소외와 자본주의의 심화)는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측가능성을 잡아두려는 심리에 기인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는 이미 그 시작에서부터 그 붕괴를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인문학 전공자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이지만, 비전공자에게는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같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 생각된다. 역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근대에 대해, 근대적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간 미래>>에 대한 보충 설명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일독을 권할 만큼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밑줄을 엄청 그었다) 그리고 리뷰를 올렸는데, 몇몇 분들께서 리뷰가 어렵다는 견해를 밝혀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보충 설명을 하고자 한다.

1. 이 책의 목차의 아래와 같다. 목차에 적힌 단어들부터 만만치 않다.


I. 근대사에 있어서의 과거와 미래의 관계
- 근대초기의 지나간 미래
- 역사는 삶의 스승인가
- 근대 혁명개념의 사적 기준
- 로젠츠 폰 슈타인의 역사예측

II. 사적 시간규정의 이론과 방법
- 개념사와 사회사
- 역사, 역사들, 시간의 형식구조
- 서술, 사건, 구조
- 우연: 역사서술에서의 계기화의 불가능성
- 입장연관성과 시간성

III. 역사적 경험변화의 의미론
- 비대칭적 대응개념의 사적-정치적 의미론
- 역사의 생산가능성
- 공포와 꿈: 제3제국에서의 시간경험
- ‘근대’: 현대적 운동개념의 의미론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2. 각각의 챕터는 각기 다른 내용을 서술하고 있지만, 크게 ‘역사서술 방법론’과 ‘근대의 시간 경험’이라는 두 부분으로 모여질 수 있겠다.

3.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하여
과연 '역사의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란 가능할까?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의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란 불가능하다. 이 부분에서 역사 서술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서술 방법(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서술가들은 나름대로 정확한 사실 전달을 위해 여러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고 고고학적인 탐사를 벌이기도 하며 목격자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 모였다고 해서(* 대부분 다 모을 수도 없지만) 완벽하고 정확한 전달이 가능해질까. 또한 여기에 또 개입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서술가의 시각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당파성’. 이렇게 어려운 일이니,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더 더 낫다고 한 것이 일견 수긍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주목하는 부분은 여러 개념을 담고 있는 단어들의 변천사이다. 이를 그는 ‘개념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 변화를 통시적으로 분석하여 그 당시의 의식 구조를 예리하게 분석해 낸다. 하나의 단어가 시대 마다 다른 의미로 통용되었고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역사 서술가의 시각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이런 역사서술과 관련된 논의를 담고 있다.

4. ‘근대의 시간 경험’
아마 이런 생각을 낯설게 여기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란, 바로 ‘내일은 좋아질꺼야’ 따위의 생각을 말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코젤렉에 따르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몇 세기 되지 않는다. 아마 르네상스 무렵부터 이런 생각의 단초가 보여졌을 텐데, 이런 생각이 일반 대중 속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인 18세기이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였다고 한다.

앞선 글에서 내가 인용한 “근대는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 때까지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쉽게 설명해서 평생을 시골에서 산 사람에게 (시골이라는 공간 속에서의) 내일에 대한 예상은 자신이 살아왔던 경험의 범위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고대적 삶이나 중세적 삶은 이런 환경 속에 속해있었다. 즉 하나의 행위 결과는 경험의 범위 안에 있었고 그것에 대한 기대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로 오면 상황은 급격하게 바뀐다. 시간이 갈수록 이 상황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즉 이때까지 살아온 경험의 범위 안에서 내일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맨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니깐 18세기 무렵에는 미래에 대한 열광으로 표현되었다. (* 이 열광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고 이러한 열광은 예술적 반영은 바로크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내일이 되면 새로운 과학 법칙이 생겨나고 새로운 기계가 생기며 카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근대가 새로운 시대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즘은 더 심해졌다. 블로그를 보라.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하루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이러한 상황은 내일, 즉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삶 속에서 미래란 과거와 똑같은 그 무엇이었지만, 18세기에 오면 미래는 과거에도 오늘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으로 변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내일 일을 누가 알아’라고 말해버리기 시작했다.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내 인생이 내일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 경험과 기대의 간격이 벌어짐으로 인해 나는 온전하게 내 삶을 제어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즉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이는 인생에 드리워진 생의 불확실성에도 기인하지만, 최근의 인문학적 성찰은 이 인식(*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에 더 큰 무게 중심을 두게 만든다.

최근의 자본주의 심화(* 돈 중심주의)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초조하고 불안한 심리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면 내 영혼의 삶은 아니더라도 내 육체의 삶의 안정성을 그나마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는 것은 ‘돈’이기 때문이다.

근대는 내일에 대한 기대로 시작되었지만, 그 기대 속에는 이미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나는 내일 펼쳐질 내 삶의 운동을 알지 못한다’는 인식을 숨기고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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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구조 - 10점
이마무라 히토시 지음, 이수정 옮김/민음사


근대성의 구조
, 이마무라 히토시(지음), 민음사, 1999.


1. 인과율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현상에는 인과율 (causality)이라고 하는, <원인-결과>라는 이름의 족쇄에 묶여 있다. 그리고 현재의 고통이나 불합리는 이것을 둘러싼 이러한 인과 관계를 이해할 때에만 벗어나거나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 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근대인(Moderni)라면 그렇게 생각 할 것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이 속해 있는 우주에 비한다면 '근대(Modern)'란 그렇게 특별한 시대는 아니다. 단지 이 세계와 우주, 그 속에서 진행되는 인간들의 삶을 이러한 인과 관계와 이성의 눈을 통해 보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시대이며, 20세기 후반의 학자들은 이 치밀하고 정확하려 했던 활동에 큰 문제점이 있었다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이마무라 히토시는 『근대성의 구조』라는 책을 통해 이 난삽한 지도를 간략하게 정리해놓고 있을 뿐이다.

2. 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시대로서 1960년대, 그 중에서도 1968년의 파리와 프라하가 있었다라는 말로 이마무라 히토시의 논의는 시작된다. 그러나 그가 68세대의 철학-소위 '포스트 구조주의'라 불리는-을 긍정하면서 걸어가려 하는 이러한 논의의 시작은 마샬 버먼이 미셸 푸코를 언급하면서 '그의 언어는 꿰맨 자 국이 없는 거미집, 즉 베버가 일찍이 꿈꾸었던 모든 것보다도 훨 씬 더 완벽한 새장, 어떤 생명도 꿰뚫고 들어갈 수 없는 새장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많은 오늘날의 지성인들이 그 새장 안에서 푸코와 함께 질식사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이다'(『현대성의 경험』, 현대미학사, p.37)라고 말했을 때처럼 스스로 새장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위험한 작업임을 미리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토시의 논의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는데, 그것은 근대 속에 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대해 보다 정확하 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전해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큰 희망을 부여하기 보다는 그러한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 긴 하지만.

3. 시간관

우리는 밝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는 근대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라든지 '내일은 이렇게 비참 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현재를 극복하려 한다. 하지만 과연 그 옛날 내일이라고 믿었던 오늘은 행복에 가득차 있는 것일까?

내일을 염두해 두고 인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즉 오늘은 어제보다 나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는,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직선적 시간관'은 중세 와 그 이전의 순환적 시간관을 대체한, 근대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순환적 시간관 속에는 과거 와 현재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겐 미래란 없었고 끊임없이 순 환하는 시간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시와 상업의 발달 그리 고 종교개혁 등 일련의, 근대를 향해가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우 리는 '직선적 시간관'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알 수 있다. 간단 하게 우리가 내일을 예측하기 위해 오늘의 주가동향을 유심히 살 펴보는 것처럼 그러한 행동들이 중세 말기의 도시 상인들에게서 도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를 향해 기도 한다고 하는 시간의식'인 것이다. '기도하는 정신의 시간의식은 미래를 선취하여 현재에 편입시키고, 미래를 편입시킨 현재에 있 어서 계획을 세우며, 또다시 미래를 향해 모험적으로 도박을 해 가는 시간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시간과는 정반대이다. 순환 시간은 전적으로 과거를 향하지만, 근대의 시간의식은 전적으로 미래를 향하는 것이다.'(p.76)

4. 기계론

그렇다면 근대의 직선적 시간관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미래를 선취한다는 것, 그것도 신의 이름이 아닌 인간의 능력으 로 <계획>하고 <제작>하고 끊임없는 <실험>의 반복을 통해 <확실 한> 미래를 달성하는 것. 여기에는 '이 세계 즉 자연이라고 하는 책은 삼각형이나 원과 같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언어로 씌여있다' 라는 수학에 대한 신뢰(갈릴레이), '제작으로써 자연을 정복한 다'라는, 기계를 제작하듯이 자연도 수학적 확실성을 바탕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새로운 태도(베이컨),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나>의 발견, 그런 나에 대한 절대적 믿음, 그 믿음으로 시작되는 <분석>, <종합>, <검산>의 시스템(데카르트)이 밑바탕 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속에서 세상 의 모든 것은 등질 공간과 등질 시간 속에 위치하게 되며, 시간 은 직선적인 양적 존재로 파악되면서 진보라는 새로운 시간관념 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뉴튼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듯 기계론적 이성은 '세계를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적 정신'의 다른 이름이며, '이 방법을 뒷받침하는 원점에 분할 불 가능한 개인'이 놓이게 된다.(p.121) 근대 시민사회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기계로서의 인간과 세계'를 말하고 있으며, 근대의 <자연법사상>이란 데카르트의 '코키토'가 만들어낸 근대 정신의 끝없는 변주들 중의 하나이다. 개인의 자 유와 권리는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것이라는 <자연법사상>은 근대 자유주의와 정치 사상의 뿌리를 형성하게 되며,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에서 '인간이 자유이며 공적 시민으로서 권리를 주장 할 수 있다'는 근대적 <개인>의 개념이 확고하게 선언되기에 이 르게 하는 밑바탕이기도 하다.

근대 시민 사회는 이러한 기계부품으로서의 개인들이 모여 있 는 곳으로서, 크게 나와 나의 관계(윤리 혹은 정신), 타인과의 관계(정치 경제), 자연과의 관계(생산과정)라는 세 가지 관계가 기계론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래서 홉스는 '사람들에게 이성 (기계론적 이성)을 자각시키고, 개개인이 이성적 존재자가 되어, 만인의 생명과 소유물을 보전할 수 있는 국가를 창출하고, 근대 세계에 어울리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p.146)한다. 여기에는 '부품으로서의 개인, 톱니장치로서 의 사회'가 구성되며, 국가란 거대기계(리바이어던)가 된다. 이 렇게 새롭게 구성된 세계 속에서는 스미스는 홉스가 <이성>이 인 공적 인간관계를 만든다고 본 것과 대조적으로 <감정>이 인간적 인 대타관계를 만든다고 본다. 스미스의 이런 주장을 통해 시장경제의 매커니즘이 완성되며, 칸트에게서는 자기 입법과 자기 통 제가 이루어진다. 근대란 개인적 자율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자율은 정치 혁명과 산업 혁명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며, 근대 기 계론은 부분적으로 근대 유기체론-라이프니츠, 헤겔, 화이트헤드 -으로 그 결점을 보완하면서 시민사회에 더욱 강력하게 정착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근대는 똑같은 이름의 다른 모습으로 나가게 된다.

5. 근본적 회의

하지만 1968년의 파리와 프라하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는 어떻 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마무라 히토시는 자본주의 내부에 서, 그리고 사회주의 내부에서 일어난 이 움직임을 근대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파악한다. '근대 세계가 충분히 <합리적>이기 때 문에, 근대적 시민의 내면이 너무나도 충분히 <자기 통제적> <자 기 입법적> 이기 때문에, 도리어 근대성은 배제적, 차별적이라는 반성이 일어나게 된 것', 다시 말해서 근대 세계가 스스로의 인 과율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순 수 자아>가 <경험 자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 안에는 가능하 면 <경험 자아>(신체와 욕망을 갖는 자아)를 말살하고 싶다는 욕 구가 몰래 작용하고 있다. 근대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이미 배제와 차별의 구도를, 말하자면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p.175)

인간 내부에서부터 이루어진 이러한 <배제>와 <차별>은 근대 성의 구조가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것 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계론적, 수학적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직선적 시간관과 진보에 대한 확고한 신뢰는 신의 손을 떠 난 인간이, 자신의 앞에 놓여진 세계를 해명하고 구축시키면서 자연의 질서가 아닌 인간의 이성이 파악한 질서와 인과율을 부여 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성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배 척당하게 된 것이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이러한 근대성의 구조를 진단하면서 이러한 근대를 넘어서는 방법을 제시한다.

6. 타자 공동체

'타자의 공동체는 중심이 없는 공동체이다. 동일화도 배제도 없는 공동체이다. 솔선해서 자기배제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만든 소극적 공동체는, 비록 무력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서는 인간이냐 비인간이냐 하는 물음이 완전히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p.190) 하지만 이러한 타자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해 야 하는 일들-자신 내부의 타자를 발견하는 것, 스스로 타자화 되는 것, 그리고 세계의 타자를 수용하는 것 등에 앞서 먼저 '타 자'를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 는 결코 타자를 알 수 없는데, 왜냐면 우리가 진리를 알아가는 방식은 전적으로 수학적 이성에 의지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는 우리의 사고가 진행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부터 이마무라 히 토시의 진단한 근대성의 구조- <배제>와 <차별>-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적 자아가 아닌 <경험 자아>(신체와 욕망 의 자아)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의 문제점을 이야기 하는 모든 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궁극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지점 은 바로 이 지점인 것이다.

7. 근대

근대란 <희망>의 시대이다. 이 시대는 신의 손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 상정한 '이성이라는 이름의 빛'을 따라 항해한 시대이며 항해 도중에 만나게 되는 파도와 암초, 바람과 별빛의 지도를 손 수 제작하는 것과 동시에 배 안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점들을 여러가지 규칙으로 제도화하려고 노력한 시대이다. 그것은 뉴튼 과 케플러가 '과학혁명'을 진행시켰을 때, 프랑스 민중들이 바스 티유감옥을 습격했을 때, 그 희망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 만 이제 그 근대가 꿈꾸던 '희망'이란 고작 '자본주의의 승리'쯤 이라는 사실에 우리들은 당혹해하고 있다. 그 동안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현대 과학이 어떻게 인간을 조직적으로 학살 할 수 있는가와 폭탄 하나가 한 도시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가 에 대한 처절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20 세기 최대의 정치실험이 68년 프라하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었을 때,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을 제도화하고 억압하며 감시하 는가가 그 해 '파리'에서 드러났을 때, 근대에 대한 회의는 그 극단에 치달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소위 탈근대라 고 불리는 '절망'뿐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절망을 요약하고 있 는 책이다. 나는 '타자공동체'론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무라 히토시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근대가 마주하게 된 '절망'을 이성의 눈으로 그 깊숙이 응시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근대인 이 될 지도 모르는 우리들이 해야할 첫번째 일일 것이다.

'절망적이라고 일단 판단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달콤한 언설과 이데올로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사회성이 내포하는 끔찍스러움에 직면해 나가야 한다. 그 편이 인간적인 성실함의 표시가 될 것이다.'(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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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련 님,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번에 지하련 님의 리뷰를 9월 5주 <반디 & View 어워드>로 선정하였습니다. 어워드 관련 적립금은 지하련 님의 반디 아이디로 일주일 이내에 지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네요.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컨텐츠팀 현선 드림

    • 고맙습니다. ^^~. 코엑스 반디앤루니스에 가끔 들려서 책을 사가지고 가곤 해요. 사무실이 근처라서요~. 인터넷 서점으로도 책을 사보기도 하지만, 그래서 책은 실제로 만져보고 내용도 확인하고 사는 게 최고라서..ㅋㅋ. 이번에도 요긴하게 써야겠네요.

현대성의 경험 - 10점
마샬 버먼 지음, 윤호병 옮김/현대미학사




<<현대성의 경험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마샬 버먼 (윤호병, 이만식 옮김).   현대미학사. 1994.



01. 

"현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소용돌이로서 경험하는 것이고, 영원한 해체와 재생, 고난과 고통, 애매성과 모순 대립 속에서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버리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모더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든간에 자기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고, 현실, 아름다움, 자유, 정의 등 소용돌이의  도도하고 위험스러운 흐름이 허용하는 것들의 형태를 찾아서 그 흐름  속에 합류하는 것이다." ( 425쪽 )  

          

02.

마샬 버먼은 강력한 모더니즘 옹호자이다. 그것은 그가 이  책을 기획했을 1970년대 초반엔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지만,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엔 그가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꼭 다른 혹성이나 다른 은하에서 온  것처럼 되어버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모더니즘 옹호자가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던을 주장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들이 모더니스트임을 알지 못한 채  마샬 버먼을 낯선 시선으로 쳐다보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자아낸 것이다. 

          

버먼이 강력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발전과 파괴'라는 모더니즘의 강력한 특징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 <<공산당 선언>>, 보들레르, 페테스부르그, 뉴욕을 질주한다. 그리고, 어떻게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 버리고,  신성한 모든 것이 저속한 것이 되며, 인간은 마침내 제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진정한 인생의 조건 및 자기 동료와의 관계에 직면하도록  강요받는"가를 보여준다.( * ""는 <<공산당선언>> 속에서 인용된 것임) 

          

03.

발전한다는 것은, 진보한다는 것은 두메산골에서 나와  도시로 나와되는 것이며, 한 나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며,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현대 경제의 본질적인 역동성 및 이러한 경제에서 비롯되는 문화의 역동성은, 좀더 많은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세계를 새롭게  끊임없이 계속해서 창조하기 위해서 그것이 창조하는 모든 것 -  물리적인 환경, 사회제도, 형이상학적인 아이디어, 예술적인 비전, 윤리적인 가치 - 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349쪽 )

          

그러면서, 우리는 새로운 고향에 도달하는 것을 꿈꾼다. 

          

04. 

이 책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며, 무수한 책들이 펼쳐지고, 연극, 영화, 그림, 무용까지 '현대성'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경험되었는가를 증명해 주기 위해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 현대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전혀 다르게 평가되었고,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현대적'인가를 알기도 한다. 

          

05. 

불행하게도 마샬 버먼의 뛰어난 지식을 따라가기에 우리의 번역자들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  장-룩   고다르(Jean-Luc Godard)는   『호흡정지』(Breathless),『멋대로 살아라』(Vivre sa Vie) 및『여성은 여성이다』(Une Femme Est Une Femme)에서 파리의 거리를..." ( 391쪽 ) 

          

라고 옮기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Comment +2

  • 정윤 2012.09.12 17:18 신고

    책 읽다가 몇번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번역...아 이 망할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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