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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봄, 바람은 사무실 안으로도, 내 마음으로도, 그대 가슴으로도 밀려들지 않는다. 늘, 그렇듯, 우리에게 싱그러운 바람은 비켜나간다. 그렇게 청춘은 지나갔고 노년은 음울한 기운을 풍기며 낮게 깔려 들어와 자리잡는다. 노안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무심결에 했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젊은 시절 상상했지만, 마치 SF 영화와 같다는 걸 나이 들어서야 안다. 


이런 비-일치는 우리 생애 전반을 물들이고도 모자라, 이 도시를, 이 나라를, 이 지구를 물들인다. 그래서 엘레야의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있다'고 말한 것일까. 그 때 그녀의 손가락 끝을 잘 살펴볼 걸, 지금에서야 후회한다. 


일요일 오후, 몇 시간 일을 하고 난 다음, 남은 일을 체크하곤 집에 가긴 틀렸다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봄날은 가고, 주말은 지나간다. 


우리의 희망은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주말의 여유가 그리운 어느 봄 일요일이 조용히 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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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이런저런 고민에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잠은 오지 않고... 그는 원두커피 원액이다. 차가운 물에 그를 섞어...서... 그녀같은 얼음을 넣어 마셨다. 추운 초여름 밤인가, 아니면 쓸쓸한 늦봄 밤인가. 바람 한 점 없는 도시에 내 마음만 바람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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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티 2015.06.27 11:15 신고

    주름과 이정복의 시집은 같은 책을 갖고 있고요 채호기의 시집은 비교적 최근 책인가요?박청호는 모르는 시인입니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끌리는군요. 치명적인. 저는 이 말은 늘 체게바라와 함께 떠올립니다. 치명적인 순수함. 그의 여정들, 타협을 몰랐던. 그런 사람들은 마흔을 넘겨 살기가 힘들더라고요. 예수도 그렇고. 윤동주와 전태일이 그렇고.또 시몬느베이유도 있군요. ( 어느 포스트에선가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책이 찍힌 사진은 무조건 확대해서 책 제목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요)
    창원분이시더군요. 저는 마산출신입나다.저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문학을 전공했고요. 마산이나 창원의 어느 길에서는 어쩌면 스치기도 했을 인연일 수도.있겠어요.
    제가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별명이 하루살이였어요.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인데 한치 앞을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 그거 별 쓸모없다, 저의 표어랍니다. 이리 나이 먹은 제가 저는 쫌 자랑스럽답니다.
    주인장님도 고민거리가 있을 땐 그냥 무심히 걷거나 잠을 잘 수 있다면 잠을 자거나 아이들이나 부인과 수다를 떨거나
    그리 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주제 넘지만 감히.



    • 마산이시면, 동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절 고등학교는 다들 마산에서 나왔으니깐요. 주름은 몇 장 읽다가 말았어요. 질 들뢰즈는 아직 읽지 못한 철학자입니다. 문학으로 읽기에도 애매하고 철학으로 읽기에도 애매해요. 시집들은 대부분 옛날 것들이지요. 박청호의 첫 시집인데, 그 땐 반짝했지요. 그 이후 후속타가 없었고 뭐랄까, 팬심을 불러일으키는 시집이 아니었던 터라 ...
      고민거리가 있을 땐 모르는 사람과 술 마시는 게 최고였던 것 같아요. 저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저를 타인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망각, 또는 거리두기와 객관화를 동시에 ...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엔 너무 위험한 짓이죠. ㅡ_ㅡ;
      채호기의 시를 좋아라 했는데... 요즘은 거의 읽지 않아요. 확실히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기엔 나이도 많이 들었고 돈벌이가 쉽지 않네요. ~ ㅎㅎ 장난과 수다는 일종의 의무사항이 된 터라, ... 고민과는 무관하죠. 기혼자의 고민이라는 게 대체로 가족과 관련있는 경우가 많다보니.. ㅋㅋ 더운 날씨, 건강하고 활기찬 하루 되시고요~.

  • 느티 2015.06.30 23:46 신고

    동문일 리는 없겠어요. 저는 여고를 졸업했거든요. 마산의 고등학교들이 다 산등성이에 있으니 교실에서 바라보던 합포만
    바다에 대해서는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겠군요. 해가 떠오를 때, 저녁 무렵, 흐린 날 비오는 날 그 각각의 물빛 말입니다.
    서울 가서 처음 몇 달은 바다가 보이지 않아서 힘들었는데 어쩌면 바다는 핑계고 그 추위와 무지막지한 남자애들과 하루도 쉴새없이 터지던 최루탄과 뭐 그런 낯선 것들이 적응이 안 됐던 것도 같아요. 들뢰즈는 저도 아직 잘 몰라요. 남편이 좋아하는 철학자지요. 타인과 얘기하기. 대학 4년 간 마산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그 대여섯 시간 동안 옆 자리에 앉은 사람과 얘길 나눠 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컴퓨터라는 공간에선 이러고 있네요. 비가 내리고 집 뒤 논에선 개구리 울고 내일도 종일 비 내리면 뒹굴뒹굴 무슨 책을 읽울까, 두근거리며 존 버거와 겐자부로와 베네딕토 16세의 여러 책들을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 가장 오래 탔던 버스는 약 13시간이었습니다. 이른 오후에 출발해 다음 날 새벽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저도 옆 자리에 앉은 이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은 없어요. 대신 한 번은 중앙 통로 건너편 자리에 나란히 40대 중반의 남자와 30대 초반의 여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 그 땐 그들의 이후가 궁금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젊은 시절, 삶의 신비 같은 게 있다고 여겼는데, 그런 신비로움이 살아지는, 그 속도만큼 이 세상에 익숙해졌다는 것이겠지요.
      산복도로를 한 번쯤 가고 싶은데, 고향 내려가선 영 갈 일이 없네요. ㅎㅎ

      제 주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소설 같은 인생들을 살았던 터라, ㅡ_ㅡ;;





조심스럽게, 상냥한 오월의 바람이 녹색 이파리 끝에 닿자, 이미 무성해진 아카시아 잎들이 놀라며, 스치는 바람에게 지금 칠월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반팔 차림의 행인은 영 어색하고 고민스러운 땀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며, 건조한 거리를 배회하고, 길가의 주점은 테이블을 밖으로 꺼내며, 다가올 어지러운 마음의 밤을 준비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2년 5월 어느 날, 그 누구도 듣지 않고 말만 했다. 말하는 위안이 지구를 뒤덮었다. 


아스팔트 아래 아카시아 나무 뿌리가 바람에 이야기를 건네었지만, 땅 위와 아래는 서로 교통이 금지되었고, 학자들은 그것을 모더니티로 담론화시켰다. 


 


(이제서야 로르카의 시가 읽히다니... 1996년도에 산 시집인데..)




연 가 





내 입맞춤은

깊이 틈새 벌린 석류,

네 입술은 

종이 장미였다네.


눈 덮인 들녘 땅.


내 양손은 

모루를 향한 무쇠;

네 육신은 

종소리 울리는 낙조였다네.


눈 덮인 들녘 땅.


구멍난 푸른 빛 해골 속에

종유석은 

사랑하는 당신 모습을 만들었다네.


눈 덮인 들녘 땅.


철없던 내 꿈들은

곰팡이가 가득 피고,

솔로몬 같은 내 고통은

달에까지 사무쳤다네.


눈 덮인 들녘 땅.


지금 나는 나의

사랑과 나의 꿈을

정상을 향하며

신중히 길들이네

(눈 없는 어린 말들)


눈 덮인 들녘 땅. 


- 가르시아 로르카, 1921년 (김현창 옮김, 청하,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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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일까? 지난 주 주간 업무를 리뷰하면서, 팀 업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하였다. 즉 일이 많다는 건 좋지 않다. 그만큼 빨리 지치기 마련이고 할 수 있다는 의욕이나 열정과, 실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거리는 상당하기 때문이다.그리고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내 낡은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회사는 그 사이 직원 수가 늘어 이제 관광버스를 타고 움직일 수준이 되었다. 회사의 이런 성장 앞에서 내 모습은 그대로이니,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봄 하늘은 너무 좋았다. 그 하늘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이번에 간 곳은 문경 자연휴양림이었다. 꽤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사진 찍기가 겁난다. 이제 내 나이도 제법 되었으니, 저 귀에 낀 이어폰이 어색하기만 하다. 나는 저 때 너바나의 MTV 언플러그드 앨범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수요일 오전. 나는 전화 통화만 열 통 넘게 했다. 지역도 다양했다. 서울, 경기도, 대구, 포항,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까지. 내일은 하루 종일 미팅이고 ... 어디 좋은 일 없나. 이제 워크샵 가서 진탕 술 마시는 일도 없애야겠다. 취한 듯 싶으면 들어가서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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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오전에 적다가 ... 이런저런 일상들로 인해 이제서야 정리해 올리는 글.



어제(토요일) 읽다가 펼쳐놓은 책, 정확하게 378페이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 페이지의 한 구절은 이렇다. '여러 의사결정에 집단의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난 실패의 원인을 규정하는 것에도 집단적인 거리낌이 있다. 조직들은 지난 일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회피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제프리 페퍼Jeffrery Pfeffer의 1992년도 저서, Managing with Power: Politics and Influence in Organizations를 번역한 이 책의 제목은 '권력의 경영', 내가 이번 주 내내 들고 있는 책이다.

어제 내려 놓은 이디오피아 모카하라 드립커피는 식은 채 책상 한 모서리에 위치해 있고, 낡은 만년필은 굳게 입술을 닫힌 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식은 커피 속에서 커피향이 진하게 퍼져 나왔다. 어느 해의 1월, 두 번째 일요일 아침, 창틈으로 차가운 겨울 대기가 스며드는 서재.

사용하던 오디오를 처분해야 되는데, 계속 미루고 있다. 오래된 JBL X40 Speaker와 A&R Cambridge Inti-Amp, 그리고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 합쳐서 40만원에 팔면 팔릴까. 아침에 일어나 벨라 바르톡의 피아노를 듣는다. 요즘 그가 좋다.





작은 스피커로 물결치듯 방 안으로 흘러가는 피아노 소리. 오늘, 일요일, 아무런 계획도 없다. 하지만 할 일은 산더미 같고 이제 마흔이라는 나이가 실감난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 벨라 바르톡, 여전히 그는 한국에서 그다지 인기 없는 작곡가들 중의 한 명이었다. 이번 주, 그의 음반 하나를 더 사야겠다. 아, 혹시 내 오디오를 사 갈 사람이 어디 없을까. 조만간 상세한 내용을 블로그에 올려봐야 겠다. 창 틈으로 일요일 아침의 찬 바람이 들어온다. 새로운 해의 바람이다. (하지만 불과 백 여년 전만 해도, 아직 새해가 오지 않는 12월이지만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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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만난 이는 도시를 흐르는 대기의 흐름이었다. 가을 아침 바람. 강남구청역 1번 출구. 내가 아침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곳.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기 틈새로 비가 내렸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어버린 중년의 감각 세포들.

거리는 어수선한 지난 밤 속을 헤매는 듯 보였고, 상기된 표정의 행인들은 가져온 우산을 힘없게 펼쳤다. 그 때 마침 문을 연 커피숍에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참 멀리 걸었다. 걸으면서 낡은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데이비드 린치, 스매싱 펌킨스의 EYE를 떠올렸다. 기억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 내 몸도 따라 휘말려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어디까지 걸어온(혹은 걸어간) 것일까? 기억은 길을 잃었고 의식은 희미해진다. 아주 길게.

커피숍에서 커피를 가지고 난 순간, 빌딩 지하 고급스러운 술집에서 나오는 젊은 여자와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남자와 만났다. 그러자 테이크아웃 종이컵 위로 갈색 커피 향이 밀려들었다. 기억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게, 추억은 고통스럽게 한다. 어느새 2011년도 채 네 달이 남지 않았고, 그렇게 내 삼 십대도 지나고 있다. 멀리 돌아온 커피 한 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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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에 마시는 커피가.. 참.. 향이 좋아요..ㅎㅎ 이상하게 낮에 먹는 커피보다도..

    • 저도 밤에 커피를 내려마셨는데, ... 요즘은 거의 마시질 않아요. 다음 날 출근이 힘들더라고요. ㅎㅎ.. 조용한 밤의 커피 향기 참 좋죠~. ^^



내가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최초는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을 것이고 몇 번은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말 없는 식물이 침묵과 쓸쓸함 속에서 잘 자라주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것이다.


사무실 책상 한 켠에 화분을 놓아두고 그 옆엔 낡은, 자신의 노년을 겨우 지탱해나가는 캔우드 리시버 앰프를 놓아두었다. 화분은 소란스럽고 건조한 사무실을 잘 견디었고, 오래된 캔우드 리시버 앰프는 몇 명의 주인을 거쳐간 다음, 나에게 왔지만, 가끔 자신의 처지를 슬프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다.

오늘은 화분을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얇게 내리는 비와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속에 놓아 두었다.

비와 바람은 옛날 이야기를 내 귀에 속삭였지만, 모던 사회에선 과거는 잊혀져야할 것들의 리스트에 속했고 내일 떠오르게 될 태양 이야기만으로도 내 일상은 여유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하루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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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곤한 봄날 오후가 이어졌다. 마음은 적당하게 쓸쓸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초조했다. 잔뜩 밀린 일들은 저 깊은 업무의 터널 속을 가득 메우고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모니터와 사각형의 문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얇게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면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며 가슴엔 윤기 나는 석탄층(石炭層)이 깊었다.





오랜만에 읽는 이성복의 시는 아름다웠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이 내 오래된 서가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나이를 먹었구나.



사무실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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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저녁 7시, 도시의 가을,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익숙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어둠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동굴을 파고 숨어 들어간 내 마음을 찾을 길 없어, 잠시 거리를 걸었다. 삼성동에서 논현동까지.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리는 10월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나이 탓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무 어린 마음이 늙은 육체를 가졌을 때의 그 비릿한 인생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 냄새를 숨기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린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렸다. 이 세상이 익숙해진 육체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요 며칠 하늘은 정말 푸르고 높았지만, 그건 고개 돌린 외면의 색의 높이였다. 집에 들어와 오랜만에 김치찌게를 했다. 다진 마늘, 올리브유에 김치, 참치캔와 햄 몇 조각. 배가 고팠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거대한 기업에서 수천명의 이름으로 만든 햇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내가 김치찌게를 제법 끓인 탓일까. 허겁지겁 숟가락을 들고 움직이면서, 15년이 넘은 대우 TV 속에서 아나운서들이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하듯 국내 뉴스를 전하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차피 그들은 나를 향해 하는 소리가 아니었고, 내가 TV 속 그들을 본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표명한다거나, 내일 전화를 한다거나, 커피나 술을 사줄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19세기의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그 모더니티의 익명성은 이제 우리의 일상 모두를 지배하는 감옥이 되었지만, 그 누구 하나 나서서 모더니티가 감옥을 찬양했으며, 감옥을 낯선 것이며 열광했다는 일을 지금도 좋아하는 걸 보면 정말 웃긴 일이다. 내가 알기로 오직 막스 베버만이 그것을 새장이라고 표현했다.) 

새로 산 운동화를, 버리려고 내놓은 수 백 권의 책 옆에 밀어두고 벨앤세바스티안을 들었다. 미친 짓이다. 요즘 잘 듣지도 않는 팝 음악에 빠져있다는 건 권장할 만한 짓은 아니다. 연말엔 클래식 공연을 몇 개 챙겨서 볼 요량이었으나, 혼자 가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람스 전집을 사려고 인터넷 서점 소망리스트에 올려놓았으나, 결정적으로 들을 시간이 없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마르크스주의'(한길 그레이트북스)를 읽고 있다. 아마 이 책이 재미있다고 하면 욕 먹겠지. 보편과 특수, 개념과 총체성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마르크스나 엥겔스, 혹은 루카치가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와 오캄을 떠올린다고 하면 돌았다고 하겠지. 

오늘 점심 시간, 점심 대신 압구정 트리니티 빌딩 지하 2층, 3층에 자리잡은 PKM Trinity Gallery에 가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전시를 보았다. 몇 년 전 웹 기사를 통해 그의 The Weather Report를 보면서 경험해보고 있었는데, 막상 서울 전시는 그의 스케일을 느끼기엔 다소 약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퇴근 후, 올라퍼 엘리아슨의 기사 몇 개를 찾고 이미지와 동영상을 찾다고 보니, 금세 열 한 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열 두 시가 넘었다. 

글쓰기도 잘 안 되고, 책읽기도 잘 안 되고, 연애도 잘 안 되는 느낌이다. 결국 내 어린 마음은 믿을 수가 없고, 내 늙은 육체는 이 가을, 너무 쉽게 지치기만 한다. 터무니없는 가을을 용케 잘 버티고 있는 중이다. 술을 조금 줄이든지, 아니면 도어스의 '인디안 섬머'를 들으면서 병맥주를 조만간 마셔야 겠다. 이번 가을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중이라며 나에게 스스로 술 한 잔 권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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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가만히 있어도 목 둘레와 어깨가 아프다. 해야 일은 많고 내 마음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성음레코드에서 나온 팻 매쓰니의 레코드를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작고 네모난 창으로 밀려드는 6월의 축축하고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에 아파한다. 잠시 감기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혼자 있으면서 아픈 것 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아주 가끔, 이 방 안에서 내가 죽으면, 나는 분명 며칠이 지난 후에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까.

르 끌레지오의 젊은 날에 발표한 소설 '침묵'은 자신이 죽은 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현의 번역을 좋아했는데, 복사해놓은 종이는 잃어버렸고 김화영의 번역본은 어디에 있는지 서재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하긴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큼 삶에 대한 열망도 비례하는 것일 테다. 일요일 오후,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고작 육체의 고통에만 예민해져 있었다.

대학 다닐 때, 한창 문학을 공부할 때, 기형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기형도만이 내 위안으로 남아있었다. 죽은 자의 힘인가. 마치 소설가 유미리가 그녀의 사춘기를 견디게 한 힘처럼.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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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소리 없는 내리는 봄비 모습이 좋았고
오늘 창 틈으로 밀려든 봄날 스산함이 좋았다.

몇 가지 더 좋은 일이 봄바람을 타고 밀려들었으면 더 좋겠다.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장은 빈약해져가고 내 영혼은 가난함으로 물들어있다.

오랜 만에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었고
시디 케이스의 먼지를 닦았다.

밀린 신문을 읽으며 일을 했고
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피웠다.

힘든 생활의 연속이지만, 잘 되거라 믿는다.
주중에는 시간을 내어 전시를 볼 것이고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생각이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을 같이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Little Jack Melody의 'The Ballad Of The Ladies' Man'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찾아 올렸는데, 오늘 음악을 듣다가 mp3 시디를 발견했다.
mp3를 오디오 시디로 구운 것이다. 조악한 음질이지만, 라이브와 다른 느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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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ooyeons 2008.04.03 14:34 신고

    태그의 좋은 일은 착한 사람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을 함께 하는 것이죠? 음,, 저는 지난 주에 그 좋은 일을 했었군요. : )

  • pink-lotus 2008.04.03 19:39 신고

    문장은 빈약해져가고 내 영혼은 가난함으로 물들어있다.

    말 그대로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중이예요.
    아무 글도 쓰지않고,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
    보여줄 것도, 들려줄 것도, 나눌 것도 없구나 싶어요.
    우울해하고만을 있을 수 없다고 주문만 걸고 있어요.
    지하련님도 기운내세요. :)

갑자기 뜨거운 바람의 그 열기를 잃어버렸다. 꼭 사랑에 빠져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을 지나가던 한 소녀가 몇 개의 계절을 보내고 난 다음 화사함은 다 사라지고 투명한 어두움, 생의 어떤 깊이를 가진 미소를 지어보일 때, 문득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듯이, 새벽 택시에서 내려 열기를 잃어버린 바람의 노래를 보면서, 잠시 쓸쓸함을 느꼈다.

찬 바람이 분다. 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젊음들이 어디에 가서 부딪히고 어디에 가서 우는가와는 아무런 관계 없는 바람이. 그저 한 쪽 방향에서 한 쪽 방향으로. 때로 빙빙 돌면서 불기도 한다.

도시의 빌딩들이 지하보다는 하늘을 향해 더 높이 올라가듯이, 내 눈물은 하늘을 향하기 보다는 땅바닥을 향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도시의 빌딩이 위로 향하는 것과 내 눈물이 아래를 향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후... ... 전자는 인간의 의지이지만, 후자는 인간의 의지로 되지 않는 것.

또 하나의 계절이 떠나고 있다. 무심한 자연과 그 자연을 무시하는 인간들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찬 바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은하계가 사흘 있다 무너질꺼래. 어떡해. 어떡하긴, ...  우주에도 바람이 불겠지. 그럼 우주로 나가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우주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어떡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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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고개를 돌리는 사람과 가슴에 많은 구멍을 가지고 있는 사람, 손가락 하나 사랑하는 이 가슴에다 심어주고 온 사람, 그렇게 세 명이서 만났다. 원래 네 명이 만나기로 되어있었는데, 한 명은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손가락'이 '고개'에게 손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개'는 웃기 시작했고, '가슴 구멍'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도 웃었다. 웃으면서 '고개'는 계속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고 '가슴 구멍'은 등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에 나 있는 구멍들을 통과해 나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손을 앞가슴 쪽에다 갖다대었다. 갑자기 돌풍이 몰아쳤고 '가슴구멍'의 몸에서 바람소리가 멜로디를 만들었다. '고개'는 너무 고개를 많이 돌려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가락'이 바지 주머니에서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 하나를 꺼내며, '이게 내 사랑이야, 음... 그녀의 향기
가 나...' 그리고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바람이 멈췄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고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마지막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자기 얼굴'라고 불렸는데, 늘 자기 얼굴에 걸려 넘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길을 가다 뭔가 걸려 넘어지고 난 다음에다 자기 얼굴이 몸에서 떨어져 길바닥 위를 뒹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고개'가 '자기 얼굴'을 보면서, '여전히 상처투성이군'이라고 말했다. '손가락'이 바지 주머니에서 딱딱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몇 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고개'가 '한 시, 오후 한 시야'라고 말했지만, '가슴 구멍'은 '새벽 다섯 시', '자기 얼굴'은 '아침 열 시'라고 주장했다. '손가락'이 웃었다. '시간은 오후 세 시야. 그러니까 그녀의 가슴에 내 손가락이 붙은 시각이 오후 세 시야. 하하하.'

'자기 얼굴'이 또 넘어졌다. 그리고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기 얼굴을 주워 다시 목 위에다 달았다. 그러자 '손가락'이 주머니에서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을 꺼내 '자기 얼굴'에다 보여주며 '사랑의 향기'가 난다며 울기 시작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바람 한 가운데 네 명은 자기가 해오던 일을 계속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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