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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 흐린 마음, 흐린, 흐린,

한동안 피프티피프티 노래를 들었는데, 플레이리스트에서 삭제했다. 그녀들의 인터뷰를 보며 성격들도 다 좋구나 생각했더니만, 다들 귀가 얇았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전 세계 어딜 가더라도 신뢰(trust)는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덕목이다. 애덤 그랜트Adam Grant는 대놓고 기버(Giver)가 되라고 조언했다. 우습게도 신뢰란 먼저 믿어줄 때 생기는 것이지, 신뢰해주지 않는다고 비난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상당히 안타깝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피로도가 전 세계적으로 누적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어떻게든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할 것이고 이는 리더십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푸틴의 러시아도 비슷할 것이다. 지금 경제적으로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우크라이나에게 언제까지 ..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고

서구의 어느 기상학자는 한반도는 4계절이 아니라 5계절이라고 말한다. 봄, 장마(우기),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4계절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에는 우리가 정의내리지 않는 어떤 계절을 지금 지나고 있다. 다행이다. 비가 내려서. 그래서 내륙의 가뭄이 사라지길 기원한다. 봄이 지나자 더위가 밀려들었다. 더위의 위세로 인해 사람들은 기가 죽고 짜증만 낸다. 나도, 아내도, 아이도, 짜증의 바다를 지나며 서로에게 불평을 쏟아내며 빨리 지친다. 프로젝트 상황이 난감해진 지금,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노력 중이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책에서 '리추얼ritual'을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같은 활동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었다. 독일의 한병철은 리추얼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한 쪽에서는 리추얼의 부활을 말한다...

우중산책

종일 비가 왔다. 예전 남부 독일에서 맞았던 그 비를 닮은, 차갑고 무겁고 바람 섞인 겨울비가 내렸다. 펼친 우산이 바람에 흔들렸고 머리카락 끝과 안경과 옷소매, 그리고 바지와 신발이 젖었다. 그 비 위로 음악이 이어졌다, 끊겼다. 바다는 높았고 북에서 남으로 쉼없이 흘렀다. 저 흐름은 어쩌면 달의 부름에 바다가 응한 것일까. 나도 한 때, 누군가의 부름을 한없이 기다리곤 했는데, 딱 오늘 같은 날이었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YongSup Kim(@yongsup)님의 공유 게시물

8월 3일, 혹은 4일

문득 업무 총량의 법칙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주팔자에 이 친구는 직장인이고, 직장인으로서 해야할 업무량이 있는데, 중간에 사업을 했다거나 자기가 원하는 일을 했더라도 그냥 업무량이나 시간은 줄지 않는다는... 그래서 내가 요즘 힘든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밤 9시 프로젝트 멤버들의 호출로 나가, 소주를 두 세 병이 마시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든다.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걸, 어쩌면 자유는 포장이고 우리 삶은 백조의 발짓과 같은 어떤 성실함을 그냥 기본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을. *** 그렇게 집에 오니, 취기가 올라 노래를 듣는다. 요즘 유튜브는 너무 좋다. 음질이 아니라, 노래가 많다. 예전엔 음반 구하려고 노력했던 것..

반 고흐, 비 내린 후의 밀밭

Vincent van Gogh: Wheat Fields after the Rain, July 1890 고흐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굵고 선명한 붓 터치가 마치 내 마음을 긁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는. 하지만 반 고흐와 친하게 지내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변덕스러움, 민감함 등등에 도리어 내가 상처받았을 지도. 쌓여있는 뉴스레터 이메일에 반 고흐의 저 작품이 있었다. 비 내린 후의 밀밭이라. 내일부터 비가 온다고 하니, 이 더위도 잠시 비켜가려나. 문득, 자주, 나는 내 나이를 잊곤 한다. 내가 좋아하던, 이미 죽은 작가들보다 더 나이 먹었는데도 말이다.

비 내리는 날의 녹턴

이렇게 비 올 땐 쇼팽이구나. 쇼팽의 녹턴만 들으면 왜 고등학교 때 가끔 주말마다 가던 창원 도립 도서관 생각이 나는지 몰라. 노오란 색인표를 뒤져가며 책을 찾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고 혼자 온 나를 사이에 두고 앞서 책을 빌리던 아저씨는 무슨 책을 빌렸나 뒤에 빌린 그 소녀는 무슨 책을 빌렸나 궁금해 했지. 아무 말 없이 서서 물끄러미 창 밖을 보며 아주 잠시 내 미래를 생각했어. 그 옆을 지키던 네모난 색인표를 넣어두던 서랍장과 책들 사이로 지나는 서늘하고 무거운 공기들 사이로 계단이 이어지고 해가 살짝 기울어, 도서관 앞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할 때쯤 나들이 나선 여학생들의 깔깔거리던 소리들과 ... 지금도 그 자리에, 그 도립도서관은 그대로 있을려나. 내가 타고 다니던 그 시내버스도 그대로..

비 오는 날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겼다. 우산 밖으로 나온 가방, 신발, 입은 옷들의 끝자락들, 그리고 내 마음과 이름 모를 이들로 가득한 거리는 비에 젖었다. 비 내리는 풍경이 좋았다. 내 일상은 좋지 않지만, 비 속에 갇힌 거리의 시간은 음미할 만 했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은 글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 술이나 마셔야 하나. (그러기엔 너무 일이 많구나) 비 오는 그림을 좀 찾아봤는데, 거의 없다. 비 내리는 풍경이 회화의 소재로 나온 것도 이제 고작 1세기 남짓 지났으니.. Gustave Caillebotte (1848-1894)Paris Street; Rainy Day, 1877

뒤늦은 장마 속 까페

동네에 까페 하나가 생겼다. 몇 번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 까페 한 쪽 면의 창문들은 어두워지면 저 멀리 63빌딩이 보이고 강변북로를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도처럼 수놓는 자동차 불빛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야경을 가졌다. 사무실의 술자리를 줄이니, 동네 술자리가 늘어났다. 동네 술자리가 마음 편하다. 술을 많이 마실 염려도 없고 많이 마시더라도 걸어서 집에 가니 걱정 없다. 비가 많이 내렸다. 내린 비만큼 내 치아와 잇몸 상태도 엉망이었음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매주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걸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안다. 우리는 나이 드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 늘 상투적으로 말한다. "몸은 늙었으나, 마음만은 이팔청춘이야"라고. 그런데 저 상투적 표현이 얼마나 우리 사회를, 우리..

젖은 운동화 속의 목요일

새벽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자, 더 세차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비에 젖으면, ... 내 발이, 내 몸이, 내 얼굴이, 내 가슴이 젖으면 안 될 것같아, 운동화를 꺼내 신고, 큰 우산을 찾아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출근하는 목요일 아침, 길바닥에 고인 빗물들이 나를 향해 날아올랐다. 땅에서 허공으로, 대기로, 하늘로, 우주로 날아오르는 빗물 방울들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또다른 빗줄기에 갇혀 마음의 자유를 잃어갔다. 2014년 여름. 출근하자 마자, 전날의 최종 매출을 확인하고, 퇴근할 때 그 날의 최종 매출을 예측하며 사무실을 나간다. 대구에 출마한 김부겸 전 의원이 "출마해본 사람만 알 수 있어요. 지지율 1%를 올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라고 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