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73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전집 5

셰익스피어의 기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나이가 든다는 것, 그건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진 것, 지금 없지만 다가오는 공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쌓아갈수록 갑작스레 부는 바람에서 계절의 수상함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의 뜬금 없는 키스의 따스함 속에 깃든 슬픈 이별의 메세지를 읽으며, 길을 지나는 이름없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중 마지막 권인 을 읽었다. (1975)과 (1983)을 묶어 번역한 이 책은 짧지만 보르헤스의 세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에게 보르헤스는,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난..

행복한 연인, 쿠르베

The Happy Lovers Gustave Courbet, oil on canvas, 77*60cm1844 외근 후 바로 퇴근하는 길, 서점에 들려, 참 오랜만에 미술 잡지 한 권을 샀다. 그리고 내 눈을 사로잡은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 하나. 행복한 연인. ... 뭔가 작위적인 느낌을 풍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사랑하고 있다, 혹은 있을 것이다. 적당히 흥분해 있으며 이미 마주 잡은 두 손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음악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내 사랑의 단어가 그녀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갔음을 기뻐하고 여자는 이 남자를 가졌구나 하며 안도의 미소를 띈다. 그들 뒤 배경은 먼 듯 가까운 듯 흐릿하고 군데군데 보이는 붉은 빛은 화창하던 오후가 끝나는 어느 무렵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포도주..

거짓말의 힘, 우테 에어하르트 외(지음)

거짓말의 힘우테 에어하르트, 빌헬름 요넨(지음), 배명자(옮김), 청림출판 "거짓말은 쓸모가 많다. 거짓말은 삶의 일부이고 소통의 필수 요소이며 갈등을 없애고 성공을 도우며, 모순처럼 보이는 우리 내면의 충동들이 공존하는 것을 돕는다. 거짓말은 삶을 더 행복하게 한다." (6쪽) 책을 펼치자 말자, '거짓말'은 나쁘지 않고, 도리어 장려되어야 된다는 식의 문장들로 시작되는 책. 읽는 독자가 무안해질 정도로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과감해서 심지어 야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진실된 말이 옳고 거짓말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이미 독자들은 거짓말쟁이 대열에 서 있음을 하나하나 사례를 들어가며 지적하고는 도리어 건강이나 행복한 삶, 그리고 사랑에는 필수불가결한 요소..

농염한 몸짓의 소년 - 티에폴로(Tiepolo)

미의 기준은 바뀌고 미의 대상도 바뀐다. 미소년에 대한 염모는, 어쩌면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 18세기 후반, 시대는 로코코로 향하고 티에폴로는 바로크적 몸짓 속에 로코코적 염원을 담아낸다. 동성애적 갈망이 화폭에 담긴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즉 선미의식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 그래서 고대에는 여성의 아름다움보다 남성의 아름다움이 더 추앙받았으며, 이는 근대에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는데, 예전 싸이월드에 올린 글들을 이렇게 옮긴다. 업무용으로 네이트온을 사용하다 보니, 쪽지로 예전에 올린 글들을 알려주고, 이를 다시 블로그에 올린다.) 2003년 12월 3일에 쓰다. The Death of Hyacinth1752-53Oil..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지음), 예담 연애의 기억일까, 아니면 사랑의 기억일까. 딱 세 명만 나오는 이 소설은 일종의 연애 편지이며,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배경 삽화에 머물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말줄임표가 유독 많은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연애라고 할 만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고, 쓸쓸함만이 가득했다. 결국 모든 것은 죽어 사라지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남긴 흔적이라는 건 우리 마음의 위로를 위한 변명거리일 뿐이다. 소설은 못 생긴 여자를 향한 사랑을 담고 있다지만, 실제로 그녀를 만나지 못한 나는 그녀가 못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도리어 내 경험 상 못 생긴 여자가 클래식 음악과 미술에 조예 깊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 ..

북강변

북강변 이병률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보면서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 중에서 *** 선릉역 지하 개찰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 즈음, 하얀 보푸라기가 날리듯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잠깐. 지하 전철역에서 인근한 빌딩 3층으로 가는 동안. 그리고 세 시간이 걸린 지리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회의가 끝나자, 어둠이..

97년, 날 사랑한 두 명의 여자

나도 말랑말랑하던 감수성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선배는 나에게 '10년 전 나는 참 4차원이면서 똘똘했다'고 평했는데, ... 내 스스로 그랬나 싶어할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물 안에 있으면 내가 있는 곳이 우물인지 모르고, 우물 밖에 나와야만 내가 우물 안에 있었다는 걸 안다. 즉 자신 스스로 돌이켜보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물어서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2004년 6월에 쓴 메모를 다시 읽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게 휴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 2004년 6월 6일 05:04 전화를 하지만, 전화는 되지 않고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돌다가어디 ..

마음, 나쓰메 소세키

마음 -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문예출판사 마음, 나쓰메 소세키(지음), 김성기(옮김), 이레 1.나쓰메 소세키, 무려 1세기 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동시대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근대성(modernity)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리라. 이번 소설도, 내가 이전에 읽었던 소설과 비슷하게, 큰 사건이 없이 한 편의 풍경화처럼 이야기는 조용히 흘러간다. 소설의 전반부는 나와 선생님이 만나고 가깝게 되는 과정을, 소설의 후반부는 선생님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한 부분은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머지 한 부분은 독백에 가까운 편지로만 구성된다. 그런데 누군가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 대화가 아닌 '글로 씌어진 편지'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리고 ..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마음산책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Pol-Serge Kakon)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i12bent.tumblr.com/post/242749612/jean-seberg-nov-13-1938-1979-was-an 그러고 보면 이 책의 독자는 정해져 있었다. 로맹 가리Romain Gary, 혹은 에밀 아자르Emile Ajar의 팬이거나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의 여 주인공 진 세버그Jean Seberg를 잊지 못하는 이들로. 그러나 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재미있지 않다.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