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68

개인적 체험, 혹은 늙어간다는 것, 무디어져간다는 것

개인적인 체험 -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을유문화사(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으나, 이제는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귀한 전집이 되었다.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업적을 이룬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이해가 한국에서도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새로 홈페이지를 단장하면서 이전에 쓴 글을 추스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글. 히미코를 따라 소리내어 있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인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런 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히미코에겐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로 기능하고, 버드에겐 장애를 가진 아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로 기능하는, 그래서 세상은 평온 속에서 이어나가고 상처와 방황은 눈물로 스스로 아물어가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스물 ..

여자

내가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는 어떤 여자. 그런데 과연 사랑하는 걸까. 눈만 감으면 생각나고 힘들 때면 생각나고 행복할 때면 생각나고 비가 올 때도 생각나도 언제가 생각나긴 하지만, 그런데 과연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사랑은 언제나 유리창 같아서 보기엔 투명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얇은 망치 하나로 깨지는 게 사랑인데, .. 과연 난 그녀는 사랑하는 걸까. 현실의 삶은 너무 거칠고 힘들어서, 그냥 손을 놓아버리면, 그냥 놓아버리면 속이 편할 어떤 것이어서, 그 속에서 유리창 같은 사랑을 난 지킬 수 있을까. 내 꿈은 내가 손수 잡은 갤러리에 그녀의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걸어, 내가 전시 평을 쓰고 잡지 잡아 인터뷰 하고 .. 그런게 꿈이었는데, ... 그게 가능할까. 하긴 가능은 할 꺼야. 대신 그녀가..

봄날의 문자 메시지

군대를 벗어난 지도 벌써 9년이 지났다. 어느새 민방위이다. 넓은 영등포 구민 회관 입구 쓰레기통에다 민방위 관련 책자를 놔두고 왔다. 강당 앞쪽에 앉아 있는데, 몇 통의 전화가 왔고 몇 개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신기한 일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전화와 문자메시지. 보통 때라면 오지 않았을. 바람은 너울치듯이 나무가지 앉았다가 지붕에 앉았다가 전신주에 앉았다가, 그렇게 봄을 심어놓으면서 지나가고 도시의 퀘퀘한 매연 틈 속에서 햇살은 곧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후 두 시 반. 주머니 속의 핸드폰으로 문제 메시지 하나가 와있었다. "그대에게로 향하는 나의 마음이 멍에가 되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 같아 미안하구요." 낯선 전화번호. 누구일까. 누구였을까. 그리고 민방위 교육 사이 쉬는 시간, 누구신가..

스토리텔링

건너편 창으로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 보인다. 밤이면 술에 취한 40대 쯤으로 보이는 사내의 팔짱을 끼고 씩씩한 걸음으로 들어가는 젊고 산뜻한 피부를 가진 여자 아이와 만날 수 있다. 그 여자의 이름은 'Feel'이다. 내가 그녀를 'Feel'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몇 명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에게 "필이 꽂혔기" 때문이다. 요즘 난 퇴근도 하지 않고 억지로 야근을 해대며 11시 쯤 사무실을 나가 라마다 르네상스 앞을 서성거린다. 이런 미친 짓을 한 지도 벌써 15일째다. 뭐, 미친 세상이니, 미친 짓을 한다고 해서 악한 행위는 아니다. 차라리 성스러운 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Feel이 꽂혀 나의 정신을 잃어버렸으니. 그리고 20일째 되는 날,..

이별연습, 로랑 모비니에

이별 연습 - 로랑 모비니에 지음, 이재룡 옮김/현대문학 Apprendre 'a finir 이별연습 로랑 모비니에 지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오늘, 광활한 대륙에서 밀어닥친 차갑고 건조한 바람들이 검은 아스팔트 위를 낮게 깔려 지나가는 순간, 지친 표정들로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난 당신을 알아요’라고 큰 소리로 부를 뻔했다. 다행히도 난 황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고 그녀는 날 보지 않고 오던 길처럼 나머지 길도 그렇게 걸어갔다. 우리는 때때로,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하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한때 그것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에 대한 강력한 부정, 또는 누군가가 내 말을 듣게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바빌로니아사람들의 "사랑의 병"

환자가 가벼운 기침을 계속하고 말문을 닫을 때가 많으며, 혼자 말을 자주 하고 이유도 없이 웃는다. ... 보통 때에도 풀이 죽고 목이 조이는 듯이 느끼며, 먹고 마시는 것에 아무런 즐거움도 발견하지 못하고 커다란 한숨을 쉬면서 줄곧 '아아, 불쌍한 내 마음이여!"만 읊조리는 경우, 이 환자는 사랑의 병을 얻은 것이다. - 기원전 3천년경, 메소포타미아 어느 석편에 정의된 사랑의 병. **** 몇 천년 전 고대인들이 정의한 사랑병 환자. 그 매력적인 풍경 속으로.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지음), 문학과 지성사 1. Passion 불같이 활활 타오르던 사랑이 식지 못한 채 여러 차례의 깊은 계곡을 통과한 다음,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의 정념이 사악하기 때문일까? 혹은 불륜을 지속시키기 위해, 부도덕을 도덕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순수한 사랑은 그 사랑을 타인들에게 숨겼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사랑이 허약하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상처 입은 것일까? 2. 불륜 나에게, 혹은 이 소설을 읽고 잔인한 쾌감,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자신만만하게 '카타르시스'라고 말했을 그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

사랑?, 훗~!

날씨가 너무 좋아 집 안에서 빈둥거리기로 마음 먹었다. 몇 달만에 Sidsel Endresen을 꺼내 듣는다. "So I write/about the world/and only rarely come close/to saying this/so we can share this/it's just black marks/on white paper/and me/wanting another blank page/and yet another/so I write/thinking I'm constructing a bridge/but I get lost/on the way across/and I stumble/on implications/ associations/ synonyms/combinations/of the per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