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24

최초의 모험, 헤르만 헤세

최초의 모험헤르만 헤세(지음), 이인웅(옮김), 올재클래식스, 2018년 "나는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보다도 회상시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무상하게 사라져 갈 일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며, 말을 걸어 불러내고 사랑에 찬 서술을 함으로써 지난 과거의 일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의 관념론적 전통에 따라 작가의 임무에는 어느 정도 선생님이나 경고해주는 사람이나 설교자로서의 기능이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교훈을 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언제나 우리 인생에 혼을 불어넣기 위한 독려의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사물을 관조하는 일이란 연구하거나 비평하는 것이 아니다. 관조란 바로 사랑이다. 관조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소망할 만한 상태로서, 아무런 욕구가 없..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둘만한 보들레르의 작은 산문들을 모았다. 각각의 산문들은 19세기적인 묘한 매력과 허를 찌르는 감각으로 채워진다. 는 너무 유명한 산문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문학청년들에게 주는 충고 지금 나이로 보자면, 문학청년 시기쯤으로 분류될 이십대 중반에 쓴 산문이다. 그 스스로도 이렇게 살지 못했을 텐데, 이런 충고를 썼다는 건 그만큼 문학 활동에 자신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런 이율배반은 그의 생애 전반에 나타나는 바이기도 하다) 시란 가장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는 예술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20쪽 이런 놀라운 사..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황현산(지음), 난다(문학동네 임프린트)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괴테, 중에서 다행이다. 이 책이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는 건 좋은 일이다. 불문학자인 황현산 교수가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은 이 산문 모음집은 출간 후 몇 년간 많은 이들의 밤을 조용히 채웠을 것이다. 글들은 대체로 짧고 읽기 편하며 담백하다. 실은 이런 글 읽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탓에, 이 책의 유명세는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나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약간 밍밍한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취향의 문제일 뿐, 이 책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편안하게 권할 수 있는 산문집이다. 여기서 ..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지음), 김난주(옮김), 바다출판사 1. 부모를 버려라, 그래야 어른이다2. 가족, 이제 해산하자3.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4.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5. 아직도 모르겠나, 직장인은 노예다6. 신 따위, 개나 줘라 7. 언제까지 멍청하게 앉아만 있을 건가 8. 애절한 사랑 따위, 같잖다 9. 청춘, 인생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10. 동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어라 - 이 책의 목차다. 정말 이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도 이십 여년이 지났다. 그의 소설, 투명한 서정성이랄까, 그런 느낌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의 산문은 거침없다. 그가 소설에서 보..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도정일(지음), 문학동네 도정일 교수의 산문집을 읽었다. 다소(혹은 매우) 실망이다. 여러 일간지와 저널에, 마치 마감 시간에 쫓겨 쓴 듯한 짧은 글들의 모음이기 때문이고 대부분 지면에 실린 지 꽤 지났다. 다만 저자가 워낙 유명한 지라, 글 읽는 재미가 없다거나 형편없진 않다. 도리어 다른 책들보다 훨씬 낫다. 글들 대부분 짧고 금방 읽힌다. 대신 깊이 있는 통찰을 느끼기엔 글들이 너무 짧고 그 때 그 당시에 읽어야 하는 시평時評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90년대에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2015년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떠나 서글픔마저 느끼게 만든다. 옛날 글 읽는 느낌이 이런 걸까. 몇몇 인용문들은 기억해둘 만했고 다소 긴 분량을 가진 몇 편의 글은 충분히 읽을..

원 맨즈 독, 조지수

원 맨즈 독조지수(지음), 지혜정원 매우 적절했다. 아니 탁월했다는 표현이 좋을까. 산문집을 좋아하지만, 그건 문장이나 표현 때문인 경우가 많다. 실은 그게 전부다. 하지만 진짜 산문집은 그런 게 아니다. 적절한 유머와 위트, 허를 찌르는 반전, 비판적 허무주의, 혹은 시니컬함, 그러면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혹은 의지. 그리고 지적이면서 동시에 풍부한 감성으로 물드는 문장. 은 그런 산문집이다. 읽으면서 일반 독자들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 인터넷 서점의 리뷰들을 보았는데, 온통 찬사 일색이라 무안해졌다. 대자적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 인간의 독특한 조건이다. 지성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세계와 나를 가른다. 나는 자연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그러고는 ..

잡담.

우연히 구한 비틀즈의 애비로드(Abbey Road) LP는 집에서만 들을 수 있는 위안이다. 어젠 임시로 있는 사무실에서 유튜브로 비틀즈의 애비로드를 들었다. 곡과 곡 사이가 떨어져 다소 불편했지만, 들을 만했다. 유트브로 음악을 듣는 걸 몇 해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나도 그렇게 듣고 있는 걸 보면 유튜브의 콘텐츠 장악력은 실로 대단하기만 하다. 그래도 잘 갖추어놓은 오디오 시스템에 나오는 소리와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비틀즈의 애비로드를 조지 벤슨은 새롭게 편곡하여 the other side of Abbey Road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나는 CD로 가지고 있는데, 아래 동영상은 LP를 녹음한 것이다. 이런 걸 공유하는 이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시간 많은가 보..

<느낌의 공동체>를 펼치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

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 유미리

요즘 친구들도 유미리를 읽을까. 유미리를 읽지 않는다면, 누구를 읽을까.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녀. 해질녁 공원 계단에서 죽은 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그녀.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 도서관에 빌린 강상중의 책 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 때문에 강연회를 할 때마다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는 강상중 교수의 책을 보자, 문득 유미리가 떠올랐다. 서재에 이미 그녀의 책은 다른 책들로 인해 밀려밀려 어디로 사라지고 ... 도서관에 가서 그녀의 책을 빌려 읽어야겠다. 그녀의 트윗을 팔로워했는데(일본어를 할 줄 모르면서), 그녀의 딸인가 싶다. 혼자 딸을 키우고 살아가는 작가 유미리... (주제 넘은 생각이지만) 가끔..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인상과 풍경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엄지영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엄지영(옮김), 펭귄 클래식 독자 제위(諸位). 여러분이 이 책을 덮는 순간 안개와도 같은 우수(憂愁)가 마음속을 뒤덮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어떻게 쓸쓸한 색채를 띠며 우울한 풍경으로 변해 가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지나가는 모든 장면들은 추억과 풍경,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나의 인상(印象)이다. 아마 현실이 눈 덮인 하얀 세상처럼 우리 앞에 분명히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 마음속에서 열정이 분출되기 시작하면, 환상은 이 세상에 영혼의 불을 지펴 작은 것들을 크게, 추한 것들을 고결하게 만든다.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