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

5월 어느 오후 서울 거리

5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삼각지로 걸어가다 문득 마주친 대도시의 오후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조르주 베르나노스). 느리게 숨죽여 있던 무채색 건물이 숨을 쉬고 우리들의 숨겨진 영혼이 노래하는 순간이다. 태양이 사라지더라도 태양을 기다리지 않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꿈 속 노을가 근처에서 막걸리 중이다. 그의 삼각지에서.

초겨울 오후의 강변

출근길에 도어즈의 '모리슨호텔'을 다운받아 들었다. 들으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도어즈의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맥주를 마시면서 취하고 싶다고. 오후 미팅이 끝나고 저녁 5시가 되었고, 내일 오전 미팅 준비를 위해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쓸쓸해 보이는 강변을 찍었다. 낭만이 사라져 가고 있다. 슬픈 일이다. 감수성이 메말라가는 건 좋지 않지만, 건조해지는 만큼 상처도 덜 입는다.

'여름-절망'에서 '가을-희망'으로

피로가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 집에 오니, 밤 12시가 가까이 되었고 나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상태다. 하긴 내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딱딱한 걸 먹으면 안 되는데, 맥주 몇 잔에 딱딱하다 못해 씹혀지지도 않는 오징어 뒷다리를 안주 삼았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가 사라지는 것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상 속에 내 온 몸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데, ... 올해 그런 여유가 생길 지 모르겠다. 여름, 뜨거운 절망을 뒤로 하고, 가을, 내년을 위한 희망을 꿈꾸어도 좋을 시기다. 몇 번의 주말 오후, 핸드폰으로 늦은 오후 석양 아래의 서울을 찍었다. 내가 가진 니콘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있지만, 지금 PC에 옮기기가 귀찮다...

우리들의 역사 - 데비 한, 마크 퀸, 서울 명동

영화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요즘 어떤 영화가 재미있는지 전해 듣기 마련이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하지만 미술은? 아직까진 찾아서 움직일 수 밖에 없음을... 몇 달 째 전시장 근처도 가지 못했다. 회사일이 바쁘기도 했고 주말이면 집 밖으로 나오는 건 대단한 각오를 해야 될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미술여행'이라는 어플을 만들어놓고도 개점 휴업 상태가 되었다. 역시 콘텐츠 관리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회사 일과는 무관할 때 더욱 그러하리라. 그러나 이제 외출하기 좋은 봄날이 오고, 몇 개의 전시를 챙겨보았다. 데비 한 1985 - 2011, 성곡미술관 데비 한의 작품은 미국과 한국, 서양과 동양, 너와 나를 묻는다. 인용과 조작, 해체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작품은 현대 ..

조우: 더블린, 리스본, 홍콩, 그리고 서울 - 2009 현대미술국제교류전, 국제교류재단

5호선 충정로역에서 내려 중앙일보사 빌딩까지 걸어갔다. 늦겨울 햇살은 따스했고 찬 바람은 없었다. 군데군데 녹다만 눈들이 도시의 그늘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혼자 정해진 모험을 하듯, 마땅히 해야할 일을 보듯, 가방에 작은 노트와 읽던 책 한 권을 넣고 전시를 보러 간다. 보통 최소 10개 이상의 전시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아는 작가를 만나면 인사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젠 누군가와 함께 보러 가는 것이 되레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조우 - 더블린, 리스본, 홍콩, 그리고 서울'은 전시된 작품들의 수준으로만 보자면, 올해 기억에 남은 몇몇 기획전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지만, 너무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는 점에서 조금은 아쉬운 전시였다. 설득력 있는 주제가..

서울에서의 일상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시속 백 킬로미터에서 백이십 킬로미터 사이를 오가는 속도 속에서,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시월 말의 아침 하늘은 신비롭고 고요했다. 서해 갯벌 사이로 나있는 도로는 꽤 절망적인 근대성(modernity)을 가지고 있었다. 서유럽 나라를 가면 늘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아직 한참 먼 한국의 정신적, 문화적 성숙도와 시스템을 선명하게 보게 된다. 종일 잠을 잤다. 잠을 자지 않을 때는 청소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아무렇게나 쓰며 방 안을 배회했다. 무려 이천 발자국 이상을 걸었다. 다행히 금붕어는 살아있었고 시든 화분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으나, 아직 남아있는 초록빛 생기는 나로 하여금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라고 주문하는 듯 보여 다소 간의 위안이 되었다. 몇 주 만에 짬뽕을..

가을의 오르세(Orsay)

어제 오전 일찍 나와, 세느강 옆을 걸었다. 서울은 마치 표준화, 규격화, 효율화의 전범처럼 꾸며져 있다면, 파리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다르다. 얼마 전 서울시 청사의 재건축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 문화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느강 옆을 걸으면서 보게 된 강 옆에 놓인 배들의 모양 하나하나는 각각의 개성을 살려 설계되고 장식되어 있었다. 동일한 디자인의 아파트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서울은 꼭 20세기 초 근대주의자들의 잃어버린 로망을 되살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보인다. 하나가 잘 되면, 그 하나를 따라하기 바쁘다. 한국 사업가들이 '벤치마킹'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문화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 있어 세계가 놀랄 정도의 시간 단축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