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64

흉터와 무늬, 최영미

흉터와 무늬 - 최영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램덤하우스중앙, 2005년 도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죽은 언니 이야기? 아니면 그걸 뒤죽박죽 섞어놓은 가족 이야기?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 이야기? 그럼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좋을까? 그런 가족이 있었다고? “지난 4년은 시인이었던 과거의 나와 소설가가 되려는 내가 서로 투쟁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천매가 넘는 분량을 써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 한겨레신문 2005년 5월 11일자 이 소설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저 가족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러기..

창녀, 넬리 아르캉

창녀 Putain 넬리 아르캉(지음), 성귀수(옮김), 문학동네, 2005. 1. 신시아에게. 신시아, 책에서만 보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어. 나도 너처럼 마른 여자가 좋아. 그러니 네 외모에 대해선 그렇게 많이 이야기할 필요 없어. 그러면 그럴 수록 너는 예쁘지 않으니깐 말이야. 하지만 네 맑은 눈동자는 나에겐 부담스러웠어. 너의 눈동자는 궁지에 처한 17살 소녀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드러낼 때의 그 빛깔을 가지고 있더군. 그러나 소녀는 한없이 사랑하는 어떤 이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기만 하면 금새 풀려버리는 그런 종류야. 신시아. 그러니, 그냥 울어버려. 그게 더 낫지 않을까. 다행이야. 너와 키스만 했다는 게. 아마 너와 관계를 맺었다면 너는 날 공격했을 꺼야. 형편없다면서..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나르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의 운명. 그/그녀는 현대에 속하지 않고 고대에 속한다. 그/그녀는 현존하지 않고 오직 그림자로 왔다가 그림자로 사라진다. 침묵 속에 있으면서 수다스럽게 자신의 육체를 숨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나, 실은 그/그녀는 끊임없이 여행 중이다. 우아한 몸짓으로 시간 속으로. 오래된 시간 속으로. 소설은 이제 스토리도, 플롯도 지니지 못한 채, 소설의 운명, 책의 운명, 독서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고대에 속하는 것들이 가지는 이 때, 이런 책이 읽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실은 이 소설은 거짓말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먼지가 될..

계절풍 속의 마르그리뜨 뒤라스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오늘 쉴새없이 불었던 가을바람을 떠올린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마르그리뜨 뒤라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을이나 겨울에 부는 바람은 늘 그녀를 떠오르게 한다. 한 때 뒤라스의 소설만 읽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는가 보다. 그녀의 책을 서점에서 본 적이 오래 되었고 그녀를 이야기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하긴 그녀는 사랑 속에서 죽었으니. 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잠시 ... 내가 그녀의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벌써 6년이나 지났구나. ... 뒤라스. 1998년 겨울. 그 겨울. ... 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뉴욕삼부작, 폴 오스터

폴 오스터(지음), 한기찬(옮김), 뉴욕 삼부작 The New York Trilogy, 웅진출판, 1996 초판2쇄. 어둠 속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밀어 넣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내 실수와 과오, 내 조그마한 상처, 또는 내 고귀했던 사랑마저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었을 때, 왜 누군가가 날 찾는 것일까. 소설은 누군가를 계속 찾아 다니다 그 누군가를 잊어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실은 오래 전부터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고 그것을 그 스스로 선택했으며 그렇게 남은 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날 찾는 따위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 전부터 세상은 나의 것이 아닌 타인들의 것임을. 그..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로 깔랭, 그건 내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야. 내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말하지 못한 거지. 그렇지만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창작수업

시 창작 수업이다. 5월. 1층 강의실 옆 잔디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대낮부터 막걸리와 소주를 펼쳐놓고 술을 마시고 있다. 의례 술잔 옆에는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이 나뒹굴고. 강의를 하러 들어온 교수는, 출석을 부르다 말고 고개를 돌려 창 밖으로 술판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 틈에서 이 수업을 들어와야할 학생들이 있음을 발견하곤 한심한 눈으로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쳐다본다. 이 좋은 봄날에 자네들은 강의실에서 뭐하는 짓인가. 자네들은 시를 쓸 수 없겠구만. 하곤 2시간 강의를 꼬박 채우고 창 밖 학생들의 술자리로 간다. 강의실에 앉아 있던 몇 명의 학생들도 투덜대면서 술자리로 간다. 그렇게 어느 대학 봄날 오후가 지나간다. ----------- 생각해보면, 대학 2학년 때, 군대 가기 전 낮술이 정말..

삼십세, 잉게보르크 바하만

, 잉게보르크 바하만(지음), 차경아(옮김), 문예출판사 1997년 가을에 이 책을 구입했으니까, 벌써 6년이 지나고 있는 셈이다. 대학 4학년이었으리라. 대학 도서관 구석진 곳에서 문고판으로 나와있는 이 책을 읽었다. 그 문고판 책에는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에서의 청춘'이 첫 번째로 실려 있었는데, 그 때, "쾌청한 10월, 라데츠키 가로부터 오노라면 우리는 시립 극장 옆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한 무리의 나무를 보게 된다. 열매를 맺지 않는 저 검붉은 태양의 벚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서 있는 첫 번째 나무는 가을과 함께 불타올라, 천사가 떨어뜨리고 간 횃불처럼, 어울리지 않게 금빛 찬란한 얼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나무는 불타고 있다. 그리고 가을 바람도 서리도 나무의 불을 끌 수는 없다..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열림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6월 일요일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 이상 인식하지 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 98쪽 글쎄, 이 소설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며 선뜻 누군가에게 권할 수 있을까. 한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 회고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프랑스 어느 작은 지방 도시 이야기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호기심을 자아내기 보다는 이질적인 느낌만을 더할 뿐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산뜻하고 사뿐했다. 그러니 글쓰..

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열린책들 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열린 책들 이야기는 안나 블룸이라는 여자가 그 도시로 오빠를 찾아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도시는 정말 ‘폐허’였다. 그 풍경은 먼 미래, 무시무시한 핵전쟁 이후 무정부상태를 묘사하곤 하는 SF 영화들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한 개인(안나 블룸)에게만 그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녀의 실존적 환경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SF 장르 영화의 서사구조와는 틀리다. 그렇다고해서 장르 영화와 얼마나 틀릴 수 있을까. 끝까지 달성 가능한 희망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1) 소설은 안나 블룸이라는 여자가 그 도시에 들어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 도시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