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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시집 +43



1. 

봄날이 간다. 여름이 온다. 비가 온다는 예보 뒤로 자동차들이 한산한 주말의 거리를 달리고 수줍은 소년은 저 먼 발치에서 소녀의 그림자를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그 사이로 커피향이 올라오고 내 어깨에 매달린 가방의 무게를 잰다. 내 나이를 잰다. 내 남은 하루, 하루들을 세다가 만다. 포기한다. 


2.

포기해도 별 수 없는 탓에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게 된다. 포기해도 된다면, 포기가 좋다. 내려놓든가, 아니면 그냥 믿는다. 포기를 해도 남겨진 삶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포기는 그저 단어일 뿐, 행동은 아니다.  




3. 

비가 내리는 날 저녁 황급히 들어간 카페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 저녁 식사의 수선스러움을 기억한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일상. 그런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4. 

방문 열쇠가 빠지지 않았다. 차키가 빠지지 않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손에서 일시적으로 모든 힘들이 다 빠져나간 것일까. 여전히 어깨에는 가방을 맨 채로 고속버스를 타고 종일 헤맸다. 


5. 

응급실 풍경은 늘 낯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옆에선 우는 소리가 들렸다. 교통사고로 다친 아이가 응급실에 온 지 2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강제된 부재는 그 동안 쌓아온 것들을 천천히 갉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슬픔마저도. 


6.

몇 주째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시집을 들고 다녔지만, 읽지 못했다. 오늘도 읽지 못했다. 이 사무실에서 나는 일을 한다는 핑계로, 잠시 블로그에 들어와 단상을 남긴다. 봄날 대기도 어수선하고 내 마음도 어수선하고 책상 위도 어수선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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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의 <<카불의 책장수>>(권민정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05년)은 책 제목과 달리 아프카니스탄에서의 일상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준다. 그 참혹함 속에서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지만, (다들 잘 알다시피) 여성의 삶은 더 참혹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에 대한 미움 같은 감정이 싹튼다. 그들(일부 이슬람 국가들과 대부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어리석음, 종교와 경전에 대한 (무자비한) 축어적 해석과 현실적 상황을 무시한 (강압적/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통한) 적용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이슬람 여성에 대한 여러 풍문을 들은 바 있다. 야한 속옷이 잘 팔리며 부르카 밑으로 진한 화장을 하고 집 안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이러한 풍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선입견을 조장하고 이슬람 여성의 시대착오적 삶의 형태에 대해선 무관심하게 만든다. 


실은 그 풍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에겐 심각할 정도로 자유가 없음을 알았다. 심지어 친어머니의 명령으로 오빠들에 의해 여동생을 죽이는 명예살인 이야기까지. 결혼은 자신의 의사가 아닌 집안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며 결혼 후의 개인 생활이란 일체 없다. 더구나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가지겠다고 하면, 싫어도 어쩔 수 없으며(심지어 남편을 싫어할 경우엔 두 번째 부인이 오는 걸 반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여성들 간의 또다른 일상이 펼쳐진다.  


사이드 바호딘 마지로흐(Sayd Bahodine Majrouh, 1928 - 1988)은 작가이자 정치가로 몽펠리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몽펠리에 대학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 아프가니스칸 카불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인 카불로. 그리고 그가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살해당한 후 나온 시집이 <<자살과 노래 Le suicide et le chant, Poesis populaire' des femmes pashtounes>>(갈리마르, 1988)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부족 여인들의 구전되거나 창작된 노래들(혹은 시들)을 모은 것으로, <<카불의 책장수>>에는 그 일부만 실렸다. 그런데 그 일부만으로 그 표현들이 의미심장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영역본 제목: Songs of Love and War: Afghan Women's Poetry) 


그래서 아래 그 일부들을 옮겨놓는다. 영역본 시집을 구하는대로 다시 한 번 옮겨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성찰을 구할 수 있도록 해야 겠다. 




Sayd Bahodine Majrouh 







잔인한 사람들, 당신들도 보이죠.

내 침대로 다가오는 저 늙은이가.

그러면서 내게 왜 우냐고, 왜 머리를 쥐어뜯느냐고 묻는군요.


오, 신이시여, 당신은 제게 또다시 질흑 같은 밤을 주시고

전 또다시 온몸을 부들부들 떱니다.

증오하는 저 침실로 가야만 하니까요.




* *




손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우리 함께 초원에 숨어요.

사랑하거나 칼 아래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


난 강으로 뛰어들죠, 하지만 강물은 날 데려가지 않아요.

내 남편은 운도 좋지요, 강물이 늘 나를 강둑으로 밀어내니.


내일 아침 난 당신 때문에 죽을 거예요.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일랑은 부디 마세요. 




* *



장미처럼 아름다웠던 나,

당신 밑에서 오렌지처럼 노랗게 시들어갔네.


난 고통이라곤 몰랐지.

그래서 곧게 자랐지, 전나무처럼. 




*  *




그대 입술로 내 입술을 덮어줘요.

사랑의 말을 속삭일 수 있도록 혀는 놔두고,


어서 날 안아줘요!

그리곤 벨벳 같은 내 허벅지에 휘감겨봐요.


내 입술은 그대의 것, 맛봐요, 겁먹지 말고!

설탕이 아니니, 녹아 없어지지 않는답니다.


그대, 내 입술을 가져요. 

그런데 자극은 왜 하나요, 난 이미 젖었는걸요.


한순간 그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난 그대를 재로 만들 수 있어요. 



    

불어 원서와 영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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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지음), 최성은(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왜 내가 새삼스럽게 외국 번역 시집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번역된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아마 언어 너머로도 전해지는 시적 감수성, 또는 해석의 가능성, 그리고 지역과 언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태도 같은 것에  감동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쉼보르스카의 시들은 한글로 옮겨지더라도 그 시적 매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는 역자의 노고일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 자체가 가진 힘을 그만큼 대단한 것일 게다.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침대 밑에서, 계단 아래에서

오래된 주소에. 


무의한 것들, 터무니없는 것들로 가득찬

장롱 속을, 상자 속을, 서랍 속을 샅샅이 뒤졌다.


여행 가방 속에서 끄집어냈다,

내가 선택했던 시간들과 여행들은.


주머니를 털어 비워냈다,

시들어 말라버린 편지들과 내게 발송된 것이 아닌 나뭇잎들.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녔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들,

불안과 안도 사이를. 


눈(雪)의 터널 속에서

망각 속에서 가라 앉아버렸다.


가시덤불 속에서,

추측 속에서 갇혀버렸다.


공기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잔디밭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끝장을 내보려고 몸부림쳤다,

구시대의 땅거미가 내려앉기 전에,

막이 내리기 전에, 정적(靜寂)이 찾아오기 전에


결국 알라내길 포기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과연 무얼 찾고 있었는지


깨어났다,

시계를 본다 

꿈을 꾼 시간은 불과 두 시간 삼십 분 남짓


이것은 시간에게 강요된 일종의 속임수다

졸음에 짓눌린 머리들이 

시간 앞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이 번역시집은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을 번역한 것으로, 책 뒷편에서는 쉼보르스카의, 죽기 전 육필 원고가 실려 있기도 하다.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쉽게 읽히면서도 시적 유머나 휘트, 풍부하고 다채로운 비유들은 읽는 이들을 시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이혼 




아이들에겐 첫번째 세상의 종말,

고양이에겐 새로운 남자 주인,

개에겐 새로운 여자 주인의 등장,

가구에겐 계다과 쿵쾅거림, 차량과 운송. 

벽에겐 그림을 떼고 난 뒤 드러나나는 선명한 네모 자국.

이웃들에겐 이야깃거리, 잠시 따문함을 잊게 해주는 휴식.

자동차에겐 만약 두 대였다면 훨씬 나은 상황.

소설책과 시집들에겐 - 좋아, 당신이 원하는 걸 맘대로 가져가

문제는 백과사전과 비디오 플레이어, 

그리고 맞춤법 교본이다.

앞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쓸 때 어떡하면 좋을지 적혀 있을 텐데 -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두 이름을 분리하기 위해 마침표를 사용해야 하는지. 



시란 무얼까? 시를 읽는다는 행위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최근 자주 시집을 읽는다. 내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해볼 일이다. 쉼보르스카의 시집, 추천한다. 정말 좋은 시집이다. 

 




Wisława Szymborska (1923 - 2012)




충분하다 - 10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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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Paul Celan / unter judaisierten Deutschen 

장 볼락Jean Bollack(지음), 윤정민(옮김), 에디투스, 2017




<죽음의 푸가>로 잘 알려진 파울 첼란의 연구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흔아홉의 나이에 파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시인. 아우슈비츠에서 부모를 잃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가 그 말을 번복하게 만든 작가. 하지만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 한국 시인도 잘 알지 못하는 요즘, 파울 첼란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이 때, 이 책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울림은, 번역된 시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진하다. 길지만 <죽음의 푸가>를 옮기면,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타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중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시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연민과 고통, 그것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서정적이지만 아프고 아름답지만 고통스럽다. 1960년 파울 첼란이 뷔히너 상 수상 연설인 <자오선Der Meridian>은 그의 시론, 문학관을 잘 알 수 있는 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글로 제대로 번역된 글은 없으니...)



“어떤 시인도 결코 타인의 문제로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만 말할 뿐이다. (… …) 말해진 것은 제 각각의 판단에 맡겨진다.” 

- <자오선> 중에서, 파울 첼란



이 책에서 장 볼락은 파울 첼란에 대해서,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인이면서 독일어로 글을 쓴 시인이라는 위치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몇몇 작품에 대해, 시어 하나하나를 되새기며 깊이 있는 분석을 전개한다. 단어 하나하나 짚으며 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한, 뛰어난 예를 보여주고 있다(이 점에서 이 책은 문학 평론가들, 혹은 평론을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첼란의 모든 시는 시가 갖는 진리에의 요구와 씨름하며, 그런 이유로 그의 시는 시로서의 자기 특성을 부각합니다. 

- 37쪽



첼란의 시문학은 일종의 사유 양식입니다. 첼란은 그것을 기억과 동일시합니다. 이처럼 응축된 사유형태는 철학으로도 신학으로도 분류될 수 없습니다.

 - 51쪽




유대인으로서의 첼란, 예술과 시, 그리고 첼란의 문학에 대한 태도, 몇몇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답고 있는 이 책은 작지만, 탄탄하고 깊이있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장 볼락Jean Bollack(1923 - 2012)




파울 첼란 / 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 10점
장 볼락 지음, 윤정민 옮김/에디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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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s://www.concertgebouw.be/en/event/detail/1442/Federico_Garcia_Lorca 




강의 백일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정현종(옮김), 민음사 




이 번역 시집은 시인 정현종이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어떤 시들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지고, 옮겨진 그 언어에서 다시 또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사이에도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 해댱된다.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총살당한 이 스페인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자면,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첫 사랑을 만난 듯 가슴 떨리고 흥분된다. 


서정적인 강렬함이 지배하는 로르카의 시 세계는 후회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청춘의 아름다운 무모함과 인생의 낭떠러지 앞에서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사랑으로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자연은 그 무모함과 위험한 사랑을 지지하며 같이 노래 부른다. 


시들은 적절한 은유와 상징, 알레고리 또는 직접적인 표현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독자는 스페인 그나라다의, 저 거대한 대지를 감싸고 도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사랑스럽기만 한 바람의 그늘 속에서 앉아 있게 될 것이다.  



산티아고 시를 위한 마드리갈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내 달콤한 사랑

공중의 흰 동백

햇빛은 희미하게 비친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어두운 밤에

잠든 은빛 풀잎들이

텅 빈 달을 덮는다


거리의 비를 보렴

돌과 수정의 비탄을

사라지는 바람 속에서 본다

네 바다의 재와 그림자를 


네 바다의 재와 그림자

산티아고, 태양에서 먼

옛 아침의 물이

내 가슴에서 떤










강의 백일몽 - 10점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정현종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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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쓴 포스팅이라니. 벌써 12년이 흘렀구나. 함민복과 채호기의 시다. 


*** 2004년 1월 27일 *** 


강화도 어느 폐가에 들어가 산 지 꽤 지난 듯 하다. 세상의 물욕과 시의 마음은 틀리다는 생각에 인적 뜸한 곳으로 들어가버린 시인 함민복. 그의 초기 시들은 무척 유쾌하면서도 시니컬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연시들이 많아졌다. 외로워서 그런 걸까. 아니면...


광고를 위해 지은 그의 시 "설중매"는 세상의 술에 취한 영혼을 살며시 깨우고 저기 멀리 달아나는 그리움을 조용히 잡아 세운다.



설중매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 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내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이 시 때문에 설중매를 얼마나 사 마시려마는, 내 마음 외로운 탓에 차가운 겨울 오후부터 술 생각 동하게 만드는 건 함민복의 시가 가진 힘일 게다.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어 술을 마시면 좋을련만, 그 꿈 접은 지 오래. 하지만 꿈을 가지는 상상은 때로 좋을 때가 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오래된 시 한 편 읽어본다.



몸 밖의 그대 1


1

그대와 마주앉아 그대의 술잔에 술을 따릅니다. 그대의 몸
을 조금씩 채워가는 술. 그대와 마주앉아 내 몸에 따르어지
는 그대를 봅니다. 내 몸 속에 채워지는 그대. 술은 그대 핏
속으로 스며 구멍마다 붉은 꽃송이 내질러 숨막히는 향기로
내 몸을 묶어놓습니다. 그대는 내 몸으로 들어와 영혼을 점
령하고 옴쭉달싹 못하게 합니다.


2

내 몸 속에는 그대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죽
었다고 하지만 내 몸 속에는 그대가 온전히 살아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의 사막에 홀로 버려
질 때 그대는 내 몸을 찢고 밖으로 나옵니다. 내가 그대를
그토록 사랑했듯 그때야 비로소 나는 없고 오로지 그대만이
있습니다.


********


어느새 십이년이 넘어버린 채호기의 시다. 술에 취해 이 시를 읽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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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녹색노트

구광렬 엮고 옮김, 문학동네 



음유시인 


             니콜라스 기옌 




알갱이가 빽빽한 옥수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부하들이 

그란마에서 내릴 때,

격정의 바다는

그들이 난폭한 걸음으로 출발하는 걸 본다 

턱수염 없는 근엄한 얼굴,

이마엔 나비들을,

구두엔 수렁, 늪을,

죽음, 군인처럼 노란 유니폼에 미제 총을 한 

죽음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으며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손가락 수보다 조금 더 많은 수가 

희망과 피로로 다시 영광을 향해 출발했다 

깨어난 길에선 주먹을 움켜쥐고 

양귀비를 따 노래를 불렀다 

칼날은 빛났으며 총은 번쩍거렸다 

마침내 산속으로 먼저 들어간 

피델 카스트로는 병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에서 내려간다.

평원은 총들의 바다가 될 것이다."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 사망 당시 그가 메고 다녔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연필로 덧칠이 된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두 권의 비망록은 사후 '체 게바라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는데, 나머지 노트 한 권은 시가 빼곡히 적혀 있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40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노트 속의 시 69편이 밝혀졌다. 바로 체 게바라가 좋아했던 네 명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 니콜라스 기옌Nicolas Guillen, 레온 펠리페Leon Felipe의 시들이었다. - 6쪽 


번역자인 구광렬 교수는 체 게바라의 노트에 빠졌겠지만, 나는 세사르 바예호 때문에 이 책을 샀다. 


예전, 어느 프랑스 소설에서 '세자르 발레조'로 옮겨진 그를 읽었고 그 페루 시인의 시를 읽고 싶었다. 시간은 흘렀고 기억은 흐릿해지고 시집은 일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시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고 할까. 특히 영미시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그리고 잊고 있던 세사르 바예호를 떠올렸다. 혹시 싶어 찾아보았으나, 한 권은 절판되었고 구할 수 있는 건 이 책이 유일했다. 



XV

-<<트릴세>>에서 



세사르 바예호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낸 저 모퉁이,

하지만 지금 나, 걷기 위해 앉아 있네.

죽은 연인들의 침대는 누가 빼버렸을까?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넌 조금 전 다른 일로 여기 도착했지.

지금은 없구나. 네 곁에서,

네 허벅지 사이에서 밤을 읽고 

알퐁스 도데의 이야기를 읽었건만.

혼동하지 마, 

이 사랑하는 모퉁에서였잖아.


지난 여름날을 생각해,

작고 창백한 얼굴로

이 방 저 방 드나들던 너를.


비 내리는 이 밤, 

우리 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열렸다 닫히는 두 개의 문,

그 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그리고 그림자 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안목으로 선택된 네 명의 시인을 우리는 새로, 다시 만난다. 쿠바를 떠나 다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남미의 숲 속에서 노트를 꺼내 이 시들을 읽었을 체 게바라를 떠올리면, ... 어떤 시들은 가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같다고 할까.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지금, 무참하게 내려누르는 일상의 공포, 책임, 무모함 속에서 시집은 작지만 강한 위로가 된다. 특히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너무 아름다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이 겨울의 아침, 언어가 가진 슬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쓸쓸한 마음을 잠시 스스로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에게나 추천해도 좋을 시집이다. 


** 


2015/03/04 - [책들의 우주/문학] - 죽은 전원시, 세자르 바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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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독했던 때는 없네 


-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1886 ~ 1956) 



8월처럼 고독했던 때는 없네

성숙의 계절 -, 땅에는

붉은, 황금빛 신열(身熱)

그런데 그대 정원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맑은 호수, 부드러운 하늘,

깨끗한 밭들은 조용히 빛나는데

그대 군림하는 왕국의 개선(凱旋)은,

그리고 그 개선의 자국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행복을 통해 드러나는 곳,

술 냄새 속, 물건 소리 속에

시선을 나누고, 반지를 나누는 곳에서

그대는 행복의 적(敵)인 정신에 몸 두고 있네 






지독했던 8월이 가고, 여기저기 긁힌 마음의 가장자리는 찢어진 헝겊으로 잘 덮어두곤 가을 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 노트 정리를 하다가 메모 해 두었던 벤의 시를 읽으며, 문득 고독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게, 고독한 건 아닌가. 


이번 가을 벤의 시집 읽으면서 보내야 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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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곰팡이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제, <<산책시편>> 중에서  




이문재의 <<산책시편>>(민음사)가 있는데, 서가를 찾아보니 없다. 정리되지 않는 서가, 정리할 시간도 없는 서가, 이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마저 사라지고, 이 시도 읽었으나 이젠 기억나지 않아, 신문에서 읽은 다음, 출처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문재를 읽던 시간도 이젠 드물어지고, 가을은 아직 저 멀리 있기만 하다. 끝나지 않을 것같은 여름밤, 책은 읽히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데, 어찌 꿈을 꿀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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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자끄 프레베르 Jacques Prevert 

안민재 역편, 태학당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 예전엔 외국 번역 시집들이 꽤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긴 시집 읽는 이도 드문 마당에... 


번역이 다소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오늘 다시 보니 어느 것은 좋고 어느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1994년에 출판되었고 인터넷서점에선 검색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 소개한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닫혀있는 마음은 밖으로 무너지고 저녁 바람을 새삼 느끼고 저 하늘 달빛이 이 버릇없는 작은 도시의 사람들 위를 비추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될 것이다. 


대학시절 불어로 시 읽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불어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흔적으로 남았다. 시를 읽으며 술을 마시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그 시절 탓에 지금 삶이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 갈피 잡을 수 없는 중년의 봄날이 이어진다.  


 



공원 Le Jardin 




우주 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 몽수리 공원에서

어느 겨울 아침 햇빛

네가 내게 입 맞춘 

내가 네게 입 맞춘

그 영원의 한순간을

다 말하려면

모자라리라

백만 년 또 수백만 년도 






어느 새의 그림을 그릴려면 Pour faire le portratit d'un oiseau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을 

뭔가 단순한 것을

뭔가 예쁜 것을

뭔가 쓸모 있는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그림을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걸어놓을 것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 ...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여러 해가 걸려서

결심하기도 한다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관계 없는 것

새가 날아올 때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길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만들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나무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신선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를 또한 그릴 것

그리고는 새가 결심하여 노래하기를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림이 잘못된 징조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해도 좋다는 징조

그렇거든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 뽑아서

그림 한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라 





절망이 의자 위에 앉아 있다 Le de'sepoir est assis sur un banc 




광장의 의자 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부른다

외안경에 낡은 회색 옷을 입은 그는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그를 바라보면 안 된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냥 스쳐야 한다

그가 보이거든

그의 말이 들리거든

걸음을 빨리 하여 지나쳐야 한다

혹 그가 신호라도 한다면

당신은 그의 옆에 앉을 수 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보고 미소 짓고 

당신은 참혹하게 고통 받고

계속 그 사람은 웃기만 하고

당신도 같은 웃음을 웃게 되고

웃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혹하고

고통이 더 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

당신은 거기 의자 위에 

움직이지 못하고 미소 지으며 

주위에는 아이들이 놀고

사람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당신은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조용히 

이 행인들처럼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날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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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소식 



파울 첼란 




이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에둘러 가는 백리향(百里香) 양탄자 

종소리벌판을, 가로 

질러 놓인 빈 행(行).

바람이 짓부수어 놓은 곳으로는 아무 것도 실려 오지 않는다. 


다시금 흩어진 

말들과의 만남, 가령 

낙석(落石), 딱딱한 풀들, 시간. 



- 전영애 옮김, <<죽음의 푸가>>(민음사) 중에서 





이렇게 다시 시집을 읽을 줄 알았다면, 그 많던 시집들을 버리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외국 시를 읽게 될 줄 알았다면, 지금 나오지 않는 번역 시집을 사두고 버리지 말 걸, 이렇게 외국 시의 아름다움을 즐기게 될 줄 알았다면 외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 둘 것을... 


이번 주 내내 파울 첼란의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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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행성




 박정대

     

 


 콜 미, 가수는 밤 새 노래를 하고 나는 로즈제라늄 곁에 누워 있네

 여기는 12월의 입구를 떠도는 고독 행성


 방울토마토처럼 입 안 가득 깨물고 싶은 밤


 그 밤의 옆구리로 밤새도록 눈발들은 허공의 밀사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데, 눈발들이 내려와 고독고독 쌓이는 이곳은 하얀 침묵의 지붕을 모자처럼 쓰고 서 있는 고독 행성


 콜 미, 밤 새 가수는 저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지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쌓이는 노래들


 고독 행성에 호롱불이 켜지는 점등의 시간이 오면 생의 비등점에선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고 톱밥 난로의 내면을 가진 천사들은 따스하게 데워진 생의 안쪽에서 영혼의 국경선을 생각하네


 콜 미, 가수의 목소리도 가랑잎처럼 바람에 뒤척이는데 창문 밖 국경수비대들도 하얀 눈발을 뒤집어쓰고 곤하게 잠든 세계의 지붕 밑


 천사들의 숨결에 로즈제라늄만 사붓이 흔들리는 시간


 여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저 홀로 펄럭이며 아득하게 깊어가는 한 잎의 고독 행성





'고독고독'하다는 게 무얼까. 나도 참 '고독고독'한데, '고독고독'하다는 게 뭘까. 뒤늦게 박정대의 시집, '사랑과 열벙의 화학적 근원'을 찾으니, 절판되었다. 도서관에서 복사라도 할까. 


고독고독한 바람이 불고 고독고독한 가수가 '텔미'를 부르는 행성, 고독고독하게 밤 새 눈이 내리고, 아득하게 깊은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고독고독하기만 한 바람을 가진 고독고독한 이의 행성, 고독 행성. 


따스한 봄바람 부는 대도시 서울은 나이가 들수록 고독고독해지만 한다. 실은 그런 시대이고, 그런 행성인 게다. 


고독고독고독....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박정대, 웅진, 2007 




고독고독한 일상을 견디기 위한 짧은 노래 하나. 


Sarabande - Ludovico Einaudi by Angèle Dubeau & La Piet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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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의 노래 

J. Ch. F. 횔덜린(지음), 송용구(옮김), 고려대 출판부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삶이란, 제가 확신하건대 시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시는 낯설지 않으며,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구석에 숨어있습니다. 시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튀어나올 것입니다." 

- 보르헤스, <시라는 수수께기> 중에서(<<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11쪽) 



시는 아무래도 원문 그대로 읽어야 제 맛이다. 번역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동일한 단어라고 언어마다 그 어감이나 뉘앙스, 풍기는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옮겨서 밋밋한 시라도 원문으로 읽으면 풍성한 느낌을 주는 시일 수 있다. 몇 해 동안 영시를 읽으면서 배운 바라고 할까. 


횔덜린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으나, 그의 시를 제대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백 여년 전 독일 튀빙겐, 헤겔과 셀링이 있었고, 루소의 사상과 나폴레옹의 혁명 공화정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신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이 뒤섞여, 서서히 싹트던 민족주의적 이상을 노래하던 그 때,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든 이들이 프리드리히 횔덜린이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하다. 


만약 내가 독일인이라면, 그의 <독일인의 노래Gesang des Deutschen>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호소력 짙은 시가 될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그 당시에는 어땠으랴. 하지만 한글로 읽는 이 시집은 횔덜린을 앍고 그 시절의 분위기, 그리고 강렬한 이상과 염원으로, 그리스 고전주의적 미학을 성취하고자 할 때의 시학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지만, 시 특유의 감미로움이나 위안, 서정적인 표현이나 비유를 즐기기에는 너무 관념적이라고 할까. 


그래도 시 읽기란, 잠시 내 몸과 마음을 놓고 쉬어갈 수 있는 휴식일 것이다. 


이 시집만 읽는 건 재미있을 듯하지 않고 그 당시 독일의 분위기라든가, 독일 문학 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더 흥미로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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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건 ... 






나는 너를 만나지 못했으니, 내 산 새며, 내 산 꽃이며, 내가 산 사슬도 보지 못했지. 그리고 너는 나를 영영 만나지 않았지. ...  


진짜는 어렵다. 그게 사랑이든, 문학이든, 삶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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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

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

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

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

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

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편은 유명한 연극연출가 임영웅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구르몽의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으니, 술 생각이 났다. 나이가 들어도 좋은 시 읽을 때, 술 생각 나는 건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즘 사람들은 구르몽의 시를 알까. 쓸쓸하기만 한 6월 밤이다. 나라는 엉망이 되었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로 변해간다. 이제 시인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린다. ... ... 나는 어쩌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 가슴을 가진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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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달력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이제 우울한 벚꽃은 하얗게 썩어버렸다

마차는 덜컹덜컹 먼 곳을 달리고

바다도 시골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

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른 날일까

운명은 연달아 어두워져 가고

쓸쓸한 우울증은 버드나무 잎 그늘에 흐려져 있다

이제 달력도 없다 기억도 없다

나는 제비처럼 홀로서기를 해, 그리하여 신기한 풍경 끝을 날아가겠다

옛날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고양이여

나는 하나의 노래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먼 해초를 태우는 하늘에서 짓무르는 것 같은 키스를 던지겠다

아마 이 슬픈 정열 이외는 그 어떤 단어도 알지 못한다



- 하기와라 사쿠타로(지음), 서재곤(옮김), <우울한 고양이>, 지만지 

*   *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 朔太郎, 1886 ~ 1942)의 시를 읽는다. 사쿠타로도 오랜만이구나. '쓸쓸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읽곤 아, 우울증은 쓸쓸했구나 라며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젊은 시절의 사쿠타로도 꽤 쓸쓸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그의 말년은 일본주의자로 점철되어 있다. '일본 근대시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으나, 한국에 소개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1923년 시집, <우울한 고양이>



1924년의 하기와라 사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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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푸른 이야기(une histoire de bleu) 
장 미셸 몰푸아(Jean-Michel Maulpoix) 지음, 정선아 옮김, 글빛(이화여대출판부) 






늦가을, 잔잔히 비 내릴 때, 하늘의 흐느낌을 듣고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럴 때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착잡한 눈물을 슬레이트 지붕과 아연 홈통을 두드리는 맑디맑은 빗물에 보태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부드러운, 거의 평온해진 동작이다. 이 시각, 이 계절에, 우리는 언어를 뒤흔들지 않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 이번만큼은 그 적절함이 빗줄기의 속삭임과 유리창의 어둠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확신하며. 그 순간, 뜻이 확실치 않아 오래 전부터 밀쳐두었던 책 몇 장을 다시 읽어보고 싶으리라. 이번에는 그 감동을 되찾고 그 의미를 이해할 거라고 확신하며. 그래서 만일 펜을 들게 된다면, 무엇을 발견하기보다는 기억해내기 위해서이리라. 자신의 얼굴이 비친 수면 위로 마침내 몸을 숙이듯. 
- 144쪽
 

몰푸아의 시집을 읽으면서 작고 낮은 웃음을 천천히 흘러 나왔다. 번역 시집을 읽으며 이런 기분에 빠진 건 정말 오랜만이니, 역자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푸른 바다에 대한 끝없는 무한과 사랑, 그리고 서정성에 대한 시집이다.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읽는 이의 마음을 스다듬는다. 

아주 드물게, 좋은 번역 시집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단어들로만 구성하여 풍부한 시적 풍경을 만들고 그 속에 독자를 안내한다. 이 시집도 여기에 속한다. 아주 드문 번역 시집에. 


청명한 날이면, 난바다는 찬란히 부서진다. 

하얀 기와 얹은 하늘. 낮잠에 취한 바다가 잉크빛 기다란 상처 자국을 수평선의 뺨에 새긴다. 그곳에 돛단배들이 고요한 한길을 내고 새를 키우는 사람의 순백색 사랑을 심는다. 

수풀 넘쳐나는 정원들은 박하, 물망초, 봉숭아 향 날리며 난바다를 향해 더 높이 자란다. 페인트칠한 나무발코니에 뱃사람들의 가슴이 물거품처럼 튀어오르면, 라일락 꽃잎 술렁이는 소리가 바다로 곤두박질친다.

바다의 대기실에서 보낸 어느 여름날 일요일. 드리워진 커튼이 조금 벌어져 있다. 불빛이 깜박인다. 바다의 투명한 물결이 왁스 칠한 가구와 종이 위로 흐르며 잔잔히 흔들린다. 출범을 앞둔 빈약한 함대 한 척. 그리고 물살 위의 배처럼 살랑대는 한 편의 시. 알 수 없는 욕망 하나 눈을 뜬다, 아니 잠든다. 난바다를 향해 문들이 살짝 열리다 이내 다시 닫힌다. 몽상에 젖은 자, 손가락을 푸르름에 적시면 그의 몸은 이윽고 모래가 된다. 
- 16쪽 


시의 제목처럼 첫 문장 하나가 떨어져 나오기도 하고, 아예 없기도 하다.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사적인 테마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짧은 시들이 모여 어떤 지향을 가지긴 하나, 이는 비평가에게 맡길 일이니, 우리는 그저 읽으며 조용해질 뿐

'무한은 인간의 문제'라고 여기는 몰푸아는 이 시집을 통해 자신만의 시론(詩論)을 펼쳤는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론인가! 


http://www.maulpoix.net/ (장 미셸 몰푸아의 홈페이지. 프랑스어로만 구성되어 있음)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폴 발레리의 문장. 






어떤 푸른 이야기 - 10점
장 미셸 몰푸아 지음, 정선아 옮김/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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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이우환 Lee Ufan, 대화(Dialogue), 2011 

 



그의 작품들이 좋아서일까, 이 시집은 그의 회화, 조각, 설치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설명서처럼 읽혀진다. 내가 알기로, 예술가들 중에서 이우환만큼 명징(明澄)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옮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현대 철학과 현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실천력으로 현대 일본 미술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국어 교과서엔 이미 그의 글이 실려있고, 일본어라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검증 받은 글쟁이이다.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08)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이우환은 일본과 유럽에 먼저 알려졌고 그런 다음 한국에서 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가끔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양 떠드는 사람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이러한 태도 밑에 숨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태만, 불성실을 감추려는 불순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잘못된 관행, 정치적 낙후성 등마저도 옹호하려고 한다. 


해외에서 유명해져 국내로 들어오는 경우, 한국 내의 텃세는 만만치 않다. 이는 문화예술계는 더 심해서, 그들의 부족함을 상대의 몰이해, 또는 지역의 차이로 환원시킨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우환에 대한 관심은 국내 미술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한다(이우환 스스로도 그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 전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계 한국 작가였을 뿐이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이우환이 구겐하임과 베르사이유 궁에서 전시한 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의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식자들에 의해 거론되는 경우을 보지 못했다. 가끔 월간 현대문학에 실렸던 책 소개를 제외하곤. 이와 비슷하게, 무수한 번역된 소설들이 나오지만, 정작 한국의 비평가들이 번역 소설들을 평론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했다. 문체나 문장을 떠나 어떤 세계관과 태도, 인물과 사건의 구성, 언어 등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짧지만, 울림이 크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언어로 안내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도 옮긴 바 있지만, 가령 이런 시 말이다. 





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 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컫었다. 이러한 시선에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13)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다행히 현대문학에서는 꾸준히 이우환의 책들을 찍어 내고 있다. 이우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좋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십 수년 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 전을 잊지 못하듯, 그의 진수는 작품들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에서의 이번 전시는 아, 내 처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정말 느끼고 싶은 전시였는데. 기하학적으로 올려진 정원을 걸어가다가 무심코 마주하는 '조응'이라 ... 


 



멈춰서서

이우환저 | 성혜경역 | 현대문학 | 2004.11.19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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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 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 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시선을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 이우환, 시집 <멈춰서서> 중에서 




자코메티, Three Men Walking

출처: http://elogedelart.canalblog.com/archives/2009/05/31/139128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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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보르헤스(지음), 우석균(옮김), 민음사 




그의 소설들을 떠올린다면, 보르헤스의 시도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수수께끼처럼 펼쳐지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소설가 보르헤스는 잊고 시인 보르헤스만 기억에 담아두게 될 터이다. 


그렇게 몇 주 보르헤스의 시집을 읽었고 몇몇 시 구절들을 기억하게 된다. 


시집 읽는 사람이 드문 어느 여름날, 세상은 저주스럽고 슬픔은 가시질 않는다. 행동이 필요한 지금, 어쩔 수 없이 반성부터 하게 되는 현실을, 미래보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게 되는 상황 앞에서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

대평원 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

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

소박한 집들이 있는,

자애로운 나무들마저 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

이런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숱한 삶이 집안에만 은거하길 거부하며

거리의 보호 아래 형제애를 나누고 

우리네 희망이 부풀려진 영웅적 의지로

거리를 떠다니기에

깃발처럼 거리가 

사방으로 펼쳐지네

우뚝 솟은 내 시에서

그 깃발이 하늘을 펄럭이기를.

- <거리> 전문 







본질은 언제나 상실되는 것.

영감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지.

달과의 내 오랜 실랑이에 대한

다음 요약은 피할 수 없을.


나는 달은 어디서 처음 봤는지 모르네.

앞서의 그리스인이 말한 하늘에서였는지,

우물과 무화과나무의

정원으로 기우는 오후에서였는지


유전하는 이 삶은

어찌 되었든 무척 아름다울 수도 있지.

그런 순간에 우리 모두 너를 바라보던

오후가 있었네. 아, 모든 이의 달이여. 

- <달> 중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저 | 우석균역 | 민음사 | 2014.03.2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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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고양이(靑猫)




이 아름다운 도시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건축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상냥한 여성을 찾기 위해

모든 고귀한 생활을 찾기 위해

이 도시에 와서 번화한 거리를 지나가는 것은 좋은 것이다.

거리를 따라 서 있는 벚나무 가로수

거기에도 무수한 참새들이 지저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 거대한 도시의 밤에 잠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마리의 우울한 고양이 그림자다

슬픈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고양이 그림자다

우리가 찾기를 그치지 않는 행복의 우울한 그림자다.

어떤 그림자를 찾기에

진눈깨비 내리는 날에도 우리는 도쿄(東京)를 그립다고 생각해

그곳 뒷골목 벽에 차갑게 기대어 있는

이 사람과 같은 거지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 하기와라 사쿠타로(1886 ~ 1942) (서재곤 역) 






점심 식사 대신 우울한 고양이를 만난다. 아, 어느 새 나는 술 취하고 싶은 한 마리 고양이 꿈을 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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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초. 영원히 이어지며 슬픔이 없을까. 

계속 십오 초만 있고 십오 초가 지나 다시 십오 초가 오고 십오 초로 채워지며 

어떤 계절이 가고 오고 생과 사가 돌며 슬픔은 없을까. 

십오 초로 슬픔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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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지음), 문학과 지성사 







시인 김경주의 소문을 듣고 이 시집을 산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이제서야 끝 페이지까지 읽었다. 실은 무수히 이 시집을 읽었고 그 때마다 첫 몇 페이지를 읽곤 숨이 턱턱 막혀와 더 이상 읽지 못했다. 그의 시적 상상력와 언어 구사는 탁월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이유로 다 읽지 않았지만, 그 동안 많은 이들에게 이 시집을 추천했다. 젊은 시인들 중에서(최근에 시집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고, 내가 읽은 바 그의 첫 시집은 독창적인 시적 세계와 울림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래서 그런 걸까. 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 그는 여러 겹의 은유들로 자신의 세계를 꾸미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음악으로, 한 쪽에서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한 쪽에서는 성적이고 육체적인 내밀함으로. 이 세 방향은 서로 어우러져 서로를 떼어낼 수 없다. 딱딱하기도 했고 물렁하기도 했다. 슬프고 우울하기도 했지만, 그 슬픔과 우울은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눈물을 흘리고 울어도 풀리지 않는 마음의 오래된 상처같았다. 


그렇게 시는 얇은 꽃잎같은 성벽에 둘러싸인 채,  때이르게 찾아온 초여름 더위 속에서 만발한 꽃들의 향기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금세 내 오감은 시에 취해 흔들거렸지만, 때로(혹은 자주) 시를 읽는 내 마음과는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고 계절의 향기만 가득한 것일지도. 


그래도 이 시집은 참 좋다. 세상과 참 멀리 있는 듯한 풍경을 언어로 수놓고 있는 탓에, 여행가는 듯한 기분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서가에 꽂아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시집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메모 해둔 몇몇 구절을 옮긴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 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중에서



무명(無名)의 별에서 별 한 채가 날아옵니다 그 빛의 세월이 내 눈까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음악의 생은 또한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요 외로운 사람은 눈을 감고 걷고, 눈이 외로운 사람은 강심(江心)에 그 눈의 음(音)을 숨겨야 하는 밤입니다

- <아우라지> 중에서



속으로 뜨겁게 뒤집었던 시간을 열어보이며

몸의 열을 다 비우고 나서야

말라가는 생이 있다

봄날은 방에서 혼자 끓고 있는

밥물의 희미한 쪽이다

- <눈 내리는 내재율> 중에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저 | 문학과지성사 | 2012.1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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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여관

이병률저 | 문학과지성사 | 2013.09.22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눈사람 여관

이병률 시집, 문학과 지성 시인선 434 




최근에는 일 년에 시집 한 권 읽는 듯 싶다. 그리고 시집 리뷰는 건성, 건성으로 쓰는 듯하고. 일상의 대부분이 사무실에서 산더미와 같은 업무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지금, 시집은 ... 참 멀리 있기만 하다. 이병률. 그의 글은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여행기. 하지만 이것도 건성, 건성 읽었으니, 이번에 읽은 그의 시집, <눈사람 여관>이 처음 읽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집을 다 읽고 노트에 짧게 감상을 적었는데, 그가 읽는다면, 불편해 하거나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했다. 시는 소설과 달라, 드물지 않게 시를 읽으며 시 속의 시인을 만난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지레짐작으로 어떤 이겠구나 여긴다. 이 시집에 대한 내 감상은 그렇게 시작해 끝난다. 


* * 


그는 손을 내밀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견디고 걸어간다. 그 걸음걸이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바람따라 걸어갈 뿐이다. 가끔 가슴 설레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수줍은 고백을 할 터이지만, 세상 풍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이병률은 그것을 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다. 혼자 있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비겁한 일이기도 하다. 이기적이지만, 종종 아름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그건 스스로를 늘 들여다보기 때문이고, 들여다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따라 걸어가며 글을 쓸 뿐이다. 다행인 것은 그는 스스로를 내려놓거나 자책하거나 도망가진 않는다. 그저 스스로를 훔쳐볼 뿐. 





낙화



                                                    이병률



그대가 일하는 곳 멀리 자전거를 세우고

그대를 훔쳐보는 일처럼


반쪽의 반쪽밖에 안 되는 나는

비겁이라는 꽃 이파리 머리에 꽂고

시시덕 시시덕 오늘도 얼마나 비겁했던가요


당신이 자전거 쪽으로 다가와

우산을 버리고 돌아설 때에도

나는 비겁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 그늘이 생깁니다


천 년에 한 번 사랑을 해서 그런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그토록 많은 꽃술이 매달릴 수가

천 년에 한 번 죽게 될 테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아니면 그토록 한 사람의 독으로 서서히 죽어갈 수야 


혼자인 것은 비겁하지 않은데

당신을 훔쳐보는 일은

당신 하는 일 앞에서 비겁한 일이어서


십 년을 백 년처럼 

당신을 보러 이곳에 오고

당신은 어느 바다로 흘러가지도 않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주차할 수 없는 구역에

단독 주차하는 나를 위해

마냥 봄처럼 십 년을 당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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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식당 



                                                                  이영주 




헝가리 식당에 앉아 있다. 내 목을 만져보면서. 침묵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 ... 이런 기후는 맛없이 천천히 간다.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는. 아름다운 철창 밑에 있다. 원래의 언어로 돌아가는 것인가. 조용히 있다 보면 감각은 끔찍해진다.


수염까지 붉게 물든 남자는 접시에 혀를 대고 있다. 오도카니 앉아서. 철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들어온다. 


동쪽에 있는 식당. 맛없는 내가 앉아서 오래된 폐허를 헤집으며 속을 파고 있을 때.


무섭고 겁이 날 때. 수염 달린 남자는 창문을 연다. 향수병에 걸린 감각은 바람 따라 흐른다. 웅웅웅 울림소리를 낸다. 동쪽은 은신처가 아니지. 수염 사이로 붉은 침이 뚝뚝 떨어진다. 우리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많이 다쳤을 때는 밥을 먹어야지, 그래야 기운을 내지, 이 식당에 오면 죽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럴 때면 세상이 맛없게 천천히 간다고 생각했다. 


침묵을 먹으면 알 수 있다. 어떤 슬픈 이야기도 죽지 않고 그릇 안에 담겨 있다. 




<<문학과 사회>> 2013년 가을호.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잠시 계간지에 시를 읽는다. 왜 '헝가리 식당'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 밖은 이미 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고 사람들은 말 없이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말 없이 작은 도서관 건물을 나갔다. 


말 없이 있어도 용서되는 도서관이 나는 좋다. 말 없어도 이야기로 가득 차는 공간. 말 없어도 말들로 넘쳐나는 공간. 말 없지만 책장 넘기는 소리, 책을 향해 걸어가는 소리, ... 그리고 그녀가 하얀 손으로 긴 머리칼을 귀 위로 넘기며 가는 목으로 가 닿는 소리,들이 내 살갗에 닿을 때의 느낌이 좋다. 


몇 년만에 도서관에 그렇게 길게 앉아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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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강변 



                                           이병률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

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보면서

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 <<눈사람 여관>> 중에서 

*** 



선릉역 지하 개찰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 즈음, 하얀 보푸라기가 날리듯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잠깐. 지하 전철역에서 인근한 빌딩 3층으로 가는 동안. 그리고 세 시간이 걸린 지리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회의가 끝나자, 어둠이 왔고 눈은 사라졌다. 앞으로 눈은 계속 내릴테지만, 나에겐 시간은 없고, 없는 시간은 새로 만들어지는 법 없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한다. 


지난 주말, 스산한 마음과 안타까움에 책을 읽었다. 오래만에 든 시집이었다. 그리고 '시집을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는 가장 좋은 것은 누군가를 핑계거리 삼는 것이다. 그리고 핑계거리가 사라지면, 자기 자신이 핑계거리가 되거나 새로운 핑계를 찾기 위해서 방랑할 것이다. 스스로 핑계거리를 내세우지 않으려고, 그리고 스스로가 핑계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어느 늦가을, 불편한 눈송이들은 쌓이지 않고 거리 위로 물기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도 스며들고 얼어붙는다. 


마음 막히는 밤이 왔고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추위가 사무실을 에워싼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손가락 끄트머리에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자라나다가 금방 마른다.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어느 11월, ... 길도 막히고 마음도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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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들기 전 서가에서 낡은 시집 한 권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어떤 영혼들은 ...... 

1920년 2월 8일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

시간의 갈피에 

끼워놓은 아침들을,

그리고 꿈과

노스탤지어의 옛 도란거림

이 있는

정결한 구석들을.


      또 다른 영혼들은

열정의 환영(幻影)들

로 괴로워한다. 벌레 먹은

과일들. 그림자의

흐름과도 같이

멀리서

오는 

타버린 목소리의

메아리. 슬픔이 없는 

기억들.

키스의 부스러기들.


       내 영혼은

오래 익어왔다; 그건 시든다,

불가사의로 어두운 채.

환각에 침식당한

어린 돌들은

내 생각의 

물 위에 떨어진다.

모든 돌은 말한다: 

"신(神)은 멀리 계시다!" 


- 로르카, <강의 백일몽>, 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3년. 





이 밤, 로르카 시집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위안이다. 





강의백일몽 [개정]

로르카저 | 정현종역 | 민음사 | 2003.03.2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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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년 만에 시집을 샀다. 실은 1년이 더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한참동안 글을 썼고 아주 가끔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십 수년 전 일이니, 시집은 나로부터 참 멀리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사무실에서 이병률의 시집을 펼친다. ... 참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나도 건달이고 싶다, 철없이 로맨틱하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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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게,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 비가 내리고 우리들의 일상은, 놀랍도록 조용히 흘러간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나는 간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았다. 사무실로 걸어가는 동안, 지나치게 되는 어느 중학교 뒷편은 고요했고 무채색 아파트 벽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어제 어쩌다가 보니, 시를 읽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시인이었지만, 오래, 어떤 손이 가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우리 삶도 그치테지만, 어떤 시들의 여운은 문명의 끝까지 가면 좋으리라. 





손의 의미 

 

  

박서영 

 


 

기타를 잘 치는 긴 손가락을 갖기 위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갈퀴를 찢어버린 사람,

그러고 보면 호미를 쥐는 손은 호미에 맞게

펜을 쥐는 손은 펜에 맞게 점점 변해가는 것 같다

그건 자신의 울음에 알맞은 손을 가지려는 것

자신이 만져야 할 색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음악의 육체에서 고양이가 울고, 음악은 점점 자란다

시간과 공기의 색을 찢으며 

사자의 음악과 치타의 음악과 표범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악기들은 때때로

코끼리, 하마, 기린의 울음을 연주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 초원에는 겁에 질린 소녀의 색이 있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문을 흥얼거린다

기타를 잘 치는 손가락을 갖기 위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갈퀴를 찢어버린 사람이 있다

그가 오늘은 어린 사자새끼를 연주하고 있다

울음이 길어지면 손가락도 점점 자랄 것이다

 

 

계간 [시에] 201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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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 목장은 … 




                           프란시스 잠 





개울가 목장은 풀이 무성하다.

퍼부은 비에 밀이 젖어 포기 포기 쓰러졌고

연회색 빛인 버드나무 말고는

둑마다 잎새들이 진초록이다.

베어 놓은 꼴은 벌통처럼 쌓여 있다.

언덕들은 너무 완곡하여서 애무를 받고 있는 듯하다.

시인인 친구여, 우리에게서 마음 속 기쁨을 빼앗아 가는

괴로움만 없다면 모든 게 달콤하리.

하지만 괴로움을 벗어나려 함도 쓸데없는 일,

말벌이 풀밭을 떠나는 적이 좀처럼 없듯이.

그러니 ‘삶’을 가는 대로 흐르게 내버려두고,

검은 소떼에게 마실 물이 있는 데서 풀 뜯게 하자.

서서히 괴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을,

우리와 같은 모든 사람을 측은히 여기자.

그들 모두가 재능이 있는 건 아닌 것 말고, 우리와 같은 그들.

그것이 유일한 차이이면서 중요한 사실이 되기도 하지만

오래 퍼붓는 급류가의 맺혀 있는 싱그러운 딸기처럼,

매혹적인 사랑만이 훌륭한 위안. 



(* 번역: 김기봉, 혜원출판사, 1994년) 




번역이 좋지 않지만, 프란시스 잠 특유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특유의 세계라고 옮기긴 했지만, 서정적 프랑스라고 하기엔 그가 살았던 시기는 너무 격동의 세계였다. 서정적인 시가 씌여지기 어려운 시대에 잠은 서정적이었으니, ... 그는 현실에서 잠시 뒤로 물러나 어떤 서정성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요일 오후도 모두 지나가고, 문득, 방에 앉아 정처없이 메모를 하다, 책을 읽다, 잡지를 보다, 쓸쓸하다는 생각에 스치고 프란시스 잠의 시를 읽었다. 


오래된 프랑스 시인의 시를 읽는 일요일 오후.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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