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56

무인도를 위하여

서가에서 오래된 시집 한 권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소리 내는 사이사이로 생의 거친 바람과 서늘한 도시 풍경이 밀려온다. 일주일 내내 목 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젠 두통까지 생기는 느낌이다. 몸은 너무 피곤하고 음악 소리는 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햇살은 부드럽지만, 늘 그렇듯,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늘 따로따로 움직일 뿐,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 대학시절, 신대철의 시를 끼고 살았다. 딱 한 권만 나와있던 그의 시집. 몇 년 전에 새로 시집이 나왔으나, 읽히진 않았다. 첫 시집 내고 두 ..

나 취했노라

고대의 길과 근대의 길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양재역 사거리에서 강남역 사거리 사이의 길들은 곧지만, 늘 막혀 있다. 느리고 뚝뚝 끊어지는 경적 소리와 숨 넘어 가는 엔진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의 길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익히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차지만, 근대의 길엔 늘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곧지만 호흡하기 힘든 분위기로 내 삶을 옥죄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6월 3일 금요일 밤 10시. 무릎엔 아무런 상처도 없지만, 실은 영혼의 무릎에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도망가지도 못하도록 나를 몰아 붙였지만, 실은 늘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이 때까지 나온 시집의 첫 장 중에서 가장 멋지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슬픈 것은 장정일의 시집이다. 늘 도망 중이라는. 발 한 쪽을 앞으..

바다와 나비, 김기림

바다와 나비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시집이 있었다. 가끔 꺼내 읽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주고는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빌려준 그 이는 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 한 밤 중에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작은 소리로 읽어본다.

예감, 흔적

예감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흔적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김화영 엮음, 시와시학사. 시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시절엔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 한 권 사면 배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얼마 전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시집을 복사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대학시절 날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가 복사한 시집이, 허수경의 시집들 중 가장 최악인, 최근의 시집이라는 점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오래 전에 시집을 복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이었다. 지학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에도 절판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이라 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루바이야트, 오마르 카이얌

루바이야트 -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지음/민음사 The Rubaiyat of Omar Khayyam E. Pitzgerald. 이상옥 옮김, 민음사 세계시인선 12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 63편 19세기에 번역된 11세기, 또는 12세기 아랍의 시집. 그러고 보면 거의 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옛날, 같은 하늘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법한 곳의 시인의 시집이 후에 유럽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감동이나 열광을 생각을 해보면, 이 세계가 아무리 많이 변했다고들 하나, 이 인생들의 본질적인 영역의 변화는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면발작증, 그리고 시인 박서원

기면 발작증. My Own Private Idaho 첫 몇 쇼트에 나오는 단어. 그리고 시인 박서원이 앓고 있는 병.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꽤나 멋있게 보였던 병(* 수전 손탁이 말한 병의 은유?). 하버드 대학 법대에 다니는 애인과 헤어지 고, 119 구급 대원과 결혼한 여자. 그리고 그 결혼의 실패. 문학 잡지에 실린 그녀의 시를 읽고, 손톱 만한 그녀의 사 진을 보고 난 다음 풍부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라는 감상과 함께 실제로 만나면 꽤나 매력적이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 나, 열음사에서 나온 그녀의 첫번째 시집은 그다지 좋지 못했 고, 그것이 끝이었다. 가끔 잡지에서 그녀의 시를 읽었고, 최 근에 나온,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주목받았던 시집들을 보긴 했 지만 사서 읽진 않았다. 오늘 신문 기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