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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도서관

종종 나이를 잊는다. 내가 얼마나 나이가 들었는지 잊곤 한다. 아직 아이가 어리고, 내 마음도 어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아직 어리고 작기만 하다. 그래서 더 자라야 하고 더 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것들이 아직 많고 계속 배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하지만 며칠 전 밤 11시까지 야근을 하고 들어와 혼자 소주 한 잔 했더니, 그 피로가 며칠 이어졌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늘 마음 뿐이다. 다들 그렇듯이. 밀린 일들이 많아 일요일 출근을 해야 하는데, 하늘을 보자 그 마음이 사라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가을 날씨는 어색하지만, 내 불편한 일상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다. 아이와 함께 아침 미사를 올리고 난 다음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최근 읽고 있는 올리비아 랭의 는 참 좋다. 올..

스케일이 전복된 세계, 제이머 헌터

스케일이 전복된 세계 Not To Scale 제이머 헌트Jamer Hunt(지음), 홍경탁(옮김), 어크로스 환경주의자들의 진언.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243쪽) 스케일(scale)을 ‘사물을 측정하거나 비교하는 체계로 사용되는 숫자의 범위’라고 책에선 설명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규모'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저울, 또는 저울의 눈금이나 비례나 지도의 축척'을 뜻하기도 하며, 음악에서는 ‘음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측정 기준이나 등급'을 뜻한다. 이 책에서 '숫자의 범위'라고 설명한 이유는 측정 기준 안에서는 우리는 알 수 있고 이 범위나 기준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측정하지 못해, 알 수 없게 되는 상황을 ..

책 몇 권 사서 오는 길

1. 책 읽는 사람의 수는 줄어드는데, 나오는 책들은 더 많아지는 듯함은 뭘까? (아니면 문학책만 읽다가 이런 저런 책들까지 손대기 시작한 탓일까) 2.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가는 와중에도 나는 또 책을 사고 있다. (사놓으면 언젠가는 읽게 된다고 할까) 3. 새 책을 사다가 이젠 새 책, 헌 책 가리지 않고 구입한다.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 가리지 않는다) 4. 좋은 책이라고 해서 다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책인데, 온라인서점에 리뷰 하나 없는 것도 많고 이 책을 왜 읽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만점 리뷰가 많은 책도 있다. (쓰레기 책만 전문적으로 알려주는 유튜브 방송이나 숨겨진 좋은 책을 알려주는 유튜브 방송 같은 걸 해볼까 고민 중이다. 아니면 서양명화감상시간도 괜찮을 것같..

최근에 구한 책 세 권

수전 손택의 책을 감동적으로 읽지 못했다. 이론가라기 보다는 비평가이기 때문일까. 재미있게 읽었으나, 꾸준한 독서를 나에게 요청하지 않았다. 수전 손택과 비교되는 이가 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비평가로 시작해 이론가(사상가)로 옮겨갔다. 고진의 은 대단한 저작이었다. 고진의 책은 몇 권을 더 읽었으나, 비슷한 느낌이라 더 이상 읽지 않았다. 후기 모던의 입장에서 정리정돈하는 듯한 이야기만 반복적으로 한다고 할까. 리베카 긱스의 은 순전히 고래 때문이다. 그냥 죽어 다음 생엔 고래, 그것도 심해의 고독과 싸우는 향유고래로 태어나는 게 작은 소망이다 보니... 레이몽 루셀은, 음, 그냥, 읽어야 하는 작가니까, 구입했다. 그러니까, 로쿠스 솔루스Locus Solus랄까. 바닷가 인근의 L..

책들의 우주 2021.09.28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지음), 마티 1. 어떤 경향성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기 보다는 그냥 손 가는 대로 들고 읽는 듯하다. 그래서 책 자체의 완성도나 집중도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씌어진 글도, 그렇게 만든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은 온전히 작가 장정일의 태도나 문장 자체가 될 것이다. 가끔 우연히 읽게 되는 장정일의 짧은 글들은 상당히 좋다. 그렇다고 해서 꾸준히 찾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장정일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 나로선, 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여준 변화가 한 편으로 보기 좋다. 그러나 가끔 소년 장정일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에겐 반항적이며 이단적이고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거부하는 자아를 가진 예술가의,..

절판과 우연성

눈 여겨 보던 책이 절판될 예정이라고 알려준다. 인터넷서점 안, 그 책이 있던 페이지였는지, 아니면 장바구니였는지, 혹은 이메일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사려고 마음 먹은 그 책을 뒤로 미루는 사이, 그 책이 이제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안내를, 절판된 후 이 책을 구할 수 없음을 나는 직감한다. 결국 나는 이 책을 샀다. 인터넷으로 책이나 음반을 구입할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열광적으로 기뻐했다. 책이나 음반을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원하는 책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특히 음반은! 하지만 이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 두 번 이상 신문 기사나 인터넷 서평으로 놀라운 찬사가 이어진, 정말 형편없는 쓰레기 책을 구입한 후, 믿을 수 있는 저자가 아니라면, 오프라인 서점에 나가 ..

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나의 삶이라는 책 The Book of My Life 알렉산다르 헤몬Aleksandar Hemon(지음), 이동교(옮김), 은행나무 나는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 151쪽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서 아는 건 거의 없다. 학살과 인종 청소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끔찍한 전쟁이었다는 정도. 우리와는 너무 멀리 있는 곳이다. 그래서 사라예보라고 하면 탁구선수 이에리사와 제 1차 세계대전을 떠올릴 뿐이다.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하나, 그 끔찍함으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실은 한국전쟁이 더 끔찍한데, 이것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알렉산드르 헤몬Aleksandar Hemon은 내가 처음 읽는 보스니아 작가다. 티토가 극적으로 통합한 사회주의국가 유고슬..

어제 온 책 두 권, 에릭 사티와 데릭 저먼 사이의 예정된 독서

바다 건너 책 두 권이 왔다. 한 권은 에릭 사티Erik Satie의 A Mammal's Notebook. 다른 한 권은 데릭 저먼Derek Jarman의 Modern Nature. 다재다능했던 에릭 사티는, 어쩌면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매력적인 사람일 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끌리는 탓에 그의 글을 읽고 싶었다. 이 책에는 에릭 사티의 악보나 짧은 글 뿐만 아니라 메모, 그림, 카드 등 이것저것 다 들어있다. 이 책은 십수년 전부터 구입하려고 아마존 위시리스트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더 늦게 결정하면 절판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샀다. 아, 그리고 데릭 저먼!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미술 관련 기사였다. 해외의 어느 미술관계자가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미술 관련 책으로..

용기가 필요한, 어떤 시절

고민 많고 걱정 많은 여름을 보낸다. 4월 휴대폰 통화시간이 150분 남짓이었는데, 5월 300분을 넘어서더니, 6월과 7월은 모두 500분을 넘겼다. 자칫하면 600분을 넘길 태세였다. 스트레스 때문에 악몽을 꾸고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대체로 나는 할 수 있다고 믿고 부딪히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대체로 해낸다. 처음 하는 일일 경우 시행착오도 있지만, 아직도 배우면서 해내곤 한다.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하지 못할 것같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은 바뀌고 새로운 경쟁력을 개인과 조직에게 요구한다. 특히 디지털 세계는! * * 피파 맘그렌의 을 다 읽었다. 평일 새벽까지 책을 읽기는 오랜만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하다고 할까. 조만간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지만..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에드몽 자베스

예상 밖의 전복의 서 (Le petit livre de la subversion hors de soupcon)에드몽 자베스Edmond Jabes(지음), 최성웅(옮김), 읻다 글은 무엇이고 책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의 시작은 어디이며 그 끝은 언제일까. 이 형이상학적 질문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끌어당기지만, 우리는 금세 그 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어쩌면 포기일지도, 혹은 도망이거나, 실질적인 결론 없는 무의미에 대한 경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드몽 자베스에게서 이 질문들은 글쓰기의 원천이며 삶의 의지이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향기다.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죽게 되는 미완 속에 우리를 내버려둔다. 우리에게 남은 공백은, 무언가를 쏟아야 할 곳이 아닌 견뎌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