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가브리엘 마르케스

지하련 2008. 1. 25. 19:45
가르시아 마르케스 - 8점
송병선 엮어 옮김/문학과지성사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가르시아 마르케스>, 문학과 지성사, p.187)

(이 글은 수 년 전에 작성한 글이다. 외출하기 전에 다시 다듬어 올린다.)

최근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어느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와 시장 사이의 모순이 현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시장은 인간을 사적인 고객으로 취급하지만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문제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공적 시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시장의 전면적 지배는 곧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정치적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해낸 이론으로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슬람문화권과 기독교문화권의 갈등은 이미 여러 전쟁을 통해 확인되었고,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냉전체제가 끝났기 때문에, 그리고 후쿠야마식으로 자본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역사의 암울한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핵의 위협은 심해졌고(강대국에서가 아니라 제 3세계에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고 있다. 최근 뉴라운드협상에서 보여준 세계시민단체의 시위는 2000년대의 자본주의가 어떤 상황에 와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 한가하게 앉아 소설 나부랭이, 혹은 시 나부랭이를 읽는 것은 정말이지 한심한 짓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심한 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행한 수상연설문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보인다.
(물리적 실체를 가지지 못하는 독서 행위는 장기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매우 충분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한국의 현대 작가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나는 요즘 가지고 되었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 혹은 유럽인들에게 낯설고 신기롭고 상상력으로 가득차,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소설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어떤 배경을 뒤에 두고 있는가를 말하며 그리고 우리들의 편견에서 눈을 뜨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이 어디에서 나오며 그것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말한다(아래는 좀 길게 인용하였다. 아홉 페이지의 짧은 글이므로 한 번쯤 읽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에서 세 번에 걸쳐 독재를 자행했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나 장군은 ‘파스텔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투에서 잃어버렸던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화려하고 멋진 장례를 치르며 매장했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장군은 16년간 절대 군주로서 에콰도르를 통치했으며 그의 시체는 대통령 의자에 앉혀진 채 정복과 훈장을 달고서 치러졌습니다. 30,000명의 농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엘살바도르의 견신론자이자 폭군인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장군은 자기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특수한 추를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관공서의 전등에 빨간 종이를 붙여서 성홍열 전염병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테구시갈파의 중앙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프란시스코 모라산 장군의 기념비는 사실은 파리의 중고 조각품 창고에서 구입한 네이 제독의 동상입니다.

(중략)

다시 말하면,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정신나간 남자들과 역사적인 여자들이 즐비한 거대한 왕국이며, 그들의 한없는 완고함은 전설과 혼동된다고 다룬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있은 적이 없습니다. 불길에 휩싸인 대통령궁에 피신했던 프로메테우스 같은 어느 대통령은 혼자서 군대 전체와 싸우며 숨을 거두었고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아직까지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두 번의 비행기 사고는 인자하기 그지없었던 또 다른 지도자의 목숨과 민중의 명예를 복구했던 민주적인 군인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5번의 전쟁과 17번의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빈 악마 같은 독재자도 출현했으며,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라틴아메리카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첫 독재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2천만명의 라틴아메리카 어린이들은 채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고, 이 숫자는 1970년 이후 유럽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수를 상회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정치 탄압으로 실종된 사람들은 거의 12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스웨덴의 웁살라 시의 모든 주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실종된 것과 같습니다. 임신한 채 체포된 수많은 여인들이 아르헨티나의 감옥에서 아기를 낳았고 아직도 자기 아이들이 비밀리에 입양되었는지 아니면 군사 정권에 의해 고아원에 수용되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되지 않게 하려는 소망으로 거의 20만 명에 가까운 남녀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10만 명 이상이 중미의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의 조그만 세 나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이런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본다면, 임시로 추정해본 숫자는 4년 간 백만여 명이 폭력에 의해 희생된 것입니다.

마음씨가 극진하고 돈독한 전통의 나라였던 칠레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백만 명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인구는 2백 50만의 작은 나라이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문명국으로 여겨졌던 우루과이는 인구 5명당 한 명 꼴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내전은 1979년 이후 거의 20분에 한 명 꼴로 피난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강제로 이주했거나 혹은 망명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나라는 노르웨이보다도 더 많은 인구를 가질 것입니다.

(중략)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아마도 존경받는 유럽이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우리를 본다면 지각 있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런던이 첫 성벽을 건설하는 데 3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주교를 갖는 데 또 다른 300년이 걸렸고,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이 인류의 역사 속에 이식할 때까지 20세기 동안이나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심지어 부드러운 치즈와 무감각한 시계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오늘날의 평화의 민족인 스위스인들도 16세기까지만 해도 돈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지 않는 용병들로 유럽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심지어는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제국 군대의 돈을 받고 고용된 12,000명의 독일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고 유린했으며, 8천명의 로마 주민들을 칼로 쓰러뜨렸습니다.

(중략)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 단순히 유토피아처럼 보였던 이런 가공할 만한 현실 앞에서, 모든 것을 믿는 우화의 창조자들인 우리는 아직도 그것과 반대인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그곳은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