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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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련 1998. 9. 5. 23:49


         
          아는 이가 나에게 좋아하는 작가가 없냐고  물었다. 그대
       는 좋아하는 작가가 없다고 말했다. 난 좋아하는  작가가 있
       지만, 그들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 있다고 보
       기 힘들다 말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고민에 잠겼다.  과연
       나에게 그런 작가는 없었나 하고 말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는 침울하고 지친 표정으로 앙상한 손을  내밀었다. 그
       는 나에게 한 마디 인사도 하지 않고, 창백한  눈빛으로 "이
       번 겨울엔 쓸쓸하게 술을 마시지 말게나"하고  말했다. 이미
       죽은 자의 손을 마주 잡고 난 한참을 서있었다.  "그래야 겠
       지. 하지만 여자들은 날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러니 어쩌겠
       나." 보르헤르트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정 술을  마시고 싶
       으면 날 부르게. 아마 별빛들 사이에서 내가  술잔을 내밀고
       있을 것이네." 그리곤 그는 조용히 누렇게 변해가는 책 속으
       로 걸어들어갔다.
         
          그는 한동안 내가 가지 않던 그 곳에 앉아  있었다. 병들
       고 지치고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은 사내. 유일하게 내가 좋
       아하는 작가. 그를 잊고 있었다니!
         
          볼프강 보르헤르트.  1921년  5월 12일   함부르크 출생.
       1947년 11월 20일 바젤 사망.
         
          (* 민음사에서 나온 『이별없는 세대』가 낫다.  최근 보
       르헤르트전집이 나왔으나, 민음사의 번역문장이 낫다. )
         
                        *                   *
         
          돈을 벌 것이냐,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꿈꿀 것인
       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과 돈
       이 무관할 때 상황은 달라진다. 난 단지 하고 싶은  일을 택
       했을 뿐이다. 돈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난 돈을 중심에 놓
       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
       다. 그걸 벗어나는 방법은 외딴섬이나 두메산골에 올라가 혼
       자 농사지으며 사는 것뿐이리라. 글이 늘어질려 한다.
         
          한 달에 이십만원씩만 준다면, 죽을 때까지 책 읽으며 소
       설을 쓰겠다는 소설가 형이 생각난다. 누군가는 하루에 식사
       로 이십만원씩 꼬박꼬박 사용할  것이다. 세상은 말이  되는
       곳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 곳이다. 말이 안 되는  곳에서 살
       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건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
       리라.
         
                      *                        *
         
          9월의 첫번째 주, 엉망으로 보내고 말았다.  정신은 갑자
       기 피곤해졌고, 육체는 갑자기 축 늘어졌다.  하늘은 높았지
       만, 햇살은 8월의 그것과  똑같았고, 가을바람은 그  햇살과
       싸워 패배하고 있다. 패배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난 죽을 때
       까지 패배할 각오를 다지고 있는 셈이다. 왜냐면, 말 안되는
       세상에서 말 되게 사는  것은 바로 패배를 자초하는  일임으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