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지하련 2000. 1. 3. 20:51
존재하지 않는 기사 - 10점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민음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1.
모든 것들이 '희극'으로 결론 나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존재하지 않는 자'에 의해 존재하는 자들(우리들)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인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 의미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기만'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현대란 보이는 세계의 화려함과 편리함, 또는 현란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의해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 아슬아슬한 지탱이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그 존재를 유지해 나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우리 인간들이란 그 아슬아슬함과 비례하는 만큼의 허황된 희망을 품는데, '포스트모던 사회'란 바로 그런 허황된 희망으로 축조된 사회이고 포스트모던 사회 속의 우리들은 그 희망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것도 던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경우 더 끔찍한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까닭에 끊임없이 그 희망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란 매우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존재함'을 택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말해 불가능한 것이다. 꼭 꿈 속의 소녀를 잊지못해 그 소녀를 그리며 그 소녀가 현실 속으로 걸어나오길 바라는 젊은 화가의 바램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바램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이란 현실 속의 누군가를 꿈 속의 소녀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계속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2.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말하는 토리스몬도는 그가 말하는 그 순간까지만 정당하고 그 이후로는 그 어떤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믿는 성배기사단도, 그가 믿는 어머니도, 그가 믿는 신념도,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인간'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꼭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존재하듯이 그가 믿는 바도 그와 비슷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적 인간들로서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셈이다.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의 대비로 인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애초부터 실패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서사를 위해 그는 아질울프의 명령에 따르며 동시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사유로서만 존재하는 자와 연장으로만 존재하여 자연의 모든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의 승리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다만테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며 계속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쫓는다. 그리고 프리쉴라는 오직 언어로만 존재하는 자에게 매혹당한 채 "그 사람은 남자야, 진짜 남자야, ... ... 하룻밤 내내 천국이었어......"라고 말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즉자(en soi)로서만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앞에선 자신의 존재를 때때로 깨달으며, 브라다만테와 프리쉴라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소설을 읽어나가면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게 매혹당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기사와 싸워도 이길 것처럼 보이던 아질울프는 자신의 존재가 거짓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리스몬도에게서 듣고는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찾아나서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브라다만테가 사랑하였고 프리쉴라가 매혹당했으며 그 어떤 전투도 그의 하얀 갑옷에 흠집 하나 만들지 못했던 위대한 기사가 한 사람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영혼에 깊은 상처입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람발도는 '투구를 향해, 갑옷을 향해, 떡갈나무를 향해,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며 아질울프를 불렀'지만, "기사님! 갑옷을 입으세요! 프랑스 군대와 귀족 사회에서 기사님의 지위는 분명해졌습니다!"라고, "기사님, 당신은 존재합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쳤지만, '갑옷은 똑바로 서 있지 못했고 투구는 땅에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3.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남긴 <이 갑옷을 로실리오네의 기사 람발도에게 남기노라.>라는 쪽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근대의 신념이 탈근대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람발도는 그 하얀 갑옷을 입었고 그녀 앞에, 브라다만테 앞에 선다. 그리고 그를 아질울프라고 믿는, "드디어 당신이 저를 찾아 달려오시는군요, 잡히지 않는 기사님!"라고 소리치는 브라다만테는 람발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순간, 소설 속 이 소설을 써나가는 수녀가 브라다만테라는 사실을 드러나는 순간, 모든 사건들은 허구의 미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람발도가 그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그는 달려오는 브라다만테에게 '나 역시 서투르게 행동하는 그런 남자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넌 모르겠지? 행동을 할 때마다 욕망이나 불만족이나 불안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그런 남자라는 걸 넌 모르겠지? 내가 바라는 것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거짓없이 무언가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들과 똑같이 존재하는 그 기사에게 희망을 걸어야할 것이다. 수녀가 된 브라다만테의, 람발도를 향한 사랑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아마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몸짓으로 람발도가 계속 그의 생을 꾸려나가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