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어느 일기

1. 화요일이었나, 아니면 월요일이었나... 봄비가 내리는 서울역 맞은편 카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어수선한 거리 분위기와 달리 카페 안은 조용했다. 창 밖 우산의 색이 밝고 화사하게 보여, 불투명한 우리 삶과는 대비되어 보이는 오후였다. 지난 십년 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꼈던 삼십대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그건 내 주업이 아니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지만, 그것도 이젠 주업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뭔가 가치 있는, 특히 예술계에세 기여할 수 있는 어떤 사업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긴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나, 정작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한 느낌이 들..

블로그의 힘F로서의 테터앤미디어

블로그의 힘F로서의 테터앤미디어 - TNM 3주년을 즈음하여 가끔 살아가다 보면 변화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릴 때가 있다. 자신의 처지나 모습을, 혹은 외부 세계의 환경을, 나라의 정치나 정부, 환경 문제 등을. 그런데 변화를 바라지만, 그 변화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은 고대와 현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을 정도로 크게 변했다. 대학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듣게 되는 교양철학 시간, 두 번째나 세 번째 시간 강사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과 달리 형상, 이데아는 이 세계 속에 있다고 합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는 저 세계에 있다고 한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실 세계 속에 있다고 하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이 본질적으로..

벚꽃같이 사라지는 일요일의 불안

벚꽃이 활짝 피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가 갑작스럽게 어울리지 않는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권한은 없고 책임만 늘어나는 걸까. 잠시 우울해질뻔했다. 마음이 담긴 글을 쓰고 싶지만, 그럴 여유마저도 없어졌다. 오후 사무실에 나가 한참동안 리더십에 대해 생각했다. 리더십에 대해 고민하지만, 내가 조직에서 가진 리더십은 제한적이다.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리더십은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력자의 역할은 수행할 수 있을 듯 싶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생각이 오가지만, 내가 결정낼 수 있는 것이 소수라는 점에서, 이런 고민도 내 한계만을 자각하게 되는 어떤 고통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지는 건,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탓이리라. 수요일까지 제출해야 될 수십 페이지짜리 제안서도 결국 혼자만의 몫이 된 지금....

다시 봄이 왔다

노곤한 봄날 오후가 이어졌다. 마음은 적당하게 쓸쓸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초조했다. 잔뜩 밀린 일들은 저 깊은 업무의 터널 속을 가득 메우고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모니터와 사각형의 문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얇게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

서재 정리

5년 넘게 살던 방화동에서 노량진으로 이사온 지도 서너달이 지났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서재 정리를 하지 못했다. 물리적인 공간의 부족이다. 많은 책들을 버렸으나, 아직도 공간이 부족하다. 직장을 다니면서 책 읽기를 그저 습관처럼 지켜온 탓에, 책들은 두서가 없고 노트와 메모가 어지럽다. 한때 꿈꾸었던 인문학도의 흔적은 두꺼운 도록들과 사전들 속으로 숨어들었고 군데군데 보이는 경영학 책들은 회사에서 자리잡기 위한 내 모습을 드러내는 듯 하여 아프다. 책상은 어지럽다. 아직까지 오디오 셋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 할 수 있을까... 오늘 오전에 시디 정리를 했는데, 새삼스럽게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던가 반문하게 되었다. 비가 올 듯한 날씨. 하..

네티즌과 한국 사회의 이중성

예전 같으면 새로운 정보나 뉴스를 신문이나 잡지, TV 뉴스를 통해 알게 되지만, 이제 대부분은 웹에서 구하게 된다. 너무 많아진 정보는 우리를 쉽게 피곤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정보들의 대부분은 쓰레기다. 요즘 같이 웹 트래픽의 대부분이 포털 사이트에 몰려있고, 이들 포털사이트가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는 관계로, 이 포털에 뉴스나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는 콘텐츠 생산자들의 ‘인터넷 저널리즘’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 저널리즘’이 얼마나 형편없는가!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네티즌과 한국 사회의 이중성’이다. 2000년대 들어서 이름도 듣지 못한 무수한 인터넷 신문들이 등장했다. 그들이 토해내는 저질 기사들은 우리들의 시간을 잡아먹고 눈을 더럽히고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그런데 이들 저질..

회의를 끝내고 그들을 만났다 - 펄 잼, In My Tree

아침 8시 반부터 시작된 회의들은 오후 1시 가까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정부 지원 사업 신청서를 간단하게 작성해서 관계 기관 부처에 보내고 나자, 오후 4시가 되어있었다. 이제서야 실제 업무를 해야 하는데, 난감하다. 바쁘다는 건 때론 좋은 의미로 통용될 수 있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의 위치나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오랜만에 펄 잼을 듣는다.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고 싶을 때 듣는 음악이 있다. 술을 잔뜩 마시고 몸을 흔들고 싶을 때 듣는 음악이 있다. 펄 잼을 듣는다. 남 몰래, 귀에 이어폰을 끼고. 보고서를 하나 작성하면서.

사물들에 대한 사랑, 혹은 숨겨진 외로움

하루의 피로가 몰려드는 저녁 시간. 밖에는 3월을 증오하는 1월의 눈이 내리고 대륙에서 불어온 바람은 막 새 잎새를 틔우려는 가녀린 나무 가지에 앉아 연신 몸을 흔들고 ... 어수선한 세상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고, 밀려드는 업무에 잠시 손을 놓고 ... 하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눈 오는 3월의 어느 저녁.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소리 내어 읽는다. 사물들에게 바치는 송가 모든 사물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들이 정열적이거나 달콤한 향내가 나기 때문이 아니라 모르긴 해도 이 대양은 당신의 것이며 또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단추들과 바퀴들과 조그마한 잊혀진 보물들. 부챗살 위에 달린 깃털 사랑은 그 만발한 꽃들을 흩뿌린다. 유리잔들, 나이프들 가위들… 이들 모두는 손잡이나 표면에 누군가의 손가락이 스쳐..

걸어가면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었다.

대출 기한을 넘긴 책을 도서관에 반납했다. 반납하는 내 손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발바닥에 굳은 살이 일어났다. 마치 지구 밑바닥을 흐른다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용암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표하듯, 2011년의 봄이 오는 속도로 굳은 살들이 허옇게 올라왔다. 나는 무인 대출반납기에 서서 책 한 권을 반납했다. 여러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여러 차례 햇살이 비치는 곳과 그늘 진 곳을 번갈아가며 낡고 오래된 갈색 구두 굽이 보도블럭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구두굽은 보도블럭을 사랑하는가 보다. 그 소리가 그렇게 상쾌하게 들릴 수가. 회사 일 때문에 요 며칠 한남동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오늘은 이태원에서 내려 한남동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커피 몇 잔을 사 들고 걸어갔다. 걸어가면..

어느 토요일의 일상

이번 경우는 이렇게 씌어 있었어도 괜찮았을 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분 속의 한 사람, 한 알의 씨앗이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 빛나고 ... ... 진동하고 ... ... 작열하는 씨악이다......" 어느 날 나는 국립도서관에 있었는데, 쉰 안팎의 토끼털 모자를 쓴 부인이 내가 있던 책상 앞으로 다가와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 르 끌레지오, '사랑하는 대지' 중에서 낡고 오래된 책을 꺼내 기억하는 몇 문장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이 일상도 거대한 지구의 운동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토요일의 일상을 오늘에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이 갑자기 많아졌고 이를 헤쳐나가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몸에 이상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