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뉴트롤즈New Trolls를 듣는 가을

1. 뉴트롤즈를 듣는 월요일 아침이다. 갑자기 쌀쌀해진 가을. 사람들은 두터운 옷을 입고 출근길을 재촉했다. 바람에 나뭇잎이 날렸다. 그들은 지난 여름의 폭우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 그리고 위대한 현인들이 이야기했다는 의지력이나 이상(꿈)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2. 뉴트롤즈를 듣는 월요일 저녁이다. 갑자기 쌀쌀해진 가을. 사람들은 무거운 옷을 다시 입으며, 퇴근을 고민한다. 하지만 입 끝에는 쓸쓸한 알콜 향이 맵돈다. 작은 술잔 안으로 밀려드는 기세가 마치 8월의 소용돌이 구름 아래의 파도와 같은 ... 투명한 소주가 가을 저녁에, 뉴트롤즈를 듣는다. 이제 아무도 이십여년 전 그 때처럼 뉴트롤즈를 찾지 않고 그들의 전설은 이탈리아 반도 어딘가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질..

서울 시장 선거에 대한 단상

1. 박원순 변호사와 나경원 의원의 지지율 여론조사가 며칠에 한 번씩 나오는 것같다. 그런데 이런 여론조사를 사람들은 얼마나 믿을까?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여론 조사 결과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이미 누구를 찍을 것인가를 결정해 놓았고 여론 조사 결과나 여러 언론에 실리는 기사들 대부분, 나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민주당 지지자도 아니고 적극적인 한나라당 반대자도 아닌 나로선 이번 서울 시장 보궐 선거는 한국 정당 정치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어떤 이유로 정당 정치의 위기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이 왜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되는가를 천천히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마련한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정치인의 반성이나 변화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것과는 ..

가을 어느 날, 커피의 사소한 위안

가을 햇살이 비스듬하게 바람 따라 나풀나풀거렸다. 커피 향이 거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대비되는 빛깔끼리 대화하는 법이 없는 도시에는 외로움만 흘렀다. 투덜되는 쓸쓸함 앞에서 커피는 사소한 위안이 되었을 뿐, 결국엔 둥근 테이블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푸른 하늘 위로 떠나버렸다. 가을이 왔다. 그리고 가을이 갈 것이다. 해마다 그랬듯이.

구한말 조선 어머니의 모습

원고 쓸 일이 있어 아침부터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한다. 몇 개의 관련 기사와 책들을 이리저리 펼쳐놓고 있다, 잠시 쉬어가는 겸, 쓸 원고와는 아무 관련없는 책을 펼쳐 읽는다. 에밀 부르다레의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그리고 그 속에서의 문장들. 조선에서 소녀와 숙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적령기가 되면 계집 아이는 곧 결혼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총각은 결혼할 때까지, 즉 열다섯에서 서른 살까지 어른으로 보지 않고, 매사에 논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들은 혼인할 때까지 등 뒤로 머리를 땋고 다닌다. 망사 말총 모자[갓]는 결혼하고서 상투를 틀 때나 쓰게 된다. 조선 부인의 경우 만약 그녀가 지적이고 남편이 방탕하지 않다면, 가정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리며 종종 남편보다 더 강인한 모습을 보이..

멀리 돌아온 커피 한 잔과 함께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만난 이는 도시를 흐르는 대기의 흐름이었다. 가을 아침 바람. 강남구청역 1번 출구. 내가 아침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곳.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기 틈새로 비가 내렸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어버린 중년의 감각 세포들. 거리는 어수선한 지난 밤 속을 헤매는 듯 보였고, 상기된 표정의 행인들은 가져온 우산을 힘없게 펼쳤다. 그 때 마침 문을 연 커피숍에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참 멀리 걸었다. 걸으면서 낡은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데이비드 린치, 스매싱 펌킨스의 EYE를 떠올렸다. 기억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 내 몸도 따라 휘말려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어디까..

남자가 철든다는 것에 대해

철든 남자만큼 안타깝고 슬프고 절망스러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종종 우리들은 성직자들에게서 ‘철 들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철들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이니, 성직자들에게는 종교적 관점에서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힘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종교적 관점’이 될 것이다. 성직자들은 신앙을 향한 ‘철없는 열정’을 숨기고 있다. (즉, 모든 열정은 철없음의 소산이다!) 마음 속에서는 늘 자신들이 믿는 신을 향한 끝없는 신앙심을 숨겨져 있는 탓에, 그들은 자신의 생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철든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병상 위의 남자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남자. 자신의 생명력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 남자는 갑자기 철이 든다..

중세 속의 아르보 페르트

슬픈 중세주의는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세기의 낭만적 중세는 거침없는 산업화 속에서 사라지고 20세기, 21세기의 중세주의는 학문 연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진지한 동경, 숙고, 찬미로 바뀌고 있다. 마치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지속적으로 이야기되듯. 그 사이로 에스토니아 출신의 아르보 페르트가 있다. 미니멀리즘과 중세적 성스러움 속에서 그는 미사곡과 성가곡을 작곡한다. 그의 음악은 슬프고 그리운 중세를 닮아있다. 불가능함을 불가능함으로 받아들이고 자연과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중세를... 오늘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을 듣는다.

휴식, 또는 디폴트 네트워크

특히 '디폴트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미국의 두뇌 연구가 마커스 라이클은 실험 참가자 문제 풀이에 집중하자 뇌의 특정 영역의 활동이 오히려 줄어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문제 풀기를 멈추자 이 영역의 활동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멍'한 상태에 있거나 잡념에 빠졌을 때 극도로 활발해지는 뇌의 영역은 디폴트 네트워크로 명명됐습니다. 이란 책의 저자는 울리히 슈나벨은 신경세포인 뉴런들을 새롭게 정비하고 기억을 분류하며 배운 것을 처리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디폴트 네트워크가 활성화한다고 분석했습니다. 특정 과업에서 벗어나 별 생각 없이 있는 게 우리의 정신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는 설명입니다. 외부의 자극이 없어도 내면의 지식, 오래 전에 갖고 있던 지식, 잠시 스쳐 ..

담배 피우는 우리들의 피터팬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금연 캠페인 홍보물이다. 하나는 백설공주가 나쁜 마녀한테서 사과 대신 담배를 건네 받는 그림이고 하나는 피터팬이 담배를 피우다 할아버지가 된 그림이다. 그런데 피터팬 그림은 이래저래 심금을 울린다. 그건 담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얼마나 안 좋아졌으면 피터팬으로 하여금 담배를 피우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다가 늙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미 피터팬에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었고 늙지 않는다는 피터팬도 천천히 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담배를 피우면서 신세한탄조의 표정으로 물끄러미 먼 산을 쳐다본다. 그러고 보면 힘든 세상, 벗이 되는 건 술과 담배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 너무 위험한 생각인가. 크) - 2005년 8월 19일 토요일 아침 커..

Summer Clouds, Summer Rain

간밤에 잠을 설쳤다. 일요일 오후에 낮잠을 잤고 밤 늦게 푸짐한 저녁 식사를 한 탓이다. 집 근처 홈플러스 마트에 갔더니, 프랑스산 삼겹살 1KG을 9,800원에 팔고 있어서, 이를 소주, 맥주와 함께 먹었는데, 12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소화를 못 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냉동 삼겹살이라 고기는 다소 질겼다. 먹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싼 가격을 감수해야 했다. (그건 그렇고, 삼겹살 가격은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오전에 사무실에 도착해 두 번의 회의를 했더니, 오전 시간은 다 지나가버렸고, 수면 시간이 채 3시간이 되지 않는 터라 점심식사 대신 낮잠을 택했다.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부치는 수준이었으나, 한결 나아졌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밀려드는 햇살의 두께와 밀도, 밝기는 한 여름날의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