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 1051

책 읽는 일상

책을 다 읽고 노트에 옮겨적었다. 선물받은 라미 만년필은, 사용한지 꽤 되었는데, 아직까지 필기감이 좋지 않다. 비슷한 유형의 로트링 만년필은 필기감이 매우 훌륭했는데 말이지. 당분간 라미 만년필을 사용하면서 펜을 길들일 예정이다. 오늘에서야 수전 케인의 '콰어이트'를 다 읽었다.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으로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성격의 문화'가 가져다 준 영향, 그리고 아시아와 서구 사회를 비교하면서 자녀 양육으로 끝나는 책이었다. 그러나 명성에 비해 책은 얇다. 4시간이면 넉넉하게 다 읽을 수 있다.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책 읽는 재미는 무척 좋다. 내용도 훌륭하다. 깔끔한 정리는 아메리카 쪽 저자들의 특징이기도 한 듯 싶다. 하지만 책의 깊이는 유럽 쪽 저자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건..

누런 먼지 같은 중년

어떤 기억은 신선한 사과에 묻은 누런 빛깔 먼지 같았다. 그래서 그 사과가 누런 흙 알갱이로 가득했던 맑은 하늘 아래의, 어느 과수원에서 익숙한 손길의, 적당히 성의 없이 포장되어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스테인리스 특유의 무심한 빛깔을 뽐내는 주방 앞의 아내 손길에 그 먼지는 씻겨져 흘러 내려갔다. 그렇게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다. 문득 내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15세기 중세 서유럽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한 편으론 감사하고 한 편으론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만한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어떤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시간의 틈에 끼어 오래되어 지쳐 잠들 뿐이다.그 잠든 모습을 스스로는 돌이켜보지 못하는 ..

춘천으로 떠난 가을 여행

여행을 좋아할 것같지만, 여행지에 가서도 책을 읽는 터라, 실은 여행을 거의 가지 않는다. 가끔 가게 되는 여행에서도, 낯선 풍경이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풍경은 늘 빙빙 돌아 내 마음 한군데를 가르키고, 결국 내 마음만 들여다보다 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여행보다 집에 박혀 책을 읽고 음악 듣는 게 더 즐거운 일이 된 나에게 ... 이번 여행은 내 의지라기 보다는 가족의 의지로 가게 된 것이었고, 한 줄의 글도 읽지 못한 최초의 여행이 되었다. 이 특이한 경험 위로 즐겁게 웃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이 겹쳐지니, 즐겁고 가치 있는 여행이 되었던 셈이다. 2박3일 동안 남이섬, 소양강 댐, 청평사를 둘러보는 여행이었고, 숙박은 춘천 세종호텔이었다. 사진을 꽤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서울로 돌아와서 살펴보니 ..

토요일에 만난 아이 웨이웨이

토요일 외출을 했고 몇 개의 전시를 봤다. 아이 웨이웨이는 '감각적 미학으로 본 정치적 풍경'(이런 표현이 정확하진 않지만, 그냥 '감각적 정치 미학'이라고 하고 싶은데, 이건 더 모호한 것같아서..)을 잘 포착한다. 그래서 중국 내에서는 꽤 위험한 예술가이지만, 외부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는 현대 중국 미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가일 것이다.

낮은 하늘 아래서

해마다 가는 창원이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는 건 내 나이 탓일까, 아니면 내가 처하게 되는 환경 탓일까. 집 밖을 나오면 멀리 뒷 산들이 보이는 풍경이 다소 낯설게 여겨지는 건, 너무 오래 서울 생활을 했다는 뜻일 게다. 하긴 지금 살고 있는 노량진 인근 아파트 창으론 여의도가 한 눈에 들어오긴 하지만... 연휴 때 나온 사무실은 조용하기만 하다.

직장인의 하루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다. 타이를 매고 흰 색 셔츠를 입고도 어색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내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하긴 지하철에 빼곡히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절망감에 휩싸였던 20대를 보낸 나로선, 지금의 내가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내 마음 속 또 다른 나 자신에게. 며칠 만에 제안서를 끝내고 프리젠테이션까지 했다. 작년 초에 한 번 하고 거의 1년 만이다. 누군가 앞에서 나서서 뭔가를 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했는데, 이제 내가 책임을 지고 뭔가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 왔다. 며칠 전 TV를 보는데, 김기덕 감독의 거처가 나오고 김기덕 감독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그걸 보던 아내가 날 보더니, '당신도 저렇게 살고 싶지?'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름-절망'에서 '가을-희망'으로

피로가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 집에 오니, 밤 12시가 가까이 되었고 나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상태다. 하긴 내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딱딱한 걸 먹으면 안 되는데, 맥주 몇 잔에 딱딱하다 못해 씹혀지지도 않는 오징어 뒷다리를 안주 삼았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가 사라지는 것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상 속에 내 온 몸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데, ... 올해 그런 여유가 생길 지 모르겠다. 여름, 뜨거운 절망을 뒤로 하고, 가을, 내년을 위한 희망을 꿈꾸어도 좋을 시기다. 몇 번의 주말 오후, 핸드폰으로 늦은 오후 석양 아래의 서울을 찍었다. 내가 가진 니콘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있지만, 지금 PC에 옮기기가 귀찮다...

김명호 교수 인터뷰 - 중국, 중국인에 대하여

한동안 중앙선데이를 구독해 읽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이상 구독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술/예술에 대한 심층 기사가 많고 다른 신문에선 보기 드문 연재가 있어 가끔 가판대에서 사서 읽곤 한다. 그 연재들 중 특히 성공회대 김명호 교수의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는 흥미롭다. 오늘 아침 김명호 교수의 인터뷰를 작년 초 신문에서 꺼내 읽었다. 그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그 동안 중국에 대한 책 여러 권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중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구나 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가지는 중국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일제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라 말한다. '잘못된 시발점은 일제 시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이 각급 학교에서 적국인 중국을 비난하는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은 ..

어느 아침의 일상

아침 일찍 일어나, 분유를 먹은 아이를 재우는 아내 옆을 나와, 아침밥을 올리고 서재로 와, 아주 오랜만에 턴테이블에 비틀즈의 '애비 로드'를 올린다. 그 때 창으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눈이 막막해지고 보이지 않는 몇 초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불만이 있고 그걸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 * 그리고 사무실. 어제 남기고 간 커피를, 1층 반대편 끝에 있는 화장실 세면대에 가 버리고 컵을 씻고 출근하는 직장인들 사이, 복도와 현관을 걸어 사무실로 돌아온다. 바쁜 21세기. 테일러식 모더니즘은 극단으로 치달아, '시간 관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현실 앞에서 몇 개의 노래와 커피는 사소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 구수한 로컬리티 보사노바는 올해 최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