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298

헤르메스적 세계, 혹은 새로운 철학적 신화학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 H. 롬바흐 지음, 전동진 옮김, 서광사 이미 품절된 책, 그리고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울 책이 된 롬바흐의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는 마치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아폴론 – 디오니소스) 아래에서 아폴론과 헤르메스를 대비시키며 현대적 신화학, 혹은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을 시도한다. 하지만 많은 현대철학자들에 의해 철학은 이미 미학화되었고 이 책도 그 지평을 따라 서사(신화)와 미적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책들 중의 한 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서양의 지적이며 미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들의 여러 사례들을 끄집어 내어 자신의 사유를 설명해 가는 롬바흐의 서술은 이 책을 읽는 예상치 못한 즐..

보수적 문화사가로서의 부르크하르트

혁명 시대의 역사 서문 외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성철 옮김, 책세상 이 책은 역사학자이자 문화사학자인 야콥 크리스토프 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1818~1897)의 글을 우리말로 옮긴 책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학자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르네상스Renaissance’로 더 알려진 학자일 것이다. (여기에서 ‘일반인’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지지만) ‘그리스 문화사 서문’, ‘여행 안내서의 16세기 회화 중에서’, ‘혁명시대의 역사 서문’, ‘세계사적 고찰 서문’ 등이 실린 이 책은 부르크하르트의 학문적 태도에 대해 알 수 있기에 매우 유용하다. 문화사는 과거 인류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그들이 어떻게 존재했고, 원했고, 생각했고, 관찰했고, 할 수 있었는지..

후기 마르크스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김유동 옮김/한길사 후기마르크스주의 Late Marxism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김유동 옮김, 한길그레이트북스 몇 달 전에 이 책을 다 읽었지만, 서평을 쓰지 못했다. 딱딱하고 압축적이며 추상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론서를 읽기에는, 내 독서 태도가 성실하지 못했다. 어떻게 겨우겨우 완독하기는 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아도르노에 대한 편애로 가득 찬 프레드릭 제임슨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지만, 아도르노는 자신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벤야민에게서 영향 받았겠지만, 실은 벤야민의 독특함 이상이다. 벤야민에 대한 이상한 선호(대중적 인기)로 인해, 아도르노는 종종 무시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프레..

열정의 레토릭, 미셸 메이에르

열정의 레토릭 - 미셜 메이에르 지음, 전성기 옮김/고려대학교출판부 지금에서야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는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보다 자연스럽게 읽히고 들리게 되었지만, 실은 채 이 백년도 되지 않았다. 마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태도가 17~8세기에서야 비로서 등장했던 것처럼. 하나의 개념, 혹은 개념어에 대한 우리 삶의, 정신의 태도가 변화하고 혹은 새로 생기는 것도 역사의 일부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열정’이라는 것에 대해 현대의 우리가 가지는 느낌도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일시적인 산물이며, 먼 미래에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를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 책은 ‘열정’에 대한 현대의 일반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로마시대의 키케로는 열정을..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새물결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지음), 박진우(옮김), 새물결 이 책 전체의 핵심 주제는 바로 정치의 근본 범주를 ‘주권/벌거벗은 생명’의 관계로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를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비오스,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이 과연 어떤 존재론적 층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근대 정치의 핵심 범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해명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근본 주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23쪽, 옮긴이 서문 옮긴이의 서문을 옮기지만, 이 책은 초심..

뮤지컬을 꿈꾸다, 정재왈(지음)

뮤지컬을 꿈꾸다 - 정재왈 지음/아이세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읽히게, 책을 만든 의도가 궁금해진다. 내가 책에 대해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한국의 독자 수준이 형편없다는 말인가. 아마 대부분의 출판기획자들은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이 책은 너무 쉽게 만들었다는 느낌을 준다. '문화교과서'라는 시리즈 제목이 무색할 정도다. 뮤지컬의 역사, 뮤지컬 제작, 대표 뮤지컬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각 부분은 뮤지컬 초보에게 간단한 안내서로 기능하겠지만, 그 뿐이다. 너무 편하게 쓴 탓에, 전문적인 부분을 건들지 못하고 있는 단점이 너무 눈에 보인다. 실은 비전문가가 쓴 책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나라도 뮤지컬 관련 서적들을 읽고 이 정도의 책을 ..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 마틴 맥퀄런 지음, 이창남 옮김/앨피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가 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장도 있다. 아예 책 전체가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다음 주체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치 암호처럼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끝까지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든다. 몇몇 독자는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로만 병렬적으로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독자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악명을 떨치니 말이다. 아도르노도 이에 못지 않다. 아도르노는 ‘글쓰기’를 자신의 사상에 대한 실천으로 여겼다. 불문학을 전공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독일어로 글을 쓴 아도르노에 빠진 것도 독특하기 그지 없는 아도르노식 글쓰기 탓은 아..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 조중걸 지음/베아르피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지음), 베아르피, 2009. '마술과 의미를 동시에 잃어'버린 세계, 사막이 되어버린 세계. '우리는 거울만을 보도록 운명 지어져 있고, 우리의 운명은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오랜 역사는 현대의 비트겐슈타인에서 머물러 있고, 그는 거짓된 말보다 진실된 침묵을 택한다. 이 얼마나 아찔한 귀결인가. 책은 짧고 문장은 단순하다. '철학은 관념적 독단과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양 끝으로는 하는 스펙트럼'이고, 우리 '인간은 관념론자가 되거나 유물론자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 아니 이는 배운 사람들(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관념론..

기억의 정치, 권귀숙

기억의 정치 - 권귀숙 지음/문학과지성사 현재 진행형이다. 아마 그렇게 '현재 진행형'으로 있다가 묻혀질 것이다. 현대 한국 내에서 끊임없이 권력에 의해 자행되어 온 대량학살이 이야기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하긴 대량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 것도 채 100년이 되지 않으니(일제, 광복 후 미군정,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와 군사정권들에 이르기까지), 젊은 세대로 속하는 우리들에게 대량학살은 아주 먼 이야기일 뿐이다. 직간접적으로 강요된 침묵 속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은 아주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기억'을 수집하고 분석하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이젠 증언을 할 사람들마저 불합리했던 과거 속으로 사라져갈 때, 슬프고 고통스런 과거이지만,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녹색평론사 정의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지음), 김종철(옮김), 녹색평론사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필요 없다. 단지 ‘읽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꼭 리 호이나키가 자신이 알고 있던 바를 성실하게, 혹자가 보기엔 무모하고 철없이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처럼, 이 책을 읽은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 이 책의 독서를 강요하는 것’이다. 카페테리아의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메뉴들 ... 이런 것이 저 학생반란과 운동들의 주된 결과인가? 나는 궁금했다. ... 대학개혁을 위한 요구들은 어떠한 좀더 심각한 변화를 초래했는가? - 11쪽 리 호이나키는 자신이 알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