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896

정체성, 밀란 쿤데라

정체성 L'Identite'밀란 쿤데라(지음), 이재룡(옮김), 민음사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쿤데라 특유의 문장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간 읽었던 그의 소설들과 비교한다면 읽는 재미가 다소 떨어진다고 할까. 어쩌면 내가 그 사이 나이 든 탓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상당히 오래 전 일이니(찾아보니, 거의 십 년만이다). 꿈은 한 인생의 각기 다른 시절에 대한, 수용하지 못할 평등성과, 인간이 겪은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는 동시대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꿈은 현재의 특권적 지위를 부정하며 현재를 무시한다. (9쪽)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꿈을 꾼다. 샹탈도 꿈을 꾸고 장-마르크는 그 꿈을 위해 익명의 편지들을 그녀에게 보낸다. 그것으..

소유 Possession: A Romance, 수전 바이어트

소유 1, 2 앤토니어 수전 바이어트(지음), 윤희기(옮김), 동아출판사 꽤 오래 읽었다. 강렬한 몰입감보다는 잔잔한 호기심이랄까. 두 시인, 랜돌프 헨리 애쉬와 크리스타벨 라모트의 이야기는, 이들의 흔적을 쫓는 롤런드와 모드의 이야기와 겹치며, 끊임없이 독자를 궁금하게 만든다. 너무나도 문학적인 이 소설은 거의 모든 챕터마다 랜돌프 헨리 애쉬나 크리스타벨 라모트의 작품이 인용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두 시인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실존했던 작가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두 작가는 수전 바이어트가 창작해 낸 가상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 두 작가가 실제 있었던 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이 가상의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들이 놀랍기 때문이다. 서신들하며, 시 작품들은..

발터 벤야민 - 그의 생애와 시대, 베르너 풀트

발터 벤야민 - 그의 생애와 시대 Walter Benjamin Zwischen den Stuhlen: Eine Biographie베르너 풀트Werner Fuld(지음), 이기식, 김영옥(옮김), 문학과지성사, 1985년 1.새 책도 사서 읽지만, 읽지 않은 채 서가에 잠자던 책도 꺼내 읽는다. 다 읽고 난 다음,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을까 하는 책도 있고, 이제 읽으니 제대로 이해가 되는구나 하는 책도 있다. 어떤 책들은 읽으려고 노력해도 읽히지 않는다. 대체로 인문학이 그렇다. 때론 소설도 있다. 이 책, ‘발터 벤야민 - 그의 생애와 시대’는 둘 다 해당된다. 2.여기에서 벤야민의 사유에 있어서의 급진적인 전환점을 보는 매우 많은 해석자들이 있다.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론의 자산이 그러한 모델 - ..

에밀 시오랑, 언어의 위축

우유부단한 자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단편적인 사실과 흔적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우리는 실제 사례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임상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한 작가가 침묵했던 것,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 그 말하지 않은 것의 깊이이다. 작가가 어떤 작품을 남겼다면,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면, 우리는 분명 그를 잊을 것이다. 자신의 환멸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모르고 그대로 사라지게 내버려둔 실패자, 그 실패한 예술가의 운명 ... - '언어의 위축', 에밀 시오랑, (김정숙 옮김, 문학동네)중에서 퇴근한 후, 책상 위에 놓인 책 첫 구절을 옮겨놓는다. 20세기말 르몽드에서 불어로 가장 아름다운 글을 남긴 작가들 중 5위 안에 속했던 철학자인데, 국내에선 거의 읽히지 않..

도덕의 기원, 마이클 토마셀로

도덕의 기원 A Natural History of Human Morality 마이클 토마셀로 Michael Tomasello(지음), 유강은(옮김), 이데아 무척 평가가 좋은 책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내가 이 책을 왜 읽었지 하는 후회를 하고 있다(읽을 책을 쌓아두고 있는 상황에). 협력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론에 다양한 난제를 제시한다. - 31쪽 대형 유인원과 인간 아동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 인류가 어떻게 도덕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다양한 연구들과 가설들로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그 대부분들은 가설에 머물 뿐이다. 결국 진화론을 바탕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도덕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은 아닐까. 그래서 도덕의 기원이 확실하게 어떤 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배움에 관하여, 강남순

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지음), 동녘, 2017 "두려움과 떨림으로 당신 자신의 구원을 끊임없이 이루어 내십시오.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 빌리보서 2장 12절- 키아케고르, 중에서 얼마 전 '인문학 유행과 인문학적 사고'라는 짧은 포스팅 하나를 올렸다. 어느 신문 칼럼에서 인용된 강남순 교수의 글이 상당히 시사적이라 올린 포스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읽기 전에는 딱딱하고 건조한 이론서로 생각했는데, 막상 읽고 보니 짧은 글들을 모은 산문집이었다. 하지만 짧은 글이라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문학적인 통찰이 묻어났다. 다양한 학자들을 인용하였으며, 자신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드러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The Order of Time 카를로 로벨리(지음), 이중원(옮김), 쌤앤파커스 물리학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시간들'이 서로 어떻게 다르게 진화하는지를 설명한다. (26쪽) 결국 우리가 이해하는 바 '시간'이란 없고 그냥 나의 시간, 너의 시간, 지구의 시간, 화성의 시간 등등 질량에 종속된 시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그저 착시 현상일 뿐이며, 끔찍한 사실 하나는 이미 미래는 거기 있어야만 한다. 정해진 바대로 시공간들이 나열해있을 뿐인데, 우리는 시간을 오직 현재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시공간 전체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카를로 로벨리는 마치 철학서..

스크린의 추방자들,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The Wretched of the Screen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지음), 김실비(옮김), 김지훈(감수), 워크룸프레스 1. 책을 사두고선 읽지 않았다. 현대예술에 대한 책이라는 걸 알았지만, 영화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일 거라는 추정과 다소 투박하게 읽혔던 몇몇 문장들로 인해, 그리고 다른 책들과의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려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한은형의 수필집에서 히토 슈타이얼이라는 흥미로운 예술가의 이름을 발견한다. (2007)라는 작품에 대한 짧은 글 속에서 나는 이 작가를 찾았다. 그런데 이런, 나는 뒤늦게 최근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가들 중의 한 명이며,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로 거의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을. 그리고..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좌안 1940-50, 아녜스 푸아리에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좌안 1940-50 아녜스 푸아리에(지음), 노시내(옮김), 마티 사람은 읽고 싶은 것만 읽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사람들 대부분 이것저것 고려할 정도로 배려심이 많지도 않고 폭넓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굳이 그럴 필요까지 느끼지 못한 채 살기 바쁘다(요즘 내 모습이구나). 그래서 이 책은 어떤 이들에게 20세기를 주름 잡았던 파리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숨겨진 모습을 알게 해주는 값진 책이 될 수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지식인들의 불건전한 연애 기록으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예상 밖의 이야기들로 인해 흔들렸으니...) 2차 세계 대전 전후, 점령당한 파리 좌안에서의 일상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다행히 나치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고 아우슈비츠로 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