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934

더 고독했던 때는 없네, 고트프리트 벤

더 고독했던 때는 없네 -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1886 ~ 1956) 8월처럼 고독했던 때는 없네성숙의 계절 -, 땅에는붉은, 황금빛 신열(身熱)그런데 그대 정원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는가? 맑은 호수, 부드러운 하늘,깨끗한 밭들은 조용히 빛나는데그대 군림하는 왕국의 개선(凱旋)은,그리고 그 개선의 자국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행복을 통해 드러나는 곳,술 냄새 속, 물건 소리 속에시선을 나누고, 반지를 나누는 곳에서그대는 행복의 적(敵)인 정신에 몸 두고 있네 지독했던 8월이 가고, 여기저기 긁힌 마음의 가장자리는 찢어진 헝겊으로 잘 덮어두곤 가을 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몸에 무리를 주기 마련. 노트 정리를 하다가 메모 해 두었던 벤의 시를 읽으며, 문득 ..

디어 클래식, 김순배

디어 클래식 Dear Classic 김순배(지음), 책읽는수요일 저자는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녀처럼 쉽고 재미있게 글 쓰는 재주는 없는 것같다. 책을 펼치자마자 금세 빨려들어가, 책 중반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내는 저자가 부러웠다(그녀의 아버지는 김현승 시인이다. 시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내가 모르는 작곡가들과 그들의 음악, 그리고 내가 알고 있으나,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음악에 대해 저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깊이 있는 내용까지 언급하며 독자를 안내한다. (내가 얼마 전에 올린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도 이 책에서 읽은 바를 옮긴 것이다) 1966년 초연된 이 작품은 펜데레츠키 특유의 극단적인 실험기법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지음), 김수희(옮김), AK 강상중 교수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소개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의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이름을 쓰는 재일한국인으로, 그리고 일본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한국과 일본 너머 어떤 곳을 지향하는 듯하다. 적어도 강상중을 읽는 일본인 독자나 한국인 독자는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식견을 가졌을 것이다. (손정의도 이와 비슷하고 그는 이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넘어 세계인이 되었으니까) 이 책은 강상중 교수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안내서이다. 나쓰메 소세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오에 겐자부로를 지나 나쓰메 소세키로. 그 중에..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건 나야. 나의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뀐 건 아니야. 외롭고 쓸쓸하다는 걸..

고착된 생각A Fixed Idea, 에이미 로웰

점심 식사 대신 에이미 로월(Amy Lowell, 1874 - 1925)의 시를 한글로 옮겨보았다. 며칠 전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로웰의 시가 실렸는데, 처음 듣는 시인이었고 처음 읽는 시였다.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시인의 이름만 제공하고 시 제목은 영어를 병기하지 않았다. '고착된'이라는 단어는 쉽게 fixed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먼저 에이미 로웰로 검색해 로웰의 시 목록(http://www.poemhunter.com/amy-lowell/)을 훑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구글에서 Amy Lowell fixed idea를 추천 검색 키워드로 제시해주었다.(원문 -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and-poets/poems..

현기증.감정들, W.G.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페터 빅셀(지음), 이용숙(옮김), 예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를. 채 30분도 되기 전에 다 읽은 이 소설집.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는 소설. 그리고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들. 하지만 페터 빅셀은 이 소설들을 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주인공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자라는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유연한 여성들에 비해 남자들은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 작가 빅셀이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더 없이 따뜻하고 ..

푸른 곰팡이, 이문재

푸른 곰팡이 -산책시 1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제, 중에서 이문재의 (민음사)가 있는데, 서가를 찾아보니 없다. 정리되지 않는 서가, 정리할 시간도 없는 서가, 이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마저 사라지고, 이 시도 읽었으나 이젠 기억나지 않아, 신문에서 읽은 다음, 출처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문재를 읽던 시간도 이젠 드물어지..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나쓰메 소세키(지음), 오석윤(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의 놀랍고 아름다운 시작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은 독자가 읽게 되는 첫 문장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이쿠 소설'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우호적인 것일지도.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메를로 퐁티, J.슈미트

메를로 퐁티 Merleau-PontyJ. 슈미트Schmidt(지음), 홍경실(옮김), 지성의 샘, 1994년 다시 메를로-퐁티를 읽을 일이 생겨, 서가에서 이 책을 꺼냈다. 예전 밑줄까지 그으며 이 책을 읽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다시 읽으면서 그 땐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기도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메를로-퐁티의 안내서로 적당하지 않다. 이 책의 원서는 아래와 같다. 원서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위치를 여러 학자들과의 비교를 통해 다시 되짚어보는 책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좀 더 쉽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전체를 다 번역한 것도 아니고 전체 5장 중 3장만 번역했다. 1. 들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