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 935

나의 서양미술순례,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작과비평사 대학원 시험을 번번히 떨어지고 학업을 하기엔 좀 지난 나이인 서른하나가 되었지만, 이미 책읽기와 그림보기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려 어쩌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창작과비평사의 문고판으로 나온 책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초에 도판도 칼라로 싣고 하드커버로 장정하여 깔끔하게 새롭게 출판되었다. 1. 화제를 바꾸려는 듯이 사내가 물었다. "일본 사람이오?" 언제나처럼 나는 대답했다. "아니, 한국인이오." 그러자 사내는 다시 수다스러워져서 지껄이는 것이었다. "오, 한국인이요? 요새 야단인가 보던데? 학생들이 매일같이 소란을 피운다던데, 어때요?" - 94쪽 그는 재일한국인이다. 한국말보다 일본말이 더 익숙한 사람이다. 미술책을 읽으면서 정체성에 ..

작은 사건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Incidents 작은 사건들, 동문선, 2003 검은 피부의 청년, 그가 입은 연두색 바지와 박하 크림색의 셔츠, 오렌지색 양말, 그리고 눈에 띄게 부드러워 보이는 빨간 구두 - 34쪽, 작은 사건들 그가 호모섹슈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1979년 9월 17일 일요일인 어제, 올리비에 G가 점심을 먹으러 왔다. 나는 그를 기다리고 맞이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 나의 태도는 내가 사랑에 빠져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부터 그의 수줍은 태도, 혹은 거리감이 날 두렵게 만들었다. 우리 관계에는 이제 어떤 행복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잠시 낮잠을 즐길 동안 내 침대 곁에,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상냥스럽게 다가온 그는 침대가..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은밀한 생' 이후 읽는 키냐르의 두 번째 소설이다. 전체가 거의 다 하얗게 보이는 드라이포인트. 빛에 잠식된 난간의 받침살들 뒤로 한 형상이 보인다.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이다. 지그시 감은 두 눈, 흰 턱수염,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는 손, 테라스 위, 로마, 황혼녘, 하루 중 제 3의 시간, 저무는 태양의 황금빛 광휘에 휩싸여, 그는 자유로움과 살아있다는 행복에 흠뻑 취해 있다. 포도주의 몽상 사이에. (78쪽) 기대한 만큼 감동적이지 않고 프랑스 내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바로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은 전혀 바로크적이지 않다. 극중 주인공의 판화 속에서..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자유출판사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 모든 모험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한 - 실제와 그리고 꿈 속의 모험에서 - 운명에 감사해야 될 것 같아요.” 라고 알베르티네는 말하지만,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알베르티네나 프리돌린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SF영화를 만들고 있는 워쇼츠키 형제가 키아누 리버스라는 배우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을 읽게 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모험이나 꿈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태도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슈니틀러의 매혹적인 문장 속에서 세기말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이 평범한 부부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베르티네가 낯선 남자에게서 느끼는 성적인 매혹과 프리돌린이 벌이는 흥미..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창해 ABC북 ‘상징주의 미학은 이상주의를 맹렬하게 주장하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현실세계를 초월하기 위해 암시, 모호함, 신비, 내성(內省) 등을 중시하는 표현 양식을 추구하였다.’ 우리는 이 한 단락만으로 이들 예술 양식이 가진 비극적 세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들 양식 속에서 염세주의는 필연적으로 수반되고 비극적 사랑에 대한 추구는 뽈 베르렌느와 랭보에게서 그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페르난트 크노프의 어둡고 우울한 색조의 작품들이나 말라르메의 모호하고 암시적이며 함축적인 언어들은 여기에서 실망한 이의 저기를 향한 염원을 담고 있다. “상징주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결코 사랑은 격한 감정이나 쓰라림, 혼란, 회한 등과 결합되지 않았다”(* 에르네스 레노, 1864~..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조르주 뒤비

, 조르주 뒤비(지음), 양영란(옮김), 동문선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계도 확실히 존재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와 동등한 힘을 지녔다고 믿었던 사회의 맥을 짚어보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현대와 중세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현대인들 중 일부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중세적 믿음을 고수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중세인들과 비슷한 연유에서 기인한다. 즉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언제나 곡식은 부족하고 전염병이 돌고 생활 환경이 극히 나쁠 때, 혹은 어떤 정신적인 이유로 인해 세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뒤덮여 있을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수한다. 조르주 뒤비의 이 책은 간단하게..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 - 샤를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 , 샤를 보들레르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울력. ‘지난 시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 1891년의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 에밀 슈트라우스 Emil Strauß의 (1902),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소설들과 함께 무질의 이 소설 또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1) 하지만 나이가 너무 든 탓일까. 아니면 그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가 틀리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바지니, 이렇게 네 명의 소년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학교 모험담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쉽게 말해 나이를 어..

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문학과지성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투르계네프의 문학에 대한 세계의 반향이 아무리 크고 높다 할지라도, 러시아인과 러시아 작가들의 사랑과 숭배에 있어 그들은 결코 푸슈킨을 능가하지 못한다’라는 책 첫머리 에 적힌 문장만으로도 푸슈킨이 어떤 위치에 있는 작가인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푸슈킨은 아직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다. 나의 경우 푸슈킨의 시를 먼저 읽었고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꽤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추천받아왔는데,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읽고 난 다음, 쉽게 푸슈킨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했다. 푸슈킨의 낭만적 세계 속으로. 푸슈킨은 러시아의 위대한 산문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의 정신은 소설과 시가 만나는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있다. 독일 낭만주의나..

예감, 흔적

예감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흔적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김화영 엮음, 시와시학사. 시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시절엔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 한 권 사면 배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얼마 전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시집을 복사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대학시절 날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가 복사한 시집이, 허수경의 시집들 중 가장 최악인, 최근의 시집이라는 점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오래 전에 시집을 복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이었다. 지학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에도 절판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이라 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