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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롱다리 그림자 김씨는 끝나가는 하얀 겨울 속에서 길을 잃었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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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많은 눈 속의 내키지 않은 출근길. 작고 낡은 검정 타이어를 끼운 초록 빛깔 마을버스가, 빠르게 떨어져 쌓이는 눈송이들을 아주 느리고 무겁게 밟으며 힘겹게 경사진 도로를 올라왔다. 누군가가 바쁜 출근길에 왜 이렇게 마을버스는 안 오는거야라고 말했지만, 정류소에 있던 다른 이들의 입술, 목, 눈꼬리, 머리, 다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못했다, 숨을 헉학대며 버스가 왔다. 계속 눈이 내렸다. 출근은 시작되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고 우리들 모두 내일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모두 다 죽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사랑하던, 했던 그녀도, 한때 믿는다고 착각했던 하나님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생기면 우리를, 나를 찾는 걸까, 정말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세상, 사람들을 모르겠다,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없었다. 그렇게 실패하며 나는, 우리는 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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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시몬느, 눈은 그대의 목처럼 희고,

시몬느, 눈은 그대의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그대의 손은 눈처럼 차고,

시몬느, 그대의 가슴은 눈처럼 차갑다.


눈은 볼의 키스에만 녹는데,

그대 가슴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가.


눈은 소나무 가지에서 슬픈데

그대 이마는 밤빛 머리칼 밑에서 슬프구나.


시몬느, 그대의 동생 눈은 정원 속에서 잠들고 있다.

시몬느, 그대는 나의 눈, 나의 사랑. 


-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38 ~1915)  

(오증자 옮김, 정우사, 1976년)  






퇴근길, 길가 헌책방엘 들렸다. 알라딘이 아니라 진짜 헌책방. 그리고 이 책을 들고 나왔다. 오증자 교수. 한때 성실했던 프랑스문학 번역가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번역서는 거의 없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녀의 번역작인데, 그녀 남편은 유명한 연극연출가 임영웅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는 걸까. 


정말 오랜만에 구르몽의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으니, 술 생각이 났다. 나이가 들어도 좋은 시 읽을 때, 술 생각 나는 건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즘 사람들은 구르몽의 시를 알까. 쓸쓸하기만 한 6월 밤이다. 나라는 엉망이 되었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로 변해간다. 이제 시인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린다. ... ... 나는 어쩌지. 이별의 키스에만 녹는 가슴을 가진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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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다. 

그대 사랑스런 가슴 위로. 

쓸.쓸.하게 

얇게 쌓이며 

미소 짓는다. 

사랑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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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t la vie, C'est tout. 

이게 인생. 이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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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강변 



                                           이병률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

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보면서

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 <<눈사람 여관>> 중에서 

*** 



선릉역 지하 개찰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 즈음, 하얀 보푸라기가 날리듯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잠깐. 지하 전철역에서 인근한 빌딩 3층으로 가는 동안. 그리고 세 시간이 걸린 지리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회의가 끝나자, 어둠이 왔고 눈은 사라졌다. 앞으로 눈은 계속 내릴테지만, 나에겐 시간은 없고, 없는 시간은 새로 만들어지는 법 없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한다. 


지난 주말, 스산한 마음과 안타까움에 책을 읽었다. 오래만에 든 시집이었다. 그리고 '시집을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는 가장 좋은 것은 누군가를 핑계거리 삼는 것이다. 그리고 핑계거리가 사라지면, 자기 자신이 핑계거리가 되거나 새로운 핑계를 찾기 위해서 방랑할 것이다. 스스로 핑계거리를 내세우지 않으려고, 그리고 스스로가 핑계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어느 늦가을, 불편한 눈송이들은 쌓이지 않고 거리 위로 물기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도 스며들고 얼어붙는다. 


마음 막히는 밤이 왔고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추위가 사무실을 에워싼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손가락 끄트머리에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자라나다가 금방 마른다.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어느 11월, ... 길도 막히고 마음도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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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두 번이나 내려 마시곤 결국 레드불을 사서 먹는다. 온 몸이 카페인화되고 심장 박동수는 빨라지고 피부가 팽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원했던 집중력 향상은 적응되지 않는 신체의 변화로 인해 도리어 산만해지고 말았다. 


회사를 옮기고 나는 자주 밤샘을 하고 있다. 주로 고객사에 Web Strategy를 제안하기 위해서다. Contents를 어떻게 창조하여 보여줄 것인지, User Interface나 User Experience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Technology를 사용할 것인가를 구성한다. 


중요한 것은 고객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인데, 그러다보니, 매번 제안서마다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내용에 대한 가치를 설득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 


이번 주에만 2개의 제안이 있고 다음 주에도 2개의 제안이 기다리고 있다. 팀원 한 명을 구한다는 공고를 내었는데, 좋은 지원자가 드물다. 


오늘도 세 시간 정도 잠을 자고 나왔다. 집에서 나올 땐 흐리기만 했는데, 지금은 얇은 눈알갱이가 날린다, 날렸다. 하늘은 낮고 내 마음도 낮아진다.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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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n 1호 - 10점
Noon 편집부 엮음/GB(월간지)



2009년에 창간호가 나온 후 소식이 없는 잡지 ‘noon -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and visual culutre’를 읽었다. 주제는 violence of the spectacle이다. 아마 몇 명은 바로 예상하겠지만, 이 주제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언급된 그 스펙타클에 대한 것이다. 기 드보르는 이 놀라운 저작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스펙타클을 새롭게 정의 내린다.


“스펙타클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기 드보르는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들의 구성체로서의 스펙타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스펙타클 환경(상황)에 주목하고 과감하게 이것을 스펙타클이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측면에서 히사시 무로이의 아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오늘날 인간은 각종 매체를 통해 조성된 ‘현실의 연장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의 연장세계란 인간이 ‘현실’이라고 믿는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호와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기 드보르의 책을 번역본으로 두 번 정도 읽었지만, 그 땐 - 벌써 십수년 전의 학부시절 -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잡지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는 실베르 로트랑제와 배영달은 기 드보르 -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 르페브르Henri Lefebvre -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를 연결 지으며 스펙타클 사회의 비극을 학구적 언어로, 아주 건조하고 논리적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보드리야르 사상이 가지는 비극성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이론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의 참혹함과 그 이론의 무책임함에 주목하지 않은 채 열광하는 철부지 인문학 수입상들을 경멸해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은 보드리야르의 문제가 아니라 보드리야르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들 탓이겠지만.


“사람들은 유희 속으로 들어가는 한, 스펙터클 속에서 가짜인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 보드리야르



그리고 21세기 초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분간하지 못하는 뉴미디어 시대가 펼쳐졌다. 이는 미디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스펙터클에 현혹된 우리들의 문제이다. 미디어가 감각을 기만하고 기만당한 감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감각이란 없다. 대신 비판적 이성이 있을 뿐이지만, 이미 그 이성은 탐욕적 금융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 만드는(making money) 도구적 이성이 된 지 오래다(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21세기 초를 경험했다면 어떠했을까?).

이런 올드-뉴미디어들의 총체적 문제가 바로 21세기적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이 ‘재현’으로 물러난다.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어떤 것 속에 우리들의 삶이, 일상이 퍼즐처럼 끼어 맞춰지는 형국이다. 실베르 로트랑제는 폴 비릴리오을 이렇게 인용한다.


사회적-정치적 공간의 동질화 - 원격 현전(telepresense), 편재성 환영(illusion of ubiquity) - 는 속도로 생산된다. 속도가 폭력의 형식인 것이다. 즉석 응답은 공간을 폐기하며, 즉석의 시간성은 실재의 일반화된 탈실재화를 유발하면서 기억과 역사를 말소한다. (The homogeneisation of the socio-political space - telepresence, the illusion of ubiquity - was produced by speed, and speed is a form of violence. lnstant response abolishes space, instantaneity cancels memory and history, provoking a generalized derealization of reality.)


다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공간의 거리는 무의미하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간은 동질화된다. 이 동질화란 하나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이 거의 동시에 전 세계를 휘감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9.11 사태가 터졌을 때 모든 미디어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SNS는 내 물리적 존재가 가지는 공간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편재하는 가상의 실재가 되며, 인터넷 상의 프로파일과 히스토리로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은 바로바로 수정, 삭제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건 구글Google 서버에 저장된 기록이 전부일 것이다. 동질화된 공간의 무자비한 속도는 축적되는 기억과 지나간 역사를 지우며, 브레이크가 상실된 가속패달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진짜와 가짜가 사라진 액체 형태의 스펙터클 시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술로 더욱 강력하게 무장하고 확장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미술 잡지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못하고 있다. 다만 잡지 서두에 실린 니콜라 부리요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볼까 한다.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 형식은 단연 얼터모던의 중심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호연결된 단수성을 정의한다. 오늘날의 모더니티는 독립된 소군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론을 통합한다기보다는 아이디어와 형식, 인물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통로이며, 표준화되거나 동질화된 영역이라기 보다는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서 제시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은, 니콜라 부리요의 언급처럼 상호연결된 단수성으로 저항하고 있지 않을까. 스펙터클의 분석과 해체야 말로 21세기 예술가들의 사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 부리요의 저 언급은 짧지만, 무자비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예술 실천의 단초로 해석될 수 있다. 



* 아래는 위 본문에서 언급한 책들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한 리스트다. 읽기 쉬운 책들은 아니지만.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옮김) 현실문화연구(* 현재 절판)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적인 저서. 그러나 현재 절판이고 번역에 대해서도 다소 말이 있었던 책. 아래는 영역본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역본)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그리고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기 드보르의 Comments!


토탈 스크린
장 보드리야르 저/배영달

장 보드리야르의 토탈 스크린! 보드리야르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겐 읽어봐도 좋으리라.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저/박정자

앙리 르페브르의 이 책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실은 그만큼 번역이 어려운 책이었던 셈이지만, 박정자 교수의 노고가 안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Classics in Communication and Mass Culture)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영역본)


관계의 미학
니꼴라 부리요 저/현지연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 번역본이다. 번역된다는 소문만 전해들었고, 실제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오늘 검색해보고 알게 되었다. 니콜라 부리요는 미술계에선 꽤나 유명한 이론가이며, 그의 관계 미학은 한 때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기도 했다. 학문의 세계 종사자들과의 인연이 사라진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독서가 전부다.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저/이재원 역

폴 비릴리오. 아직 읽지 않은 비릴리오. 한 번 읽어봐야 겠다.


noon은 창간호를 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낸 책인데, 반응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론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미술 전문 잡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사례를 다시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아르코에서 나왔던 '볼'은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고(황당한 사건들 중의 하나), ... ...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듯 싶지만, 그건 호사가들의 수다에 지나지 않고 진지한 관심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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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 중에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잠을 청하러 가는 거실 창이 뿌옇게 변해 있어 내다 보니, 함박눈이 겨울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와 한 장 찍어둔다. 렌즈가 아쉬운 때다. 삼각대도 필요하겠다.

나는 자기 전 눈을 보았다. 오늘은 음력으로 1월 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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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전 잠시 일 층으로 내려가, 일 층 한 모서리를 삼백 육십 오 일 이십사 시간 내내,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 초라한 뿌연 빛깔을 내는 형광등 불을 켜두고 있을 듯한 편의점에서, 따뜻하게 데운, 조각난 치킨들과 캔맥주를 마시고 올라왔다. 편의점 창 밖으로 어느 새 겨울 어둠이 내렸고, 눈발이 날렸고, 헤트라이트를 켠 검정색 차가 지나고, 이름 모를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추린 채 길을 걸어갔다. 검고  흰 젖은 길을.

그 순간 내 입술은 닫혔고 내 혀는 금방 스쳐지나간 맥주향에 대한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잠시 지나간 이천십일년과 결혼과 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편의점 치킨과 캔맥주의 경쟁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무실 책상은 쌓인 실패들과 꿈들과 계획들로 어수선했고, 음악은, 그 보잘 것 없는 음악은 최신 스마트폰에 갇혀 나를 위로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귀에 끼인 작은 독일제 이어폰에.


몽라 Monla - 트랄라 Tral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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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쓸쓸한 하늘 가까이 말라 휘어진 잔 가지들이 재치기를 하였다.

죽음 가까이 버티고 서서 안간힘을 다해 푸른 빛을 받아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허공 가운데,

내 마음이 나부꼈다.

 


2.

익숙한 여행길의 낯선 파란 색이 건조한 물기에 젖어 떠올랐다

검은 빛깔의 지친 아스팔트가 습기로 물들었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실룩거리는 엉덩이 위로

한 다발 꽃들이 피어나 꽃가루를 뿌렸다

붉은 색에 멈춰선 도로 위의 자동차 속에서 사내들이 내려

소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고

아직 어린 나는 공포에 떨며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기 시작해 내 눈물은 강이 되어 내 육신을 싣고

아무도 없는 바다를 향해 떠났다.

 

  


3.

나에게 혼자냐고 물었다. 그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녀에게.

너는 혼자야 라고 그녀가 강력하게 입술을 갖다 대며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아, 나도 모르는 나들이 너무 많아 라고 말하며

입술을 돌렸다.

 

상처 난 바람이 콘크리트 벽을 스치며

스스로의 상처를 덧내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잘라, 그대 첫 눈에 뿌리겠다고 협박했다.

 

태어나, 처음 당해보는 협박에

나는 무조건 미안하다며 빌었다.

 

그렇게 내 첫 사랑은 시작되었다.

 


4.

 

주먹을 쥐었다. 손을 폈다. 못생긴 손이다. 버림받은 손이다. 작은 손이다. 큰 것이나, 무거운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나, 자극적인 것은 들지도 못하는 손이다.

 

그 손의 소유자인 나는 비극적인 손의 인생을 잘 알지 못했다.

 

내 코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내 눈썹의 슬픈 사연을 뒤섞어

포스트모던한 비빔밥을 만들어 2005년산 보르도 와인에 넣어

못생긴 내 손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노란색 꽃무늬 벽지로 포장된 내 코, 내 눈썹, 자주 빛깔 내 손

위로

12월의 눈이 쌓이고 있었다. 




 

5.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어둠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어둠을 따라 마음도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녀를 따라 내 몸도 오르락내리락 하며

 

 



6.

무수한 시간.. 앞에 서서 시간의 유형학에 대한 책을 쓰고 있었다.

기분 좋은 시간, 소중한 시간, 아팠던 시간, 증오스럽던 시간, 지랄 같았던 시간, 흥분되었던 시간, 고통스럽던 시간, … … 무수한 시간.. 앞에 서서

무수하게 조각난 나..을 찾고 있었다.

 

흰 눈처럼, 무한히 조각난 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찬 12월 도시의 허공을 떠돌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도 나를 모른 척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 곳에도 나는 없고 이 세상 어디에도 나는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내 손은 참 못생겼다. 내 코는 징그럽고 내 눈썹은 지랄 맞다.

 

그렇게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숨 죽인 채, 처마 밑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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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아홉시를 넘긴 시간에 집 밖으로 나가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을 끝내고 오는 시간에 문득 눈이 곱게 쌓인 골목길을 걸어가는 동영상을 찍기로 했다.

갑자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술을 줄였으며 1주일에 3-4회 이상 꼬박꼬박 동네 피트니스 센터에 나가는 것을 이야기하자, 그 이유를 매우 궁금해 한다. 한 여자친구는 곧바로 이젠 소개팅을 시켜줘도 되겠다며, 시간을 잡으려고 했다. 어떤 이는 피트니스 센터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정말 황당할 정도다. 이제 6주째로 접어든 이 생활은 송년모임 약속이 몰려 있었던 지난 주말을 제외하곤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 이제 운동에도 어느 정도로 적응을 한 것인지, 운동을 하지 않으면 불편할 정도다.

나는 매우 공상적인 사람이다. 늘 꿈을 꾸고 있으며 그 꿈을 현실화시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늘 꿈 가까이 다가가지만, 어딘가 이상하고 실패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딱히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 어쨋든 꿈 가까이 다가갔으며 적절한 행운만 있었다면 성공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선 내가 먼저 변하지 않으면 안 됨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적절한 운동은 지치고 나약해지기 쉬운 영혼에게 적당한 위로와 활력을 부여해준다. 그것이 가식이든 허위이든, 이 도시에서 혼자 살아가는 서른 중반의 사내에겐 필요악인 셈이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가, 소설가를 꿈꾸었다가, 평론을 잠시 준비하다가, 미술사로, 웹기획자로, 경영컨설턴트로, 마케터로, 문화기획자로, 잡지 기획 편집자로, 국제아트페어에서의 갤러리스트로, 국내아트페어의 디렉터로, ...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진 못했지만, 대단한 성공을 거둔 적도 없었다. 다채로운 경력을 가졌지만, 그 다채로운 경력을 어떻게 하나로 모으고 사용해야 할 지에 대한 혜안이 아직 나에겐 없었다.

그러자 사태는 분명해졌다. 내 치명적인 단점들 한 두 가지부터 바꾸자고 결심했다. 술을 줄였으며 그저 자정이 되기 전에 잠을 청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시간이 고정되었다. 시간 관리를 시작한 것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했으며, 어떤 일에 대한 마감을 지킬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저 몇 가지만 고쳤을 뿐이나, 그 몇 가지로 인해 일상의 모든 것들이 변화했다.

매우 흥미로운 변화였다. 어쨋든 변화를 시작되었고 아직 나는 내 꿈을 버릴 생각이 없다. 아니 도리어 현실화를 시킬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을 가지기로 마음 먹었다.
(적고 보니, 위 동영상과는 별 관련이 없다. 다음에는 동영상에 사운드를 깔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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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의 눈
오전 9시의 눈

내 마음 속으로 밀려드는 2월의 눈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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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샘 쉐퍼드Sam Shepard
황산, 아멜리 노통브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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